슈프림(Supreme)은 이번 시즌 당신의 통장을 ‘텅장’으로 바꿀 만반의 준비를 마친 듯하다. 앞서 공개한 방대한 양의 프리뷰에서 커스텀 펜더(Fender) 기타를 비롯한 상상을 뛰어넘는 컬렉션을 선보이며, 슈프림의 깐깐한 행태에 탈프림을 선언했던 수많은 추종자를 돌아앉게 했다.
슈프림은 이번 시즌의 시작을 뉴욕의 살아있는 전설, 나스(NAS, Nasir bin Olu Dara Jones)로 낙점했다. 이전 영국 현대미술 아티스트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와의 작업과 슈퍼캣 돈다다(NAS-The Don) 티셔츠를 통해 나스의 숨결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나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겠다는 듯 나스의 얼굴을 전면에 프린트한 포토 티셔츠를 발매했다. 왜 갑자기 슈프림이 나스를 주목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면 지난 시즌 말미를 장식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을 다시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는 아직은 어린, 나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1980년대로 되돌아간다.
미국 ABC 방송국에서는 1971부터 2년간 두 시즌에 걸쳐 ‘더 잭슨 파이브(The Jackson 5ive)’ 라는 타이틀로 토요일 아침 잭슨 파이브가 등장하는 만화영화를 방영했다. 만화는 마이클 잭슨이 애완용으로 키우는 쥐인 레이와 찰스가 등장하고 실제 콘서트 장면과 애니메이션을 혼합한 영상을 선보이는 등 다채로운 화면으로 구성되었다. 삽입곡으로 잭슨 파이브의 곡을 사용한 것은 당연지사. 이와 관련해 나스는 왁스포에틱스(Wax Poetics)와의 인터뷰에서 이 만화를 언급했다. “토요일 아침 방영하는 만화영화 시간을 매주 기다리곤 했다. 더 잭슨 파이브 만화영화를 보고 정말 음악을 하고 싶어졌다”. 나스는 자신의 꿈을 확신하기 전 어린 시절, TV쇼와 만화영화에 흠뻑 빠져있었는데, 이러한 TV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에 관심을 가지며 뮤지션의 꿈을 키워갔다. 이렇듯 나스가 뮤지션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잭슨 파이브의 영향과 나고 자란 동네인 뉴욕 퀸즈(Queens)에서 벌어지는 살아있는 힙합의 역사를 눈으로 직접보고 자란 환경적 요인이 자리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재즈 뮤지션이었다는 사실이다.
나스의 아버지는 재즈 뮤지션 올루다라 존스(Olu Dara Jones)로 아트 블래키(Art Blakey), 데이비드 머레이(David Murray) 등 재즈의 거장과 함께 활동했던 베테랑 연주자였다. 재즈 뮤지션 아버지를 둔 덕에 나스는 유년기부터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재즈 음반을 들어왔다. 이번 시즌 ‘LOVE SUPREME’ ━ 존 콜트레인의 대표 음반, 스웨터가 등장한 이유 역시 나스와의 연관성을 갖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볼 부분이다 ━올루다라는 나스의 앨범에 연주자로도 참여했다. 그의 연주가 궁금하다면 나스의 명반 [Illmatic]의 “Life’s A Bitch” 후반에 등장하는 코넷 연주를 들어보자.
The World Is Yours
1994년 나스는 세기의 명반 [Illmatic]을 발표했다. 이 앨범에서 시도한 한 앨범에 여러 명의 프로듀서가 동시에 참여하는 방식은 당시 힙합 신(Scene)의 판도를 바꾸었고, 나스는 여기서 얻어진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마피아적 세계관의 랩과 뉴욕 스타일에 대한 고찰을 거듭하며 꾸준한 발전을 이룬다. [Illmatic] 수록곡인 “The World Is Yours”는 영화 “스카페이스(Scarface, 1983)”에서 차용한 문구로, 이번 시즌 스카페이스가 등장한 이유, 나스가 학창 시절, 스카페이스에서 얻은 강렬한 깨달음과 연결지을 수 있다.
영화 스카페이스는 쿠바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주인공이 폭력과 마약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고 파멸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그가 행한 갱스터적 삶의 방식은 나스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래퍼와 흑인 커뮤니티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전 시즌 슈프림과 협업한 게토 보이즈(Geto Boys)의 멤버 ‘스카페이스’ 역시 이 영화에 영향받아 랩 네임을 정했다. 스카페이스에 관한 내용은 수많은 곡의 가사로 인용되었고, 많은 미국 래퍼가 주인공 토니 몬타나의 대사를 마치 성경 구절을 암송하듯 외우고 다녔다. 이번 시즌엔 스카페이스의 장면을 암시하는 아이템이 다수 발견된다. 영화의 장면과 함께 어떤 아이템이 스카페이스의 장면을 오마주했는지 살펴보자.
이번 액세서리의 소형 비행선은 앞서 보았던 사진처럼 토니 몬타나가 마약상 프랭크의 자리를 차지한 후 하늘을 바라보는 홍보 비행선에 쓰인 문구 ‘The World is Yours’를 상징하는 아이템으로 볼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무장한 소사 패거리가 토니의 저택을 습격하고, 이에 맞서 격렬한사투를 벌인 끝에 그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비행선에 쓰인 토니의 슬로건과 같은 ‘The World is Yours’ 문구가 빛나는 조각상을 비추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Made You Look
나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또 다른 곡은 [God’s Son]에 수록한 곡 “Made You Look”이다. 얼마 전 힙합 탄생의 달을 맞아 구글(Google)이 기획한 디제잉 게임을 해봤다면 나스의 “Made You Look” 전체를 감싸는 훵키한 봉고 리듬을 기억할 것이다. 이 곡이 샘플링한 인크레더블 봉고 밴드(Incredible bongo band)의 곡 “Apache”는 수많은 디제이의 저글링 루틴과 힙합 프로듀서의 샘플로 사랑받아왔다.
이번 시즌 슈프림 가죽 재킷에 인디언 추장의 옆모습이 나타난 것은 곡과 아파치의 연관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아파치는 미국 남서부 지역에 거주하는 일련의 원주민 부족을 칭하며, 이번 시즌 나바호(Navajo) ━ 나바호족은 문화나 언어학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아파치의 일부로 본다 ━ 패턴을 사용한 재킷 또한 아파치의 연장으로 보인다. 한 가지 덧붙이면 과거 올드스쿨 비보이(B-Boy)들은 훵크 브레이크 비트에 춤을 췄는데, 인크레더블 봉고 밴드의 아파치야말로 지미 캐스터 번치(Jimmy Castor Bunch)의 “It’s Just Begun”,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의 “Turnit a Loose”와 함께 비보이 올타임 페이버릿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슈프림과 비보이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번 시즌 어김없이 등장한 슈프림 x 플레이보이(Playboy) 프로덕트는 단순한 성인잡지와의 협업이 아니다. 소싯적 만화 ‘힙합’을 보고 발재간 좀 부려봤다면 ‘락스테디 크루’ (Rock Steady Crew)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1977년에 결성한 이 유서 깊은 댄스 크루는 “와일드스타일(WildStyle, 1982)”, 플래쉬댄스(Flashdance,1983) 등 온갖 유명한 힙합 다큐멘터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 크루가 활동했던 당시 모습을 보면 R.S.C 문구와 함께 그들의 로고인 귀여운 토끼를 목격할 수 있다. 이 토끼는 플레이보이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이며, 성인잡지와는 다른 의미의 플레이보이인 락스테디 크루(Rock Steady Crew)를 상징한다.
락스테디 크루의 토끼 로고와 함께 자주 보이는 폰트가 있다. 이전 슈프림 재킷에서도 토끼 로고와 함께 이 폰트를 사용한 적이 있는데, 이 폰트는 올드스쿨 디제이의 전설 그랜드마스터 플래시(Grandmaster Flash)의 트랙 재킷에서도 나타난다. 이 폰트의 출처는 브루클린 티셔츠가게에서 살 수 있었던 옷에 글자를 새길 수 있는 펠트 레터링으로, 나이 좀 먹었다 하는 이는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할 수 있을 것. 예전에도 나이키 스우시 같은 것을 손수 다림질해 프린팅할 수 있는 전사지 커스텀이 있지 않았나.
F/W 시즌은 그 어느 때보다 다채로운 디자인과 구매욕을 자극하는 제품들로 풍성하게 채워졌다. 물론 방대한 컬렉션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번 시즌도 슈프림과 찰나의 공방전을 펼치다 겨우 빤쓰 한 팩 건져올지 모르일이지만, 하루빨리 거리에서 반짝거리는 새 슈프림을 걸치고 활보하는 모습을 마주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미지 출처 ㅣ 위키피디아, 슈프림 공식 웹사이트, 컴플렉스, 파인 아트 아메리카 등 다수
커버 일러스트 ㅣ 이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