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서른을 넘긴 세대, 학창시절을 힙합 보이로 보낸 이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그 이름 후부(FUBU). 그 혼돈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1992년 미국 뉴욕, 데이몬드(Daymond)와 그의 친구들 키스 페린(Keith Perrin), 제이 알렉산더 마틴(J. Alexander Martin), 칼 브라운(Carl Brown)이 설립했다. 현지에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후부는 몇 년이 지나 힙합의 흐름을 타고 국내로 유입됐고, 90년대 중반 칼 카니(Karl Kani)와 로카웨어(Rocawear) 등의 브랜드와 함께 힙합을 상징하는 의류로 국내에 정착했다.
LL COOL J가 출연한 FUBU 광고
해외 브랜드가 판을 치는 와중에도 지누션의 인기에 힘입어 엠에프(MF)가 의외의 선전을 하며 한국 힙합 의류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던 1999년, 당시 국내 대기업 계열의 패션업체 A사는 후부를 인수하며 국내 브랜드로 새롭게 탈바꿈시킨다. 후부는 흑인들의 브랜드 충성도가 높은 편이었는데, 아시아의 대기업으로의 파격적 매각은 기존 팬 입장에서 보자면 굉장히 실망스러운, 마치 배신과도 같은 영혼의 거래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기존의 강력한 브랜드 이미지와 대기업의 자본력을 등에 업고 한국 후부는 덩치를 키워갔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힙합 패션의 인기는 2000년도 중반부터 서서히 힘을 잃고 한국은 ‘캐주얼’이라는 여러모로 퉁치는 듯한 묘한 스타일로 통일된다. 기대한 매출이 나오지 않자, 기업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승부를 봐야 했을까? 후부는 그나마 남아있던 정체성을 완전히 제거해버리고 역시나 아리송한 이름의 ‘힙합 베이스 캐주얼’로 노선 변경을 감행한다. 기존 힙합 팬도, 폴로와 빈폴을 사랑하던 캐주얼 팬 모두가 쳐다보지 않는 브랜드가 된 것이다. 기존 전국팔도 길거리와 백화점에 자리 잡은 수많은 후부 매장은 손님보다 직원의 숫자가 많은 곳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2012년, 후부로서는 아주 특별한 해를 맞는다. 다름 아닌 브랜드 론칭 20주년, A사는 계륵 브랜드가 되어버린 후부의 존폐를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진작 접었어야 했지만 다수의 소비자에게 브랜드 이름이 인식되어 있다는 점은 꽤 아까웠나 보다. 20주년을 맞아 브랜드 콘셉트, 로고, 심볼, 상품, VMD를 새롭게 정비하며 야심 찬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후부는 ‘포스트 힙합 감성의 스트리트 캐주얼’이라는 탐욕스러운 키워드로 당시 주가를 올리던 유명 패션 디자이너 서상영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모델로 영입하고, 인기스타 탑(T.O.P.)을 광고모델로 섭외하며 큰 반향을 일으킬 큰 그림을 준비한다. 당시 후부의 마케팅 중 하나로 네이버 블로그가 운용됐는데 그 흔적은 아직 남아있다. 예상했겠지만, 역시 별다른 성과 없이 혁명은 끝났다. 결과적으로 A사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으며, 이미 나락이었던 후부의 브랜드 이미지는 공허함만이 남는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14년. 결국, 후부는 A사의 손을 떠나고, 쇼핑몰 업체 B사의 손에 들어간다. 아직도 고민투성이 사춘기 소년 같은 후부는 또 한 번의 혼신의 힘을 다해 애처로운 변신을 감행한다. 아웃도어의 나라 대한민국,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까, 이번에는 30~40대를 위한 스포티브 캐주얼 브랜드로 변신한 것. 이후 몇몇 대기업이 운영하는 쇼핑몰에서만 최종 진화한 후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2017년, 국내 쇼핑몰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후부를 발견했다. 계약 기간이 종료된 것일까? FUBU.COM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의 인스타그램을 살펴보니 최초 게시물이 2015년이다. 또한 이 웹사이트에서 소량의 제품군이긴 하지만, 마치 시간을 여행한 듯, 90년대 후부의 감성을 간직한 모자와 티셔츠를 판매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올해 2월, 본지에서도 자주 소개하는 네덜란드 브랜드 파타(PATTA)와의 협업도 존재한다. 한국 힙합이 새롭게 부동한 현재, 후부가 박제된 90년대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점이 묘하다. 1999년 후부를 도입했던 한국의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하다. 후부의 메인 페이지에서 플레이되는 광고 영상이 살짝 기대에 못 미치기는 하지만 90년대의 문화, 패션이 다시 유행하는 지금, 많은 이들의 손을 거쳐 후부가 다시 90년대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롭다. 힙합에 기반을 둔 수많은 브랜드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가운데, 90년대를 풍미했던 포텐셜을 화석처럼 간직한 후부의 행보와 대중의 반응이 조금은 궁금해진다.
특정 스타일이 유행을 휩쓰는 흐름이 상대적으로 적어지고 다양한 스타일에 대한 존중이 커지는 지금, 뜬금없이 모습을 드러낸 미국 후부는 분명 누군가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한국에서 반복되었던 ‘이미지 팔이’의 미국판에 불과할지, 아니면 90년대 후부를 향한 향수와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아쉬움을 채우고자 절치부심한 재도전일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미 충성심 강한 소비자들에게 배신감을 안겼던 전례가 있기에, ‘레트로’라는 키워드로 꾀는 수준 그 이상으로 다가갈 욕심이 있다면 신경 쓸 부분이 많아 보인다. 현재 미국 후부의 제품은 FUBU.COM과 얼반아웃피터스(Urbanoutfitters)에서 만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쯤에서 ‘MAJAH FLAVAH’가 다시 등장한다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