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장벽 너머, 멜로디야(Μелодия)

무언가를 수집하는 습관이 들면 그것에 일희일비하기 나름이다. 비록 누군가 이전에 내놓은 결과물을 뒤늦게 찾아내는 양상일지라도 품에 소중히 안고 기뻐하는 마음, 그것이 수집가의 사고회로 아닐까. 만약 당신이 소리를 수집하는 사람이라면, 나아가 쉽게 찾을 수 없는 음향에 열광한 경험이 있다면, 고립되었던 거대한 체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하 소련)의 소리를 궁금해했을 법하다. 하지만 슬라브어파의 악명 높은 난이도 문제로 진입의 벽을 크게 느낀 적 있는 당신에게 이정표로 삼을 만한 단어 하나를 감히 소개한다. 멜로디야(Μелодия), 아니나 다를까 멜로디란 뜻의 이 단어는 소련 정부가 운영하던 대형 음악출판사의 이름이었다.

정부가 관리하는 형태의 레코드 레이블, 멜로디야의 크기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창립연도 1964년부터 사기업으로 전환한 1989년까지 내놓은 곡수는 약 23만 개. 말고도 레코드에 담지 못한 잉여분도 있다니 어딘가 먼지 쌓이고 있을 그들의 안부가 궁금할 따름이다. 비교적 잘 알려진 멜로디야의 출반물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Пётр Ильи́ч Чайко́вский)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Дми́трий Дми́триевич Шостако́вич)같은 러시아 고전 음악 거장들의 작품이나, 그 뒤에는 마치 건빵 봉지 속 별사탕처럼 다른 성분의 음악도 있었다. 그리고 사이키델릭한 록과 펑크부터 전자음 짙은 실험 음악까지 넓게 아우른 소련의 음악계는 체제에 짓눌린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대변하는 듯했다.

역사적 배경을 조금 더 뜯어보자. 1930년대 새로운 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려던 목적으로 사회주의 이상주의자들은 일명 서구의 ‘부르주아 음악’을 배제하고 새로운 소련 대중음악의 창조를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극단적인 문화 실험은 스탈린의 개입으로 곧 유화되었으나, 오랜 기간 소련의 대중음악을 지배하는 기조는 이 시기 형성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족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압력으로 30년대 소련에서 대인기를 누린 재즈 음악과 재즈 뮤지션들이 숙청되었고, 소련 팝이 소련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중음악 장르로 급부상했다. ‘에스트라다 음악’이라 불리는 소련 팝(popsa)을 정의하는 건 매우 어려우나, 집시가요, 재즈, 폭스트롯, 로망스 그리고 서구음악이 섞인 소련 독자적인 장르였다.

원체 모호한 장르의 성격 때문에 문지방 넘나들 듯 소련 정부와 위험한 줄다리기를 벌였던 소련의 음악인. 그중 적지 않은 수는 1960년대에 이르며 서구적 색채가 강한 작품을 대범하게 선보인다. 대중매체를 이용할 수 없었던 사회적 배경 탓에 불법으로 음반을 녹음해 배포하는 방법으로 ‘지하청중’을 모은 그들은 낮에는 노동자로, 밤에는 음악인으로 활동했다. 덕분에 짚불처럼 번진 대표적인 음악 장르는 록이다. 소련 사회에 히피 문화까지 들여온 록 음악의 위세는 대단해서, 1960년대 말에는 록밴드 하나 없는 고등학교나 공장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매질이 특효가 아님을 깨달은 소련 정부는 ‘옳은 록 음악’은 허락한다는 모호한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이후 1970년대 중반에 불기 시작한 디스코 유행을 어느 정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보니 엠(Boney M)의 1978년 작 “Rasputin”이 그해 가을 소련 디스코장을 광란으로 몰아넣은 것은 단지 곡 제목 때문만은 아니다.

그래도 앞서 언급한 소련만의 대중음악을 창조하려는 기조는 굳건했다. 보니 엠의 음악이 디스코장을 휩쓰는 현상이 불만이었던 소련 작곡가 연맹은 1980년 디스코장에서 서구의 대중음악을 트는 것을 금지했다. 또다시 지하로 숨은 음악인들은 1985년 소련 초대 대통령인 미하일 고르바초프(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가 시행한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 즉 사회주의 사회를 문자 그대로 ‘개편’하려던 실패한 사회적 실험 이전까지는 가슴 펴고 활동할 수 없었다. 페레스트로이카를 포함한 여러 원인으로 1980년대 말 공산주의 사회구조가 해체되기까지, 멜로디야는 숨죽여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술은 시대와 사회관계에서 빚어진 도자기와 같다. 그렇다면 유라시아의 지배자로 약 70년간 군림했던 문화와 민족의 모자이크, 소련이 구워낸 그릇은 그 재료부터 남다를 수밖에. 앞서 설명한 배경으로 서구와 다른 스타일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소련의 작품들은 분명 확인할 가치가 있다. 이색적인 선율, 그래서 익숙지 않은 분위기에 몸을 맡기고 싶다면 Μелодия, 이 단어의 모양새를 기억하라. 만약 아직 그대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고 있다면, 우선 멜로디야가 세상에 내놓은 작품 몇 가지를 살펴보는 건 어떤지.

 

소련과 냉전 구도를 이루던 미국이 라텍스 옷을 입고 에어로빅 음악에 취했을 때, 소련은 멀뚱히 자신만의 전자음악을 내놓았다. 물론 앞서 말한 검열의 탓도 있다. 프로듀서 예두아르트 아르테미예프(Эдуа́рд Арте́мьев)의 1984년 작, “Охота”로 설명을 대신한다.

 

그렇다고 80년대를 상징하는 키치적 분위기를 아예 외면할 수는 없었는지 각종 스포츠 행사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음악이 사용되었다. 라트비아의 프로듀서 지그마르스 리에핀쉬(Zigmars Liepiņš)의 작품 표지만 봐도 짐작이 되는 부분. 본 작품은 1985년부터 1987년까지 2년 동안 지속한 ‘스포츠풍의 배경음악’을 만드는 국가사업의 결과물이다. 사회구성원의 운동량을 늘리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 다소 무미건조한 의지의 산물이나 그 내용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소련만의 맛이 가미되었음이 주안점이다.

 

소련 음악 시장의 생리는 신비했다. 에스토니아인 신시사이저 연주자이자 작곡가 스밴 그륀베르크(Sven Grünberg)의 우주적 엠비언트 넘버 “Valgusois”가 수록된 앨범[Hingus]가 큰 인기를 누리며 7번이나 재발매 되었음이 그 증거다.

 

이 시기 에스토니아의 음악 신(scene)의 스펙트럼은 화려해서 각종 실험 음악들도 소비되었는데, 그 예 중 하나가 피에테르 바히(Peeter Vähi)의 “Evening Music”이다. 티베트와 몽골의 음악에서 큰 영감을 얻었던 그는 아시아의 미학을 악보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마지막으로 70년대 전 소련 음악 사회( All-Soviet Musical Society of the USSR)의 부회장을 역임하며 당대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콘스탄틴 아가파로노비치 오르벨리얀(Константин Агапаронович Орбелян)을 소개한다. 저명한 그가 지휘한 오케스트라의 소련 재즈, 팝 앨범 [Константин Орбелян И Его Оркестр]로 당시 사회주의 예술계가 제공한 카탈로그를 살펴보자. 

위의 몇 가지의 예로 엿볼 수 있듯, 러시아 말 ‘Μелодия’가 소리 수집가에게 열어주는 세계가 있다. 갖가지 이유로 러시아에 갈 수 없는 수집가들은 디스콕스(Discogs)를 방문해 멜로디야를 검색해보길. 패망한 소련의 잔해 사이에서 보물을 건져보자.

Discogs 내 멜로디야 출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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