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ly Quick Life, Wonder Boy

생명에는 기한 따위 정해져 있지 않다. 따라서 장수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단명을 면치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인생에서 뜻을 다 이루지도 못한 채 떠나는 이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들이 치른 고생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나는 심신이 지쳐 제 기능을 상실할 때쯤 이런 생각에 잠기곤 한다. ‘제 아무리 심장이 터질 듯 뛰고, 머리가 새하얘져도 아직 살아있잖아. 그래서 고통도 느낄 수 있는 거지’. 그런 다음 지친 심신을 차분히 회복한다. 지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나의 심신을 위로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세상에서 잊히게 두고 싶지 않았다.

누자베스 Nujabes(1974 – 2010)

200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친구들은 스타크래프트(Starcraft)와 함께했다. 게임을 천부적으로 못하는 소질을 타고난 덕분에 게임 방송만 즐겨보곤 했는데 2010년도에 방영한 ‘강민의 올드보이’는 특히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다. 몇 년이 흐른 뒤 우연찮게 중첩된 기억 속에 아주 깊이 덮여 잊고 살았던 ‘강민의 올드보이’를 다시 보게 되었고 강민의 하루가 끝나갈 때쯤 흘러나오는 노래에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 노래가 바로 사무라이 참프루 OST로 잘 알려진, 누자베스(Nujabes)의 대표곡으로 대중이 기억하는 바로 그 곡, “Aruarian Dance”다. 참내, 텔레비전으로 내가 누자베스의 음악을 듣고 자랐다니.

누자베스의 본명은 세바 준. 그의 본명을 거꾸로 뒤집어 스테이지 네임(Stage Name)으로 사용한 것이다. 디제이와 프로듀서를 겸하며 자국인 일본은 물론 전 세계를 무대로 입지를 빠르게 다져갔다. 하지만 그는 앨범 활동과 공연 외에는 매체에 노출되는 것을 즐기지 않았고, 유명세에 비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2010년 2월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았을까. “몇 월 며칠 몇 시 부로 저는 지구 행성에서 사라지겠습니다. 대신 나에게 악마의 재능을 주십시오”. 나는 누자베스가 죽은 후 그의 음악을 접했기에 그의 죽음이 슬프게 느껴지지 않았으나 당시 그의 팬과 동료들은 얼마나 허망했을까. 지금까지도 수많은 뮤지션들이 누자베스를 기억하며 그의 의지를 이어가고 있다.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취향의 정체성을 만들기 시작할 무렵 누자베스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건 정말로 축복받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디깅의 즐거움을 몸소 알게 해 준 사람. 큰돈이 없고, 여자가 많지 않아도 내 삶을 윤택하게 한 데는 누자베스가 빗어낸 소리 선율이 한몫한다.

Nujabes의 다큐멘터리 – 한글 자막은 없으니 능력껏 읽고 듣고 보고 즐기시길



딜런 리더 Dylan Rieder(1988 – 2016)

그를 알게 된 게 언제쯤이더라. 아마 14년, 15년 경일 거다. 내가 이제껏 봐왔던 스케이터와는 격이 다르게 느껴졌다. 헐렁한 청바지에 그래픽 티셔츠가 아닌 슬림한 검정 데님과 무채색 티셔츠를 입고 보드를 타는 모습은 어떤 미사여구를 갖다 붙일 필요 없이 정말 멋있었다. 스케이트보드에 깊게 관심을 가지진 않았지만 딜런 리더의 충실한 팬이 된 나는 그를 어느새 따라하기까지 했다.

나는 대구에서 의무 경찰로 복무했다. 16년 10월에는 정말 고된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부산에서 화물 연대가 파업하고 시위하는 바람에 출동을 나가 숙영을 하곤 했는데 어느 날은 근처에 있는 모텔에서 숙박해야만 했다. 모텔 방에서 컴퓨터를 켜고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더니 그의 사진과 함께 국화 다발이 놓인 포스팅을 보게 되었다. 일면 없는 사이지만 그때 느꼈던 상실감은 매우 컸다. 지친 탓에 더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부산 출동 내내 멍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인을 찾아보니 백혈병으로 인한 폐렴. 그의 투병 생활을 상상해 보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생명력이 빛을 발하던 때, 이유도 없이 피곤하고 하루하루가 쳐지는 찝찝한 기분을 느꼈을 거다. 그 불길한 기운은 골수 검사까지 이어졌을 테고, 백혈병 진단을 받았겠지. 왜 하필이면 그 지독한 병은 내 몸에서 생겨 났을까. 처절한 기분이었을 거다. 속으로 삼키려 해도 입 밖으로 새어져 나오는 울음을 어떻게 막으리. 나는 지금도 딜런 리더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스크랩한다. 그는 하늘에서도 아름다운 여자와 스케이트보드에 둘러싸여 지내고 있을 것 같다.

딜런 리더라는 한 인물을 약 10분짜리 영상에 담은
“This Is Dylan Rieder” 필름

임윤택 Lim Yoon-Taek(1980 – 2013)

사람을 이끄는 힘을 리더십이라고 말한다.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리더의 덕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은 울랄라세션의 임윤택이라고 단언한다. 아마 앞으로도 평생 그럴 것이다. 임윤택은 중학생이 될 무렵 듀스에 빠져 35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오로지 춤과 음악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는 유식하지 않다. 그의 생전 트위터에 적은 글을 보면 맞춤법도 엉성하고 구사하는 단어의 폭이 굉장히 한정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순수한 열정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고심과 역경을 헤쳤고 덕분에 짧은 인생이었지만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았다. 아는 게 많아도 사고의 수준이 자신의 중심에 갇혀 있다면 지혜롭다고 할 수 없다. 임윤택은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좋은 리더십을 발현한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슈퍼스타K 시즌 3가 방영될 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 시기 솔직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하루하루 학교 교실의 책상에 앉기가 두려웠고, 등교할 때부터 하굣길까지 혹여나 다른 반 친구들에게 나의 치부를 들킬까 두려워하며 지냈다. 그때 나는 임윤택을 보면서 위로를 많이 받았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저렇게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도 분명 어딘가 있겠지. 지금의 나는 아직 어리숙하지만 꽤나 의연하게 변했다. 비록 암 환자도, 언더그라운드 바닥에서 배 굶으며 힘들게 춤을 추는 댄서도 아니지만 그의 존재는 나에게 큰 응원이었다. 임윤택이라는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싶다. 많은 이가 그를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임윤택의 인간상人間像을 알 수 있는 강연



김현지 Kim Hyeon-Ji(1985 – 2015)

흐르는 음악 위로 삶의 고통을 잘근잘근 씹어뱉고선 또다시 동이 트면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며 ‘이리 오너라 이놈의 세상아’. 절망 속에서도 피는 꽃처럼 희망이란 이름으로 저 앞으로, 더 앞으로 뛰어가자.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 우리는 피리 부는 사나이. 언제나 웃는 멋쟁이.

인간에게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선과 악으로 나눌 수도, 강인함과 연약함으로 나눌 수도 있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인간에게 이롭다고 해서 대자연에 이로울 수 없고 신에게 이롭다고 해서 결코 인간에게 이로울 수도 없다. 어떤 잣대로 사람을 판가름할 것인가. 과연 우리가 누군가를 감히 평가하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양면성을 지닌 채 살아간다. 어른스러울 때도 있고, 어린아이 같을 때도 있다. 나는 김현지의 무대를 보면서 사람 냄새를 가득 느꼈다. 2~3분 남짓한 무대 위에서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모두 쏟아냈다. 때로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참회가 되기도 했고, 관중 앞에서 자신의 소리를 한껏 내보이며 음악에 대한 희열로 가득 찬 행복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의 문턱에 발을 들였다. 되돌아오지 못하는 길임을 알면서도. 그녀가 죽음을 선택한 것은 옳지 못한 일일까. 안타까운 소식에 비록 슬퍼할지라도 나는 감히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겠다.

김현지가 부르는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



최요삼 Choi Yo-Sam(1973 – 2008)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턱이 나간 것 같습니다”. 최요삼은 WBC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 매치 10라운드를 끝내고 코너로 돌아와서 코치에게 말했다. 그는 라이트 어퍼컷을 맞고 턱이 세 조각으로 쪼개졌다. 스텝을 밟기만 해도 턱이 덜렁거리던 그는 마우스피스를 꽉 물고 남은 2라운드를 버텼다. 그렇게 도전자에서 챔피언이 되었다. 병원으로 후송된 최요삼은 담당의에게 웃으며 자랑했다. “제 정신력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보통 링에서 시합을 치르면 선수는 라운드당 평균 50번 정도의 펀치를 뻗는다. 많으면 100번 정도. 최요삼은 매 라운드 150번의 주먹을 상대에게 던졌다. 3분간 2초에 한 번씩, 온 힘을 다해서. 단단히 가드하기 위해선 몸을 잔뜩 웅크리고 고개를 치켜들어야 한다. 그 상태에서 주먹을 12라운드 동안 교환하는 것이다. 때리기도 하고 맞기도 하면서. 최요삼은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링에 올라간다고 했다. 국가대표는 국가를 대신해 경기에 임하지만 프로 선수인 그는 링 위에서 스스로 강해져야만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킬 수 있었다.

2007년 크리스마스, 그는 WBO 플라이급 인터콘티넨탈 1차 방어전을 치른다. 마지막 라운드 10초를 남기고 라이트 훅을 맞아 다운을 당한다. 하지만 곧바로 일어서서 경기를 매듭 지었다. 결과는 최요삼의 12라운드 판정승. 경기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린 후 그는 동생의 품에서 글러브를 풀어달라는 말을 하고 의식을 잃는다. 그는 그 순간에도 소중한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어선 것이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엉덩이를 털어내고 주먹을 쥐고 상대방을 향해 지지 않겠다는 눈빛을 보인 것이다. 예전부터 몸에서 이상 징후가 나타났을 터. 잦은 두통과 시야가 흐릿하게 보이는 뇌출혈의 증상. 격렬한 경기 중에는 그 통증이 더 심해졌을 것.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눈을 비비던 순간 라이트훅을 맞았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었다. 그의 생전 일기장에는 ‘외롭다’라는 말이 빼곡했다. 동생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글러브를 풀어달라는 말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의 삶은 영광의 빛으로 찬란하기도 했지만 참으로 황망한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한동안 그의 싸이월드 홈페이지에서는 “Gonna Fly Now”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리쌍이 최요삼에게 바치는 헌정곡 – “챔피언”



히스 레저 Heath Ledger(1979 – 2008)

히스 레저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았던 것 같다. 하루하루, 열정으로 가득 찬 숨을 내쉬며 살았고, 그 에너지는 주변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의 고뇌와 갈등은 진정성으로 가득했다. 그는 종종 커트 코베인이나 제니스 조플린 같은 사람에 관해 말했다고 한다.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할 일이 많은데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것처럼 느껴져. 이유는 모르겠어. 그러니 당장 다 해야겠어”.

나는 히스 레저와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비록 스크린에서 마주한 경험이 고작이지만, 그를 보면서 강한 동기부여를 받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히스 레저의 죽음에 연민을 느끼지는 않는다. 좀 더 그를 지켜보고 싶었기에 아쉽긴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비참한 내리막길이 아니라서. 세상은 그가 조커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해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히스 레저는 자신의 방식으로 맡은 배역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저 누구와 비교할 필요 없이 스스로 떳떳할 수 있는 연기. 촬영이 끝나고 나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을 정도로 진이 빠졌지만 그는 시나리오의 가상과 현실의 세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배우가 아니었다. 오히려 불타오르는 창작 욕구로 불면증에 시달려서 시도 때도 없이 주변 동료의 잠마저 괴롭혔으니 말이다. 오죽했으면 그의 이메일 주소가 illberunningaround@.com이었을까. 문장으로 풀어 놓으면 ‘I’ll be running around ─ 계속 뛰어다닐 거야 ─ ‘. 그저 운이 없었고, 어쩌면 신조차도 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곁에 두고 싶어서 데려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Heath Ledger의 전기(傳記)를 담은 다큐멘터리 “I Am Heath Ledger” 예고편



이은주 Lee Eun-Ju(1980 -2005)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디선가 들은 말을 대충 떠올려 보자면 가수는 자신이 부르는 노래처럼 인생을 살다 가고, 배우는 자신이 연기한 배역처럼 살다 간다고 했다. 이은주가 맡은 시나리오의 끝에는 언제나 죽음이 따라다녔기 때문일까. 그녀는 20대 중반의 나이를 끝으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 지었다. 이은주의 탁월한 점은 누가 무어라 해도 인간이 가진 내면성 중 저 깊이 가라앉은 인간의 여린 부분을 아름다운 연기로 표현하는 데 있다.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외모, 천부적인 아우라는 당시 국내 영화 업계에 많은 관계자로부터 러브콜 세례를 받는다. 그렇게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릴 때는 좋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대책이 없다. 상황이라는 건 나빠질 수도 있지만 겪어보지 않고선 대처할 줄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20대 중반의 이은주라는 한 사람이 당시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무게의 고통이었고 결국 삶과의 이별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고혹한 매력으로 가을 내음을 한껏 머금은 빨간 단풍이 곧 낙엽이 되어 차갑고 축축한 바닥으로 떨어지듯 비운의 운명을 맞이하는 주인공이 주로 그녀가 맡은 역할이었다. 

“안돼… 감정도 없고… 내가 아니니까… 일 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일 년 전이면 원래 나처럼 살 수 있는데 말이야.” 그녀의 유서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2002년도에 개봉한 “연애소설”에서 그녀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 경희가 죽고 지난 시간을 그리워하며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유서를 쓰면서 그때의 장면을 떠올렸을까. 연애소설에서도 죽음을 맞이하지만 극 중 수인역으로 나오는 이은주는 봄 같은 파릇파릇한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스크린을 채웠다. 생명처럼 추상적인 것이 있을까. 그것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이은주의 생기를 느낄 수 있는 영화 “연애소설”



박용하 Park Yong-ha(1977 – 2010)

박용하는 인기 절정을 누리던 순간, 자택에서 휴대폰 충전기 선으로 자신의 목을 감았다. 생전 박효신의 “사랑한 후에”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그의 모습은 마치 개인적인 삶을 절실히 투영한 듯하다. 당시 박용하의 배우 인생을 최정상의 커리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는 당대 일본에서 한류 열풍이 불던 시기 배용준, 원빈을 잇는 한류 스타 중 한 명이었다. 박용하는 연기 외에도 다방면으로 재능이 뛰어나 곧잘 운동과 카 레이싱을 즐겼으며 노래 실력이 출중해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가 부른 노래 중 가장 많은 사람에게 열띤 호응을 얻었던 드라마 “올인”의 OST “처음 그날처럼”은 드라마의 백그라운드를 가장 반영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나는 드라마의 분위기와 가장 잘 합치된 곡을 고르라면 임재범이 부른 “추노”의 “낙인”과 함께 단연코 박용하가 부른 “처음 그날처럼”을 꼽는다. 그는 일본에서 대히트한 “겨울연가” 덕분에 한국보다 일본에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이런 말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한 적 있다. “사람들이 가끔씩 나도 잘 모르는 나에 관해 쉽게 이야기한다”. 연예인 혹은 공인의 삶을 경험해보질 못해서 나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독한지 잘 모르지만 박용하는 까다롭지 않은 성격, 까다로운 일도 원만하게 해결하는 부류의 사람이라고 느꼈다. 이런 그조차도 힘에 부쳐 쉬고 싶지만 멈출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과연 돈이었을까.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다들 돈 때문에 웃고, 우니까.

절친 박효신의 “사랑한 후에” 뮤직비디오에 참여한 박용하



아비치 Avicii(1989 – 2018)

아비치(Avicii)는 FL 스튜디오(FL Studio)를 접하기 전까지는 활동 반경이 자신이 사는 집 5블록을 넘지 않았다. 이 운명의 음악 편집 프로그램을 알게 된 순간 한 소년은 비로소 자신이 열정적으로 쏟아부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아침을 알리는 새의 지저귐이나 밤공기의 농도를 짙게 하는 벌레들의 울음소리나 그에게는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오로지 작업을 하기 위해 눈을 뜬 시간과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는 시간 둘로 나눠질 뿐이었다. 한동안 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FL 스튜디오​에 매달린 그는 ‘이 정도 했으면 테니스 라켓으로 우쿨렐레 연주도 할 수 있을 것 같군’이라는 듯 그간 갈고 닦은 작곡 실력으로 블로그에 데모 곡을 하나씩 올렸다.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자연스럽게 그는 성공 가도를 달렸고 2011년도부터 2016년도까지 약 5년 7개월 기간 동안 전 세계를 누비며 813회에 달하는 공연을 펼친다. 5년 7개월을 일수로 환산하면 약 2035일 정도 되는데 거의 2.5일에 한 번씩 공연을 한 것이다 ─ 그 사이 1년가량의 휴식기를 빼면 사실 이틀에 한 번꼴로 공연을 한 셈 ─ . 상상하기 힘든 강행군, 이 스케줄이라면 몸에 탈 안 나고, 정신 멀쩡한 게 오히려 더 비정상이 아닐까 싶다. 당시 아비치는 떨어지지 않는 췌장염의 통증과 함께 끝이 없는 유목 생활에 심한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삶의 균형을 다시 찾기에는 너무 늦은 탓일까. 2018년 4월 20일, 오만의 무스카트 지역 한 호텔에서 깨진 와인병과 함께 쓰러진 그가 발견되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먹고 자란다. 그 관심은 쾌감을 동반하며, 자신이 특수하고 매우 중요한 존재로 느껴지게끔 한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것. 아비치는 팀 베릴링이라는 소년의 모습이 사무치게 그리웠던가 보다. 오로지 재미로 음악을 만들던 시절, 널브러진 작곡 파일과 말라붙은 스파게티 접시가 쌓인 비좁은 공간. 그땐 모든 시선에서 자유로웠고,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부담을 느낄 필요도 없었을 테니.

‘All my life I just wanted to be free(평생 나는 그저 자유로워지길 바랬지)’

-2016 Ultra Music Festival Miami Avicii’s 4th track-

아비치를 기억하기 위해 팬이 만든 Tribute unofficial film



폴 워커 Paul Walker(1973 – 2013)

남자로서 기름기가 오르기 시작하던 때 폴 워커(Paul Walker)는 태풍으로 난장판이 된 필리핀 이재민 자선 행사를 마치고 친구와 함께 귀가 중 교통사고를 당하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는 차를 타고 귀가하기 직전 사람들에게 “5분 안에 돌아올게요(We will be back in 5 minutes)”라는 말을 넌지시 남겼지만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생전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어느 날, 속도가 나를 죽게 해도 눈물 흘리지 마. 나는 미소를 짓고 있을 테니까(If one day the speed kills me, don’t cry because I was smiling)”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본인의 바람대로 폴 워커는 속도와 함께 인생의 막을 내렸다. 운명이란 참으로 기이하고 또 알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분노의 질주” 7번째 시리즈를 촬영하던 중 사고로 떠난 폴 워커를 기억하기 위해 마지막 엔딩 신에는 “어이, 작별 인사도 없이 그냥 가려고 했어?(Hey, thought you could leave without saying goodbye?)”라는 대사에 도미닉​ ─ 빈 디젤 ─ 이 “작별은 없어(It’s never goodbye)”라는 말로 화답한다. 그렇게 폴 워커는 도요타 수프라를 타고 홀연히 떠나버린다.

선한 인상에 진솔한 눈빛을 가진 그에게 자동차가 빠진 모습은 참으로 어색하다. 그의 인생은 어느 순간 “분노의 질주”의 삶과 일치된 것 같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스틱을 거침없이 당겼다 밀면서 브레이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열심히 액셀과 클러치를 밟아대는 캐릭터에 마음을 뺏긴다. ‘영화의 시나리오 따위 뭐가 중요해. 그저 아슬아슬한 속도의 경계와 의리로 똘똘 뭉친 악동들의 질주하는 모습이면 충분하지’라는 감상만이 남는다. 그저 브라이언 오코너와 그의 친구들이 모인 장면 그거 하나면 모두 충족되는 거다.

Wiz Khalifa와 Charlie Puth가 참여한 분노의 질주 OST “See You Again”
(Paul Walker을 위한 헌정곡으로도 불린다)



끝으로.

이제 10명의 인물을 조명하는 시간은 끝났다. 몇 마디 덧붙이자면 글이나 그림, 음악 등 예술과 예술가들이 가치 있는 이유는 다른 이의 영혼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이 남긴 작품으로 우리는 위로를 받고, 감동하기도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어딘가 조용히 잠든 절망의 감정이 움틀 때도 있다. 이를테면 베르테르 효과가 될 수 있는데, 이 기사를 작성하면서 결코 이 이야기가 혹여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많이 고민했다. 따라서 나는 인간의 죽음을 오랜 시간 고민하고, 그들의 죽음을 스스로 가벼이 여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림 │ 정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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