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한 움직임으로 긴 시간 매번 새롭게 변모하는 컨버스(CONVERSE)가 “RENEW”라는 이름의 스니커 컬렉션을 출시했다. ‘다시 새롭게’라는 슬로건과 함께 등장한 리뉴 캔버스 컬렉션은 지속 가능한 패션을 향한 컨버스의 대안으로 척 70(Chuck 70)와 척 테일러(Chuck Taylor)의 실루엣을 고스란히 가져옴과 동시에 스니커를 이루는 어퍼와 부자재를 재활용 소재로 탈바꿈시켰다.
리뉴 캔버스 컬렉션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잊혀진 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일러스트레이터 람한(Ramhan) 역시 자신이 갖고 있는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기묘한 세계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정신을 드러낸다. 이에 VISLA 매거진이 그녀와 함께 과거의 기억, 그리고 리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인천에 살지만,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일러스트레이터 람한이다.
어떤 계기로 처음 그림을 접하게 되었는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렸다. 만화영화를 많이 봤는데, 이때 받은 영향이 지금 작업의 근간이 된 것 같다. 나에게 그림이란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 대한 영상적인 기억을 다시 살려내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의 등장인물로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데.
내겐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 그림 대부분은 인물이 아예 없거나, 여자가 있거나 둘 중 하나다. 그림 속 여성은 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어떠한 감정을 표현하는 요소로 사용된다. 여자가 나오는 그림은 보통 내가 어렸을 때 느꼈던 특별한 감정에 관한 이야기다.
이러한 감정은 개인적인 기억으로부터 파생되나.
구체적인 기억과 경험에 의한 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추상적인, 누구나 한번쯤 느껴봤을 법한 뭉뚱그려진 감정을 표현하려 한다.
창작의 주된 영감은 무엇인가?
아까 말했다시피 과거의 기억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그림 그리며 놀고, 만화 보던 어릴 때의 기억이 주로 그림으로 나타난다.
미래가 아닌 과거의 기억을 주 소재로 사용하는 이유가 있을까?
내가 어떻게든 공감할 수 있는 것을 그리려다 보니 직접 겪어보지 않은 것을 그리기 힘들다. 실제로 그림 안의 모든 요소를 경험한 적은 없지만, 비슷한 것을 보며 느낀 게 있기에 이를 작품으로 완성할 수 있다. 내가 동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억에서 영감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과거란 내가 여태껏 쌓아온 시간이니까. ‘과거’란 내 작품의 필수적인 요소다.
람한의 라이프스타일을 소개하자면?
집에 있는 시간을 즐긴다. 예쁜 동네와 멋진 집은 아니지만, 이런 내 주변의 공간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냥 집에서 쉬고, 게임하며 시간을 보낼 때 가장 즐겁다.
평소 일상 속 사물에 관한 관찰력이 좋은 편인 것 같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습관적으로 본인이 속한 일상을 관찰하는 것 같다. 길을 걸을 때 얻는 영감이나, 흘러간 사진을 보며 얻는 영감 모두 비슷한 종류의 자극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이 모든 자극을 바탕으로 작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작품을 보면 다양한 요소가 여백 없이 채워져 있다. 이런 요소 모두가 다양한 기억의 파편을 모아 놓은 것인가?
그렇다. 내 그림에서 특별한 서사적 규칙을 찾기란 힘들다. 예를 들어 내 그림 속에 토끼가 있지만, 사실 그곳에 토끼가 있어야 할 명확한 이유는 없는 거지.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은 보통 그림 속 요소를 모아 연관성을 찾으려 하지 않나. 그러나 결국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게 색다른 재미를 주는 거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감을 초현실적으로 표현하는 것,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무조건 초현실적인 비주얼이 멋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초현실적인 연출을 했을 때 주는 전체적인 느낌을 중요하게 여긴다. 어딘가에서 느껴본 적 있는 익숙한 느낌 같은 것. 예를 들어 길을 걷다 문득 바람에서 익숙한 냄새를 맡는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이런 흐릿한 기억의 파편을 그림에 옮겨내려 하는 편이다. 명확한 장면보다는 적절한 재료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린다.
람한의 작품처럼 본인이 상상한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기는 것, 이 또한 ‘RENEW’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텐데.
내가 지닌 과거의 기억을 색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억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최대한 그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겨우 다시 끄집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잘 골라서 버무리고 작품으로 만드는 일이 리뉴(RENEW)라고 생각한다.
국내외 매체를 통해 다양한 작업물들이 소개되었다. 지금까지의 결과물 중 특히 애착이 가는 작업물이 있다면.
클라이언트가 개입하지 않은 개인 작업에 가장 애착이 간다. 그 중 내가 가장 애착이 가고, 공들여 완성하고 싶은 작품은 ‘룸타입(Room Type)’이라는 연작이다. 한 때 나는 임시적인 공간을 배회하며, 부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고정된 공간에 안착하지 못하는 결핍은 곧바로 공허함으로 이어졌다. 이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표현하려 ‘룸타입’이라는 시리즈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룸타입의 방은 람한의 판타지가 투영된 그림인가.
그런 이상적인 판타지는 아니다. 내가 처음 그리려고 한 ‘룸타입’의 주제는 러브호텔이었다. 외부인이 관리하고, 내부에 있는 사람이 공간 자체에 따로 개입할 수 없는 공간이랄까. 그 답답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내가 안착할 수 있는 공간에 관한 욕망을 나타내려 했다.
그간 참여한 프로젝트와 이벤트에 관해 간단한 설명을 부탁한다.
전시와 개인 작업을 이어오며 생각을 확장시킬 수 있었던 계기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한 ‘유령팔’이라는 전시였다. 이를 기점으로 생각이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앞으로 공부를 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의 이상적인 모습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이때 룸타입 작업도 시작했다.
손으로 하는 작업보다는 디지털 작업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의 작가다. 디지털 작업을 통해 과거의 영감을 풀어내는 과정을 돌이켜볼 때 과거의 작가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일단 모든 작업을 디지털로 진행한다. 그것이 내 강점이라기보다는 나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스케치부터 컴퓨터와 드로잉 패드를 사용한다. 중학교 때 그래픽 태블릿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는 연필보다 드로잉 패드가 더 익숙하다. 오죽하면 대학교 입시도 컴퓨터 작업으로 포트폴리오를 완성했을 정도니까.
디지털은 내 작업에 가장 적합한 도구다. 디지털로 다양한 실험을 해보거나, 특정 툴로 그림을 연출한다. 그리고 이런 디지털 툴로만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수채화나 파스텔도 그 재료만의 특성이 있듯이 각 그래픽 툴마다 프로그램 특유의 느낌이 있다.
향후 계획은?
지금처럼 바쁘게 살면서 조금 더 작업에 관한 선택지를 확장하고 싶다. 스스로 건강을 잘 챙기며 오래 그림을 그리고 싶다.
제작 │ VISLA, CONVERSE Korea
디렉터 │ 고지원
에디터 │ 권혁인, 오욱석, 김홍식
사진 │ 김선익
스타일리스트 │ 이잎새
헤어 & 메이크업 │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