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PIONNE

에스피오네(espionne)는 디제이 소울스케이프(DJ Soulscape)로 활동하는 박민준의 또 다른 페르소나. 디지털 음성 워크스테이션(Digital Audio Workstation), 샘플러의 발전으로 생음악의 기준이 모호한 시대임에도 그는 에스피오네라는 이름으로 스튜디오 레코딩, 라이브 악기를 통해 과거의 음악을 복각하고자 한다. 그렇게 무려 10년간 빌리프(Belif) 뮤직 트리트먼트 시리즈를 지속하며 지난 3월 1일 열한 번째 OST [Inner Dialogue]를 공개했다.

VISLA는 에스피오네의 아지트 rm.360을 찾아가 1시간 동안 빌리프 뮤직 트리트먼트 시리즈의 10년을 두고 대화를 나눴다. 라이너 노트에 이어 많은 TMI를 쏟아낸 박민준과의 대화문은 하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에스피오네는 불어로 관찰자를 의미한다. 불어를 사용한 이유는 프랑스 라이브러리 뮤직을 동경해서일까?

60, 70년대 프랑스 경음악에는 브라질리언, 오케스트레이션, 레어 그루브 같은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니 어느 정도 맞는 말이나 정확히는 프렌치 스타일보다는 60, 70년대의 음악 요소를 다시 복각하는 데 힘을 쏟고 싶었다. 이를테면 지금은 불가능한 과거의 음악 제작 방식과 광고, 또는 영화에나 삽입될 법한 큰 스케일의 음악. 이는 지금 시대에 절대로 팝이 될 수 없지만 당시에는 대중 음악이었다. 팝의 범주가 매우 넓었던 시대로 장르, 기술 등 모든 부분이 발전하고 있었다. 에스피오네는 그 시대 팝의 향수를 담고 싶었다.

espionne – “어쩌면”

에스피오네의 시작은 EP [어쩌면]으로 알려져있다. 정확히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사실 지금은 폐간된 잡지 MDM 부록 컴필레이션 CD에 수록용으로 음악을 제작하던 게 에스피오네의 시작이다. 당시 잡지를 편집하던 디제이 양양이 내가 브라질리언 음악을 소개하는 모습을 보고 제의했다. 또한 뉴 재즈를 비롯한 라운지 음악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동시에 부다 바(Buddha Bar)나 호텔 코스테스(Hotel Costes) 등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라운지, 브라질리언, 보사노바를 플레이할 공간도 무척 많았다. 외려 힙합을 플레이할 공간이 없었지. 반면 지금은 에스피오네로 1년에 4~5번 플레잉할 정도로 공간이 없다.

당시의 라운지는 지금과 분위기가 달랐나?

달랐다. 2001년에서 2004년 즈음에는 라운지에서 디제이가 중심이 되는 크고 작은 파티가 많이 열렸다. 특히 아프로킹(Afroking)에서 라운지 음악을 많이 소개했다. 아프로킹은 당시 거의 유일한 파티였기에 서울 시내에서 소위 논다는 사람은 모두 그 파티를 찾았다.

디제이 소울스케이프로 라이브러리 뮤직 [창작과 비트]를 제작한 적이 있다. 에스피오네와 차이점이 있다면?

에스피오네의 음악은 실제 연주자가 전부 악보를 보고 제작하는 음악이다. 비교적 전통적인 음악 제작 방식인 셈이지. 반면 디제이 소울스케이프로 제작한 것들은 샘플링 기반의 작곡이다. 이게 가장 큰 차이점이다.

소울스케이프, 에스피오네 이름이 함께 수록된 앨범도 있었다.

리믹스 앨범 제의를 받고 진행했다. 그게 원래는 연주자의 가녹음 버전이 있었는데 갑자기 약속된 세션 연주자가 한국을 막 떠났다. 그래서 정작 라이브 레코드 버전으로 실리진 못했고 브라질리언을 비롯한 라운지, 이지리스닝 단위로 편곡, 리믹스된 음악을 공개했다. 그런데 크게 이상하진 않았다. 당시 에스피오네는 뉴 재즈나 보사노바를 리믹스한 음원도 제작하는 프로젝트였다. 지금도 에스피오네로 리믹스를 하고 있다. 그러나 빌리프 뮤직 트리트먼트는 라이브 레코딩 콘셉트를 유지하자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다.

빌리프 뮤직 트리트먼트 시리즈는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지.

빌리프 뮤직 트리트먼트 시리즈를 제의 받을 당시에 나는 스튜디오에서 광고, 영화음악을 주로 제작했다. 이러한 상업 음악에 한계를 느끼던 시점이었고. 그때 빌리프에서 연락이 왔다. 유튜브가 활성화된 시점이 아닌 UCC, 바이럴 같은 동영상이 유행하던 시절이었으니 15초, 20초 정도의 트랙을 요청하겠거니 했다. 그래서 이 제안을 어떻게 거절할까 먼저 생각했다. 그런데 빌리프는 내가 에스피오네로 작업한 트랙을 모두 알고 있어서 놀랐다. 또한 상업 목적이 아닌, 에스피오네 스타일의 인스트루멘탈, 사운드 트랙을 제작하고 싶다고 말했고 과대 포장과 연예인 마케팅을 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그래서 추출물 디자인 자료를 받았다. 느낌이 60~70년대 라이브러리 뮤직에 어울릴 법했다. 그 뒤로는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빌리프 시리즈의 다양한 음악적 영감은 라이브러리 뮤직 복각에서만 오는 게 아닐 것 같다. 영감의 원천이라면?

시리즈는 빌리프의 자연스러운 허브 추출물에서 착안하기도 한다. 빌리프가 제작하는 화장품 제작 방식은 지금의 음악 제작 방식과 다르게 연주자와 실제로 만나 이뤄지는 앙상블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또한 영국의 에든버러 허브 장인의 레시피로 화장품을 제작한다는 점에서 에든버러를 테마로 한 라이브러리 뮤직이 떠올랐다. 빅토리안 시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클래식한 악기와 밴드를 섞어낸 훵키한 음악을 자연스럽게 연계했다.

과거의 라이브러리 뮤직이라면 미리 제작, 저장해두고 광고 에이전시가 필요한 무드에 맞춰 골라 쓰는 방식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빌리프 뮤직 트리트먼트는 마치 화장품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큐레이션 코멘트가 작성되어있다. 음악 또한 화장품을 먼저 사용하고 즉각 떠오르는 느낌을 음악으로 풀어낸 것만 같았다.

빌리프 트리트먼트 시리즈는 라이브러리 뮤직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프로덕션, 광고 음악, 사운드 트랙 사이에 자리 잡았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제작 과정을 말하자면, 캠페인과 새 화장품 자료를 받고 나서 내가 음악으로 풀어낼 수 있는 키워드를 찾고 곡을 최종 완성한 후 결과를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빌리프의 시작을 함께했다 보니 브랜드 스토리 또한 잘 안다고 생각해서 내가 자연스럽게 음악을 풀어주길 원하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컨펌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라이브러리 뮤직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특정한 케이스나 키워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다는 방식에서다.

음악이 화장품으로 제작된 반대의 경우는 없었나?

제품 제작은 아니고 음악 프로젝트로 360사운즈(360 Sounds)와 함께 대구, 부산, 서울을 돌아다니며 캠페인 파티를 펼친 적은 있다.

그렇다면 10년간 이어온 빌리프 트리트먼트 시리즈가 다른 미디어 매체에 사용된 적이 있나?

빌리프만을 위한 음악이기에 다른 곳에 사용하려 한 적은 없다. 가끔 영상 제작하는 분들이 비상업 용도로 사용할 수 있냐고 묻긴 하는데, 브랜드와 엮여있다 보니 영상에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해준 적은 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브랜드에서 빌리프 사운드 트랙을 구매할 수 있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 기업은 라이브러리 뮤직을 돈을 주고 사면 된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콘셉트만 라이브러리 뮤직이다. 이러한 착오가 생길 때마다 거절한 적이 많아서 죄송하다. 그래도 빌리프만을 위한 음악이라 어쩔 수 없이 거절한다.

espionne – [inner dialogue]

이번 [Inner Dialogue]는 빌리프의 10주년을 기념하는 앨범이다. 앨범의 키워드가 있나?

이번엔 아예 대놓고 생일 축하 트랙이 하나 있다. 전체적으로는 빌리프가 지닌 일상성에 포커스를 뒀다. 빌리프는 색조 화장품이 아니라 수분을 강조하는 기능성 화장품이다. 집에서 하루 일과를 시작할 때와 일과를 마치고 잠자기 전까지 사용하는 일반적인 쓰임새에 원칙을 둔 셈이지. 이러한 점에서 화장품이라기보단 코스메틱이라 말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았다. 따라서 [Inner Dialogue]라는 타이틀 자체가 빌리프 브랜드를 사용한다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키워드일 거 같았다.

지난 5주년에는 5를 상징하는 의미로 5명의 아티스트와 함께 제작할뿐만 아니라 4/5박, 5개도시를 거쳐 음반 작업을 진행하는 등의 시도가 있었다.

숫자, 이름, 소재 등의 자유 연상을 통한 뜬금없는 연관성이 라이브러리 뮤직의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8주년에는 아시아 진출을 축하하며 아시아 각국의 60~70년대 경음악에 영감을 얻어서 음악을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여행을 테마로 잡고 베네치아에서 곡 작업을 한 적도 있다. 이러한 환경, 테마와 키워드가 에스피오네의 장르와 스타일에 많이 반영되는 편이다.

세션이 모두 베네치아로 간 건가?

거기서 곡 작업만 했고, 서울로 돌아와 세션 녹음을 진행했다.

[Inner Dialogue]에는 연진과 수민(SUMIN)이 스캣으로 참여했다. 이들에게 별도로 주문한 요청사항이 있다면?

연진은 나와 8년을 함께하고 있다. 연진과 꾸준한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라면 그는 팝적인 스캣 싱잉에 이해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멜로디 탑 라인만 짜서 건네주고 스튜디오에선 녹음 버튼만 누르고 기다린다. 또한 연진은 그 이해도를 바탕으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한다.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는 편이다.

수민의 경우가 즉흥적으로 작업한 경우다. “REFLEXAO”에 사실 보컬을 넣을 생각이 없었고 솔로 악기를 넣으려 했다. 그런데 수민이 학교를 다닐 때의 경험으로 스캣 싱잉을 제안했다. 그래서 멜로디를 보내줬는데 수민이 척척 알아서 녹음해서 보내줬다.

이렇듯 새로운 아티스트와 아이디어를 나누고 작업하는 건 나에겐 큰 즐거움이다. 특히 지난 [Timeless]에서는 제이슨 리(Jason Lee)와 함께했는데 내가 짠 멜로디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본인 마음대로 표현하다 보니 살짝 편곡을 수정하게 됐다. 덕분에 상쾌한 퓨전 스타일의 음악이 탄생했다. 이렇듯 아티스트와의 교류는 내 결과물에 크게 반영이 된다.

과거 시리즈가 무드와 앙상블을 강조한 반면, 최근에는 빠르고 경쾌함을 더욱 강조하는 것 같다.

빌리프 뮤직 트리트먼트 앨범은 어느 시점에 고정된 게 아니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초기 앨범이 60년대 중후반의 어센틱한 보사노바와 재즈를 모노 마이킹을 이용해서 작업했던 반면, 지금은 70년대의 퓨전 요소가 가미된, 빠르고 경쾌한 음악과 연주자 위주의 음악을 구현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앙상블은 타이트해졌다. 이러한 방향은 브랜드가 확장되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빌리프는 초기 모노톤, 무채색의 브랜드였다. 반면 지금은 기능성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스펙트럼과 스타일의 반영이다.

라이브러리 뮤직 특성상 2~3분 남짓의 길이가 될 수밖에 없을 것. 좀 더 길게 끌고 싶었던 욕심이 생긴 적은 없는지.

사실 데모로 녹음할 당시에는 길이, 편성이 훨씬 다양하고 기승전결 또한 확실하다. 이게 편곡 파트에서 짧게 변하지. 이 또한 70년대 라이브러리 뮤직의 특징이긴 하다. 그래서 또 다른 버전 제작을 염두하고 데모를 모두 간직해두고 있다. 또 연주자가 앙상블 잼을 하는 과정에서 트랙이 많이 바뀌는 편이다. 훗날에는 스케일이 큰 오케스트라 단위를 편성하여 완곡 형태로 발매하고 싶다. 지금은 빌리프 브랜드가 지닌 사운드 지향점, 6~7인조 밴드 사운드를 최대한 따르고 있다.

한정 7인치에는 단 세 곡만 담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7인치에 담기는 음악과 아닌 음악을 직접 선택하는 기준이 있나?

본래 7인치 싱글에는 한 곡을 담기도 벅차다. 그러나 나는 만들다 보니 욕심이 생겨서 세 곡을 넣게 됐다. 짧은 곡을 눌러 담을 수 있겠다 싶어 무리하게 집어넣은 편이다. 일단은 시즌 캠페인 테마곡 위주로 선택했다. 그리고 영상 제작에 필요한 시그널 음악은 바이닐에 포함하지 않는다. 바이닐로 공개되는 트랙은 미리 골라둔 곡이고, 디지털로 공개한 트랙은 시간이 넉넉해서 두고두고 작업하는 편이다.

7인치가 아닌 12인치 혹은 또 다른 포맷으로 공개될 가능성도 있을 듯하다.

지금까지 빌리프 뮤직 트리트먼트로 약 70곡 정도 제작했다. 매년 다른 테마로 새로운 음악을 녹음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이어지도록 설계했다. 나중엔 이를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서 새로운 앨범이 탄생할 수도 있다. 단순한 컴필레이션 형식이 아닌, 새로운 녹음과 편곡을 거치고, 비슷한 테마의 음악을 서로 묶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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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if 공식 웹사이트


에디터 │황선웅
사진 │ 오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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