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투개월로 이름을 알리고, 짧은 솔로 활동 후 자취를 감춘 김예림. 그가 오랜 공백 후 림킴(Lim Kim)으로 돌아왔다. 바뀐 건 이름뿐이 아니다. 4년간 준비한 목소리에는 전에 없던 곧은 심지가, 텍스트에는 비합리를 깨부수는 날카로움이 선명하다. 아시아 여성에게 힘을 싣는 림킴의 외침.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킬 빌” 우마 서먼의 칼날이 시퍼런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뱉은 말을 매체가 어떻게 해석하든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림킴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힘이 실린 답변. 그는 충분히 곱씹은 후 말을 이었다.
[GENERASIAN] EP 앨범을 발매한 지 4개월이 지났다. 어떻게 지냈나.
공연 일정을 소화하며 간간이 잡지 촬영에도 참여하고, 틈틈이 다음 스텝을 고민 중이다.
2016년부터의 공백 기간, 아침 7시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고.
공백기라 특별히 그런 건 아니고, 원래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편이다. 늦은 밤보다는 이른 아침이 더 집중하기 좋다. 올빼미 생활이 보통인 주변에선 몇 없는 경우 같은데, 솔직히 그들의 생활방식이 나에겐 더 신기하다.
그래도 소속사 제약이 없는 만큼 늦게까지 놀러 다닐 수도 있겠다.
별로 나가 놀지 않는 성격이다. 그래도 요즘은 비주얼 면을 도와주는 또래 친구가 조금 생겨서 전보단 자주 나가는 편인데, 그래도 몇 개월에 한 번 정도다.
‘컴백’했다고 표현해도 될까? 돌아온 모습이 이전과 아주 다르니 김예림과 림킴을 동일시해도 될지 망설여진다.
딱히 과거의 자신과 지금을 분리하진 않는다. 자아, 색깔 등이 모두 바뀐 건 맞지만, 그 시절을 거쳤기에 지금의 림킴으로 진화한 게 아닐까.
모든 걸 스스로 정하며 활동한다.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는 때가 있는지.
친구들과 작업하거나 어울릴 때. 음, 사실 어디에 속해도 별로 의식하고 행동하지 않아서, 크게 중요한 가치는 아니다.
갑자기 스포트라이트에서 물러나는 일. 고독하진 않았나.
전과 다른 생활이 즐거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소속사의 ‘관리’라는 건 다시 말해 자잘한 일상의 수고를 남이 대신하는 건데, 영 불편했다. 스스로 하는 게 당연한 일도 나중에는 그렇지 않게 될 거 같더라고. 숨통이 트인 느낌이었다.
소속사 없이 활동하는 지금이 편하다는 말인가?
자연스럽다. 완벽한 조건이라곤 말 못 하겠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니 전보다 낫지. 내가 원하는 사람과 일하고 내키면 여행도 가고. 단점이라면 가끔 손이 부족하다는 거.
그러면 음악에 오롯이 집중할 시간이 줄어들지 않나.
사실 EP [GENERASIAN]을 재작년 말 마무리하고 음악 작업을 거의 안 했다. 지금은 다음 작품을 구상만 하는 단계다.
지금은 유니버설 뮤직과 협업 관계에 있는데, 소속사의 개념은 아니라고 들었다.
활동을 도울 뿐이다. 편의상 파트너 계약이라 부르는데, 음원 유통이나 일정 조정 등 자잘한 것을 보조할 뿐 아티스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더라. 전속 계약이 아닌 점이 장점이자 단점. 본인 성향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이전 소속사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당연한 듯 지속된 일, 누군가 말해야 했던 지점을 꼬집었다. 그렇지만 그들 입장에선 달갑지 않을 내용 아닌가.
직접 들은 얘기는 없다. 하도 이 바닥이 좁으니 이전 관계자들도 가끔 마주치지만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응원을 보내주던데? 적어도 같이 오래 일한 실무진은 내가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리라 충분히 예상했던 것 같다.
토해낸 것처럼 앨범을 만들었다고. 뭘 토해냈고, 뭐가 남았나.
출구 없이 쌓아온 묵은 생각을 뱉었다. 20대 초반부터 담아온 감정도 같이. 그 후 남은 건 마음의 평온과 앞으로의 전진을 도와줄 영감, 사람들이다. 무얼 위해 오랜 시간 고민했는지 고민의 타래가 풀린 느낌이랄까. 여러모로 시원했다.
남은 후회는 없나.
긴 기간 매달려 만들다 보니 후회는 없다. 기력이 없을 때까지 세밀하게 고치고 넣은 앨범이니 ‘뭘 더 하나’라고 생각했다.
앨범을 프로듀싱한 노 아이덴티티(No Identity), 달로(Dalo)와 만난 계기는?
논리보단 직감에 따르는 성격이고 중요한 일도 보통 그렇게 결정하는 편이다. 노 아이덴티티와 다로가 함께 퓨처 카와이(Future Kawaii)로 내놓은 음악을 듣고 수소문해 만났다.
앨범 제작 과정에서 본인이 맡은 역할은?
방향 제시. 곡에 담길 서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구상한 후 다로와 노 아이덴티티에게 보여주면, 그들이 음악으로 답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디깅을 매일 했다고. 무엇을 찾았나. 또 그 과정은 무엇을 위해서였나.
디깅은 생활의 일부다. 필요 여부를 떠나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재미있더라. 어려서부터 그랬다. 어떤 흐름이 흘러가는 모습은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앨범의 음악 방향을 결정하는 데 영국 레이블 영 터크스(Young Turks)를 방문한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영 터크스와 함께한 FKA 트위그스(FKA Twigs) 같은 아티스트를 좋아하기도 하고, 역시 직감에 따라 영국을 찾아 관계자와 만났다. EP로 보여준 스타일보다는 의식의 흐름대로 만든 듣기 편한 하우스 성향의 곡을 들고 갔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궁금해진 거다. 우리 문화의 특성을 담은 음악이 뭔지. 그렇게 ‘동양적’이란 말이 무엇인지에 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EP에 동양의 민속 악기 소리를 대폭 집어넣었다. 프로듀서나 본인에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메시지 전달을 위해 고민하다 그렇게 됐다. 동양, 그리고 여성이라는 큰 틀 속 작은 이야기를 써 내려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민속 악기라는 도구가 필요하더라. 함께 다다른 결론이니 큰 이견은 없었다.
목소리로도 민속적인 요소를 표현하려 했다.
전달하고 싶은 게 확실하니 그에 맞춰 자아도, 창법도 진화했다.
자아의 진화는 어떤 의미일까.
나의 사고와 성격을 음악과 그 메시지에 맞추는 과정이다. 메시지의 무게와 크기를 생각해 때로는 가볍게, 또 가능한 한 자신을 부풀려서 표현했다.
그렇다면 ‘동양적’이라는 의미는 결국 어떻게 해석한 것인가.
‘동양’이라고 하면 당연히 떠오르던 토속적인 이미지, 음악은 공부하면 할수록 희미해졌다. 수많은 얼굴을 가진 너무나 큰, 이제 동양은 무한한 개념으로 다가온다.
동양 여성에게 힘을 전하는 가사가 돋보인다.
내가 경험한 동양 여성의 현실, 그리고 내 안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전하기 위한 공부가 그 기본이었다. 여러 이야기가 내재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말을 적었다.
이번 EP 관련 활동의 슬로건처럼 쓰이는, ‘UNFUCKABLE CREATURE’는 퍽 잘 어울리는 문구 같다.
어디선가 본 단어 ‘Unfuckable’이 잊히지 않더라. ‘Fuckable’은 상대를 상당히 업신여기는 표현인데, 이를 간단히 부정하는 어감이 마음에 들었다. 단단하게, 주체적으로 사는 이는 모두 ‘UNFUCKABLE CREATURE’가 아닐까?
지금 림킴에게 돌아오는 스포트라이트는 과거와는 달리 모두 주체적으로 행한 일의 결과다. 여기에서 오는 부담은 없는지.
별로 없다. 내 정체성과 그리 어긋난 말이나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앞으로 [GENERASIAN]에 담은 주제, 동양과 여성은 계속 이야기할 거니까. 목소리를 다루는 가수는 청자에게 영향을 주고, 그 영향 또한 동양의 개념처럼 형태가 무한하다. 자신을 틀에 가두고 싶지 않다.
EP 발매와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한 텀블벅 모금은 본인의 정체성을 건 일종의 도박이었는지도 모른다.
참여자 수, 모금액을 누구나 볼 수 있는 구조 때문에? 그보단 타인과 소통해 에너지를 얻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남아있던 앨범 준비를 마무리한 후 기력이 가장 없던 때, 한두 명 쌓이는 응원이 얼마나 힘이 되던지.
결과적으로 모금은 성공했나.
그렇지. 목표한 금액보다 많이 모였으니까.
본인에게 성공이란.
나란 사람의 인격, 모습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리프리젠테이션이 되는 것.
크리스틴 유안(Christine Yuan) 감독과 “YELLOW” 뮤직비디오를 작업했다.
이전부터 멋있는 작업을 한다 생각했기에 직접 연락했다. 이메일로 의견을 주고받다가, 텀블벅 모금이 끝난 작년 여름 상하이에서 만나 작업했다. 내 또래인 촬영 스태프와 친해져서, 그가 추천해준 로컬 클럽 올(Club ALL)에도 같이 놀러 가고 좋은 자극을 받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하이는 새롭고 묘한 도시다.
“YELLOW” 뮤직비디오에서 강조한 ‘음향의 시각화’는 어떤 의미인지.
간단하다. 내가 짜 놓은 시각적인 요소에 편중된 서사를 다로와 노 아이덴티티가 음악으로 풀듯, 완성된 곡을 크리스틴이 자기식의 영상으로 해석했다는 얘기다.
공연도 생각보다 뜸하다. 여러 제의가 들어올 것 같은데, 특별한 기준이 있나.
딱히 없다. 내 기준으로 흥미로운 행사면 참가하고 싶다.
[GENERASIAN]은 주 음원 플랫폼에서 힙합으로 분류되어있다. 동의하는가.
음원을 등록할 때 장르라는 틀로 가두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게 힙합일 뿐,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럼 색깔로 표현한다면.
검은색과 빨간색.
앨범을 발표한 후 기사는 물론, 각종 매체에서 인터뷰를 다수 공개했다. 본인의 의도와 맞지 않는 내용도 그에 섞여 나왔을 법한데.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이리저리 돌다가 아무도 모르게 살이 붙는 게 말과 글 아닌가. 매체, 지인, 팬 모두 나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게 당연하다. 내가 뭘 한다고 달라지지도 않고. 이전의 활동으로 배운 게 있다면 그런 거겠지.
림킴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아,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라고 참고는 할 수 있겠다. 작은 힌트, 딱 그 정도.
“SAL-KI”를 들고 업계 관계자들을 만났을 때 부정적인 피드백이 지배적이었던 걸로 아는데, 올해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악인을 포함한 여러 상 후보에 올랐다. 감회가 남다를 거 같다.
한국에 아직 음악의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보여줘야 수긍하는 기존 시스템. 그들의 예상과는 정반대 결과니 재미있지.
본인의 다음 행보를 주변에서 심심찮게 물어보지 않나. 조금 힌트를 준다면.
새로운 문화 현상을 계속 찾아 익히는 성격이라 다음 작업의 구상은 어렵지 않다. 누구와 함께할지가 고민이다. 언제나처럼 직감으로 찾게 될 듯한데, 지금 이 인터뷰를 읽고 누군가 내게 연락해 작업으로 이어진다면 재미있을 거 같다.
에디터│홍석민
포토그래퍼│유지민
스타일리스트│박안나
헤어 / 메이크업│윤나나 박진형
*해당 인터뷰는 지난 VISLA Paper 1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VISLA Paper는 지정 배포처에서 무료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