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편 “박화영”에서 10대 청소년의 문제를 가감 없이 스크린에 옮기며 하이퍼 리얼리즘 영화로 주목받았던 이환 감독이 지난 2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두 번째 장편 “어른들은 몰라요”를 최초로 공개했다. 크레딧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 숨을 멎게 만드는 배우들의 열연과 강렬한 캐릭터 설정, 치밀한 스토리 라인과 구조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를 더는 픽션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게 하는 특유의 찝찝함까지 삼박자를 고루 갖추며 아주 불편한, 하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영화가 탄생했다. 감독인 동시에 배우로서 이번 영화에 참여했음에도 그는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어른’을 정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짙고 매서운 눈빛을 던지는 그에게 작품 전반을 비롯하여 유독 인연이 깊은 부산국제영화제에 관한 단상 그리고 감독과 배우로서 영화를 수행하는 태도를 물었다.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월 말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됐다. 상영관 축소부터 1회 상영, 온라인 GV 등 지난 영화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그만큼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은데, 새로운 환경에서 작품을 선보인 기분이 궁금하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영화를 만드는 나 같은 사람에게 늘 큰 의미로 다가온다. 감독으로서 첫 번째 장편인 “박화영”과 두 번째 장편 “어른들은 몰라요” 모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했고, 영화를 만들기 이전에 배우로 활동하면서도 영화제에 참여했으니 개인적으로 남다른 의미가 있다. 아마 열 번은 넘게 부산을 찾았지 싶다. 그래서인지 고향 같은 느낌도 든다. 한편으로는 영화 작업을 하면 ‘아, 부산에서 틀어야 하는데’ 하는 강박도 있고.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면 아마 부산에서 자신의 영화를 상영해보고 싶지 않을까.
현장에서 이번 영화를 향한 관객과 관계자들의 기대감이 굉장했다. 그만큼 반응도 좋았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좋은 소식이 들리더라. 무려 2관왕(한국영화감독조합 메가박스상, KHT상)을 달성했다.
사실 전혀 예상 못 했다. 이번에는 1회만 상영했기 때문에 일정을 2박 3일로 짧게 잡았다. 작품을 틀고 그다음 날 다시 서울로 올라왔는데, 이틀 뒤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원래 모르는 번호는 안 받는데 전화가 계속 오길래 혹시 택배인가 싶어서 겨우 받았다. 보니까 영화제에서 연락이 온 거였다. 그때 상을 받는다는 걸 처음 알았고, 다음날 부산에 내려가 시상식에 참석했다.
시상식 중간 즈음에 올라가 상을 받고서는 이제 끝이니까 편하게 저녁이나 먹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진행자가 오더니, 다음에 또 올라가야 한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의아해서 “저 이미 받았는데요?”라고 물었다. “감독님은 두 개예요. 상 하나 더 받으신다고요”라고 하셨다. 그렇게 얼떨결에 두 번째 상도 받았다. 사실 상을 받는 게 목적이나 목표는 아니다. 그래도 받으니까 기분은 좋더라.
일정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영화제 기간이 곧 영화 홍보 기간이라 일이 많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영화제를 찾는 감독이나 배우가 영화제에서 영화 홍보 이외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가 늘 궁금했다.
이거 이야기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하하.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술이다. 일정 끝나면 다음 날 새벽까지 마시고, 눈 뜨면 해장하고 일정 소화하고. 일정 끝나면 또 술 마시고. 이게 반복이다. 여기서 다른 이야기 하면 배우고 감독이고 나보고 거짓말한다고 할 것 같아서 솔직하게 말한다. 술이다.
부산에 올 때마다 자주 가는 술집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맥주는 갈매기브루잉, 해운대 시장 안에 꼼장어도 맛있다. 회는 무조건 삼선횟집에 간다. 가끔 여력이 되면 바다마을 포장마차에 가서 랍스터를 먹기도 한다. 그리고 “박화영” 작업할 때부터 회식도 많이 하고 자주 가서 단골집이 된 곳이 있다. 옛날집이라고 해운대 시장 옆 2층에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갔는데, 좀 늦게 갔더니 문 닫는다고 하셔서 나왔다. 여기는 베이컨 꼬치가 맛있다.
부산에 오래 살았던 나도 처음 들어보는 곳이다. 영화계 안에서 입소문 난 곳도 있나?
아무래도 바다마을. 랍스터를 꼭 먹지 않더라도 포차 특유의 분위기가 좋다. 영화제 기간에 여기 가면 배우부터 감독, 제작자 등 영화제 관계자 다 있다.
영화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개인적으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처음 경험하면서 ‘왜 영화제일까? 과연 영화제는 무엇일까?’라는 꽤 근원적인 질문에 최근까지 빠져있었다. 이 질문을 그대로 전달해보고 싶다.
나처럼 독립 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는 기회의 장이고 분명 영화제에서 작품을 상영한다는 것 자체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배우로서도 감독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소중한 기회이자 하나의 출구라고 생각한다. 포지션에 상관없이 영화제를 향한 마음은 똑같은 것 같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국내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영화가 한정되어 있기에 짧은 시간에 쉽게 볼 수 없는 그리고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를 가장 빠르게 만날 수 있는 장이고, 무엇보다 그 영화들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영화제에 방문했다. 영화제와 관객을 마주하는 태도나 기분 그리고 기대감이 각각 다르지는 않은지?
음, 사실 다른 점은 크게 없는 것 같다. 연출자로서든 배우로서든 영화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는 마음은 똑같다. 하나의 작품을 향해 함께 공동 창작을 해왔기 때문에 같은 마음으로 보고, 즐기고, 관객의 반응을 보는 것 같다. 부담감도 똑같은 것 같고. 특히 부산에서 영화를 공개하면 정말 반응이 즉각적으로 온다. 엄청 두렵고 떨리는 순간이다. 그만큼 반응이 좋으면 기쁘다. 하지만 영화제 반응이 개봉했을 때의 흥행과 또 비례하는 건 아니라서 영화제가 끝나고 최대한 재정비하는 일에 집중하려고 한다.
올해는 영화를 제대로 상영하기도 감상하기도 꽤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만큼 기대감보다 부담감이 더 컸을 것 같다. 무엇보다 관객의 반응에 신경이 많이 쓰였을 텐데.
처음에는 사실 관객 반응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다. 오히려 배우들 때문에 많이 긴장했지. “박화영”을 작업할 때도 그랬지만, 편집 과정에서 배우들에게 영화를 절대 안 보여준다. 그러니까 배우들도 이번 작업을 부산에서 처음 본 거다. 그런데 담당 프로그래머가 오셔서 관객들이 이 영화를 제일 많이 기대하고 있고, 말도 제일 많다고 하더라. 그때부터 정말 부담감이 물밀 듯이 쏟아졌다. 진짜 5분 간격으로 담배를 계속 피우러 나갔다 들어왔다 반복했다.
그렇게 관객분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반응을 잘 모르겠더라. 이후에 GV를 하면서도 엄청 긴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 시대에 어렵사리 개최된 영화제인 만큼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 찾아 주셨고 던지는 모든 질문이 날카로웠다. 그래도 다행히 긍정적 질문을 많이 받았다. 처음에 시나리오를 쓸 때의 생각과 연출하려고 했던 의도에 점점 다가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전작보다 훨씬 보편적인 영화를 만든 것 같다는 질문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이 부분은 영화를 찍기 전부터 제작사 대표님과 PD님한테 계속 말했던 내용이었다. “박화영 때보다 훨씬 보편적인 영화를 만들 거다!”라고 했는데, 보편성에 관한 그 질문 한마디로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가까이 갔다’라는 용기가 생겼다.
이번 영화는 국내 극장에서도 곧 볼 수 있는 건지?
아직 개봉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국내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어른들은 몰라요”는 의도치 않은 임신을 한 10대 소녀 ‘세진’이 아이를 지우기 위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그린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주인공의 이름. 전작에서도 같은 이름을 지닌 인물이 등장한다. 심지어 배우도 동일하다. 전작과 혹시 세계관이 이어지는 것일까?
“박화영”에서 가져온 세진은 맞다. 그러나 작품의 세계관이 이어지는 건 아니다. 세진이라는 캐릭터는 동일하지만, 이 영화는 별개의 영화다. 같은 캐릭터를 가지고만 왔을 뿐. 이번 영화는 전작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그런데도 많은 분이 주인공의 이름이 같고, 이를 연기한 배우도 똑같아서인지 세계관이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오시는 것 같더라. 앞서 영화의 세계관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게 뭐 중요하냐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를 본 이들의 생각이 그렇다면 나의 의도와는 달라도 그 나름대로 영화를 완성해나가는 것이다. 자기만의 영화로 읽어 내리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보고 싶은 것들을 보면서 영화는 완성된다. 그러니까 영화는 내가 다 만들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관객을 만나면서 진짜 완성되는 것이지.
한편 영화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제와 소재가 강렬하다. ‘임신’ 그리고 ‘낙태’ 이 두 단어의 무게가 상당한데. 시나리오를 작업하며 어려웠던 점은 없었는지?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가 한창 임신 중절 수술에 관한 찬반 의견이 팽팽했던 시기였다. 지금은 법적으로 정립이 되었지만,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어제도 100분 토론에서 관련한 논쟁을 이어가던데, 이런 시사 프로부터 신문, 뉴스 그리고 해외 다큐멘터리도 많이 참고했다. 그러면서 나는 도대체 이 사안에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의문이 들더라. 엄청 고민했는데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럼 일단 시나리오를 한 번 써보자. 쓰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 또한 쉽지 않았다. 결국 나중에는 ‘아, 이건 나도 알 수 없겠다. 그러면 차라리 공론화를 시키자!’에 이르게 되었다.
영화를 통해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을 누군가가 한 번이라도 생각하고, 좋든 나쁘든 어떤 말이든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한다는 건 곧 내가 고민한 주제를 생각해봤다는 것이니까. 그리고 생각했다는 건 결국 내가 공론화를 시켰다는 말이니까. 그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득 궁금해진다. 항상 영화만 생각하는지? 영화가 없는 틈이 존재하는지?
항상 영화만 생각하는 건 아니다. 진짜 좋아하는 게 혼자서 격렬히 아무것도 안 하는 거다. 작업을 안 할 때는 아침에 눈 뜨고, 씻고, 나가서 혼자 카페에 가만히 앉아 있다. 진짜 밥도 안 먹고 카페에서 가만히 음악만 듣고 앉아 있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귀가 열린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이 들리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영화를 생각한다. 그때마다 영화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만 정신을 차리고 봐도 계속 생각하고 있는 거지.
앞서 영화 소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궁금해졌다. “어른들은 몰라요”가 상영될 즈음에 마침 낙태죄 폐지에 관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던 게 기억난다. 최근에는 비혼모 출산에 관한 논쟁까지. 이러한 사회 현상과 사회적 목소리를 영화인으로서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어떤 사회적 사안을 바라봤을 때, 누구는 옳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누구는 아니라고 하는데, 사실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부 다 합당하고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면을 다시 살펴보면 자기 해석이 너무 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나아가 개인의 이기심이 보이더라. 그때 ‘아! 이게 어른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어른들이 알면 도대체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공부를 잘하고, 좋은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인생을 깨닫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을 경험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처음에 생각했던 이번 영화의 로그 라인도 ‘어른들한테 끊임없이 사기를 당하는 10대 커플’이었다. 아이를 갖게 된 어린 남녀가 어떻게든 아이를 지우고자 집을 나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일종의 로드 무비를 머릿속에 그렸다. 그 과정에서 어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사기를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이게 이 영화를 처음 생각했을 때의 모습이다. 이후에 세진의 주변 인물들이 하나둘 더해지면서 스토리가 더 풍성해졌다.
그렇다면 이번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특별한 계기도 있었는지? 조금 더 개인적인 범위 안에서 말이다.
예전에 “박화영” 작품 공개와 함께 GV만 120회를 진행했는데, 언제 한 번은 청소년 쉼터에서 상담하시는 분들이 관객으로 자리에 함께해주신 적이 있었다. GV가 끝났는데도 안 가고 남아 계셔서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앞으로 10대들의 영화를 더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알고 보니 본인들도 어려운 환경에서 10대를 방황하며 보냈지만, 지금은 쉼터에서 상담을 통해 방황하는 아이들이 개선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계셨다. 사실 처음에는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그분들을 만나고 나서 마음이 움직였다. 나아가 영화에도 이런 만남과 대화에서 영감을 얻은 부분이 반영되기도 했다.
한편 이번 영화는 어떤 장르라고 해야 할까?
편집 감독님과 같이 편집하면서 이 영화는 완벽한 ‘성장 영화’라고 생각했다. “박화영”을 작업하면서도 늘 이야기했지만, 성장 영화에 관심이 항상 많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성장 영화이지만, 꼭 그 지점에 초점을 두지는 않았다. 그렇다 보니 작업을 하면서 장르가 굉장히 혼합된 영화가 될 것 같다고 어느 정도 예상했다. 여전히 헷갈릴 수 있는 지점이 많겠지만, 주인공인 세진이도, 그 옆을 지키는 주영이와 재필이도, 이외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번 영화는 성장 사회 드라마다.
“아저씨, 우리도 살아야 하잖아요”, “힘들어? 앞으로 더 힘들어”처럼 폐부를 찌르는 서늘한 대사들도 영화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리는 것 같다. 이런 섬뜩한 대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가족사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한국 사회가 지닌 모습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런 대사를 부모님들이 정말 많이 쓴다. 아무렇지 않게 한숨 쉬면서 말이다. 그런 말들을 오히려 아이들이 정말 중요한 순간에 한마디 툭 뱉는다면 어쩌면 어른들이 자신의 자화상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과연 어른은 무엇일까?
나도 나이를 먹고 있는데, 사실 진짜 모르겠다. 나 또한 내가 아는 것들 안에서만 아는 것이고, 모든 걸 이해할 수 없다. 이해가 되지도 않고. 이해한다고 하는 건 사실 이해하는 척 하는 거다. 진짜 이해하려면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 대부분은 이야기를 듣다가도 결국 자기 이야기를 해버리니까. 결국 훈수를 두는 행동이고, 이는 곧 “네가 틀렸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이 영화에서는 어른들이 몰라서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부정하고 싶은 이야기를 집어넣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의도적으로 어른들이 이해하고 싶지 않고,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배치했다. 그렇게 작품의 제목도 자연스럽게 “어른들은 몰라요”가 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번 영화를 보고서 그들이 뜨끔 하거나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거라면 반은 성공했다고 본다. 한 발 나아가서 아이들의 이야기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더욱 큰 행운이고.
전작인 “박화영”보다 주제, 내용, 장소, 인물, 관계 등 전반적으로 보편적인 색채를 띠게 된 것도 어른들이 참여하기를 원해서였을까?
많은 분들이 “박화영”을 좋아해 주셔서 정말 깜짝 놀랐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호불호가 많이 갈리더라. 어른들은 잘 보지도 못했고, 사실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더 보편적인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어른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 그런데 또 10대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환이 만드는 보편적인 10대의 이야기를 고민했을 때 모든 면에서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의 확장이 필요했다. 게다가 제목도 80년대 이규형 감독의 영화 “어른들은 몰라요”와 똑같이 붙이면서 어른들에게 조금 더 익숙하게 다가가 호기심을 끌어 영화를 보게끔 하는 의도도 있었다.
한편 영화 속에서 롱보드부터 힙합 음악까지 유스 컬처를 간접 경험하는 재미도 있던데.
원래 힙합 음악을 좋아했다. “쇼미더머니”도 시즌 1부터 지금까지 다 보고 있고. 처음 기획 단계에서 룩을 만들 때, 머릿속에서 컬러풀하고 동시에 과장되면서 왜곡된 색상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모든 음악을 힙합 장르로 설정했다. 사실 영화를 처음 시작하는 단계일 때, 브린, 재키와이, 루피, 스윙스의 노래를 정말 많이 들었는데, 운이 좋게도 브린을 소개받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만남 이후 브린이 소개해 준 프로듀서 새우와 함께 브린, 윤훼이, 오왼, 타미 스트레이트까지 모두 영화 음악 작업에 합류했다.
일명 ‘롱보드 장면’은 관객 입장에서 러닝타임 중 유일하게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었다. 영화 속 세진 또한 롱보드를 타는 순간이 가장 편해 보이더라. 스크린 너머로 삶의 의지가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하던데.
영화의 이야기를 처음 설정할 때 한창 인스타그램에서 보드 타는 영상을 즐겨봤다. 그걸 보면서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타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멋있게 보드를 타는 모습이 너무 멋있고 부럽기도 했다. 그렇게 보드를 타는 친구들이 궁금해지더라. 지역마다 스찻이 있는데, 마침 집 근처에도 있길래 찾아가서 보드를 타는 걸 가까이서 지켜봤다.
영상에서 본 것과는 다르게 실패를 엄청 많이 하더라. 멋진 기술을 익히려고 수도 없이 실패하는 걸 보면서 세진이 낙태를 시도하지만 계속 실패하는 설정이 떠올랐다. 계속 실패하고 무너지는 모습만 나오면 답답하니까 중간에 롱보드를 멋지게 타는 장면을 넣었다. 어른들 때문에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없지만, 보드를 타는 순간만큼은 세진이 어떤 의지와 해방감 그리고 자유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영화를 보면서 세진을 둘러싼 다양한 관계가 그려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원인이 되는 과거의 내용이 없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현재라는 시점에 집중한 이유가 있을까?
과거를 보여준다는 건 영화적으로 플래시백을 보여준다는 말인데, 사실 그 부분은 나와 배우들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배우들에게는 워크숍을 하면서 전사를 알려줬다. 굳이 영화에 담지 않은 이유는 과거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순간 신파극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알 수 없는 현재의 이야기를 보여줘야만 영화가 하나의 결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과거 이야기를 비춰준다면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변명하는 것으로 이해될 것 같았다. 그만큼 영화 속 감정도 한정적이고, 짧은 러닝타임 안에 모든 걸 다 보여줄 수도 없다. 대신에 이야기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를 때마다 전사에 대한 힌트를 남겨두어 보는 이가 스스로 해석할 수 있도록 했다.
앞서 말한 워크숍은 영화 제작 과정에서 통상적으로 진행하는 일인지도 궁금하다.
감독님마다 각자 스타일이 다 달라서 사실 잘 모르겠다. 나의 경우는 굳이 리딩이나 리허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리딩 단계도 시간을 계산해보려고 하는 게 전부고, 러프한 리딩도 하지 않는다. 시나리오에 관한 설명서가 있는데, 이걸 최대한 부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 작업이 바로 워크숍이다. 배우들에게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해보고 싶은 대로 표현하게 두면서 감정을 확장하는 것이다. 현장에서 이 감정을 누르기는 쉽지만, 부족해서 끌어올리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워크숍을 통해서 최대한 감정을 부풀려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표현이 나오는데, 그중에서 또 좋은 게 있으면 착안해서 시나리오에 적용하면서 함께 만들어나간다. 바로 공동창작이다.
현장 촬영 이전부터 감정을 최대치로 올려놓는 일이 배우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박화영” 때도 마찬가지고 나름의 방법으로 하는 작업인데, 사실 배우들 중에서 감정을 집요하게 다루는 걸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다. 반면에 엄청난 해방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고. 운이 좋게도 지금까지 영화 두 편을 찍으면서 후자에 속하는 배우들을 만난 것 같다.
본인 또한 이번 영화에서 ‘재필’이라는 인물을 연기했다. 워크숍과 촬영을 거치면서 어떤 점을 신경 썼을지도 궁금하다.
워크숍에서도 그리고 현장에서도 끊임없이 고민했던 건 상대성이다. 세진과 주영을 연기하는 이유미, 안희연 배우와 서로 어떤 작용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연출자임과 동시에 배우로 연기에 참여했을 때, 이들의 감정이 최대한 나올 수 있도록 긍정적 작용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한편으로는 이들이 연기하는 모든 씬을 옆에서 눈여겨보고 관찰하면서 보고 싶은 감정이 있으면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기도 했다.
이번 영화에서 처음 연기하는 것이 아니더라. 감독 이전에 배우로 활동해왔다. 현재는 배우를 겸하는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연출에 직접 뛰어든 계기가 궁금하다.
사실 영화가 미친 듯이 좋아서 시작한 건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서 출발했다. 헤어진 친구에 대한 감정을 털어내기 위해 아주 적은 예산으로 31분 분량의 단편을 찍었던 게 시작이다. 너무 개인적인 감정과 이야기였는데 관객도, 영화제도 좋아해 주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위한 단편 시나리오를 썼었는데, 친구 회사의 대표님이 영화를 찍을 수 있도록 투자해 주셨다. 그 돈에 모아둔 돈을 보태서 “집”이라는 단편을 완성했다. 운이 좋게도 국내 단편 영화제에 모두 진출하면서 지금의 장편 작업까지 확장된 것 같다.
감독 이환 그리고 배우 이환은 어떻게 다른지?
앵글 안에 있느냐 아니면 밖에서 앵글을 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긴장하고, 적당히 흥분하고, 설레는 건 똑같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영화 작업은 공동 창작이다. 감독, 배우, 스태프, 제작사, 프로듀서, 협업 아티스트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상당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작업에 임한다. 그래서일까 큰 차이를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어느덧 마지막 질문이다. “어른들은 몰라요”의 감독 이환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 그리고 무엇을 꿈꾸는지 궁금하다.
예전에 누가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때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좋은 사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막연하게. 그런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남의 말에 귀를 더 기울이고 상대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그 입장을 정말로 헤아리려고 하는 자세를 지닌 사람이 아닐까. 이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알고 싶은 좋은 어른은 아마 과거에 무의식적으로 답했던 그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