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ALIB

바이닐을 가득 담은 가방과 함께 서울 클럽 신(Scene)을 휘젓던 360사운즈(360 Sounds) 소속 디제이 말립(Maalib)이 지금 새 이정표에 서 있다. 올해 초, 레이블 비스츠앤네이티브스(Beasts And Natives Alike 이하 BANA)의 새 식구로 합류하며 프로듀서로의 방향에 확신을 얻은 말립은 최근 작업실 지박령으로 거듭나며 앨범 [Seat]를 완성했다. 주거취약계층의 자생을 돕는 잡지 빅이슈(Big Issue) 코리아의 10주년을 기념하는 이 앨범에는 삶의 여운과 공허함이 녹아있다. 긴 여운의 궤적을 쫓아 내가 도착한 곳은 말립의 작업실. 그에게 근황을 물었다.

디제이, 라디오 호스트, MC로도 알려졌지만, 사실 프로듀서로서 꾸준히 곡을 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정확히 언제부터 작곡을 시작했나?

어릴 때부터 조금씩 만들기 시작했다. 게임을 안 좋아해서 친구들이 게임할 때도 난 옆에서 음악을 만들고 그랬지. 본격적으로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때는 군대를 다녀온 뒤인 23살 무렵인 것 같다. 그러나 음악을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23살이면 360사운즈에 합류한 시기와 맞물리는 것 같다.

360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거지. 사실 디제이로서 활동할 계획 또한 전혀 없었는데 360 형들이 모두 디제이니까 어깨 너머로 지켜보다가 디제잉을 시작했다.

디제잉에 흥미가 없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360에 합류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냥 같이 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찾아갔다. 사실 난 중학생때부터 입대 전까지 계속 공장에서 일을 해왔다. 그래서 전역한 후에도 특별한 일이 없다면 공장으로 돌아가 일을 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사실 공장 일이 즐겁지 않았고, 더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 입대하게 됐다. 군대에서 360이 커버로 실린 잡지를 한 권 보게 됐고, 그들의 모습에 이끌렸다. 특별히 할 줄 아는 것은 없었지만, 친해지고 싶어서 전역 후에 무작정 찾아갔다. 그렇게 벌써 6년이 지났다.

신에서 활동하며 본인에게 영향을 준 인물이나 사건, 경험이 있다면 무엇인가.

살면서 내 인생을 몇 챕터로 나눠볼 때 크게 두 번의 중요한 포인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먼저 열여덟 살, 공장에서 김정훈이라는 친구를 만난 것. 나는 야간조였고, 김정훈은 주간조여서 서로 접점이 거의 없었는데, 어느 기회에 우연히 잠깐 얘기를 나누게 됐다. 그때 김정훈은 나에게 피쉬만즈(Fishmans)와 다양한 일본 밴드의 음악과 그들의 영상을 보여줬다. 그 음악들이 큰 자극이 됐다. 그리고 지금의 여자친구인 서지은을 만난 것. 서지은에게는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다. 또 여자친구이기 전에 멋진 디자이너고, 멋진 브랜드의 디렉터이기 때문에 존경한다. 사실은 하루하루가 사건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360에 합류한 것도 나에게 큰 사건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나의 20대는 360 그 자체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비록 360이 왕성히 활동하진 않지만,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하는 여러 가지 일들 모두 결국엔 360에서 파생된 것이라서 360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겠다.

힙합 프로듀서나 래퍼의 이름이 아닌 피쉬만즈가 먼저 호명된 것이 의외다.

굳이 하나를 정하자면 블랙뮤직이 아닌 쪽의 음악을 더 많이 듣고 좋아하기도 했다.

평소 블랙뮤직을 즐겨 듣는 것으로 알고 있고, 또한 디제이로 활동하고 있기에 샘플러, 미디, 래퍼 등의 키워드가 더 익숙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밴드 지향적인 잼 음악을 선보이는 행보가 계속 됐는데, 밴드 사운드를 고집하는 편인가?

고작 두 장의 앨범밖에 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집이라 할 수는 없다. 밴드, 라이브 음악에 힘을 싣게 된 이유는 [Sutsain]의 경우 워크맨쉽(Workmanship) 밴드와 함께한 앨범이라 밴드라는 키워드, 주제가 있었고. 이번 [Seat]의 경우는 빅이슈 판매원(이하 빅판) 분들의 이야기를 부담스럽지 않게 담아내려는 과정에서 밴드 음악으로 기획하게 됐다. 또 밴드와 함께하는 작업을 내가 좋아하기도 한다.

앨범 크레딧에 총괄 프로듀서라는 직책을 맡았다고 명시했다. 이 직책에 관해 설명을 부탁한다.

말이 총괄이지 처음 빅이슈에 제안하고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름의 정리를 하는 잡일꾼 정도라고 생각한다. 앨범에 약 20명정도가 도움을 줬는데, 나는 그들이 만들어준 양질의 소스를 정리하고 완성했을 뿐이다. 그들의 연주와 에너지 덕분에 앨범이 완성될 수 있었다고 본다.

앨범 [Sustain]은 미스치프(Mischief) 쇼룸에서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공연에서 프로듀서가 맡은 역할은?

공연에서도 역할이 없다. 사실 그 공연을 준비하면서도 워크맨쉽 밴드형들이 뭐라도 해야 하지 않냐 말했다. 물론 MPC를 들고 나가서 두들기는 퍼포먼스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지향한 밴드 사운드의 앨범을 완성했고,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억지로 퍼포먼스를 하는 것보다는 형들의 과감한 연주를 부탁했고, 난 옆에서 춤이나 추겠다고 했지. 공연을 기획하고 쇼룸을 섭외하는 등 잡일을 했으니 공연에서도 잡부였다.

올해 초에 레이블 BANA에 합류 소식을 알렸다. 합류 이후 어떤 것이 바뀌었나?

그냥 기분이 좋아졌다. BANA는 언제나 멋진 레이블이었고, 그래서 그들과 함께하는 일은 즐겁다고 생각했다.

BANA와의 계약 과정을 돌아보자면?

계약 이야기가 오간 뒤로 사인까지 1년 정도 걸린 것 같은데, 그동안 회사와 공감대가 생겨 정이 더욱 두터워진 것 같다. 사실 그동안 여러 회사에서 몇 번의 제안을 받았지만,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BANA는 대표님께 들은 이야기가 와닿았다. 대표님은 BANA가 실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음악은 개인의 취향이니까 누군가에겐 별로인 작업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본인에게 실수인 앨범은 없다고 했다. 근데 내가 실수가 될 수도 있다.

이제 최근 공개된 앨범 [Seat]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어떻게 기획된 앨범인가?

빅이슈 코리아 10주년을 기념하는 노래 한 곡을 같이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가 빅판 네 명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모두 담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결국엔 일곱 트랙이 수록된 앨범으로 탄생했다.

작사, 작곡에 모두 참여했는데, 앨범 작업은 어떻게 진행됐나?

우선 순서상으로는 빅판 선생님들께 일정한 주제를 던져드렸고, 장황해도 상관없으니 그 주제에 맞는 글을 부탁했다. 글을 수집한 후에는 앨범에 가사로 담을 수 있는 내용을 추려서 가사를 완성했다. 또 두 곡 정도는 과거에 작업했던 트랙이다. 이를 테면 첫 번째 트랙 “빛 봄”의 경우는 아버지 생신 선물로 만들어 드린 트랙이다. TMI로 아버지 존함이 빛 광(光)에 봄 춘(春), 광춘이시다.

많은 세션이 참여했다. 섭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섭외했나?

라이브 연주의 에너지가 빅판의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지 않을까 생각해서 밴드 세션으로 앨범을 기획하게 됐다. 섭외 과정은 늘 무작정 연락을 넣는 식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처음 인연을 맺은 뮤지션도 있다. 첼로 연주를 제공한 조지(Geor ge)는 내가 일하고 있는 레스토랑 소금집의 대표다. 심지어 당시에는 내가 일한 지 불과 한 달도 안 됐을 시점이었고, 감히 부탁드리기 힘든 존재이기도 했지만, 그가 밴드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제안했다. 다행히 흔쾌히 수락했다. 또 앨범 내에서 많은 부분을 참여한 주럼퍼그(Zoorumpug), 박준우, 구형준에게 역시 무작정 부탁했다. 주럼퍼그와 알고 지낸 것은 오래됐지만, 그다지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는데, 이번 앨범을 제작하며 거의 매일 만나게 됐지. 그렇게 많은 인원이 함께한 앨범인 덕분에 내가 지닌 감성 외에 다양한 감성과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다.

BANA를 통해 공개된 앨범은 아니지만, 레이블의 도움도 많았을 것 같다. 어떠한가?

물론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내가 전혀 모르는 부분인 유통 부분에서 특히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 혼자선 절대 그렇게 못 했을 거다.

네 명의 빅판이 참여했는데, 말립은 오현석 빅판과 특히나 돈독한 정을 쌓은 듯했다.

오현석 선생님과는 10년 전에 처음 만났다. 10년 동안 꾸준히 친분을 다져온 것은 아니지만, 가끔 빅이슈에서 진행한 홈리스 월드컵이나, 여러 가지 빅이슈 행사에서 인사를 건넨 사이다. 그래서 마지막 트랙에 반드시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빅이슈 코리아에 앨범을 제안할 때도 오현석 선생님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기획한 대로 앨범이 진행된 것 같아서 다행이다.

한겨레 기사에서 오현석 빅판이 직접 밝히길, 글재주가 없는 편이라 했다. 그래서 가사를 쓰지 못했다고 했는데, 실제 앨범에는 그의 영향이 지대한 것 같은데?

글을 받긴 했으나 늦게 받았다. 비록 가사로 바꾸지는 못했지만, 대신에 “9시부터”라는 곡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9시부터”라는 곡은 오현석 선생님이 퇴근하는 풍경을 상상하고 제작한 트랙이다.

앨범 작업은 오래 걸린 편인가?

막상 곡을 만드는 속도는 빠른데, 구상 단계에서 시간을 많이 소모하는 편이다. 특히 이번 [Seat]를 구상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아무래도 내 이야기가 아닌 빅판 선생님들의 이야기라서. 또 그 이야기를 어떻게 더 멋있게 담아낼 수 있을지 고민하다보니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그림이 그려진 이후에 막상 움직인 단계에선 두 달 만에 앨범이 제작된 것 같다.

말립은 송영남의 [Joshua]에 내레이션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의 음악에는 목소리를 넣지 않는다. 직접 마이크를 잡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앞서 말했듯 앨범을 기획하고 여러 사람을 모아서 그들의 목소리와 감정을 싣는 데 흥미를 느끼는 편인 것 같다. 그리고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뛰어난 목소리를 지닌 분들은 많다. 그러니 내가 참여해서 앨범을 망치는 방향보다 남들의 목소리를 담는 편이 더 나은 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마이크는 중학교 때 몇 번 잡았다. 하하.

앨범 제목인 [Seat]는 어디서 시작됐고,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앨범을 마무리하는 단계까지도 제목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빅이슈 코리아 창간 10주년’이라는 제목을 걸기엔 아쉽고, 그렇다고 거창한 이름을 걸기도 싫었다. 그러던 중에 프로듀서 250이 대뜸 ‘Seat’라는 이름을 떠올렸다고 말하더라. 이유는 주거취약층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공통으로 할 수 있는 행위가 앉기인 것 같았다고. 난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노숙 생활을 경험해본 분들과 그렇지 않은 분들이 공통으로 향유할 수 있는 음악, 그리고 5, 60대의 이야기를 담자는 취지에 [Seat]가 적합한 제목인 것 같았다.

[Seat]의 수록곡 “집으로 오는 길”에 등장하는 캘리그래피에 관한 이야기도 부탁한다.

그건 [Seat]라는 제목으로 확정된 후에 문영수 선생님께 자필을 부탁한 것이다. 문영수 선생님은 취미가 캘리그래피다. 가끔 잡지에 직접 그린 캘리그래피를 끼워 팔다 보니 팬들도 생겨나는 추세라고 하더라.

싱글 트랙으로 기획됐다가, 결국엔 일곱 트랙을 수록한 앨범으로 프로젝트의 볼륨이 커졌다. 그 과정을 돌아본다면?

10년의 숙원 사업을 해결한 것 같은 느낌이다. 앨범 준비는 5월부터 시작했지만, 그전부터 인연을 쌓고 함께 뭔가 해보고 싶은 욕심이 계속 있었는데, 이번에 [Seat]를 제작하며 그 갈증이 해소된 것 같기도 하다.

앨범을 자평할 때 만족하는 편인가?

만족도 부분은 최상이라 이야기하고 싶다. 음악적으로 부족한 것이 많을지언정, 선생님들이 제공해주신 멋진 글과 이야기를 최대한 필터링 없이 담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또 그런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다는 점에서 스스로 최상의 만족을 하고 있다.

빅이슈 코리아 창간 소식을 접하고, 사무실을 직접 찾아간 것이 인연의 계기로 알고 있다. 고3의 고재경은 당시 무슨 생각으로 빅이슈를 찾아갔는가?

그냥 빅이슈 창간 소식이 재밌고 흥미로웠던 것 같다. KBS 다큐멘터리 “감성다큐 미지수”라는 시리즈에서 빅이슈가 소개된 것을 봤고, 내가 할 수 있는 뭐든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찾아갔다. 또 이게 대학 진학의 계기가 됐다.

최근엔 디제이로서 활동이 줄었다.

사실 디제잉을 안 하려고 한다. 최근 행사 섭외 연락이 왔지만, 그것도 거절했다.

디제잉을 그만둔 이유는?

난 한창 많이 틀 때는 하루 일곱 번도 틀었다. 근데 사실 그렇게틀다 보면 일곱 번의 세트가 모두 다를 수 없고, 겹치는 세트가 생긴다. 변명일 수도 있지만, 바이닐로 플레이하다 보니까 다른 매체를 이용해서 플레이하는 디제이에 비해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세트를 청중에게 들려주는 일에 창피함을 느꼈다. 좀 더 일찍 느꼈어야 했다. 만약 현장에서 창피함을 빨리 느꼈다면, 잠시 디제잉을 중단한다거나, 세트를 좀 더 준비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거쳤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또 그렇게 소비되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고, 무뎌진 것을 뒤늦게 인식했지. 그래서 클럽이 어색해지기도 했다.

본인의 음악에 집중하는 지금의 행보는 그 창피함이라는 감정에서 시작된 것인가?

아니다. 이제 와서 웃긴 얘긴데, 난 나를 디제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디제이로 소개되는 자리도 많았지만, 난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항상 프로듀서라 소개해왔다. 언제나 음악을 만드는 게 좋아서 난 스스로 디제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디제이는 나에게 너무 높은 영역인 것 같았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변한 것이 있다면?

금전적인 면이 힘들어졌다. 그리고 좀 더 일찍 자게 된 것? 밤에 생활하지 않고 공교롭게도 디제이를 그만둔 시기와 겹치기도 해서 밤에 갈 곳이 전혀 없었다. 한창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릴때는 10시 넘어서는 갈 곳이 없어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기도 했다.

레스토랑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까 소금집이 잠시 언급되기도 했는데.

소금집에서 일한 지는 6개월 정도 됐다. 그동안은 운 좋게도 매주 베뉴에 초대받고, 플레이가 잡혀서 시간을 내지 못했는데, 이제는 시간이 좀 생겼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요리를 배우고 자격증도 준비하고 있다.

평소 부친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주 노출하는 것 같은데, 부자의 친밀한 관계가 인상적이었다.

평범한 부자지간이다. 하하. 여느 가정 역시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보이지 않는 기류가 어느 정도 있지 않나. 우리 부자 역시 그런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있다.

앞선 질문에 이어 개인적인 영상 프로젝트 “Father – As Himself”의 클립을 하나씩 유튜브 계정에 올리고 있는데, 이것은 어떤 의도에서 출발한 기획인지 알려줄 수 있나?

작년 아버지가 퇴직하면서 집에 계시는 시간이 많아지고, 이때 아버지와 함께 재밌는 무언가를 만들어 보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겸사겸사 추억으로 “Father – As Himself” 시리즈를 나름대로 진행하고 있다. 사실 아버지가 고생을 많이 하고 자란 편이라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번 쭉 정리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정리하는 기분으로 시리즈를 즐겁게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 영상을 올려도 몇만 명이 보는 것도 아니고, 내 주변 사람들이 볼 테니까 서슴없이 다뤄도 재밌겠다 싶었지. 요즘엔 아버지가 더 즐거워하는 편이다. 처음 두 편까지는 고생한 시절이 떠올랐는지 많이 울었는데, 요샌 되게 즐기고 있어서 언제 또 찍냐 물어보기도 한다. 나 역시 나름 기다려지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많이들 봐줬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나 감정 또는 예기치 못했던 순간이 있다면 말해 달라.

몰랐는데, 아버지가 남들에게 드러나는 일을 나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부전자전이라고 나 또한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하는 타입이 아니다. 아버지는 영상에 어떻게 찍힐지 욕심도 있다. 이제 몇 번 촬영하다 보니까 본인이 어떻게 나오는지 딱 아는 것 같았다. 촬영 구도를 신경 쓰기도 하시고.

유튜브의 시대가 열리며 너도나도 일상을 공개하는 추세다. 영상으로 그런 시리즈를 남기는 일이 마냥 쉽지만은 않을 것. 더욱이 5, 60대에겐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렇지. 아버지 자신도 글로 자신의 삶을 적어보면서 나름대로 정리하는 것 같고 그래서 아버지 본인에게는 자서전의 개념이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든다. 지금은 촬영이나 편집 모두 열악한 퀄리티의 영상이지만, 나중에 좋은 기회가 된다면 영상을 하나로 묶어서 아버지께 드리고 싶다. 헌정의 느낌으로.

친숙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대상, 즉 말립의 아버지와 빅판이라는 공통분모에서 느낀 게 있다면 무엇일까?

확실히 그 연령대의 남자들에게 느껴지는 공통적인 정서가 있는 듯했다. 허무함 같은 감정이라고 해야 할까? 한 단어로 표현하기가 되게 어려운 것 같다. 열심히 이것저것 다 해봤는데 크게 남은 것은 없고. 결국 거기서 느껴지는 무언가? 재산의 유무나 어떤 환경에서 자라오고 그런 것과는 별개로 그 나이대 사람이 느끼는 허무함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도 처음 퇴직하고 나서 우울감을 느꼈던 거 같다. 그래서 위로해드릴 겸 영상을 같이 해보고 싶었고. 요즘엔 집에 노래방 기계를 하나 장만해드렸는데, 그걸로 노래 연습도 하신다.

훗날 아버지와 함께한 앨범을 기대해도 될까?

원래는 아버지와 앨범을 만들고 있었다. 앞서 말했지만 [Seat]의 1번 트랙 “빛 봄”은 아버지를 위한 힙합 비트의 곡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랩 겸 내레이션하는 곡을 만들려고 네, 다섯 곡을 묶어서 정리해놨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좋은 시기를 봐서 공개하고 싶다.

말립의 향후 계획은?

우선은 남은 2020년을 잘 마무리하고 싶고, 내년 봄 중으로 1집 앨범을 기획하려고 한다. 거기에 매진하지 않을까. 또 올해 꼭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로 책을 한 권 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내년에는 좀 더 정리해서 책을 발간하고 싶다.

무슨 장르의 책을 쓰고 싶었나?

판타지 소설이다. 고등학교 때 한 권 발간한 이후에도 글을 꾸준히 썼고 이제 다듬기만 하면 된다.

1집 앨범은 어떤 앨범일까?

그냥 힙합 앨범이겠지?

지금까지 본인의 음악은 힙합 장르였다고 생각하나?

당연하지. 내가 힙합인데. 최근에 빅이슈 코리아 10년을 정리하며 나의 10년도 함께 정리했다. 내가 10년 전에 좋아했던 음악이라든지 그렇게 되짚어가면서 그때 좋아했던 멋진 힙합을 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시지나 메타포는 일단 뒤로하고 그냥 멋진 힙합. 일단 하나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건 되게 멋진 아티스트와 함께 작업하게 됐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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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황선웅
포토그래퍼│백윤범


*해당 기사는 지난 VISLA 매거진 종이잡지 14호에 실렸습니다. VISLA 매거진은 VISLA 스토어에서 구매하거나 지정 배포처에서 무료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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