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훈

조광훈은 한국의 스케이터다. 그는 1997년부터 지금까지,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다양한 세대와 섞였다. 많은 스케이터가 뛰어들고 또 사라진 한국 스케이트보드 신(Scene)의 우여곡절을 지켜보며 그는 어른이 되었다. 2015년, 조광훈은 선택의 기로에서 스케이트보딩을 택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난 뒤 스케이터들의 아지트, 데일리 그라인드(Daily Grind)에 끈질기게 물을 준 지 6년째. 몇 명 남지 않은 동년배 친구부터 조카뻘 되는 동생까지, 어느덧 늘어난 동료들과 함께 그는 스케이트보드 문화의 꽃을 피우기 위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처음 조광훈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시기는 2005년 무렵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당시 위플런스(WYfluence)와 스턴트비(Stunt B)라는 두 팀이 마치 서울의 스케이트보드 신을 양분하는 모양새였는데, 그 시절의 이야기를 좀 들려줄 수 있을까?

당시에는 아닌 척을 많이 했지만, 사실 라이벌이었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스턴트비는 백승현 스케이터를 중심으로 뭉쳤고, 위플런스는 이원석, 김용민 스케이터가 주축이 된 팀이었다. 이원석과 김용민, 그 둘의 이니셜 W, Y를 결합해 ‘WYfluence’가 됐다. 두 팀은 스타일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위플런스는 당시 DGK를 비롯한 샌프란시스코 스타일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힙합 문화와 연결된 요소가 많아서 옷을 크게 입거나 헤어스타일도 주로 삭발하는 식이었다. 반면에 스턴트비는 당시 소위 마이클 잭슨처럼 통이 좁은 바지를 입는다고 해서 명명한 ‘잭슨(Jackson)’, 지금은 ‘해쉬(Hesh)’라고 부르는 스타일이었는데, 핸드레일이나 계단 같은 걸 주로 타고 음악도 메탈이나 펑크 록 장르를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보드를 잘 타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 두 팀에 몰려있다 보니 대회나 행사가 열리면 암묵적인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테크닉을 베이스로 하는 위플런스의 스타일은 스케일, 직선적인 스케이팅을 추구하는 스턴트비와 경쟁적인 대비를 이뤘다. 항간에는 두 브랜드가 라이벌 이상으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까지 돌았는데, 사실인가?

제삼자가 봤을 때 비프(Beef)가 있다고 볼 만큼의 구도가 형성됐던 거 같다. 다만 위플런스는 각자 알아서 연습하고 좀 더 같이 어울리고 노는 크루의 개념이었다면, 스턴트비는 백승현이 중심이 되어서 강한 동기부여와 훈련을 강조하는, 마치 스포츠 팀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마치 90년대 동부, 서부 힙합의 역사를 전해 듣는 기분이다. 지금에 와서는 그 두 스타일이 어느 정도 절충된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굳이 그걸 구분한다기보다는 좀 더 복합적인 양상을 띠는데, 그 시절만 해도 매뉴얼이나 테크니컬한 트릭에 집중하는 스케이터가 있다면 반대로 핸드레일이나 계단 같은 걸 미친 듯이 뛰는 스타일이 있다든지 한 가지만 고집하는 이들이 많았다.

마치 한국의 드림팀 같았던 위플런스 활동이 개인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당시 위플런스라는 이름만으로도 자부심이 생겼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스케이터가 모인 팀이었고, 다들 멋있었다. 그래서 나 또한 위플런스라는 팀의 스타일에 맞추면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다.

2005년 데뷔 파트 “Chicken Run”, “Frizizer” 등에서 보여주었던 매뉴얼(Manual), 렛지(Ledge)와 플립(Flip)을 곁들이는 테크니컬한 스타일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당시 가장 많이 연습한 트릭은 무엇인가?

당시에 플립 투 렛지(Filp to ledge) 류의 기술을 많이 연습했다. 특히 킥 플립(Kick Flip), 널리 플립(Nollie Flip)을 많이 했는데, 그러다 보니 플립해서 렛지에 거는 트릭에 관한 요령이 금방 생겼다.

반면에 끝끝내 시도해보지 못하거나 성공하지 못한 기술도 있는지.

그때는 계단이나 허바(Hubba)처럼 스케일 있는 트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게 위플런스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좀 더 테크니컬하고 섬세한 기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Chicken Run”을 찍을 당시에는 무조건 100% 이상을 발휘할 수 있는 고난도의 트릭을 시도하자는 형들의 요구를 반영해서 반강제적으로 타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스케이터로서는 큰 도움이 됐다.

1997년부터 스케이트보드를 탔다. 한 시기에 보드를 잘 탄다고 소문난 사람은 많아도 국내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꾸준하게 보드를 탄 스케이터는 찾아보기 드문 거 같다. 믿기 힘들지만 지금은 2021년인데, 지금 보드에 발을 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2~3년 전까지만 해도 오늘은 뭘 해보고, 뭘 남기자, 하는 마음가짐이 있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발목이 안 좋아지면서 많이 내려놓았다. 기술에 포커스를 맞춰서 탄다기보다는 그날의 컨디션에 초점을 둔다. 늘 하던 트릭도 왠지 무서운 기분이 들면 그 기술을 시도하지 않는다. ‘무사히 보드 타고 돌아가자’ 정도의 마인드다.

최근에는 어떤 트릭에 집중하고 있나?

근래에는 특정한 트릭을 마스터하려고 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발목을 회복하는 일이라 세 달 정도는 쉬어야 할 거 같다. 그때까지 보드를 타지 않는 건 힘들지만.

Ph. Nakshot / (2014)

2009년 초반 뉴욕 여행을 기점으로 스케이팅 스타일이 매우 심플해졌다. 이전의 테크니컬한 스타일을 그리워하는 스케이터도 많을 텐데, 그곳에서 어떤 영향을 받은 건가?

미국 내 다른 지역, 다른 나라도 가봤지만, 지금까지 내게 뉴욕만큼 큰 영향을 주는 곳은 없었다. 일종의 뉴욕병이다. 뉴욕이라고 한다면 보통 빼곡한 건물과 거친 질감의 도시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스케이트 스팟 역시 거칠고 빡셌다. 서부와 완전히 다른 뉴욕 스타일에 빠진 거지. 그때부터 뉴욕 비디오를 많이 찾아봤다. 그 무렵 일본에서 “Lenz”라는 스케이트 비디오가 탄생했는데, 미국 동부의 스케이팅에 큰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자신들의 색깔로 완성했다는 점이 보기 좋았다. 나 역시 그 뒤로 한국에 돌아와서는 스케이트를 타기에 너무 편한 광장 같은 곳이 아니라 골목길이나 알려지지 않은 스팟들을 찾아다녔다.

뉴욕에서 만난 스케이터들에 관해 더 묻고 싶다. 비디오에서 본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그들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무엇인가.

나는 뉴욕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폴 로드리게즈(Paul Rodriguez), 로드리고 TX(Rodrigo TX)와 같은 기계적이고 테크니컬한 스케이터들을 좋아했지만 뉴욕에 다녀오고 난 뒤로 많이 변했다. 다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보드를 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나만 혼자 느리더라고. 그곳에는 단순한 기술을 해도 멋지게 타는 친구들이 많았다. 똑같은 기술이어도 그 친구들이 타면 그라인드 소리가 달랐다. 속도와 소리가 주는 임팩트. 별거 안 해도 존나 멋진 것. 그들과 함께 타다 보니 어느 순간 나도 빠르게 타고 있더라.

다시 뉴욕에 가고 싶지는 않나?

사실 큰 영향을 받긴 했지만, 너무 빠르게 향수병이 찾아왔다. 3주가 지나자 한국의 모든 것이 그리웠다. 가족, 친구들, 음식. 그때 나는 외국에서 못 살 팔자라는 걸 깨달았다. 음식도 물리고 돈도 없어서 한인 마트에서 산 카레와 짜장을 한 솥에 끓인 뒤 3일씩 번갈아 먹곤 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가는 날만 기다렸는데, 막상 돌아오니 뉴욕이 또 그립더라고. 그렇게 끙끙 앓다가 신혼여행을 뉴욕으로 갔다. 그때는 보드를 타지는 않았지만, 뉴욕의 정취를 느끼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스케이트보딩의 올림픽 종목 지정, 코로나 19 발생 이후의 타임라인에서 전 세계뿐 아니라 국내 스케이트 신 역시 외양적으로 보면 분명 규모가 커진 인상이다. 스케이터로서 실제 필드에서 느낀 변화라면?

스케이터 인구도 늘어났고, 산업의 규모도 커졌다. 갑자기 수요가 늘어나니 스케이트보드 숍의 경우 데크나 컴플리트 물량 수급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은 적도 있다. 데일리 그라인드 역시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근 1~2년간 순식간에 늘어났다. 요즘 파크에 나가면 스케이트 강습을 받는 아이들로 바글바글하다. 사실 스케이터가 국내에서 스케이트보드로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 강습 요청이 많으니 다들 전에 없던 돈벌이가 생겼다. 개인이 운영하는 스케이트 파크도 많이 생겼고, 학부모 연령대도 젊어지다 보니 코로나 팬데믹 사정에 맞물려 개인이 즐길 수 있는 레포츠 같은 형태로 아이들을 보내는 것 같더라고. 마치 옛날 태권도장, 미술 학원 등록하듯이.

약 10년 전과 비교하자면 지금 스케이트보드 시장은 작은 로컬 스케이트 숍도 늘어났고, 스케이트보드 강습을 배우는 아이들과 스케이트보드 파크 또한 그 수가 많아졌다. 이것이 신이 성장하는 다음 계단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나? 패션 브랜드가 계속해서 스케이터를 찾는 일과는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

오랫동안 국내 스케이트 신에 있으면서 급물살이 들어왔다 훅 빠지는 걸 몇 번 봤던 터라 코로나 시기와 맞물린 현재의 흐름도 조금은 불안하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 세대는 단순히 유행하는 스포츠가 아니라 문화가 내포하는 쿨한 요소들까지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과거의 경우와는 다르게 좀 더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 같기도 하다.

근래에는 부모의 지원 아래 차근차근 스케이트보딩을 배워나가는 ‘선수 육성’으로서의 스케이트 신 분위기도 느껴지는 것 같다.

긍정적으로 보는 동시에 내가 걱정하는 부분이다. 경쟁 같은 요소를 내포한 스포츠로서의 스케이트보딩 또한 결국에는 스케이트보딩의 한 부분일 뿐인데, 이것을 문화의 전부라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우리가 좋아하던 스케이트보딩의 쿨한 매력들은 도외시되겠지. 이 문화가 멋진 이유는 단순히 어려운 트릭을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지 않나.

물론 여기에는 스케이트보딩의 대중화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존재하지만, 이러한 경향을 지닌 세대가 지배적으로 신을 점유한다면 스케이트보딩이 지닌 문화적인 특성 ─ 스트리트 스케이팅, 호미 문화처럼 흔히 서브컬처의 특수한 성격으로 느껴지는 것들 ─ 이 제거된 기형적인 형태로 자리 잡을 우려도 있다.

만일 정말 그렇게 된다면, 아마 스포츠처럼 정해진 구역(파크)에서만 보드를 타고, 대회에서 승리하는 일이 진정한 스케이트보딩의 의미처럼 받아들여지겠지. 물론 경쟁과 같은 스포츠적인 요소는 실력을 높이는 데 훌륭한 동기부여가 되지만, 이러한 측면만 강조하다 보면, 스케이트보드의 원초적인 즐거움은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어려운 문제이긴 한데, 스케이트보딩 자체가 서핑을 하던 사람들이 길거리에서도 비슷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만든 문화 아닌가. 친구들끼리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보드 타고 어울리고, 술 마시고 떠들기도 하면서 노는 것들이 배제된다면 그것은 재밌고 쿨한 문화로 발전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매체의 입장에서 두 가지 방향성 모두를 균형감 있게 조명하려고 한다.

많은 세대와 함께 땀을 흘렸다. 지금 한창 에너지 넘치는 젊은 스케이터 그룹과 본인 세대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이전에는 스케이트보딩을 접할 수 있는 매체나 플랫폼이 희귀했다. 나는 인터넷이 막 보급되었던 PC통신 시대에서 자랐기 때문에 스케이트보드 비디오를 지금처럼 쉽게 볼 수 없었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만큼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소비할 수 있는 매체가 없었지. 스케이트 숍에 새 비디오가 들어오면 보드 타러 가기 전에 먼저 들러서 물건은 사지 않더라도 비디오는 꼭 챙겨보곤 했다. 테이프로 비디오를 녹화한 다음에 좋아하는 트릭을 계속 리와인드해서 돌려봤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불편한 방식이다. 지금은 사실 유튜브에 ‘How to’만 쳐도 모든 내용이 나오지 않나.

또 하나는 ‘형’ 문화가 많이 희미해졌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한 살 차이의 형도 정말 무서웠다. 형, 동생 사이에 때리는 일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으니까. 지금은 한두 살 차이는 그냥 말 놓고 서로 욕하고 놀더라. 또 하나 한국 스케이트 신에서만 느껴지는 기이한 현상은 세대가 중간중간 끊어졌다는 점이다. 보드 타는 연령대가 몇 년씩 비어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에티켓이나 매너 같은 것들이 실제 잘 전달되지 않을 때가 많다. 서로 부대끼면서 알려주고 느끼고 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웠지. 물론 아는 애들은 또 다 알지만.

지금 주목하는 국내 스케이터들을 몇 명 소개해줄 수 있을까?

요즘은 중학생들이 가장 뜨겁다. 너무 많아서 따로 이름을 거론하진 않겠다.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느는 것을 보면, 이 친구들이 빨리 성인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경쟁 분위기가 심화되는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다. 적당한 경쟁은 실력 향상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과도한 경쟁에 지쳐 그만두는 친구들도 많이 보았다. 스케이트보드는 승리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이기는 것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법을 먼저 깨달았으면 하고, 그 중심에는 강사나 형, 누나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스타그램 플랫폼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스케이터 역시 인스타그램을 타겟팅한 클립들을 뽑아내고 있다. 다만 비교적 시간과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하는 풀렝스(Full-Length)나 개인 파트를 온전히 만드는 일에는 전반적으로 소홀해진 분위기를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완전히 부인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제대로 할 친구들은 다 하고 있다. 보드를 빡세게 타는 스케이터들은 인스타그램에 인스타그램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이 생기면서 자신을 보여주는 방법도 다양하고 쉬워졌으니 당연한 변화가 아닐까 싶다. 과거에는 인스타그램은커녕 스마트폰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조건 개인 파트를 만들어야 했다. 그때 당시에도 설렁설렁 타던 친구들은 인정을 받지 못했고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다. 결국 할 놈은 다 한다. 최유진, 은주원 같은 친구들을 보면 인스타그램도 즐기지만, 그 뒤에서 훨씬 더 많은 노력을 쏟는다.

스케이트 비즈니스를 하는 브랜드 또한 보수적인 편이라 인스타그램 하입(Hype)으로만 스케이터를 판단하지 않는다. 팔로워나 조회수 외에도 프로 스케이터로서의 조건을 깐깐하게 따지기 때문에 자신이 스케이트보딩에 제대로 뛰어들 마음이 있는 스케이터라면, 인스타그램으로 승부를 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송(Hyun Kummer) 같은 경우에도 처음에는 인스타그램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결국 자신의 파트로 증명했다. 그 뒤에는 물론 엄청난 노력이 뒷받침했겠지.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한 스케이터들에게는 언제나 각종 패션 브랜드가 러브콜을 보내왔다. 그만큼 스케이트보딩이 지닌 매력이란, 패션 장르에서 탐내는 성질의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스케이트보딩을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릴 수 있는 매개체라고 느낀다. 다만 그러다 보니 이상한 사람들도 많이 튀어나온다. 스케이트보딩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도 자기 브랜드를 속된 말로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해 무작정 스케이터를 써먹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요즘에는 스케이터 사이에서 트레 플립(Tre Flip-360 Flip)만 돌려도 협찬받을 수 있다는 둥 우스꽝스러운 말이 돈다. 그런 장사치들도 문제지만, 스케이터 또한 자신의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길 기회라고 생각한다. 결국 자신의 선택 아닌가. 브랜드나 기업이 자신을 스케이터로서, 한 명의 인격으로서 존중하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면 바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 같다. 물론 상호존중의 협업, 협력은 물론 언제나 좋은 일이다.

스케이트보드 커뮤니티의 성격이 강했던 데일리 그라인드가 본격적인 웹 매거진, 온라인 스토어 플랫폼으로 탈바꿈할 때 기존의 운영자 이원석과 함께 공동대표의 자격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데일리 그라인드에 뛰어든 계기는 무엇인가?

3년 정도 회사에 다녔는데, 도저히 못하겠더라고. 지금에 와 돌이켜보면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 것 같다. 회사에 다닌 지 3년쯤 됐을 때 마침 이원석 또한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던 참이어서 서로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다. 장황한 계획이나 비전을 세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볼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아마 2015년 12월 즈음이었는데, 퇴사하고 나서 바로 다음 주부터 데일리 그라인드를 시작했다.

순수한 스케이터로서 신을 만들어나갈 시절과 비교했을 때 업계에서 클라이언트와 일을 진행하며 데일리 그라인드를 운영하는 책임감의 무게에는 실제 큰 차이가 있을 거 같다. 금전적인 고충을 겪고 힘든 시간을 이겨냈다는 사실은 자명해 보이는데, 이에 관한 본인의 경험을 들어보고 싶다.

우리가 처음 웹 매거진, 스토어를 런칭했을 때만 해도 단순하게 생각해서 기사를 보러 온 독자들이 스토어에서 다 물건을 살 줄 알았다. 근데 안 사더라고. 매거진을 통한 전문적인 광고 모델을 만든 때도 아니었고, 콘텐츠 제작으로도 수익이 나지 않아서 꽤 고생했다. 정말 돈 꼬라박으면서 했지. 첫 1년이 가장 힘들었다. 그러다 2년 차에 디키즈 874가 급 유행을 타면서 숨통이 트였다. 하루에도 몇 십장씩 나갔지만, 이 유행도 딱 1년 가더라고. 그렇게 874를 1년 팔면서 버티고, 그 뒤로는 콘텐츠, 이벤트로 수익 모델을 조금씩 만들었다.

힘들었던 사업의 출발점 이후로도 계속해서 데일리 그라인드를 지탱한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나?

나는 특별히 먼 미래를 고민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뭐 어떻게 하다 보면 되겠지, 정도의 마인드로 해왔다. 지금에 와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정말 데일리 그라인드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다짐 같은 게 생겼다. 나는 언젠가 한국에서도 스케이트보딩이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믿는 편이다. 그때까지 한번 붙들고 가보는 거지. 그런 날이 온다면 정말 기쁠 테니까.

2018년을 기점으로 데일리 그라인드를 함께 운영하던 이원석과 결별했다. 그때 또 데일리 그라인드에 분기점이 온 것 같은데, 당시의 기억을 말해줄 수 있나?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동업자로서 자주 부딪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개인적인 감정까지 악화되었다. 그러다 서로 지친 거지. 데일리 그라인드는 애초에 이원석이 만든 플랫폼이었지만, 그가 나간 뒤부터는 내가 콘텐츠와 스토어 모두를 맡아서 했다. 이제 내가 안 하면 아무도 없으니 미친 듯이 할 수밖에 없었다.

스케이트보드를 좋아하는 많은 팬이 데일리 그라인드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에게서 어떤 의견들을 수렴하고 어떤 방식으로 발전 방향을 고민하는가?

혼자 데일리 그라인드를 꾸려나가는 데는 분명 한계점이 있다. 지금도 새로운 친구들을 찾고 있고, 새로운 세대와 함께 데일리 그라인드를 만들고 싶다. 올해 하반기부터는 나도 팀 멤버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설 계획이다. 또한 단순히 스케이트보드 필름, 콘텐츠 외에도 스케이트보딩과 관련된 시의성 있는 주제들을 다뤄보려고 한다.

데일리 그라인드를 홀로 짊어지게 되면서 세운 목표, 또는 오랜 시간 데일리 그라인드를 운영하며 지속적으로 마인드 컨트롤한 내용이 있다면?

데일리 그라인드의 궁극적인 목표 중 첫째는 스케이트보드로부터 비롯된 다양한 문화를 알리는 것이다. 같은 판때기여도 각자 추구하는 기술이나 스타일, 패션, 즐겨 듣는 음악도 다르다. 이처럼 스케이트보드에서 파생한 수많은 갈래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둘째는 스케이트보드가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릴 때 자전거를 배우고 나이 들어서도 타듯이, 자연스레 스케이트보드를 접하고 언제든 즐길 수 있도록, 사람들의 삶 속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 셋째는 스케이트보드를 통해 먹고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현재 스케이트보드로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은 거의 강습뿐이지만, 언젠가는 스케이트보드를 통해 다양하고 안정적인 경제활동이 가능하도록 만들고 싶다.

사실 데일리 그라인드를 하기 전에는 미래 계획이나 삶에 책임감이 없었다. 그러나 이걸 운영하면서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정신 바짝 차리고 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일에 대한 책임감은 곧 내 인생에 대한 책임감이며, 데일리 그라인드 운영에 더욱 매진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과거에서부터 독립적인 한국의 스케이트보드 브랜드를 향한 움직임은 간헐적으로 생겨났다. 그러나 그 행보를 지속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처럼 보였는데, 스케이트 신의 덩치가 더 커진 만큼 새로운 세대가 일으키는 독자적인 스케이트보드 팀, 브랜드를 고대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단순히 스케이트보드 실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에비센(Evisen Skateboards)의 대표인 카츠미 씨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자기는 일주일에 한 번 타는 것도 힘들다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쉴 틈 없이 일한다고 했다. 이처럼 자기 브랜드를 꾸려나가려면 끈기와 책임감이 필요하고, 과감히 포기해야 하는 것도 생긴다. 현재로선 눈에 띄는 친구는 없다. 그러나 지금 한국 신의 주축이 되는 친구들이 자란 뒤에 스케이트보드 외 다양한 문화를 경험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결혼이 스케이트보딩과 데일리 그라인드 운영에 미친 영향이라면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 인생에 대한 책임감을 더욱더 단단하게 해 주었다. 반면에 스케이트보딩은 조금 내려놓았다. 물론 몸 상태의 이유도 있지만, 지금의 나는 스케이트보드보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스케이터로서 커리어가 끝난 뒤의 삶’이라는 젠켐 매거진(Jenkem Magazine)의 에세이를 ‘땡큐 젠켐(Thank You Jenkem, 젠캠 매거진 국내 번역 웹사이트)’을 통해 읽었다.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젊음을 불사르던 스케이터들이 곧 맞닥뜨리는 현실의 벽이란 국내 스케이터들의 사정과도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주변 친구들, 신을 떠난 사람들, 어린 동생들을 보면서 복잡한 감정이 들 법도 한데 이와 관련한 코멘트 부탁한다.

스케이트보딩이 끼니를 해결해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미국에서도 수많은 프로가 데뷔하고 사라진다. 레전드로 남거나, 자신의 커리어를 사업으로 이어간 이들뿐, 스케이트보드로 미래를 보장받는 이들은 극소수다. 언젠가는 현실로 내던져지는 순간이 온다. 그렇기 때문에 스케이터들도 자신의 미래에 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스케이트보딩을 즐긴다면, 그 순간은 더욱더 값지게 느껴질 것이다.

또 한 가지, 꼭 미친 듯이 트릭을 성공하는 게 이 문화를 즐기는 방법이 아니다. 비디오를 보고, 스케이터처럼 옷을 입고, 크루징을 할 수도 있다. 이 문화를 즐기는 방식은 다양하다. 스케이트보드를 가볍게 여기고, 인생을 즐기는 하나의 수단으로 바라본다면 이 문화를 더 편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에세이의 주인공은 결국 다시 스케이트보드 업계로 돌아왔다. 비슷한 케이스로, 본인 또한 직장에 다니다 스케이트보딩에 모든 시간을 쏟게 된 지금, 어떤 형태의 중년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빨리 은퇴해서 개인적인 시간, 가족과의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다. 사진도 찍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그야말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말이다. 확실한 건 스케이트보드 말고도 재밌는 건 많다는 사실이다. 그러려면 지금 열심히 살아야 하겠지.

세월은 한 바퀴 돌아 다시금 테크니컬한 스케이팅, 배기팬츠가 인기를 얻고 있다. 조광훈이 바라보는 지금의 스케이트보딩은 어떤 모습인가?

앞서 말한 것처럼 과거에는 한 가지 스타일만 고집하던 스케이터가 많았다고 한다면, 지금은 정말 각양각색이다. 지금의 스케이터들은 단순히 트릭을 논하기 전에 스팟 등 주변 상황까지 고려한 창의적인 스케이트보딩을 만들어가고 있다. 스케이트보드 인구 증가의 주요한 원인으로는 올림픽도 한몫했지만, 가장 큰 영향력은 역시 슈프림(Supreme)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슈프림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무수한 브랜드가 스케이트보딩에 관심을 가지진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스케이트보드 문화가 지닌 쿨함을 슈프림이 잘 보여줬기에 다른 브랜드 또한 그걸 따라가지 않았나.

미국, 유럽권에 스케이트보드 문화가 뿌리를 잘 내린 반면 한국에서는 문화의 다양한 매력이 빛을 발하게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요즘 부모님 중 일부는 마치 보습 학원처럼 진도를 빼듯이 자녀에게 트릭을 강압적으로 요구한다고도 들었다. 이처럼 스케이트보드를 훈육하는 형태의 문화가 커진다면 자연스럽게 강사들의 역량이나 방침도 무척 중요해질 것이라고 본다.


Editor │ 권혁인
Assistant │ 오문택
Photographer │ Nakshot

*해당 인터뷰는 지난 VISLA 매거진 16호에 실렸습니다. VISLA 매거진은 VISLA 스토어에서 구매하거나 지정 배포처에서 무료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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