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enja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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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 거주하는 재미교포 Glenjamn은 도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음악파티와 행사를 찾아다니며 영상을 찍었다. 특별한 편집 없이 아티스트와 관객들을 놓치지 않고 담아낸 그의 영상은 묘한 현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음악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200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LA 음악 신(Scene)의 역사를 낱낱이 기록한 그의 영상을 한 번쯤은 유투브에서 확인했을 것이다. 방대한 양의 라이브 영상을 찍어 유투브에 기록한 그는 다양한 뮤지션들과 친분을 쌓으며 현재 LA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음악 이벤트들을 독특한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다.

 

 

당신의 닉네임, Glenjamn은 무슨 의미인가?

어느 날 Benjamin을 Ben이라고 하는 것처럼 나에게 ‘Formal Name’이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16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내 이름인 ‘Glen’을 ‘Glenjamin’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UCLA에서 졸업할 때 내 이름을 Glenjamn으로 다시 한 번 줄였다. 항상 나만의 단어가 존재하길 원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구글에 글렌잼을 검색했을 때 잘못된 단어라고 나오는 것처럼). 웹에서 글렌잼을 검색했을 때 나 밖에 나오지 않는 거지. 그 당시에 난 완전히 너드였던 것 같다. 하하.

 

 처음 파티, 이벤트 영상을 찍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내가 2006년 코첼라 페스티벌에 갔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난 Kodak V570 스냅 카메라를 구입해 가지고 놀았다. 그러던 도중 다프트 펑크(Daft Punk)의 공연을 보았다. 순간 나는 그곳에서 다프트 펑크가 만들어낸 장면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클럽이나 콘서트에 몰래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가 LA의 특별한 순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클럽을 옮겨 다니며 멋진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이 나를 파티에 초대했다. 음악을 하는 친구들과 가까워진 뒤부터는 무대에 올라가 본격적인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유튜브 계정이 Glenjamn 1, 2, 3 등으로 나누어져 있던데 어떤 기준인가?

내 유튜브 계정은 Glenjamn1, 2, 3 등 여러 개가 있다. 사라진 계정 Glenjamn1 -유튜브의 커뮤니티 가이드를 반복적으로 또는 심각하게 위반하였거나, 저작권 침해가 신고되어 계정이 해지되었다고 나온다- 은 내가 프린스(Prince)와 라디오 헤드(Radio Head)의 코첼라 공연을 촬영한 후에 닫혔다. 관객 사이에서 찍었는데도 불구하고 사운드가 워낙 깔끔하게 녹음되어 업로드 직후 바이럴 영상이 되었다. 하지만 곧 채널이 닫혔고 또 다른 채널인 Glenjam2를 오픈했다. 그러고 나서도 내 계정이 닫히는 게 신경 쓰여 Glenjam3까지 오픈했다. 아직까지 별문제는 없다.

 

촬영한 영상 중 가장 조회 수가 높았던, 혹은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영상이 있다면?

앞서 말한 프린스 사건 이후로 가장 많은 히트를 기록한 비디오는 위져(Weezer)가 앰지엠티(MGMT)와 레이디 가가(Lady GAGA)의 곡을 연주하는 영상이었다. 2009년쯤이었는데 거의 백만 명이 내 영상을 봤다. 여담이지만 학창시절 난 위져의 굉장한 팬이었다.

 

어떻게 스크릴렉스(skrillex)의 투어에 합류하게 되었나?

여러 괜찮은 이벤트의 비디오와 사진을 촬영한 후 스크릴렉스의 영상을 많이 찍었다. 어쩌다 자주 연락을 하게 되었고 같은 도시에 있을 땐 종종 어울리기도 했다. 그는 매우 바빴고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 같았다. 그를 3년간 알고 지낸 후 그가 #takeover 투어 2014에 나를 고용했다. 샌프란시스코부터 뉴욕,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 바르셀로나까지 한 달간을 함께 다녔다. 스크릴렉스는 매우 실력 있는 사람이며 내가 인생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멋진 사람이기도 하다.

 

언제부터 촬영을 본업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나.

본업으로  촬영을 시작한 시기는 2012~2013년 즈음이다. 그전까지는 대형 영화 회사를 다니며 매일 밤 개인 촬영을 하러 나갔다. 평소엔 회사에서 영상을 제작했다. 2007년~2008년엔 일이 끝난 뒤 밖에 나가서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이런 삶을 1년 정도 하다 보니 좋은 카메라를 사서 해외로 나가 마법 같은 순간을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런 회사 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고 결정을 내렸다.

 

당신의 영상은 높은 수준의 감각을 필요로 하는 편집은 없는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롱테이크로 보여주는데 이러한 방식을 고수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일부러 롱테이크로 찍는다. 노래가 연속해서 나오는 모든 순간을 화면에 담고 싶기 때문이다. 난 각각의 비디오들이 그 순간의 스냅 샷이며, 그것에는 논리적인 시작과 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영화의 사운드 트랙처럼.

 

영상을 찍을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라면?

당신이 클럽이나 이벤트에 참석한다면 반드시 그곳에 모인 수많은 관객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그들은 무대보다 더 재밌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더불어 항상 당신의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만약 무대의 라이트 쇼가 멋지다면 그것을 찍어라. 뮤지션 앞에 있는 귀여운 여자가 끔찍하게 구린 옷을 입고 춤을 추고 있다면, 뮤지션이 아닌 그녀를 찍어봐라.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찍는 것이 핵심이다.

 

당신은 LA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LA 신(Scene)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나는 LA에서 나고 자랐다. LA는 내 집 그자체다. 내 영상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내가 영상을 찍기 시작했을 때는 LA 음악 신에 있어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에드 뱅어(ED Banger)의 음악이 LA에서 흥하고 있을 당시 난 2007년과 2008년, 클럽과 콘서트에 항상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다. 그때 카빈스키(Kavinsky)를 우연히 만났고 그가 나를 모든 프렌치 크루에게 소개해 줬다. 다프트 펑크의 얼라이브 투어 이후 프랑스에서 온 문화가 얼마나 퍼질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했다. 전설적인 DJ인 DJ AM이 할리우드에서 그의 친한 친구인 쓰리 마이크 비(Thee Mike B), 스티브 아오키(Steve Aoki)와 함께 에픽 바나나 스플릿 파티(Epic Banana Split Party)를 할 때 처음 그를 만났다. 미국의 유명 페스티벌인 하드 페스티벌에 들어갔을 때 하드 이벤트(Hard Event)의 대니 벨(Danny Bell)과 디스트럭토(Destructo)의 개리 리차드(Gary Richards)와 친구가 되었다. 이후 브로맨스 레코드(Bromance Records)의 대표인 브로딘스키(Brodinsk)와 함께 일을 해오고 있다. 프렌치 사운드와도 관련한 일 역시 계속하고 있고 여전히 프랑스 음악을 좋아한다.

 

최근의 작업물은 파티 영상뿐 아니라 투어와 행사 등 각종 이벤트 영상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내가 아직 아마추어였을 때 만들어진 친분이 지금의 나를 프로 비디오그래퍼로 이끈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몇몇 아티스트를 만난 후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투어에 초대받을 수 있었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일들을 계속 했다. Brodinski, Gesaffelstein, Club Cheval, Para One, Surkin, Louisahhh!, Boyz Noize, Skrillex, Flying Lotus와 같은 이들과 함께 투어를 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를 투어에 초대해준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경험을 하고 있다.

 

당신의 성장 배경이 궁금하다. 정규적인 영상 교육을 받은 적이 있나?

나는 캘리포니아 LA에서 태어난 100% 한국인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부터 난 어머니와 쭉 LA에서 살았으며, 아버지는 한국으로 가셨다. 내 학창시절의 대부분을 글렌데일이라는 도시에서 보냈다. 그러다 UCLA에 입학했고. 어린 시절부터 모타운(Motown) 같은 R&B 음악부터 뉴잭스윙까지 다양한 음악을 듣고 자랐다. 고등학교 때는 밴드 음악을 좋아했고. 심지어 EMO 밴드까지 섭렵했다. 그 뒤에 데스 프롬 어보브 1979(Daeth From Above 1979)의 로맨스 블러디 로맨스(Romance Bloody Romance) 앨범을 만났고, 2006년 봄에 다프트 펑크를 만났다. 그때부터 나는 DJ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영상을 본격적으로 배운 적은 없다. 단지 행사의 흐름에 따라 녹화 버튼을 눌렀을 뿐이다. 내 모든 결과물은 지금껏 감상했던 영상과 스스로의 실험 속에서 태어났다.

 

다프트 펑크의 굉장한 팬으로 알고 있다. 2000년 중반부터 후반까지 프랑스 EDM이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이것이 LA의 신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가?

2007년부터 2008년까지 다프트 펑크와 저스티스(Justice)는 LA에 엄청난 파동을 일으켰다. DJ AM, 쓰리 마이크 비, 스티브 아오키가 주최한 바나나 스플릿 파티와 씨네 스페이스에서 열린 디막 튜스데이(Dim Mak Tuesday)까지, 이 두 개의 파티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고, 유럽의 유명 디제이는 모두 이곳을 거쳤다. 나는 좋은 타이밍에 카메라와 함께 그곳에 있었다. LA신에 있어서 내게 가장 중요한 순간은 씨네 스페이스에서 열린 비지 피(Busy P)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은 것이다. 그때 다프트 펑크의 멤버 토마스 방갈테르(Thomas Bangalter)가 핼멧을 쓰지 않은 채로 그의 친구 DJ Mehdi와 함께 디제잉하는 장면을 HD로 촬영할 수 있었고, 이 영상은 온라인을 통해 엄청나게 퍼졌다. 지금의 나는 LA와 파리에서 다프트 펑크의 멤버들과 어울리고 있다. 그들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영리하고 능력 있는 아티스트다.

 

미국에서 이런 쿨한 영상을 찍는 아시아인은 흔치 않다. 한인 2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어떤가.

LA는 매우 다양한 문화가 얽혀있는 도시다. 나는 항상 한국인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그래서 내 유산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내 뿌리가 어디에서부터 왔는지에 대한 것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우연히 구글을 통해 서울 88올림픽의 마스코트인 호돌이가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이미지를 발견했다. 그 이미지가 굉장히 좋아 내 프로필 사진을 당장 호돌이로 바꿨다. 그것은 내게 일종의 계시와도 같았고 언젠간 내 몸에 타투로 새길 생각도 갖고 있다. 내 생각에는 신이 내가 특별한 것을 할 수 있도록 보내준 것 같다. 녹화와 아카이빙은 내가 세상과 공유할 수 있는 특별한 여행이다. 이런 여행 중에 나와 가족들을 화면에 담고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내가 누군지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 사람들이 내게 아시아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언급할 때 그냥 웃어넘기고 다른 좋은 것들을 필름에 담으러 간다. 나의 배짱을 믿고 그것을 쭉 지켜갈 수 있도록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다. 다른 코리안 아메리칸들이 스스로 부정적인 껍데기를 깨고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영향을 주고 싶다. 한국인들이 더 편안한 생각을 가지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한국인에 대한 고정관념은 공룡처럼 멸종되겠지.

 

초기에 촬영하면서 힘든 점이 있었다면?

경비에게 쫓겨나는 것. 그러나 그들과 호의적인 관계를 만든 후부터는 다 괜찮아졌다.

이번 한국 방문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먼저 데드앤드(DEADEND)의 킹맥(Kingmck)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파티를 위해 미국의 뮤지션을 하나 섭외해야 했다. 그 행사의 예산에 내가 속했고, 데드엔드의 파티 촬영을 맡게 되었다. 친가 모두가 한국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한국에 있는 동안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한국은 대단한 곳이었으며, 특히 엘에이에서 자란 사람에게 엘에이에서의 삶과 한국 여행에서의 경험이 섞여 신선하게 느껴진 것 같다. 한국의 형제 자매들에게 세계의 다양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어 좋았다.

 

한국 방문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 음악, 파티 신에 대한 당신의 느낌이 궁금하다.

I fucking Love korea! 음악, 바이브, 새로운 것을 하는 기쁨 모두 다 좋다. 음식도 좋고 정말 다 좋았다. 특히 이곳의 파티 신은 대단했다. 360사운드, 데드앤드, 케이크샵 크루, 코호트 등 파티를 여는 사람과 지금 언급하지 않은 사람 모두 대단하다고 느꼈다.

 

Glenjamn에 올라온 영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촬영장면과 그 이유를 알려 달라.

<Daft Punk의 2006년 코첼라 영상>

음질 퀄리티는 끔찍하지만, 역사의 한 부분이다. 영상을 보면 내 얼굴을 보이며 “Fuck Yeah” 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그렇다. 나는 그 현장에 있었다!

<DJ Medhi in Maiami>

이 비디오는 우리가 잃어버린 친구 Mehdi의 느낌을 잘 요약해서 보여준다. 덧붙여 그에게 사랑을 전한다.

<Thomas Bangalter in Los Angeles>

갑작스럽게 Busy P로부터 카메라를 들고 파티에 와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다프트 펑크가 내 앞에서 그의 친구들과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Fucking awesome!

<#BROMANCE #NOUSSOMMES2014>

작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던 투어의 리캡 비디오다. 좋은 친구들과 좋은 바이브를 나눴다.

<SKRILLEX & ASAP ROCKY – WILD FOR THE NIGHT LIVE>

투어를 하면서 아티스트들의 액션을 담기위해 내가 최대한 가까이 가야만 했던 순간이었다.

<GESAFFELSTEIN – a star is born –>

이때 나는 Gesa가 스타가 될 것이고 언젠가 유명해질 거라는 것을 느꼈다. 스타가 탄생되는 순간이다.

<Baauer>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이 영상에서다. 내 생각에 그가 T&B에서 인턴이었을 때 만났던 것 같다. 아무튼 그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시킨 “Harlem Shake” 발표 이후 그를 Hard페스티벌에서 보았다. 그리고 그 뒤로 그와 친구로 지내고 있다.

 

당신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10년간의 영상 촬영이 끝날 때 엄청난 것이 나오리라 예상하고 있다. 2018년경에 굉장한 작업물을 들고 올 테니 기대해도 좋다.

 

Glenjamn의 공식 웹사이트 (http://glenjamn.com)

진행 / 텍스트 ㅣ 최장민

편집 ㅣ 오욱석 권혁인

사진 제공 ㅣ Glenja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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