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K-전성시대. 어디에든 ‘K’만 붙이면 촌스러운 문화로 치부되는 조롱 섞인 뉘앙스가 만연하던 시절도 있었으나, 현시점 ‘코리아’는 몇몇 슈퍼스타의 은혜에 힘입어 이젠 외국에서 꽤나 잘 먹히는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여느 케이팝 아이돌이 샤랄라한 노래를 부를 수 있기까지, 대한민국이라는 작디작은 나라가 얼마나 울분과 한을 삭여야 했던가.
남북을 갈라놓은 한국 전쟁부터 반전 시위, 대남공작원 적발, 일본 담배 불매 운동 그리고 IMF까지. 코리아 아카이브(Korea Archive, @koreaarchive)는 격동의 시대를 헤쳐온 한반도의 날선 역사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이다. 상처 덮인 역사와 뒤안길로 사라진 순간들을 되짚으며 저항과 투쟁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계정의 목적. 고향을 떠나 머나먼 LA에서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아카이빙을 선보이고 있는 계정 운영자 최승우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정치적 색안경은 잠시 벗어두고 그가 꾸려놓은 이야기보따리를 들어보자.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koreaarchive 계정을 운영하는 최승우(Andy Choi)라고 한다. 지금은 UC 버클리(UC Berkeley)에 다니고 있다.
미국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있나, 한국 역사와 관련된 것인지.
‘도시지역계획’을 전공하고 있고, 현재는 도시 연구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한국 역사 공부는 전적으로 자의에 의한 것이다. 한국 정치와 사회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목표가 있기도 하고. 대학에서는 주로 자본주의의 관습에서 탈피하고 노동자를 우선시하는 주택, 직장, 교통, 농업 그리고 즐거움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조성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성장 배경이 궁금하다. 주로 미국에서 자란 것 같은데, 한국에서의 경험도 있을까?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자랐고 후에 LA로 이사했다. 어렸을 때 한국에서 몇 달 지낸 적은 있지만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만큼 긴 시간은 아니었다.
전쟁 직후부터 2000년대 초까지, 아카이빙이 상당한다. 어떻게 @koreaarchive를 시작하게 되었나.
처음에는 사진, 영화, 예술 같은 내 모든 창작 활동을 담아두기 위한 계정으로 시작했다. 주말마다 가던 교회나 한국학교를 통해 한국 근대사를 얕은 수준으로 배웠는데, 독도나 동해 명명 논란 같은 이슈가 내 엉성한 민족주의에 불을 지핀 거지. 중학생 때부터 한국사에 관심이 있었다. 2년 전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태로 시끄러울 당시에 남한과 북한의 역사에 더 몰두하게 됐고. 역사적인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지는 1년밖에 안 됐다.
@koreaarchive를 계속 유지하는 데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 큰 역할을 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바뀌어야 할 여건들을 이해하는 것. 아시아에서든 북미에서든 혁명이라는 의식적이고 대중적인 일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 말이다.
계정을 운영하는 동기에는 뿌리를 향한 그리움도 영향을 미쳤을까.
뿌리에 대한 갈망 그 이상이다. 한국계 미국인은 미국 사회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다. 소외받고 방황한다. 그렇기에 @koreaarchive를 통해 미국 사회의 모순을 관찰하고 투쟁의 의미를 내비치려 했다. 존 브라운(John Brown)부터 프레드 햄트(Fred Hampton)에 이르기는 미국 해방을 위해 생을 다한 순교자들의 유산을 마주하며 통일의 무게를 느낀 게 정치적 색을 드러내게 된 계기가 됐다.
민주화 운동부터 반전 시위, 미국쌀 반대 시위 등 가장 격렬했던 한국의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의미를 표출했다. @koreaarchive 계정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한국 전쟁은 750만 이산가족을 남겼다. @koreaarchive는 이런 전쟁의 잔상을 계속해서 기억하기 위한 그릇과 같다. 북한만 해도 전쟁으로 인구의 20%를 잃지 않았나. 마오저뚱(Mao Zedong)이 한 말이 있다. “정치는 피 없는 전쟁이고, 전쟁은 유혈 정치다”.
한국의 정치 역사가 본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해외에서 꾸준히 관심을 이어오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분들을 이곳 LA에서 만난 게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내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 살면서 종종 소외감을 느끼곤 했는데, 한국 정치사가 그 부분을 채워주었다. 또한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에 큰 환상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사를 돌아보며 내가 미국인으로서 느끼는 일종의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평생을 미국에서 보냈고, 영어가 가장 편하며 무엇보다 미국 사람에게 깊은 사랑과 열정을 지니고 있다. 내 역사적 임무는 여기 미국에서 투쟁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생각할 때, 독특한 위치에 있는 한국계 미국인만이 할 수 있는 연대의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본인에게 가장 영향을 준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 있다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
당연히 조국과 타지에 있는 모든 한국인에게 가장 충격적인 집단 경험인 한국 전쟁이 있지만, 9/11 테러는 내가 태어나기 몇 년 전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자라온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사건 이후 부시(George W. Bush) 정부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해 버렸기 때문에 미국에서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상당한 긴장감을 느꼈던 것 같다. 불편한 입장이었지. 물론 나는 부시와 다르게 생각하지만 말이다.
계정을 보면서 한국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희귀한 사진들이 가득해 놀랐다. 계정에 소개할 소재는 주로 어디서 찾나.
한국 민주주의 아카이브(Korea Democracy Archive)와 국립중앙박물관의 ‘e뮤지엄’. 예술 기관이나 여러 디지털 도서관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텍스트를 보기도 한다.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아카이빙하고 있는데, 물리적인 거리에서 오는 어려움은 없는지.
방금 이야기했듯, 대부분 디지털 소스를 이용하기 때문에 그리 어렵진 않다. 미국에 있는 대학이나 도서관만 가도 흥미로운 자료가 정말 풍부하다.
표어 이미지도 재밌다. 본 계정에서 가장 좋아하는 표어는?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강원도 위쪽 북한 원산 애국 의류 공장에 붙어 있는 표어다.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koreaarchive가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 계정을 팔로우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한국의 정치와 문화를 어렸을 때부터 많이 접하지 못했던 한국계 미국인인 것 같다. 그들은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닌 방법으로 자신들의 뿌리에 다가갈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식민, 분단, 전쟁을 겪어온 한반도의 평화로운 앞날을 위해 그들의 역할을 이 계정을 통해 재고해 보는 것이다. 또한 한국에 뿌리가 없다 할지라도, 투쟁에 대한 연대를 표현하고 싶은 이들이 이 계정을 찾는 것 같다.
북한 콘텐츠도 눈길을 끈다. 북한 시민들의 삶을 조명한 사진집이라든지, 북한을 배경으로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래퍼라든지. 한국을 넘어 북한에까지 관심이 닿게 된 계기가 있을까?
부모님이나 학교, 교회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 외에 한국 역사와 사회에 대해 개인적인 호기심이 있었는데, 역시 북한 문제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1948년, 한국에서 제정된 국가보안법이 시위나 조직을 금지하고 반대 의견을 잠재우기 위해 사용된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생을 미국에서 보낸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남한이 물려준 무조건적인 반공, 반북의 이미지를 깨긴 쉽지 않았지. 미국 정부가 남한과 함께 만들어낸 대북 메시지의 틀을 거부하기 시작하면서 북한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고. 무조건적인 반공 표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편견을 부수기 위해 더 많이 배우고 있는 중이다.
프로필 링크에 달아둔 소재들도 흥미롭다. ‘이어도’, ‘시’ 같은 토속적 영화부터 ‘과거는 낯선 나라다’ 같은 정치적 다큐멘터리까지 다양한데, 이런 작업물에서 얻는 공통적인 영감이라면?
일관된 주제는 없다. 단지 내가 흥미롭게 느끼는 작품들을 무작위로 올릴 뿐이다. 그래도 지난 몇 년간 감상한 한국 영화나 문학 중 영감을 줬던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고양이를 부탁해(2001)”와 “칠수와 만수(1988)” 정도. 한국에는 ‘한국적인’ 창작 방식이 없는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한국 작품의 다양성이 정말 놀랍다.
최근 가장 영감을 준 콘텐츠는?
당장 생각나는 작품은 없지만, 고등학생 때 2006년 홋카이도의 재일조선인 학교에 관한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2006)”를 보고 영감을 많이 받았다.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으로 성장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가족이 몇 세대 동안이나 한반도와 떨어져 살았는데도 통일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정도였지.
현재 미국에서도 한국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진행하기도 하는지.
LA에도 꽤 큰 규모의 진보적인 미주 한인 운동이 있는데, 내가 그 일원인 게 자랑스럽다. 아까 언급했듯이 이민 전에 한국에서 학생 운동가로 활동하던 나이 드신 분들이 많다.
작년 본인의 첫 저작 ’SLOW HOT’을 출판했다. 한국인 성소수자에 관해 썼다고 들었는데 이와 관련해 간략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SLOW HOT’은 두 개의 서사를 따르는 소설이다. 첫 번째는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국으로 향하는 퀴어 한국인이 관계가 소원해진 어머니와 자신의 정체성과 화해하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한국의 신비로운 숲을 트래킹하는 동안 여러 시대의 유령들을 만나며 펼쳐지는 이야기다. 두 번째 이야기는 기후 대재앙과 디지털화된 인간관계를 배경으로 하는데, 소외와 쇠퇴에 관한 짧은 삽화와 글이다. 두 이야기가 흩어져 있는 모든 개인의 삶을 아우르며 서로 교차한다. 이는 결국 제국주의로 얽힌 우리 모두의 후회, 슬픔, 공통, 기쁨, 욕망, 불안 등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하다.
1871년, 조선은 영해로부터 미군을 몰아내려 했고, 그러던 도중 미군의 보복으로 요새 3곳이 파괴되었다. ‘SLOW HOT’은 미국 제국주의와 한국의 운명적 첫 만남의 1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지막 질문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란 뭐라고 생각하나.
독립운동가 김산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한국의 모든 교도소에서 울려 퍼진 노래가 있는데, 그 누구도 죽음을 앞둔 이들의 노래를 막을 순 없었다”. 한국의 비극을 상징하는 노래, 아리랑 이야기다. 아리랑의 진정한 의미는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라도, 끊임없이 장애물을 넘어서는 데 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지만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압록강을 건넜듯 말이다.
한국의 역사는 아리랑만큼이나 비극적이다. 그렇기에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짊어져 온 부당한 ‘한’의 짐을 이어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상하게도 한국인보다 한국계 미국인이 더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