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mond

DJ이자 프리랜서 에디터인 영몬드(Youngmond)는 레코드를 수집하고 거대한 자메이칸 사운드 시스템을 통해 음악을 띄운다. 특히 레게 음악의 광팬으로 2016년, 100% 레게의 앨범 [남편]을 발매한 페어브라더(Fairbrother)의 장본인이다.

레게의 인상에는 여유롭고 느릿함이 있다. 그러나 영몬드는 느릿함과 정반대의 분주한 인물이다. 그는 DJ이자 에디터, 또한 을지로의 만물 숍 ‘우주만물(CosmosWholesale)’과 난지공원을 들썩인 ‘서울인기 페스티벌’의 주축. 그의 아지트인 멜로디 바 ‘에코(ECHO)’는 코로나바이러스가 한창인 와중에 개업했고, [남편]의 리믹스 앨범 [남편 Version]의 바이닐은 2022년 ‘서울레코드페어’에서 최초로 공개되기도 했다.

이처럼 코로나 시기에도 쉴 새 없이 에너지를 쏟은 팔방미인 영몬드. 오늘은 그와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문화 전반에 걸친 삶을 살지만, 제대로 된 인터뷰나 이력을 묶은 매체는 잘 없다. 또한 영몬드 역시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관심이 없다. 때문에 이번 대화는 그동안 ‘영몬드’, ‘페어브라더’, ‘정우영’이라는 인물의 정체가 궁금했을 이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겠다.


영몬드는 기획자, 에디터, 뮤지션, 디제이 등 다방면에서 활동 중이다. 평소 남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궁금하다.

에디터라고 이야기한다. 글을 쓰든 음악을 하든 가게를 하든 ‘에디터의 입장’으로 접근한다. 무에서 유를 만들거나 나를 드러내는 일에 관심이 없다.

‘에디터의 입장’이란 무엇일까?

정보를 시간과 장소와 목적에 맞게 조직하면서 발생하는 차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선 곳에서 바라볼 때 이거는 이거여야 하고 저거는 저거여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 그저 열심히 찾으면 꼭 내가 온전히 창조한 것이 아니더라도 새로울 수 있다. 예를 들면 에코의 인테리어는 세 개의 색깔을 기본으로 한다. 빨간색이 아니라 핑크색이어야 했던 이유, 또 세 개의 뒤틀린 색깔이어야 했던 이유가 있다. 좀 더 나아간다면 정치적인 입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좌우가 아니라 특정 사안에 대한 나의 결단이 드러내지 않더라도 읽힐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디터, 디제이, 기획자 등 동시에 많은 일을 진행하기에 영몬드의 하루 일과가 궁금하기도 했다. 평소 어떤 일과를 보내는가.

에디터라고 하지만, 그냥 오랫동안 직장인으로 일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저녁이 되면 퇴근해서 남들 그렇듯 술 한 잔 하는 평균적인 삶이었다. 프리랜서가 되고 나이가 들면서 조금 바뀐 게 있다면 일하는 방식이다. 예전에는 몰아치듯 했다. 나는 계획적으로 일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데도 그랬다. 하루종일 그것만 생각했고, 일 외의 것은 다 놓았다. 굉장히 사회생활하기 힘든 방식으로 일했던 건데, 데드라인에 가까워져 집중할 때 나오는 불가사의한 에너지를 믿었다. 자신을 위기 속에 몰아넣으면 뜻밖의 굉장한 걸 할 수 있다고. 그런데 이젠 긴장도 안 하고 잘 설레지도 않고 결정적으로 나를 증명하려는 욕구 또한 없다. 지금 믿는 건 하루다. 하루를 충실히 보내는 것. 어릴 때는 아침에 머리가 맑다는 말 귓등으로도 안 들었는데, 이를테면 요새는 글 쓸 일이 있으면 아침마다 조금씩 며칠에 걸쳐서 쓴다. 

동시에 워낙 다양한 일을 하기에 어떤 유년기를 보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알려줄 수 있나?

사전 질문을 받고, 나 같은 사람에게 왜 그런 게 궁금할까 싶었다. 하하.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 고민했는데 미안하지만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좀 해야할 것 같다. 가난이 가장 중요한 단어였다. 평생 가난했던 주제에 우아하고 화려한 걸 좋아했다. 그 간극이 너무나 컸다. 나는 그 간극에 아주 오래 사로잡혀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당연히 음악을 좋아했다. 음악은 정말 특별했다. 음악이 주는 각성은 생전 처음 겪는 것이었다. 그 경험을 모른 척 하고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더 큰 각성을 얻고 싶어 계속해서 새로운 음악을 찾았던 건데 나는 너무나도 가난했다. 많은 음악을 들으려면 많은 돈을 써야 하는 시대였다. 집안꼴이 이 모양인데, 이 무용한 것들에 돈을 쓰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처럼 꿈 많고 가난한 사람들의 갈증을 채우는 데는 아무래도 책이 가깝다. 책을 읽는 것이나 글을 쓰는 것은 크게 돈이 들지 않아 함께 지속할 수 있었다.  

에디터로 일하다가 디제잉을 시작한 계기 또한 어릴 적 경험한 자극에서 시작된 것인가?

나를 디제이라고 부르는 건 수많은 위대한 디제이에게 실례다. 단지 좋아하는 음악을 갱신하고 있고, 그것을 공유하고 싶은 사람이다. 반대로 그 공유 방식이 꼭 디제이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영몬드의 음악 프로젝트 ‘페어브라더’의 음악은 오직 컴필레이션 [안녕하세요 카바레사운드입니다]에 수록된 “잎떨어지는넓은잎큰키나무”만이 남아있다. [남편]으로 뒤늦게 페어브라더의 존재를 알게 된 이들이라면 이전의 페어브라더의 행보가 궁금할 터. 밴드를 시작한 계기와 왜 한 곡을 발표하고 사라졌는지를 알려줄 수 있을까.

뻔한 얘기다. 밴드를 해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레게를 좋아하던 친구들과 밴드를 하자고 모여서 허송세월하던 차에 카바레 레코드의 공고를 봤다. 5주년 기념 컴필레이션을 만들 계획이니 데모 테잎을 받는다고 했다. 친구들과 급히 한 곡을 녹음해 보냈더니 뜻밖에 제대로 녹음하자는 연락이 왔다. 그때 철상이 형(김반장)도 소개받았고, 형에게 이런저런 리듬을 쳐달라고 하고 그걸 녹음해서 우리의 방식으로 트랙을 만들었다. “잎떨어지는넓은잎큰키나무”라는 곡이다. 입대 한 달 전쯤이었다. 그때 좀 더 용기가 있었다면 과감히 미뤘을 텐데, 가난한 사람에게는 과감한 결단의 경험이 없다. 군대를 다녀오니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애초에 내가 군대를 늦게 가서, 전역할 즈음엔 모두 취업한 뒤였다. 일 그만두고 밴드를 하자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래도 짬내서 해보자고 억지로 여러 가지 시도했는데 잘 될 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2016년에 난데없이 페어브라더라는 이름으로 [남편]이라는 앨범을 공개했다.

나는 페어브라더를 붙들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큰 재난도 있었고 회사도 계속 다녔지만 밴드를 포기하지 않았고, 이 앨범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만드는 데 그만한 시간이 걸렸다. 첫 앨범 [남편]에 대해 자주 ‘졸업장’이라고 표현한다. 졸업장을 받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는지, 또 사랑받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최고의 음악 팬이고 싶었다.

[카바레 사운드] 컴필레이션과 [남편]의 갭은 14년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페어브라더라는 예명을 유지한 이유가 있나?

우리의 젊음과 단절하고 싶지 않았다. 첫 곡이 “만나자”라는 트랙인데 친구들과 첫 앨범을 내면 이 곡을 첫 곡으로 하자고 말하면서 들떴던 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는 ‘노을의 방랑자’ 뭐 이런 중2병스러운 제목을 붙였던 것 같다. 하하. 그 앨범은 어떻게 보면 젊음의 졸업장 같은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페어브라더라는 이름도 좋았다. 아마도 ‘월간미술’이었던 것 같은데, 대학 도서관에서 읽은 바스키아 전시평 필자의 이름이 무슨무슨 페어브라더였다. 이름이 뭐 이래 싶어서 찾아봤더니 가명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성이었다.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아무 의미도 없다는 점이 좋았다. 심지어 아직 내 친구들도 단수일리가 없다는 저항감 때문인지 페어브라더스라고 부른다.

앨범 [남편] 리믹스인 [남편 Version]을 ‘서울레코드페어’에서 최초 공개했다. 리믹서로 참여한 인물들은 어떤 인연으로 참여하게 됐나?

김오키, 모과, 에머슨 키타무라(Emerson Kitamura)까지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무대에서 에머슨 키타무라와 함께 페어브라더의 “베이비”를 연주한 적이 있는데, 그때 즉흥적으로 넣은 프레이즈가 기가 막혔다. 그것만으로 완전히 다른 곡이 됐다. 그때 리믹스 앨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내가 지금까지 바이닐에 쓴 돈이 얼만데, 바이닐 하나 안 내고 끝내는 게 말이 되나? 하던 차이기도 했고. 에머슨 선생님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일본 돌아가고 딱 2주 후 리믹스를 보냈다. 내가 한 곡을 다시 만지고, 한국 두 팀, 해외 두 팀 구성이면 12인치로 고려해볼 수 있는 재미있는 지점이 많을 것 같았다. 한국 두 팀은 개인적으로 매우 아끼는 두 음악가, 김오키와 모과가 곧바로 떠올랐다. 나머지 해외의 한 팀을 놓고 엄청 고민했다. 애호가도 애호가지만 디제이가 좋아하는 음반이었으면 했다. 바이닐에 관해서는, 수많은 디제이들이 소개한 음악 덕분에 내 음악 생활이 말도 못하게 풍요로워졌다.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동시에 그들과 교류할 수 있는 물건이었으면 했다. 그래서 나랑 최대한 DNA가 같은 댄스음악 프로듀서를 주변에 수소문하고 직접 디깅도 했는데, 다들 이 사람이다! 싶지가 않았다. 요시노리 하야시(Hayashi Yoshinori)의 [Harleys Dub] 12인치를 우연히 듣고 대번에 알았다. 그를 찾고 일사천리로 제작까지 이어졌다.

Mogwaa – “현대입니다 DIGITAL STEPPING UP VERSION”
Yoshinori Hayashi – “순정 INNER VOICE VERSION”

영몬드는 어떻게 지어진 이름인가?

프라이멀 스크림(Primal Scream) 리더 바비 길레스피(Bobby Gillespie)의 이름이 트럼펫터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를 너무 좋아해서 자기 이름을 갖다붙여 만든 거라는 기사를 옛날 한국 음악 잡지에서 읽었다. 나는 스카 시대의 트롬보니스트 돈 드럼몬드(Don Drummond)를 좋아했다. 레게의 불온하고 어설픈 멜로디와 소리가 다 돈 드럼몬드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 이름을 내 이름에 갖다 붙여 영몬드다. 근데 나중에 찾아보니 바비 길레스피에 관한 그 기사는 낭설이더라고…

평소 레게에 관한 강한 애착을 보여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학창 시절 3세대 스카 무브먼트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안 좋아하던 그때의 스카 펑크 밴드들을 상당히 좋아했다. 그게 레게를 듣는 걸로 이어지진 않았는데 돌이켜보면 씨앗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진짜 계기가 된 것은 피쉬만즈(Fishmans)다. 피쉬만즈는 어디에서도 레게로 분류되지만, 스스로는 록을 추구한다고 말했던 밴드다. 그때까지 록만 들었던 나에게 피쉬만즈의 실제 음악과 음악과는 다른 지향이 가진 상보성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던 데다, 밴드로서의 완성도가 저 세상 수준이어서 매우 강하게 설득됐다. 레게로 넘어가는 다리가 됐고, 레게 이상을 꿈꾸는 깃발이 됐다. 피쉬만즈가 어떤 음악에 영향을 받았는지 디깅하다가 레게에 깊이 빠져들었다.

레게 음악 중심의 믹스셋과 앨범 활동을 벌여온 가운데, 혹시 자메이카 현지에서 전달된 피드백 혹은 팬레터 같은 것도 있었나?

없었다. 해외는 내가 좋아했던 일본의 숍에만 넘겼다. 걔네들 리뷰를 보니까 내가 어디서 영향을 받았고 어떤 소스를 사용했는지 어떤 의도인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내가 상상한 신(Scene)과 만난 것 같았고 행복했다.

돈 드럼몬드, 피쉬만즈 등 많은 인물들이 언급되었다. 외에도 당신에게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 있다면?

글쎄, 누구나 그렇듯 하는 일마다 각자 다른 영향을 받았다. 내 라이프 스타일 전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와타나베 토시미(Toshimi Watanabe)다. 도쿄 넘버원 소울셋(TOKYO No.1 SOUL SET) 같은 힙합 밴드는 물론 전혀 다른 록 밴드 줏 16(ZOOT 16)에도 참여했다. 직장인으로서는 의류 소매점 직원으로 시작해 거대 스트리트 의류 브랜드의 사장까지 지냈다. 그 와중에 책도 냈고, 믹스테이프도 여럿이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쿨하고 우아하고 새로웠다. 뭐 하나  뻔한 게 없지만 음악을 예로 들면, 펑크의 어떤 부분, 재즈의 어떤 부분, 레게의 어떤 부분이 이 사람에게는 하나였다. 70년대 뉴욕의 노 웨이브 신 같은 게 한 사람에게 깃들어있는 느낌?

다시 에디터로 前 ‘GQ’ 에디터 정우영에게 질문을 몇 가지 더 건네고 싶다. 오랜 시간 동안 GQ에서 직장 생활을 해왔다. 한 회사를 오랫동안 다닐 수 있었던 그 동력은 무엇이었는지?

내가 할 수 있는 밥벌이 중 돈과 일의 균형이 가장 잘 맞는 일이었다. 또한 ‘GQ Korea’가 소개하는 교양, 멋, 그리고 첨단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피고용인이 되는 건 자유주의자의 삶에 반한다. 싫어하는 일을 많이 해야한다. 첫 직장이 잡지는 아니었는데, 그때는 싫어하는 일의 비율이 80퍼센트는 됐다. 그것을 50퍼센트 이하로 줄이는 게 피고용인의 삶이 아닐까 싶다. 나는 빠르게 상당히 줄일 수 있었고, 그 퍼센티지가 다시 올라가려고 할 때 다른 길을 모색하고자 그만뒀다.

싫어하던 일을 어떻게 좋아지게 만드는 것일까. 생각의 전환인가?

환경, 재능, 형편 다 제쳐두고, 지금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지금껏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은 일이라는 단순명료한 사실을 믿었으면 좋겠다. 나를 망칠 수 있는 건 나뿐이라는 것도. 싫은 일도 시간을 쏟으면 좋아진다는 식은 너무 무식한 이해고. 당신이 그 직업의 범위를 너무 제한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혹은 직장 안에서만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제도권의 안전한 범위 안에서 할 생각만 하는 건 아닌지 냉정하게 되돌아 보라고 권하고 싶다. 분명히 내가 더 좋아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는 빈 공간이 있을 거다. 직장도 그렇지만, 우주만물도, 서울인기도 다 그런 식으로 접근했다.

그렇게 에디터로 활동하다가 비교적 최근에 멜로디 바 에코를 개업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 계기는?

코로나 때문이다. 내 인생 처음으로 출근을 안 해도 되는 일상을 맞았다. 졸업하자마자 취직해서 열흘 이상의 공백 없이 직장을 옮겨다니며 일했고, 심지어 프리랜스 에디터로 구한 일도 출근을 해야하는 일이었다.  그때 십 몇 년은 밀려있던 일을 했다. 창고 정리, 책 정리, 바이닐 정리 등등등. 정말 다 하면서 6개월 정도 보내고 나니까 너무 심심하더라고. 그즈음 서울에 레코드 바가 생기는 붐과 함께 나에게도 뜻밖의 이런저런 제안이 들어왔다. 하지만 하나도 성사되지 않았고, 결국 지금 1층에서 애시드를 운영하고 있는 오랜 친구와 농담을 나누다가 순식간에 시작하고 말았다.

운영해보니 어땠나?

자영업에 관해 너무 몰랐다. “내가 이 조그만 공간 월세도 못 내겠어? 음악은 그냥 집에 있는 판들 교체해가면서 틀지”라고, 사운드 시스템을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서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내가 자영업자의 정체성이 없고 가질 생각도 없다는 점이었다. 오픈했으니 운영하긴 해야 해서 나 자신과의 싸움을 꾸준히 했다. 그렇게 생각이 좀 다듬어졌다. 술 장사고 클럽이고 자영업이고 흥미없지만 대중음악 감상실이라면 흥미 있다. 일본의 클래식 음악 감상실 명곡 라이온(Lion)과 코엔지의 언더그라운드 성지 그라스루츠(GRASSROOTS) 사이에 있는 공간이라면 계속해보고 싶다.

현재 서울에는 로컬 디제이들과 교류하는 레코드 바가 제법 많다. 그들과 차별된 에코만의 강점이 있다면?

첫째는 자메이칸 사운드 시스템이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는 것. 둘째는 일관되게 레어 그루브를 추구하면서, 한 곡 한 곡 바이닐로 선곡한다는 것. 음악가 송영남을 직원으로 고용한 중요한 이유도 영남이 바이닐로 플레이할 수 있고, 새로운 음악에 호기심이 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장사에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지만, 에코처럼 작은 공간에서라도, 나처럼 자영업자 정체성이 희박한 사람이라도 음악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업장을 운영하면 좋지 않을까.

레게 레코드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레코드 숍은 어느 도시든 쉽게 만나볼 수 있다. 가까운 일본에도 그라스루츠가 떠오르고, 서울에서 레게 전문 레코드 바를 오픈할 법한 인물이 영몬드 외 딱히 생각나지도 않는다. 혹시 레게 레코드 숍을 만들어볼 계획은 없나?

너무 무모한 생각 아닐까. 우주만물에서 레게 레코드를 팔고 있어서 잘 안다. 계몽적인 취지로 레게 레코드는 특히 싸게 파는데 거의 팔리지 않는다. 우주만물이 올해 8주년이었는데, 8년 동안 안 팔린 판도 있다! 레게는 사운드 시스템으로 들어야 그 매력이 충분히 드러나는 음악이어서 에코에서 더 많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다면 좋을 거다.

에코의 장소가 삼각지인 이유가 특별히 있나?

일차적으로는 내가 에코를 너무 일처럼 운영하기 싫었다. 그래서 집 앞에 냈다. 우주만물, 서울 인기에서 실험하면서 안 건데,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부가 집중되지 않는 구조를 만들면, 더 많은 사람이 즐거운, 더 많은 사람이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다. 애초에 돈 욕심을 안 냈고, 일처럼 느끼지 않을 조건을 만들었다. 사실 집 앞에 이만한 개인 감상실이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얼마나 사치스럽나. 그거면 충분했다. 이태원이 아닌데 이태원과 가깝다는 것도 이유였다. 이태원의 밤을 모르지는 않지만 거기서 한 발짝 떨어지고 싶은 사람들이 에코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많은 일과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지만 더 많은 일을 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나?

일단 지금 책 한 권을 쓰고 있다. 음악 책으로. 두 가지 목표다. 하나는 한국 음악을 해외 리스너에게 소개하는 것, 또 하나는 한국 음악을 다른 관점에서 아카이브하는 것. 책과 별개로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있는데, 과장을 꽤나 싫어하는 내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한국 음악 저널리즘의 역사를 바꿔보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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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황선웅
Photographer │ 백윤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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