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LOMINIUM

처음 질문자가 이유미에게 호기심을 가지게 된 건 좋아하는 일을 일종의 놀이처럼 소개하는 태도에서부터였다. 할로미늄(HALOMINIUM)의 디렉터, 동시에 1인 창작자로서 삶의 일부를 유의미한 가치로 녹여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듯한 모습에 그녀가 어떠한 견해로 창작에 임하는지, 그 이면에는 어떤 삶이 있는지가 궁금했다.

때마침 할로미늄이 올해로 10년을 맞이했다고. 막연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짧은 대화가 지난 10년의 잔상을 조금이나마 담은 것만 같다. 아래에서 확인해 보자.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패션 브랜드 할로미늄의 디렉터 이유미다. 

성장 과정에서 지금의 모습을 꿈꾸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는지 궁금하다. 

어렸을 때 옷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막연히 패션 디자이너가 되어야지 생각했다. 어느 날 야자와 아이(Ai Yazawa)의 만화책 “내 남자친구 이야기”를 보고 ‘패션 디자이너라면 자기 브랜드를 만들어야 하는구나’라고 깨닫고 나만의 브랜드를 꿈꿔왔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이야기다.

다방면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데 도전적인 듯하다. 만화를 그린다든지, 책이나 영상을 만든다든지. 어린 시절부터 창작에 관심이 있었나?

그건 오히려 최근에 와서 이뤄지고 있다. 어릴 때는 만화를 그려본다는 생각은 못 했다. 지금도 어렵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그때는 더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여겼다. 만화책을 좋아하고 공연을 보러 가길 좋아하는 소비자에 가까웠다.

롤모델로 삼은 인물이나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다면.

야자와 아이의 “나나”에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가 많이 나와서 그 당시에는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좋아했고, 좀 크면서는 블레스(BLESS) 같이 실험적이면서 쿨한 브랜드를 좋아했다. 90년대에 매체에서 봤던 쿨함이 언제나 마음에 남는다. 일본 후르츠(Fruits) 매거진의 길거리 패션은 항상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후 그러한 관심이 본격적인 패션에 관한 학업으로 이어진 건가?

그렇다. 브랜드를 설립하기로 결심했을 때 작업실을 먼저 얻었다. 회사에 다닐 때였는데 공간이 있어야 진척이 생길 것 같아 갑자기 계약했다. 디자이너 전에는 패션 브랜드 유통 회사에서 마케팅 팀에 있었다. 회사에서 수입하는 브랜드의 역사와 컬처가 좋아서 마케팅 팀에서 뭐 하는지도 모르고 들어갔다. 많이 배우고 재미있었다. 

마케팅 회사가 이후 패션 브랜드의 발판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건지. 

그렇다기보다 당시 다니던 회사가 프레드 페리(Fred Perry)를 수입하는 회사였는데, 당시 그 브랜드를 너무 좋아했다. 프레드 페리 일 외에도 플랫폼 플레이스(PLATFORM PLACE)라는 셀렉트 숍의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하는 기회도 있었다. 기획이랑 공연, 전시가 다방면으로 이뤄지다 보니 아티스트들을 많이 만날 기회도 많았는데, 그런 경험이 너무 재밌었던 거 같다. 회사에서 다루던 브랜드에는 프레드 페리 외에도 세인트 제임스(Saint James)도 있었고, 상당수가 클래식하고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브랜드의 배경에 재미를 느끼는 터라 성격과도 잘 맞았지. 브랜드를 설립하기로 결정한 것은 나중의 일이다. 문제는 3개월쯤 지나 도망치듯 다시 회사로 돌아간 거다. 하하. 

회사로 돌아간 후 다시 브랜드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면 계속 회사원으로 지냈을 수도 있는 건가? 

그렇다. 내공을 다져서 다시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 그때는 그냥 회사에 다녀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회사에 다니면서는 컬렉션이라기보다는 재밌는 물건들을 만들었는데, 브랜드를 만드는 게 생각보다 어렵더라. 이후에 다시 브랜드를 이어나가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좀 더 단단히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최근 우주만물에서 독립해 쇼룸을 오픈했다. 종로구에 자리하게 된 이유를 물어보려고 했는데, 도착해서 보니, 더 북 소사이어티(The Book Society)가 있던 공간이다. 이곳에 입주하게 된 계기가 있나? 사전에 접점이 있었다든지. 

더 북 소사이어티의 대표님과는 사실 접점이 없었는데, 원래 북소사이어티 자체를 좋아하기도 했고, 이 동네를 너무 좋아해서 언젠가 할로미늄이 이사한다면 이곳이 어떨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절묘하게도 지인을 통해서 더 북 소사이어티가 이사 간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더 북소사이어티가 이사하는 건물의 건축 기간이 1년 정도 남은 시점이었어서, 기다리면서 쇼룸을 구상했다.

확 트인 창과 디테일이 독특한 커튼, 그리고 단정한 가구가 눈에 띈다. 우주만물의 공간과는 확실히 상반된 느낌이 드는데. 별도의 디렉션이 있었나?

하이브(HYBE) 사옥 인테리어를 맡았고, 인테리어 사업 외 전시도 활발히 하는 씨오엠(COM)이라는 인테리어 스튜디오에게 부탁했다. 컬렉션을 진행할 때도 그렇고, 협업할 때 별도로 치밀한 디렉션을 주는 타입은 아니라서, 가볍게 무드나 키워드를 전달하곤 한다. 우주만물의 멤버였기 때문일까, 많은 분들이 할로미늄에서 우주만물의 색깔을 기대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굉장히 깔끔한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우주만물은 친구들끼리 러프하게 시작한 거기도 하고, 구성원들의 물건이 한꺼번에 모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유분방한 느낌이 형성된 거라, 내 개인적인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할로미늄을 오픈하면서, 우주만물은 떠났다고 들었지만 그간 우주만물을 통해 경험한 특별한 일화나 추억이 있을 것 같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후 윤호 씨와 작업실로 쓰고 있던 공간을 비워야 했는데, 지큐(GQ) 에디터였던 우영 씨가 와서 가게를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 데서 시작한 게 우주만물이다. 단순히 우리가 모은 물건들을 다 가지고 오는 데서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보기에는 ‘할로미늄이 왜 우주만물에 있지’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거 같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했다. 코로나 이전에는 우주만물에 일본 아티스트들이 많이 방문했다. 어제 사운드클라우드에서 듣던, 음반을 구매한 아티스트들을 종종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재미있었다. 기억에 남는 인물은 ‘Never young beach’의 타츠미 군, 히토미 토이(Toi Hitomi), 요메이리랜드(Yomeiriland), 비디오 테잎 뮤직(Video Tape Music) 등이 있다. 재미있고 신기한 인연과 추억이 많다. 

우주만물의 영향인지 수집가일 것 같다는 인상도 강하다. 현재 따로 수집하고 있는 물건이 있나? 

어렸을 때부터 CD 사는 것을 좋아해서 CD를 계속 모은다. 모두가 바이닐을 살 때 CD를 산다. 어렸을 적 가장 친숙한 뮤직 레코드 매체이고 가볍고 편리하다. 

수집하거나 물건을 구매할 때 스스로 세운 철칙이 있다면. 

사실 요즘에는 물건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서 ‘언젠가 팔 수 있나’를 생각한다. 물건을 줄여야 할 때 버리는 것이 아닌 팔 수 있는 가치 있는 물건인지 생각하기로. 

다시 할로미늄으로 돌아가보자. 할로미늄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무엇인가? 

내가 빛과 은빛 금속의 이미지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때 사진가이자 남편 이윤호 씨가 제안한 단어다. ‘HALOMINIUM’은 빛과 관련된 단어 HALO(혹은 천사의 링)와 은백색의 금속 ALUMINIUM(알루미늄)의 합성어다.

하우스 유니폼, 커텐/침구류를 제작하는 등 의류 외에도 라이프 스타일 제품을 제작한 것이 인상 깊었다. 시즌별로 특정한 테마를 설정하는 것인지. 

할로미늄은 시즌마다 컬렉션을 출시하긴 하지만, 시즌에 맞춰 테마를 정해 옷을 보여주기보다는 이야기를 먼저 생각하려는 편이다. 하우스 유니폼 발매 당시에도 시나리오라고 하긴 거창하지만 직접 이야기를 써서 컬렉션으로 풀어냈다. 유튜브에서 5~6편짜리의 짧은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든 것을 감상할 수 있다. 

여름쯤 공개한 수영복 컬렉션에도 스토리가 있었나? 

에디터블 시나리오(editable scenario)라는 브랜드와 함께한 캡슐 컬렉션이다. 친환경적인 목소리를 내는 브랜드라, 옷보다 이야기로 다가가려는 할로미늄의 취지와 잘 맞았던 것 같아 협업을 진행했다. 

할로미늄에서는 어떤 음악이 흘러나오나?

쇼룸을 오픈하고 음악 선곡에 일가견이 있는 친구들에게 할로미늄을 위한 플레이 리스트를 부탁하고 있다. 지금까지 Yeong die, DJ Roze, Deposit300가 참여했고 앞으로도 꾸준히 플레이리스트를 아카이빙하려고 한다.

지난 해 크리스마스에 열린 행사에서는 공간을 가로지르는 큰 테이블에 서적도 배치했더라. 패션과 관련한 외국 서적을 놓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놓여있는 서적의 결이 그것과는 거리가 있는 독립 서적들이라 인상적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패션 브랜드긴 하지만, 이야기를 중시하는 편이라 패션과 밀접한 이미지를 끌어오는 것보다는 다른 분야를 더 보여주고 싶었던 데서 착안한 것 같다. 

여태 이야기 나눈 것처럼, 이유미의 삶은 패션의 화려함보다 다채로운 콘텐츠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언가에 관심이 생기면 바로 실천에 옮기는 편인지, 개인적인 시간을 내어 먼저 공부해보는 것을 선호하는 편인지. 

마음의 무게에 따라 다른데 임하는 태도 가벼울수록 실천하는 편이다. 최근에는 4차 산업혁명을 이해하기 위해 코딩을 잠깐 배우기도 했다. 

좋아하는 것을 일종의 놀이처럼 소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모습이 흡사 에디터와 같다고도 생각했는데, 할로미늄을 좋아하는 이들이 함께 즐겨줬으면 하는 추천 콘텐츠가 있다면?

아까 질문에서 고민해봤지만 패션 관련 롤모델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영화감독을 좋아하는 편인 것 같다. 에반게리온의 감독 안노 히데아키(Hideaki Anno)나, 박찬욱 감독을 굉장히 좋아한다. 나는 힘들 때 거장들의 인터뷰를 찾아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안노 히데아키 다큐멘터리 “안노 히데아키:안녕! 모든 에반게리온”을 정말 좋아해서 생각날 때마다 돌려본다. 사람들은 최근에 개봉한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디카포”에 많이 실망한 듯하지만 이 다큐멘터리와 병치하여 완성된 작품으로 생각한다. 왓챠에서 볼 수 있다.

좋아하는 일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질 때도 있을 거라 예상해 보는데. 

지금은 적응했다고나 할까. 그냥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다양한 것을 소비할 시간도 모자라다고 느끼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기 이전에 더 계획적인 일상을 보내는 것도 같다. 아까 물건을 구매하는 기준을 물었는데, 예전에는 좋아 보이는 것들을 가리지 않고 모으는 편이었다. 오랜 시간 물건을 모으다 최근에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이 아무거나 모은다고 다 흡수할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더라. 그래서 항상 계획적으로 시간을 보내고, 기준을 세운 뒤 선택과 집중을 하려고 하는데 그걸 매너리즘이나 패닉을 방지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뭘 할지 감이 안 잡힐 때, 리스트를 보고 그냥 하면 돼서 굉장히 명쾌한 방법이다.

자연스럽게 파생된 길거리 문화와 역사와 맥락의 깊이를 탐구하는 지성인들의 문화, 이를 칼같이 분리할 순 없겠지만 이유미는 두 영역 모두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 흥미롭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서로 다른 문화에서 발견한 멋진 점을 이야기해 줄 수 있나? 

길거리 문화를 깊게는 모르지만 그간 알게 된 친구들을 생각해 보면 길거리 문화와 지성인들의 문화의 공통점은 자신의 뿌리(Roots)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방향성은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이 만드는 옷에도 영향을 준 것인지, 할로미늄의 옷은 자유롭지만 또 한편으론 정제되어 보인다. 이러한 스타일은 의도한 바인지. 

스타일은 내가 의도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닌 것 같고, 자연스럽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쌓여 결과물로 도출되는 것 같다.

주변 협업자들과의 창작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가까운 사이인 만큼 일상의 실없는 대화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예상해 보는데, 의외로 일처럼 진행하는 부분도 있나?

친한 사이임에도 일처럼 제안하는 편이다. 상대방을 헷갈리게 하는 애매한 태도를 좋아하지 않아서 의도를 잘 설명한다. 

패션직종이 아닌, 그래픽 디자이너라던지, 작가 성향을 가진 주변인과의 교류가 더 활발한 점이 조금 독특하다. 

지금 할로미늄의 그래픽 디자인을 맡아서 진행해주는 워크스(WORKS)의 그래픽 디자이너가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다. 대학교 때 그래픽 디자인 수업을 들었는데, 그걸 계기로 되게 많이 친해졌다. 그래픽 디자인에 관련한 역사 스터디에 참여하고, 책도 같이 읽으면서 비슷한 성향과 관심사를 지닌 친구들을 많이 만난 거 같다.

지금 소속된 ISVN은 어떤 성격의 콜렉티브인지 간단히 소개해달라. 

ISVN games는 게임을 만드는 팀이다. 하지만 게임만 만든다기 보다는 게임 문화의 전반적인 것을 함께 이야기하고 재미있는 작업을 도모하는 팀이다. 올해는 나도 함께 참여한 작업이 나올수도 있을 것 같다.

사진가이자, 남편인 이윤호와 함께 기획하고 있는 일은 없나? 

아직 신혼여행을 안가서 신혼여행을 기획 중이다.

그 외에 작업은? 

좋아하는 콘텐츠는 같을 수 있지만 아웃풋으로 표출하고자 하는 방향이 너무 달라서 아직은 이야기된 것이 없다. 아까 언급했지만 우주만물도 따지고 보면 윤호 씨의 색깔이 많이 들어가 있다. 나는 완결되고, 완성도가 높은 걸 좋아하는 반면, 그분은 감각적으로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해서. 

여행을 다녀오고 싶은 장소와 이유가 있나? 

일본의 가루이자와. 여름 별장이 유명한 지역이다.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 나오는 실존하는 건물 ‘숲 속의 집’에 가보고 싶다. 

2023년 시점에서 바라볼 때, 세상에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버블시대가 끝나고 허투루 자원을 아끼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시대에 패션 디자이너로써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기분이 복잡하다. 

한 달간 아무런 제약이 없는 자유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떤 계획을 세울 것인가? 

집에 있는 각종 책을 다 읽고 싶다. 현재 읽는 속도보다 사는 속도가 더 빨라서 아쉽다. 

마지막 질문이다. 올해가 할로미늄의 10주년이기도 하다고. 최근 기획하고 있는 것, 새해 들어 목표하는 것이 있나? 

우선 ISVN games로 처음 같이 작업한 무언가를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 할로미늄은 새 시즌 준비와 협업도 준비 중이다. 그동안 준비해 온 무언가를 보여줘야 할 것 같다.

이유미 인스타그램 계정
HALOMINIUM 인스타그램 계정


Editor │ 한지은
Photographer │한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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