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어느새 1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장기화된 전쟁은 국제 사회에서 점점 잊혀지고, 심지어 베를린 시내 곳곳에는 ‘Das ist nicht unser Krieg(이것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라는 반-우크라이나 그래피티까지 등장했다.
벨을 누르고 문 너머를 건너가야 들어갈 수 있는 베를린의 비밀스러운 레코드숍 ‘비키니 왁스(Bikini Waxx)’에서 키이우의 클럽 클로저(Closer)의 레지던트 디제이이자 클로저 레코드 스토어의 주인장인 샤콜린(Shakolin)을 만날 수 있었다. 현재 베를린으로 보금자리를 옮긴 그는 그곳에서 역시 클로저의 시작부터 함께한 디제이 카린(Karine), 그리고 사랑스러운 두 자녀와 살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희생자가 아니다. 우크라이나는 자유 국가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샤콜린과 카린의 눈빛에는 어떤 종류의 결연함과 존엄함이 서려있었다. 전쟁의 시대에 음악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파티는 저항과 연대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그 해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샤콜린과 카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국-우크라이나의 언더그라운드 음악 신(Scene)은 꾸준히 교류해오고 있다. 둘은 특히 한국 디제이 앤트워크(Antwork), 마지코(Magico)와 친분이 깊은 듯한데, 그들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
Shakolin(이하 S): 앤트워크, 마지코와는 2018년에 처음 만났다. 이미 그들의 믹스와 팟캐스트를 들은 적이 있기에 아시아 투어 도중에 연락하게 되었고, 그들이 보이스(Voice) 파티에 나를 초대해주었다. 2018년에는 베톤 부르트(Beton Brut), 다음 해에는 트리피(Trippy), 그리고 올해의 링(Ring)까지. 이번에는 카린까지 함께해서 실로 뜻깊다. 우리는 디제이로서 좋은 동료일 뿐만 아니라 마음이 잘 통하는 좋은 친구이기에 클럽 바깥에서도 식사하고 대화하며 자주 시간을 보낸다.
Karine(이하 K): 우리가 레지던트 디제이로 몸담은 클로저에서는 생일을 맞이하는 레지던트 디제이가 원하는 게스트를 초대할 수 있는 일종의 전통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생일에 두 번, 그들을 키이우로 초대해서 같이 플레이했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Kyiv)는 매력적인 문화가 존재하는 도시다. 키이우 신의 중심이 되는 클럽 클로저(Closer)을 소개해 준다면.
S: 클로저는 포딜(Podil)에 위치한 아트 센터다. 클럽일 뿐만 아니라 갤러리 및 강연장이기도 하다. 내부에는 비건 레스토랑 새비지 푸드(Savage Food), 소파 스토어(Sofa Store), 그리고 내가 운영하던 클로저 레코드 스토어(Closer Record Store)가 있다. 본래 포딜은 아무 것도 없는 오래된 공장 단지였지만 지금은 마치 서울의 이태원처럼, 키이우의 클럽이 모인 지역이 됐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클럽이나 바뿐만 아니라 라디오 스테이션, 레코드샵, 디제이 스쿨 등이 있는 아트 클러스터인 셈이지.
K: 2012년 1월, 디제이 티무르 바샤(Timur Basha)와 클로저의 오너 세르게이(Sergey Yatsenko)가 만든 ‘파티 포 프렌즈(Party For Friends)’라는 파티가 클로저의 시작이었다. 버려진 장소를 새롭게 탈바꿈하여 만드는 일종의 DIY 파티였는데, 처음에는 친구의 친구들만 알음알음 왔지만 이내 유명해졌다. 2013년 가을쯤 마침내 클로저가 탄생했다. 그 당시 우리는 음악을 틀고 춤추며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공간, 자유로움과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사운드 시스템의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지금도 우리의 첫 시작을 기리기 위해 매년 1월 가면무도회(Masquerade) 파티를 연다.
S: 클로저에서는 파티뿐만 아니라 다양한 페스티벌도 열린다. 클로저가 있는 건물은 한때 리본과 신발끈 등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이에 착안해 매년 5월 ‘스트리치카 페스티벌(Strichka Festival)’을 개최한다. 스트리치카는 우크라이나어로 리본을 뜻하는데, 실제로 페스티벌의 팔찌를 이 공장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클로저는 그저 나이트클럽이 아니라 아트 센터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파티가 없는 평일에는 전자음악, 디제잉, 사운드 프로덕션에 관한 강연을 기획한다. 음악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줄 다양한 강연자를 초대해서 유익한 시간을 보낸다.
K: 클로저가 성장하면서 파티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존엄 혁명[1]이 우리의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플로어를 둘러보면 어린 친구들도 파티에 많이 온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이 DJ나 프로모터로 성장하여 자신만의 파티를 기획하고, 베뉴를 오픈하고, 그렇게 되는 것 아니겠나.
클로저 레지던트 디제이 중 초기 멤버에 속한다. 클로저에서 디제이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달라.
S: 키이우로 이사 오기 전에는 드니프로(Dnipro)에 살았다. 우크라이나에서 제일 큰 강의 이름을 따온 아름다운 도시다. 그곳에서 레코드 컬렉터로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바이닐을 사 모으긴 했지만, 턴테이블이 한 대뿐이라 믹싱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음악을 듣고, 음악을 만질 수 있는 그 감촉을 좋아했을 뿐. 드니프로는 클러빙을 하기에 완벽한 도시는 아니었다. 반면, 키이우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해외 아티스트가 공연을 하러 왔기에 음악을 접하기 쉬운 곳이었지. 세상을 여행하고 싶었고 더 많은 것들을 보고 싶었다. 우연히 키이우에 갔을 때 티무르, 보바(Vova Klk)가 트는 파티에 가게 됐는데 파티가 끝난 뒤, 이 도시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프리랜서였기 때문에 바로 실천에 옮겼지. 그리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전부 다 우연에서 시작된 일이다.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 모든 일은 결국 일어났다. 클로저가 처음 시작했을 때 레지던트 디제이는 티무르 바샤(Timur Basha), 보바(Vova Klk), 밤부(Bambu), 그리고 나 이렇게 단 4명이었다.
K: 나는 디제이가 되기 전에는 아티스트 섭외를 담당하는 부킹 에이전트로 시작했다. 클로저의 여름 테라스 ‘리스니 프리찰(Lisnyi Prychal)’이 처음 오픈했을 때 우연히 바텐더를 하게 된 것이 클로저와의 첫 인연이었다. 리스니 프리찰은 ‘숲의 부두’라는 뜻으로, 선박 모양의 지붕이 있고 숲 속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야외 스테이지다. 춤을 추러 갔다가 바텐더로 일하는 친구를 도와주며 자연스럽게 눌어붙었지. 2014년부터는 부킹 에이전트 일도 맡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리스너였기에 내가 음악을 플레잉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안드레이(샤콜린)와 만나게 되면서 그가 디제잉을 가르쳐주며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지금까지도 우리 둘은 가장 죽이 잘 맞는 파트너(Best partners in crime)랄까. 하하.
S: 우리는 성격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정말 잘 맞는다. 집에서는 우리에게 큰 영감을 준 아티스트, 프린스(Prince)의 음악을 함께 듣곤 한다. 우리가 디제이의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 기쁘다.
둘은 올해 6월 조지아의 ‘이스크라(ІСКРА)’ 페스티벌에서 B2B 플레잉을 선보였는데. 조지아 트빌리시의 클럽 바시아니(Bassiani)의 입구에는 거대한 우크라이나 국기가 걸려있을 정도로 키이우와 트빌리시 신의 관계 또한 돈독해 보인다.
K: ‘Іскра’는 우크라이나어로 불꽃(Spark)을 뜻하며, 이스크라는 트빌리시의 클럽 바시아니(Bassiani)가 큐레이팅하는 페스티벌이다. 2022년의 첫 페스티벌은 키이우에서 열렸지만 전쟁으로 인해 키이우에서의 페스티벌은 훗날을 기약하게 되었다. 올해 6월에는 베를린의 클럽 ‘레비어 주도스트(Revier Südost, RSO)’에서 열렸다. 현재 많은 우크라이나 디제이들이 베를린에서 머무르고 있기에 이스크라 페스티벌 라인업의 절반 이상이 우크라이나 출신의 아티스트로 구성되었다. 조지아인들은 우크라이나를 진심으로 지지한다.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사이에는 끈끈한 커넥션이 존재한다.
S: 조지아 역시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똑같은 문제를 이미 90년대에 겪었다. 러시아가 조지아의 영토 일부를 점령한 것이다. 그래서 조지아는 우리의 상황을 가슴 깊숙이 느끼고 이해하며, 우리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한다. 형제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친구들이다.
전쟁 발발 이후에 키이우 신은 다시금 파티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전쟁과 파티가 양립하는 키이우 신의 현재 상황에 대해 전해줄 수 있나.
S: 클로저뿐만 아니라 ∄(K41) 등의 키이우 클럽에서는 전력 부족과 야간 통행 금지에도 굴하지 않고 침공 몇 달 후부터 다시 파티를 시작했다. 비록 낮에 열리는 데이파티만 열 수 있지만 전쟁 중인 땅에서도 여전히 삶은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은 중요하다. 클로저의 연중 행사인 스트리치카 페스티벌은 예정대로 올해 5월에, 전자음악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공연 예술이 펼쳐지는 브레이브 팩토리(Brave! Factory) 페스티벌 역시 8월 26일에 개최됐다. 매년 그래왔듯.
K: 전쟁 중에도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 나갈 뿐이다. 그 결과 해외의 디제이뿐만 아니라 레이버 역시 다시 키이우를 찾고 있다. 키이우에 가기 위해서는 폴란드 바르샤바로 가서 국경에서 19시간이 넘는 기차를 타야 하니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지.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키이우에 와준 아티스트와 레이버는 모두 우리의 영웅이다. 평화로운 곳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이곳에서도 여전히 삶을 이어가고 파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점이 파티의 바이브를 더욱 소중하고 특별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S: 키이우는 1년 전보다는 훨씬 더 안전해졌지만 여전히 위험 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기 위해 와준 용감한 친구들이 있다. 브루노 슈미트(Bruno Schmidt), 기글링(Giegling)의 콘스탄틴(Konstantin), 지암마르코 오르시니(Giammarco Orsini) 등, 정말 영웅 같은 사람들이다.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전쟁 전에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루마니아, 조지아 등 여러 신이 연대하여 파티를 열곤 했다. 전쟁 이후 러시아 신과는 완전히 단절되었는지.
S: 전쟁 전에는 러시아 신, 러시아 아티스트와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했고 많은 것을 나누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뒤 가장 놀랐던 것은 모두가 침묵을 택했다는 것이다. 누구도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지켜보는 건 나에게, 카린에게, 우리 모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 지지를 보낸 한 아티스트는 꼭 언급하고 싶다. ‘벗테크노(Buttechno)’는 러시아 아티스트로서 전쟁에 반대하며 우크라이나를 공개적으로 지지한다. 이것이 선의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의 훌륭한 예시이다.
K: 아티스트라고 해서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한 독재자의 문제일 뿐이라고 치부하며 진공 상태에서 외부와 단절되어 음악만 틀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할수록 그 영향력은 커질 것이다. 이 전쟁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일방적으로 침략해서 시작된 ‘전쟁’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해 한국의 독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S: 우리의 친구들이 운영하고 있는 구호 단체 2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키이우 엔젤스(Kyiv Angels)’로, 이들은 파티를 주최하여 모인 구호기금으로 병원에 의약품을 기부하고, 파괴된 지역을 복구하기 위해 발전기를 보내는 등 지역 사회를 돕는다. 두 번째로 ‘리브이 버러(Livyj Bereh)’는 드니프로 강의 왼쪽(Left Bank)에 위치한다는 뜻의 이름의 자원봉사 단체다. 이들은 전쟁이 휩쓸고 간 지역의 지붕을 수리하는 등,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복구하는 데에 힘을 쏟고 있다.
K: 또한 클로저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도네이션 링크를 찾을 수 있다. 클로저는 키이우뿐만 아니라 베를린 등 다른 도시에서도 구호기금을 모으기 위한 파티를 주최하니, 좋은 음악을 즐기며 우크라이나를 돕고 싶다면 ‘클로저 투어(Closer Tour)’를 한번 체크해보기를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아티스트 개인으로서의 미래와 키이우 신의 비전에 대해 공유해준다면.
S: 최근 클로저 레코드 스토어를 닫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2015년부터 7년 동안 그곳은 내 자식과도 같은 존재였다. 클로저 레코드 스토어는 우크라이나에서 최초로 전자음악에 초점을 맞춘 레코드숍이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턴테이블을 구입하기도 전에 첫 바이닐을 사가곤 했다. 바이닐 문화의 기쁨을 나누는 여정의 안내자가 되는 것은 멋진 일이었지. 그러나 베를린에 살게 된지도 어느덧 1년이 넘었기에 새로운 시작을 위한 발걸음을 떼어야만 했다. 슬프지만 삶에는 언제나 변화가 따른다.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베를린에서 디제이 커리어, 가족과의 시간에 더욱 집중할 것이다.
K: 클로저 레코드 스토어에서 판을 사던 젊은이들은 여러 유망한 디제이와 아티스트로 성장하여 키이우 신에 점차 나타나고 있다. 그들 하나하나가 모두 키이우 신에 큰 힘이 될 것이다. 클로저 역시 새롭고 젊은 레지던트 디제이를 많이 영입했다. 전쟁이 끝난 뒤의 키이우는 새로운 사람들과 생기로 가득 찰 것이다. 계속해서 성장하는 우리의 신에는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Shakolin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Karine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이미지 출처 | Closer, Sasha Zmiievets/Mixmag
Editor | 진영
Photographer | Hansy
Special Thanks to | Technopho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