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일본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호주 태생의 배우 쿠츠나 시오리(Shioli Kutsuna)는 “데드풀 2″에서 인상적인 씬 스틸러로 활약하며, 단번에 전 세계 영화 팬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일본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다채로운 작품에서 모습을 보이던 그녀가 최근, 일본의 전통 국기인 스모를 주제로 한 화제의 넷플릭스 드라마 “리키시(Rikishi, 해외명 Sanctuary)”에서 열연을 펼쳤다.
일본인조차 쉽게 건드리지 않는 장르인 스모를 주제로 한 해당 작품은 자국민에게 자칫 예민할 수도 있는 스모 업계를 둘러싼 현실과 명암을 진지하게 탐구한다. 여기서 시오리는 스포츠 업계 내 여성의 지위와 일본 스모 업계의 보수적인 문화와 전통을 관객에게 가감없이 전달하는 렌즈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 촬영 기간 동안 일본 스모 협회는 프로덕션의 협조 요청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업계의 거친 현실만큼이나 드라마를 제작하는 일 역시 고된 여정이었을 것. 그녀는 좌천된 기자로 등장하는 쿠니시마 역을 맡아 스모 선수들과 함께 모래판을 뛰어다니며 끊임없이 일본의 오랜 전통에 의문을 제기한다.
당신이 누구인지 간략하게 소개해 달라.
쿠츠나 시오리라고 한다. 호주에서 태어났고, 14살 때부터 일본에 건너와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의 국기, 스모를 소재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리키시’가 화제다. 해당 작품에는 어떤 계기로 출연하게 됐는지 소개해줄 수 있을까?
할리우드로 진출하던 차에 오퍼가 왔다. 사실 정말 오랜만에 참여한 일본 작품이라 그런지 그만큼 신중하게 골랐다.
스모는 일본의 국가적인 스포츠로, 마치 한국의 씨름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문화이기도 하다. 이것이 지금 세대에게는 일종의 신선한 서브컬처로도 소비되는 거 같은데, 출연 전까지 스모라는 스포츠를 접한 경험이 있나?
어릴 적 주말에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NHK 월드라는 채널에서 스모 경기를 중계해주곤 했다. 매주 일요일, 일본에서는 스모 경기를 방송한 기억이 난다. 이번 작품을 하기 위해 따로 찾아보기도 했다.
일본의 국기인 만큼 철저한 현실 고증이 중요한 과제였을 거 같다. 실제 스모 업계에 속한 선수, 관계자들에게서 어떤 조언을 들었으며 무엇을 배웠는지 궁금하다.
이번 작품 제작 과정은 그야말로 험난했는데, 스모 협회에서 협력해주지 않아 더욱더 힘들었다. 현역의 어드바이스나 장소 협조 등 일절 지원받지 못했다. 따라서 무대 연출 역시 전부 다 세트로 진행했고, 실제 선수들의 출연 또한 불가능해 모든 배우가 1년 반 정도 스모 트레이닝을 거쳤다. 스모와 관련해 조언해주거나 트레이닝에 참여한 분들은 지금은 스모 업계와 관련이 없는 일반인이었다. 스모 자료 영상 또한 허가 받지 못했다.
촬영 현장의 분위기를 듣고 싶다. 거친 남자들의 세계인 만큼 극 중에서 부조리하거나 폭력적인 도장 문화가 노출되었는데, 실제로도 꽤 긴장된 분위기였는지?
촬영은 엄청나게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엄격했다고 해야 하나. 또한 드라마의 주제 또한 그간 신성시되어 온 스모라는 격투기 그리고 스모 업계의 실제를 드러내는 면이 있었기에 제작진 모두가 ‘우리가 업계에 파문을 불러일으키겠구나’ 하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아직 국내에서는 개봉하지 않았지만, 짐작하기로 본인이 맡은 쿠니시마 역은 위계질서가 강하고 보수적인 스모 문화, 일본 사회의 고정관념과 통념을 깨려는 기운 넘치는 지식인처럼 보인다. 호주 태생으로 서양권 문화에서 성장한 뒤 낯선 일본 사회를 처음 마주한 경험이 있는 시오리 본인의 성장 배경과도 잘 묻어나는 캐릭터 같다. 이러한 배역을 소화할 때 특별히 염두에 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내가 맡은 배역인 쿠니시마 아스카라는 인물은 본의 아니게 스모 업계를 취재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그 문화를 이해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그 문화에 좀 더 진지하게 접근하면서부터 업계 내의 잘못된 관행이나 문화, 질서와 전통에 퀘스천 마크를 던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단순히 스포츠를 넘어 신성한 종교의식처럼 존재하는 스모 문화를 흥미롭게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전통에 의문을 던지는 인물이다.
실제 나 또한 호주에서 살다가 14살 때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소위 컬처 쇼크를 경험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나 스스로 아웃사이더라 여기며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서와 분위기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때 느꼈던 고충과 경험이 이번 캐릭터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됐다.
또한, 기자라는 직업을 소화하기 위해 어떤 캐릭터 연구를 거쳤는지도 궁금하다.
캐릭터를 준비하긴 했지만, 너무 철저하게 연구하기보다는 촬영장에서 느끼는 대로 연기하는 데 집중했다.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사건이나 인물이 있다면?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렸을 때는 내가 배우로 성장할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해본 적이 없다. 사명감이나 운명 같은 말들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연기를 이어가다 보니 이제는 일종의 직업의식을 지니고 내 역할을 똑바로 완수하려고 한다. 수많은 직업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배우라는 직업은 지금 내게 잘 맞고, 또 즐겁게 임하고 있다.
당신이 연기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배우나 작품이 있다면 무엇인가?
당연히 좋아하는 배우나 작품은 있지만, 그것이 내 연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는다. 배우는 역시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 삶과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배우의 연기를 참고해서 연기하기보다는 내 삶에 집중했을 때 그것이 외려 연기를 더욱더 성장하게 하는 것 같다.
대학교에 진학했을 때 사진학과를 선택했다. 실제 사진 찍는 일도 즐긴다고 들었는데, 사진이라는 장르에 매력을 느낀 계기라면?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배우 활동을 했는데, 촬영장에 스틸 사진을 찍으러 오는 포토그래퍼들을 보면서 매력을 느꼈다. 필름 카메라로 촬영하는 모습이 되게 재밌어 보이더라고. 운 좋게도 RF 카메라 하나를 빌려서 그때 처음 찍기 시작했다. 나는 완전한 아날로그 세대는 아니라 그런지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놀면서 큰 재미를 느낀다. 사진을 찍고 나서 바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도 좋았다. 따라서 사진을 찍고 현상하고 실제 사진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배워보고 싶었다.
호기심을 느끼면 무조건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은데. 계속해서 더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나 취미가 있나?
호기심이 왕성해서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많다. 그림도 배워보고 싶고, 음악은 원체 좋아해서 매일 듣는다. 기회가 된다면 전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
당신에게 연기란, 평생의 업처럼 다가오는지? 아니면 긴 인생 안에서 도전하고 싶은 목표 중 한 가지인가?
사실 나는 1년 뒤 내가 뭘 할지조차 계획하지 않는 편이다. 지금 이 일은 나와 가치관이 잘 맞고, 그 자체로 내게는 사회생활이기도 하다.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기회도 생기니 배우는 참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일을 언젠가 못하게 되더라도 괜찮을 거 같다. 나는 꼭 뭔가를 이뤄내기 위해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배우로서 창작 활동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 매 순간 그 자리에서 집중하고 즐기는 삶 자체가 일종의 ‘표현’ 같기도 하다.
나 자신에 관한 평가나 잣대, 이미지 같은 것들에 엄청나게 예민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결국 중요한 건 내 주변이 아닌 나 자신인 거 같더라고. 따라서 그런 것들에 지나치게 휩쓸려 가면서 그들의 기준에 맞게 계속해서 변화하려 하기보다는 지금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느꼈다. 이때부터 내 삶은 완전히 변했고, 개인적으로는 삶의 혁명과도 같았다. 왜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것들을 지나치게 신경쓰고 살았을까? 그냥 나대로 살면 됐던 건데. 올해 나는 서른이 됐지만, 마치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다.
본인의 삶에 충실하는 일이 연기를 더욱더 성숙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연기하지 않을 때는 무엇으로 시간을 채우는가.
그때그때 떠오른 걸 하면서 재밌게 살려고 한다. 나는 배우로 살면서 수많은 배우나 연예인처럼 외부에 비치는 이미지를 신경 쓰며 개인적인 의견을 내거나 사생활을 드러내는 걸 꺼렸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니 삶이 편해지더라고.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있다. 그렇게 살아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 클럽에도 자주 가고, 어딜 갈 때마다 특별히 변장하면서 다니지도 않는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살아야 또 새로운 역할에 집중해서 몰입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그냥 편하게 생활한다. 일본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이지만, 그래도 나 같은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언젠가 내 다음 세대는 더욱더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Editor │권혁인
Photographer │전솔지
Special Thanks to │Clique Reco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