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Town Acid

세상에는 모든 영역에 보이지 않는 경계가 존재하지만, 그것을 과감하다 못해 아주 자연스럽게 뛰어넘는 인물 또한 등장하기 마련. 그러한 관점에서 코리아타운아시드(Korea Town Acid)는 참으로 독특한 아티스트다. 루이 비통의 초대로 한국을 방문한 뒤로 갑작스럽게 한국 일정을 2달이나 늘리며 직접 파티를 만들고 여러 공연에 정력적으로 참여하질 않나, 르세라핌을 보고 열광하고, 이센스를 자신의 최애 래퍼로 꼽기도 한다. 전자음악으로 ‘밥 벌어먹고 살면서도’ 힙합 아티스트들과 교류하며 곡 작업을 하는 등 감각적으로 오가는 그녀의 활동에는 제약이랄 것이 없다.

본인의 작업을 두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춰가는 일종의 타임캡슐이라고 밝혔듯, KTA는 당장 숨을 쉬고 있는 ‘현재’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오롯이 반영하고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근 두 달 남짓. 본거지 토론토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까지 제대로 처리한 KTA와 대화를 나눠보았다.


서울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약 2달간 쉬지 않고 매주 다양한 베뉴와 파티에서 긱을 펼쳤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익힌 로컬 클럽, 디제이 신은 어떤 모습이었나?

평소에 눈여겨보던 아티스트와 공연도 하고 대화도 나누며 계속해서 즐겁게 연결되었던 것 같다. 이태원처럼 클럽이 밀집된 동네를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워서 정말 물 만난 고기처럼 다녔지. 지금 이태원에서는 하우스, 테크노 장르가 주된 흐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베를린식 패스트 테크노를 들을 수도 있고, 좀 다양한 장르를 환영하는 케이크샵 같은 곳도 있고, 링처럼 좀 미니멀한 베뉴도 있으니 나는 그날 기분에 따라가고 싶은 베뉴에 가서 재밌는 자극과 영감을 받았다. DJ로서는 음악을 틀기 전에 미리 방문해 그 베뉴가 지향하는 사운드나 흐름 같은 것도 체크하면서 음악을 준비해 갔다. 어떤 베뉴에 가도 똑같은 바이브만 들려주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는 그 바운더리에 맞게 준비하는 게 재밌지 않나. 그래서 다양한 베뉴에서 긱을 했던 거 같다. 애초에 나 또한 다양한 바이브를 즐기는 편이라.

한국에서의 잊지 못할 2개월을 보내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많이 얻었다고 했다. 당신이 느끼는 대한민국과 서울은 어렸을 때 기억하던 그대로인가? 아니면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는지?

신세계지. 많이 바뀐 거 같다. 그래도 언어와 음식이 맞으니 또 바뀐 건 바뀐 대로 금세 적응했다. 원래 내 아이덴티티가 한국인이니 결국 이곳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매일 같이 인스타그램으로 내가 먹은 한국 음식을 업로드했는데, 그게 사실 정말 행복한 기분을 느껴서 그렇다. 한국인은 보통 잘 안 그러지 않나. 매일 먹는 음식이니까. 그런데 나는 정말 오래간만에 와서 한국을 즐기니 하루가 멀다하고 감동하는 거지.

서울에서 제일 맛있게 먹은 음식이나 식당 베스트 3을 꼽아보자면?

한방통닭, 숯불갈비. 삼겹살은 언제 먹어도 맛있고. 최근에는 장충동에서 족발 먹었는데 엄청나게 맛있더라고.

10살에 이민 가서 생활하며 아티스트로 영향받은 것들이라면 무엇인가? 음악적으로나 사고하는 방식이나 독특한 로컬 문화라든지.

한국인들 시선으로는 아무래도 아티스트, 그러니까 직업적으로는 프리랜서의 개념을 되게 한량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있는데 캐나다는 한국처럼 수능과 취업 문화로부터 오는 압박이 크지 않아서 자신의 삶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다양한 인종과 취향의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니 그런 다양성을 익혔다고 해야 하나. 내게 맞는 것들을 하나씩 커스터마이징하는 식으로 성장했던 것 같다.

유년기를 지나 사춘기에 접어드는 시기에 완전히 다른 환경에 놓이며 심적으로도 큰 변화를 겪었을 것 같은데, 본인의 음악적인 자양분에도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하다.

처음에는 말도 안 통하고 영어도 못해서 이어폰을 꽂고 살았다. 워크맨을 들으면서 나 혼자만의 음악에 빠지곤 했다. 한국에 있을 무렵부터 서태지, 유승준, 보아, 디바, SES 같은 케이팝을 즐겼고 캐나다에 가서도 꾸준히 한국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자연스레 한국힙합도 듣고 일본의 시부야케이에도 빠져있다가 라디오헤드(Radiohead), ATCQ, 다프트 펑크(Daft Punk), 케미컬 브라더스(Chemical Brothers)도 알게 되고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수많은 장르의 음악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워크맨부터 스포티파이까지, 모든 시대의 매체를 접한 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캐나다 또한 몬트리올이나 토론도 등의 도시가 지닌 음악적인 색채가 분명한데 그러한 영향을 받기도 했다.

각종 매체에 관한 기억이 아티스트에게도 좋은 영향을 줬을 거 같다.

당시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의 카세트테이프나 CD 포장지를 뜯던 기억은 지금 떠올려도 설렌다. 물론 요즘에는 유튜브나 스포티파이로 아주 쉽게 음악을 찾아 들을 수 있지만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성질도 좋아서 지금 작업 중인 앨범도 피지컬 카피를 낼 생각이다.

프로듀서로서의 KTA에 관해 묻고 싶다. 처음 작곡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그 창작의 발단은 어떤 과정으로 전개되는가?

리믹스 작업에서는 오리지널을 들었을 때 다가오는 영감을 중요시한다. 느낌이나 바이브 같은 것들. 곡 작업을 할 때는 일단 머신을 켜는 순간부터 시작이다. 일단 그렇게 앉아서 집중해보고 어떤 무드나 인스퍼레이션 등등 떠오르는 대로 작업하는 거지. 그런데 일단 머신 트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공부할 때 책상머리에 앉는 게 가장 어려운 일처럼 말인가?

그런 거다. 일단 앉고 틀어야지. 하하. 뭐 사운드가 어쩌고 밸런스가 어쩌느니 하는 것들은 그다음 일이다.

근래에 들어 즐기는 사운드나 작업 방식이 있다면 무엇인가?

계획적인 타입은 아니라 그때그때 다르긴 한데 뭐 요즘 카일 홀(Kyle Hall) 같은 아티스트의 작업들은 항상 좋아하고, 스티븐 줄리엔(Steven Julien)도 좋고. 반대로 팔레트 클렌징하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장르의 음악을 들으며 새롭게 귀를 정화하고 영감도 받는다. 그 음악, 장르 간의 거리(Distance)를 유지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한 거 같다. 프레임에 갇히지 않게.

2016년경부터 현재까지 몇 번의 앨범을 통해 다양한 장르와 사운드를 들려줬는데, 가족의 영향으로 클래식 피아노를 배우게 된 것이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가?

어렸을 때부터 드라마나 영화, 광고 음악을 따라 피아노 치는 걸 좋아했다.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 아티스트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어머니께 고맙지. 하하.

평소 협업하고 싶은 아티스트의 기준이 있다면.

보통 장르보다는 그 사운드 자체를 따라가는 편인데, 내가 좋아하는 곡들은 대개 레프트필드의 무디한 요소, 재즈에서 영향받은 코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 사운드를 낼 줄 아는 아티스트에 꽂히는 거 같다. 자신의 고유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아티스트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앨범 [Metamorphosis]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영감을 받으면 그때그때 작업으로 옮겨서 타임캡슐처럼 기록하려고 한다. 나는 내 인생의 순간들, 그때의 감정선을 표현하는 타입인 거 같다. 이 앨범은 코로나 시기에 만들었다. 팬데믹 전에는 뉴욕에서 활동했고, 에이전시에 소속된 아티스트였기 때문에 DJ 친화적인 뱅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감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팬데믹이 도래하고, 집에서 지내는 날이 많아지며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음악, 취향의 근간 중 하나인 힙합을 다시 찾게 됐다. 동시에 퓨처 베이스, 클라우드 랩, 정글 등으로 다양하고 트렌디하게 풀어내고 싶었다. 이런 작업 과정 자체가 마치 거울처럼 나 자신의 성장 과정과도 비슷해서 ‘탈바꿈(Metamorphosis)’이라 지었다. 내 작업 중 가장 완성도 있는 앨범인 거 같아서 좋다.

[Elephant In The Room] 또한 다양한 장르가 뒤섞여있다.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앨범인가?

청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난해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 앨범을 만들 때는 팬데믹이 끝나기 직전의 시기라 아주 어두웠고, 때마침 이별을 겪은 상황이었다. 안 좋은 상황이 겹치면서 힘든 내 마음이 반영되었고, 아트워크를 담당한 ‘Peter Chan’ 또한 그 스토리텔링을 잘 그려주었다. 앨범 제목은 ‘누구에게나 뻔히 보이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문제’ 같은 의미다.

차기 앨범에는 어떤 로컬 뮤지션들이 참여하는지 귀띔해줄 수 있나?

한국에 머무는 기간 동안 나와 어울렸던 뮤지션들, 이를테면 도나 골든(Donna Goldn)이나 델리카마(Delic’amarr)와 같은 아티스트가 참여할 예정이다.

영감과 아이디어가 흘러들어오는 좋은 작업 시간대라면 언제인가?

난 의외로 아침형 인간이라 정오에서부터 오후 4시까지가 피크타임이다. 작업할 때 가장 최적화된 환경은 아침에 일어나 오전 10시에 밥 먹고 커피를 마셨을 때, 아니면 4시쯤 두 번째 커피를 마셨을 때.

아티스트로서 다양한 나라에서 공연을 펼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긱이라면?

언제나 순간에 집중하는 타입이라 오래전 일은 굳이 기억하지 않는다. 근래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역시 SCR 찜질방 레이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보통 파티에 가면, 사람들의 패션에도 눈이 가기 마련이지만 이번에는 모두 똑같은 옷을 입으면서 놀다 보니 음악만으로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는 바이브를 느꼈다. 찜질방이라는 한국 고유의 문화를 활용한 참신한 사례이기도 하다. 당시 어떤 음악으로 분위기를 이끌어야 할지 고심했는데, 예상 범위 내의 테크노 경계를 넘어 저지클럽, 풋워크, 주크 그리고 애시드한 트랙들로 내 스타일을 드러낼 기회였다. 그리고 친구가 사준 식혜가 정말 맛있던데.

찜질방 레이브에서의 셋이 여타 긱과는 다르게 좀 더 본인의 바이브에 집중했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그렇다. 찜질방 안에 코인노래방도 있었는데, 마치 동양에서 일반적으로 음악을 즐기는 가라오케 문화와 서양의 레이브가 공존하는 공간이라는 점이 신기했다. 난 노래방도 엄청나게 좋아한다. 럼블피쉬의 “예감 좋은 날”이 내 애창곡이다. 앞서 말했듯, 다양한 음악을 즐기는 편인데 샤워할 땐 또 쳇 베이커(Chet Baker)의 재즈를 듣는다. 아무리 클럽 뮤직으로 먹고살고 있더라도 일상에서는 은근히 거리를 둔다. 그래야 클럽 뮤직을 더 사랑할 수 있다. 치즈 돈가스를 매일 먹을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다른 음식들도 먹어야 치즈 돈가스를 가장 맛있게 먹지.

이외에도 쿤스타쉬(Kunstash)에서 소울스케이프(DJ Soulscape)와 함께한 긱도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교 때부터 소울스케이프의 음악을 들었던 팬이었는데 2019년에는 아티스트로서 그가 진행하는 월드와이드 FM 라디오에 초대받으며 소위 말하는 ‘성덕’이 된 거지. 실제로 공연까지 이어지게 됐으니 무척 각별하다.

한국에서 지내며 교류한 다양한 뮤지션, 아티스트 중 기억에 남는 이들이라면?

스트릭틀리 바이닐(Strictly Vinyl) 파티에 놀러 갔을 때 우연히 우원재를 만나 음악 얘기를 나눈 것. 르세라핌과 한 무대에서 공연한 것. 김심야의 사인을 받은 것. 이 모든 커넥션은 이곳이 한국이고 내가 한국인이라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그런 우연이 주는 기회들이 나를 계속해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듯하다.

직접 레지던트로 활동 중인 브루클린의 더 랏 라디오(The Lot Radio)에서의 플레이를 인상 깊게 지켜봤다. 지금 시대의 인디펜던트 라디오나 뮤직 플랫폼, 즉 비디오와 오디오를 각자의 취향에 맞게 발전시킨 더 랏 라디오, NTS, HOR와 같은 플랫폼이 아티스트와 리스너에게 주는 긍정적인 영향이란 무엇인가?

자리 잡은 아티스트나 이제 막 떠오르는 아티스트나 로컬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시그니처 사운드를 들려줄 수 있어서 좋다. 우선 베뉴 긱과는 다르게 바운더리를 굉장히 넓게 가져갈 수 있으니 해보고 싶은 걸 마음껏 해볼 수 있지 않나. 그런 라디오가 사실 아티스트로서는 최적화된 환경이다.

내가 참여 중인 더 랏 라디오는 로컬 신에 매우 큰 영향력을 지닌 라디오다. 알다시피 뉴욕은 매우 다양한 아티스트가 투어하러 오는 도시다. 나 또한 긱이 잡혀 뉴욕으로 종종 가곤 했는데, 겸사겸사 컨택했더니 그들이 흔쾌히 받아주었다. 뉴욕은 원체 다양한 음악에 정통한 이들이 많다 보니 나 또한 플레이할 때마다 장르를 바꿔가며 틀었다. 그러다가 일종의 레지던트가 되었는데, 뉴욕에서 접하기 힘든 음악을 들려주려고 하다 보니 나중에는 일종의 실험처럼 ‘쇼미더머니’를 위시한 한국 힙합 트랙까지 틀었다. 나는 캐나다와 뉴욕을 오가며 활동하지만, 한국힙합을 향한 애정이 원체 크기에 그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하려고 한다.

당신이 느낀 뉴욕과 서울 언더그라운드 신의 비슷한 점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점이라면?

서울이나 뉴욕이나 좋은 건 클럽이나 신이 특정 지역에 몰려있기 때문에 경쟁하는 부분은 분명 힘들어도 아티스트에게는 더욱더 큰 자극과 영감을 주는 환경 같다. 기회가 많고 열려있으니 아티스트들이 실력이 있다면 잡을 수 있다. 두 도시의 차이라면 아무래도 서울은 모든 게 너무나도 가깝다는 것? 좋은 점도 있지만 한 베뉴와 파티에 온전히 집중하기엔 다른 유혹이 많지 않나. 하하.

본인의 페르소나 코리아타운아시드와 제시카 조는 얼마나 거리를 두는가?

이것도 앞서 말했듯, 내 작업은 언제나 내 현재와 그 순간을 표현하는 타임캡슐 그 자체라 딱히 코리아타운아시드와 제시카 조가 구분되는 자아라고 여기진 않는다. 한국을 좋아하는 내 성향과 애시드, 무디한 분위기를 즐기는 개인적인 성향 그 자체가 이름에 자연스레 반영된 것이다.

이제 서울에서 새로운 인생을 계획 중이라고 들었다. 큰 결심인 것 같은데 캐나다에서 짐을 싸고 다시 한국에 오려고 마음먹은 가장 큰 계기는?

반찬, 찌개. 하하. 진짜 그건데. 편의점에서 바나나 우유를 사 먹는 소소한 행복 같은 것들. 좀 더 일로서 접근하자면 음악을 만드는 작업 외에도 다른 일을 서울에서 벌이고 싶다. 아티스트를 발굴하거나 국내 아티스트와 해외의 아티스트를 연계하는 일? 특별히 어떤 회사 개념에 집중하기보다는 내 경험과 안목을 살려서 음악과 관련된 다양한 일을 해보고 싶다.

Korea Town Acid 인스타그램 계정


Editor│권혁인 강재욱
Photographer│한예림

RECOMMENDED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