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부터 2008년까지, 뉴욕 시네필들의 성지로 잡리 잡았던 비디오 가게 ‘킴스 비디오(KIM’S VIDEO)’는 예술, 컬트 영화를 사랑하는 젊은 영화 팬뿐 아니라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 스파이크 리(Spike Lee), 밥 딜런(Bob Dylan) 등 지금은 너무나 유명해진 젊은 시절의 감독들과 대학 교수들 모두가 함께하는 영화 커뮤니티였다. 디지털 매체가 영화 시장을 장악한 이후 아쉬움을 삼키며 문을 닫아야 했던 2008년, ‘킴스 비디오’는 55,000편의 비디오를 이탈리아의 소도시 살레미에 기부하기로 한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컬렉션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 혁명의 바람이 불어야 할 살레미가 의외로 잠잠하기만 하다.
오늘 27일 개봉한 “킴스 비디오”는 살레미에 잠들어 있는 비디오 컬렉션을 추적하며 뉴욕의 시네필 문화를 되돌아보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킴스 비디오’를 운영하던 김용만 대표는 당시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를 직접 만나 ‘킴스 비디오’의 시작과 그간의 이야기 그리고 집착과도 같은 그의 영화 사랑을 들어 보았다.
영화 “킴스 비디오”의 전주국제영화제 상영 당시 반응이 상당히 폭발적이었다. 특히 상영 직후 10~20대 젊은 관객이 줄지어 사인을 요청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국내에서 정식 개봉하게 된 소감은 어떤가.
고국 청년들을 만난다는 점에서 긴장되지만 동시에 흥분된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굉장히 들뜬 상태였다.
영화과 졸업 이후 곧장 비디오 사업에 매진한 건 아니라고 들었다. ‘킴스 비디오’의 출발이 궁금하다.
‘이스트빌리지(East Village)’라는 굉장히 특수한 지역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의 영향이 컸다. 24살에 미국에서 ‘Kim’s Produce’라는 조그마한 식료품점으로 생계를 위한 첫 사업을 시작했다. 작지만 내가 소유한 플랫폼이 생기니까, 그 공간이 사업장이기 이전에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중요한 장소가 되더라. 자연스럽게 내 영화에 대한 열정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다. 장사를 하다 보니 사업이 확장되고, 교류할 수 있는 친구들이 늘어나면서 1년 만에 7~8배 더 큰 장소로 옮기게 되었다. 직원이 늘어나면서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영화를 공부하면서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영화에 진입할 것인가에 관해 많이 고민했다. 특히, 학교에서는 가르쳐도 도서관에서는 구할 수 없는 영화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이런 영화를 발굴해서 매장에 비치하고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 칸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더라. 마침 당시 동네에 세탁소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세탁소를 운영하기 위한 부지를 알아보고 있었다. 막상 가게를 얻고 보니 세탁소만 하기에는 공간이 너무 컸다. 그래서 공간 일부에 비디오 1,700여 개를 비치했던 게 첫 시작이었다. 돈을 벌기 위한 게 아니었다. 그저 평소 좋아했던 것을 재미로 시작한 셈이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킴스 비디오’가 자리 잡은 미국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중심지인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풍경이 궁금해진다. 당시 이스트빌리지는 어땠는가.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가 23살이었다. 당시 이스트빌리지는 뉴욕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알파벳 시티(Alphabet City)라고 불렀다. 마약 딜러와 홈리스가 가장 많이 살던 곳이었고, 길이나 공원에는 홈리스로 가득했다. 워낙 빈 건물이 많았던 지역이었다. 이스트빌리지가 알파벳 시티라고 불리던 이유는 단순한데, 내가 처음 정착했던 거리가 A, 뒤이어 다른 지역들을 B, C, D로 구역에 알파벳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알파벳 시티에는 주로 가난하지만, 미술, 영화, 음악 등 예술 분야에 열정이 있던 젊은이들이 모여 살았다. 상대적으로 방세가 저렴하니까,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이 모이면서 특수한 지역이 된 셈이다.
70~80년대 초반까지 이스트빌리지에는 히피 문화가 굉장히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본토 예술가들이 모였던 맨해튼과 달리 이스트빌리지, 알파벳 시티는 유럽, 일본 등 전 세계에서 모인 젊은 아티스트가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미국적이지 않은 문화가 자국의 히피 문화와 결합되면서 굉장히 특별한 문화가 탄생한 거지. ‘킴스 비디오’가 그런 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 셈이었다.
‘킴스 비디오’의 손님 중 히피도 많았나.
그렇다. 다만, 히피라고 규정하기보다는 히피 문화에 심취한 사람들이라고 하자. 보통 이런 사람들은 특히 음악을 중심으로 결속됐다. 사실 ‘KIMS’ VIDEO’의 정식 명칭은 ‘KIMS’ VIDEO & MUSIC’이다. 한국에서는 비디오 가게로만 많이 알려져 있지만, 언더그라운드 음악 측면에서도 30년 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영화의 초반부, 그 시절 ‘킴스 비디오’를 회상하던 사람들은 당신의 존재를 베일에 가려진 사람처럼 묘사했다. 다양한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가 모인 이스트빌리지에서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당시 나이가 20대 중후반이었는데, 상당히 도전적이고 부지런하게 살았던 것 같다. 학교도 성실히 다니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면 주저 없이 도전했다. 어찌 보면 당시 일반적인 한국 청년의 모습이었지만, 헝그리 정신도 있었으니 주위에서는 조금 특이하게 봤을 수도 있겠다.
처음 ‘킴스비디오’를 설립할 때부터 독특한 포지셔닝으로 알려졌다고 들었다. ‘킴스비디오’가 영화를 공수하고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이었나.
사실 복잡할 것 없이 아주 간단했다. 나도 학생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보통 그런 영화는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수준에서 끝난다. 영화의 길고 짧음의 문제를 떠나 감독이 한 작품을 만드는 데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가. 이런 작품은 더 많은 관객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내 소유의 공간이 생기면 이런 영화를 접할 기회를 최대한 제공하고 싶었다. 그런 기준으로 ‘킴스 비디오’의 비디오 컬렉션들을 채워가다 보니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인정받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예술, 컬트 영화의 비디오, CD를 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영화 아카이브로서의 기능까지 한 셈인데, 비디오를 구하는 와중 혹은 이후 저작권이나 보관, 유통 등과 관련해 당시 해프닝도 있었는지.
‘킴스 비디오’ 컬렉션이 어느 정도 정돈되던 1986년 당시 가장 아쉬웠던 점이 한국 영화 섹션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한국 영화를 좀 선보이고 싶다는 욕심에 지인들을 통해 원하던 20여 개의 타이틀 리스트를 구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몇몇 사람과 컨택이 닿았지만, 요구하는 금액이 터무니없더라. 80년대만 해도 누가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명해야 하는지 등 계약 주체와 관련한 문제가 상당히 정리되지 않았던 터라 일을 진행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뉴욕에 있는 한국문화원을 방문했는데 원하던 영화가 전부 있었다. 며칠간 동태를 살펴보니 빌려가는 사람도 없어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문화원에서도 얼마든지 빌려가라 길래 보고 싶던 영화들을 골라 복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든 한국 영화 섹션이 가게 손님에게도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프랑스 문화원도 방문했는데, 역시 컬렉션이 대단하더라. 한 번에 두, 세 개 정도만 빌려주겠다는 말에 부지런히 다니면서 부지런히 복제했다. 한국 영화와 달리 PAL 시스템이다 보니 VHS로 변환하는 과정만 겪으면 보물 같은 영화들을 얻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비치해 놓은 프랑스 영화가 루이스 부뉴엘의 “세브린느(Bell de Jour)”였다. 처음에는 카피 한 개만 두었는데, 그야말로 난리였지. 나중에는 10여 개로 늘려도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그 뒤로는 프랑스 영화뿐만 아니라 동유럽 영화도 확보하기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문화원, 헝가리 대사관, 유고슬라비아 문화원 같은 곳들을 전전하면서 최대한 빌릴 수 있는 대로 빌렸다. 그야말로 보물 단지를 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1년도까지는 미국 내에 판권을 가지고 있는 타이틀이 거의 없다 보니 ‘킴스 비디오’가 독보적인 컬렉션을 확보한 셈이다. 그래서 뉴욕 대학교 교수부터 파슨스, 뉴스쿨 등의 영화과 교수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본인들도 보고 싶어 하던 영화들이 킴스 비디오에 쌓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런 컬렉션만 중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장, 단편 가리지 않고 유통이 되지 않는 독립 영화도 제한적이었지만 ‘킴스 비디오’에서 유통했다. 독립 영화 역시 상당히 많은 이가 대여하고 구매해 갔다.
초기에 복제한 한국 영화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나.
처음 빌려온 영화가 10여 편쯤 됐는데, 그중에는 김기영, 유현목 감독의 작품이 많았다. 특히, 김기영 감독의 호러물은 상당히 반응이 뜨거웠다.
당시 뉴욕 타임즈에서 ‘킴스 비디오’ 점원들의 태도에 대한 기사가 발행된 적이 있다. 좋게 말하면 고집, 나쁘게 말하면 건방짐으로 묘사되었던데, ‘킴스 비디오’만의 영업 방침이나 철학 혹은 내세우고 싶었던 태도가 있었는지.
당연히 프라이드가 있었다. ‘킴스비디오’의 직원 모두가 영화, 음악에 관한 전문가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당시 직원 중에는 지금 할리우드에서 크게 활약하는 감독이나 뮤직 프로듀서가 된 친구도 여럿 있다.
내가 직원을 뽑는 기준이나 교육하는 태도는 단순했다. 미국에서 할로윈이 되면 “Trick or Treat”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나. 우리는 이 말을 조금 바꾸어 “Trick or Catering”이라는 표현을 썼다. 영화를 잘 아는 손님의 경우에는 간단한 표시만 붙여 놓아도 금세 영화를 파악한다. 하지만 드라마, SF 등의 구분법이 보편적인 일반 비디오 대여점에 익숙한 손님이 ‘킴스 비디오’에 오면 그들이 원하는 필름을 찾는 데 애를 먹는다.
‘킴스 비디오’의 진열장은 감독 혹은 각본가나 배우 단위로 세분화되어 있었다. 섹션부터 일반 대여점과는 완전히 다르다 보니 여기가 낯선 손님은 불평하기도 했지. 그래서 나는 직원에게 이런 손님을 위해 케이터링을 하라고 교육했던 거고. 영화를 잘 알지 못하는 손님에게 좋은 영화를 보게끔 하자는 의도였다. 따라서 손님에게서 항의 편지도 많이 받았지만, 거기에 개의치 않고 ‘킴스 비디오’만의 자부심을 지키자는 말을 많이 했다.
영화를 보면 2008년 폐업 전, ‘킴스비디오’는 디지털 시대에 맞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려는 시도 역시 진행했던 것 같은데.
98년 즈음부터 스트리밍을 준비했다. 온라인 판매도 상당히 일찍 시작한 편이었지. 당시 ‘킴스 비디오’ 이용자가 일 평균 15,000명 정도였는데, 거기서 나오는 수익 상당 부분을 새로운 트렌드를 대비하는 데 재투자했다. 그때만 해도 넷플릭스(Netflix) 보다는 아마존(Amazon)과의 경쟁을 대비했다. 그런데 온라인 사업 환경은 지금까지 ‘킴스 비디오’가 걸어온 길과는 완전히 달랐다. 딱 밑 빠진 독에 뭍 붙는 느낌이었다. 여러 번 온라인 사업이 좌초되고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5~6년을 노력했지만 도저히 감당이 안 되더라.
나도 개인 사업 위주로만 박식했고, 우리 직원도 영화나 음악에 대한 지식만 많았던 터라, 외부 자금을 통해 신규 사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마존도 한 7~8년간 계속 적자였지만, 공적 자금의 힘으로 성공하지 않았나. 천문학적 돈이 조달되어야 했고, 미래를 보고 투자했어야 했지만, 사업 수익으로만 투자했던 점이 아쉬웠다.
제일 어려웠던 건 데이터베이스 작업이었다. 비디오가 50만 개, 음반이 200만 장 정도 되다 보니 하나하나 직원들의 수작업으로 데이터베이스에 옮기는 일이 쉽지 않더라. 5년 정도 진행하다 보니 자금도 고갈되고, 내가 무모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넷플릭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킴스 비디오’를 운영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플랫폼인 넷플릭스를 어떤 관점에서 시청하는지 궁금하다.
2008년 문을 닫을 때만 해도 넷플릭스가 대단한 상대라고 생각했다. 근데 지금 보니 내가 오판한 듯하다. 물론 나도 넷플릭스를 이용하지만,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콘텐츠가 특별해 보이지 않거든. 오히려 왜 그 때 ‘킴스 비디오’가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에 겁을 먹고 문을 닫았는지 후회하기도 한다. ‘킴스 비디오’가 자랑하는 수많은 비디오, 음반을 DB 작업을 통해 스트리밍을 했다면 충분히 승산 있지 않았을까.
넷플릭스 같은 OTT 플랫폼의 성공 비결은 알고리즘에 의한 추천이라 할 수도 있겠는데, 지금의 영화 관람 지형도와 당시 ‘킴스 비디오’의 큐레이션의 차이가 있을까?
당연하다. 넷플릭스의 알고리즘은 관객이 조금은 게을러도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만든다. 하지만 킴스 비디오의 ‘큐레이션’에는 관객에게도 기초적인 영화 지식을 요구한다. 만약 ‘킴스 비디오’가 새로 스트리밍 서비스를 진행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넷플릭스처럼 전 세계 인구를 타깃으로 삼지는 않을 거다. 소수지만 영화에 진짜 애정이 있고, 영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이겠지. 그 자체가 ‘킴스 비디오’의 정체성이니까.
당시 ‘킴스 비디오’가 소장한 컬렉션의 행방이 궁금하다. 살레미로 보낸 ‘몬도 킴’ 지점의 컬렉션 외에는 어디로 갔는가?
매장을 단계적으로 하나씩 닫았다. 첫 매장을 닫았을 때 컬렉션이 3만 개였다. 만약 손님들에게 개당 20달러 정도에 팔았다면, 60만 달러 정도의 돈이 생겼겠지. 하지만 ‘킴스 비디오’의 컬렉션은 관객의 것이다. 그래서 첫 번째로 동국대학교에 첫 3만 편을 기부했다. 그다음 매장을 닫았을 때 나온 3만 편 정도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으로, 세 번째 가게의 컬렉션은 나의 모교로 향했다. 콜롬비아 대학에도 4만 5천 개를 기증했고. 이런 식으로 가게를 닫을 때마다 크고 작은 기관에 모두 보냈다.
영화에서 자세히 등장하지만, ‘몬도 킴’의 컬렉션이 살레미로 향하게 된 계기도 궁금하다.
가장 아꼈던 컬렉션이 바로 ‘몬도 킴’ 지점의 5만 5천 개 컬렉션이었다. 처음에 이 컬렉션을 시실리에 기증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많은 뉴요커가 왜 하필 시실리냐고 반발했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뉴욕, 뉴저지 근교에 이미 15만 개가 넘는 컬렉션을 충분히 기증했다. 이것마저도 뉴욕에 남겨야 하나”라는 마음이었지. 사실 시실리에 컬렉션을 보내기로 결정했을 때는 스카르비 시장, 토스카니와 함께 큰 그림을 논의했다. ‘디지털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 혁명을 통해 시실리에서 네오 르네상스를 다시 시작하자는 이야기였지.
여러 감독으로부터 수 차례 다큐멘터리 제작 요청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하는데, 데이비드 레드먼(David Redmon), 애슐리 사빈(Ashley Sabin) 의 작품에 응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2008년에 마지막으로 ‘킴스 비디오’의 문을 닫고 홀가분해지고 싶었고, 떠나고 싶었다. 영화의 ‘영’ 자만 나와도 골치 아팠으니까. 그래서 이듬해 1월 멕시코로 떠났다. 큰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이었고, 돈을 벌어서 간섭 없이 내가 진짜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고, 또 영화를 만드는 후진을 도와주면서 새로운 형태의 플랫폼을 만들고 싶었다.
당시 한국에서 상용화됐던 태양광 가로등 사업을 멕시코에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순조롭게 진행되나 했지만, 공무원들의 부패로 3년 간 아무리 일해도 남는 게 없더라. 그러던 와중 데이비드와 애슐리로부터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생각 없다. 나는 이제는 완전히 잊혀진 사람인 만큼,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다”라고 전했는데, 2년이 지나고 다시 연락이 왔다. 날 꼭 만나야 한다더라. 그래서 그럼 한국으로 오라고 했다. 영화에서 그들이 날 처음 발견한 장면이 바로 그 이야기다. 만나고 보니 데이비드가 벌써 내 의사와 상관없이 3년 동안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찍어 놓았던 상태였다. 내가 거절해도 계속할 것만 같더라고. 그래서 데이비드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
여러 차례 작품을 봤겠지만, 데이비드와 애슐리의 결과물이 마음에 드는지.
상당히 재미있었다. 인상깊은 부분은 데이비드가 ‘킴스 비디오’가 뉴욕에 있었기 때문에 뉴욕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고백이었다. 데이비드뿐만 아니라 ‘킴스 비디오’ 때문에 많은 사람이 뉴욕에 정착했다. 사실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쿠엔틴 타란티노가 웨스트 빌리지에 정착한 데는 ‘킴스 비디오’의 힘이 컸지.
영화 초반, 소장품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고백했지만, 끝내 반환 과정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무엇이 마음의 변화를 일으켰나.
데이비드는 무조건 들이미는 성격이 나와 비슷하다. 어떤 상황이나 아이디어가 생기면 주저하지 않는 것. 그래서인지 내가 거절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영화에도 나오는 농담처럼 “너의 절도를 고다르가 도왔다면, 신이 도운 것이니 이 일은 분명 잘 될 거다”라는 말을 해줬다.
실제로 두 감독이 이런 방식으로 영화와 비디오들을 구출할 줄 예상했나.
엉뚱한 친구들이라는 건 알았기에 평범한 방법은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이런 기획까지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 ‘킴스 비디오’의 소장품 일부를 소장하고 있는 알라모 드래프트하우스와의 인연은 어떻게 이뤄졌나.
데이비드가 컬렉션을 가져오자고 제안했을 때, 처음에는 살레미 사람들을 설득해서 활용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했다. 유능한 스태프를 프로그래머로 보내서 이탈리아 섹션부터라도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활용하는 식으로 설득했다. 하지만 그것마저 좀 어려웠다. 데이비드는 이 제안 처음부터 설득이 불발된 뒤 상황을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만약 컬렉션을 다시 가져와야 한다면, 그전에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기관으로부터 서면으로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러 기관을 데이비드가 상대하다가 알라모 드래프트 하우스(Alamo Draft House)의 CEO인 팀 리그(Tim League)하고 연결이 되었다. 팀도 킴스 비디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킴스 비디오의 합류를 반기며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젊었을 때는 영화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당시 이야기도 궁금한데.
‘킴스 비디오’는 한편으로 프로덕션 회사이기도 했다. 당시 내가 만든 첫 작품이 “메이드 인 뉴욕(Made In New York)”이었는데, 당시 내가 뉴욕에서 활동했기에 그런 타이틀을 정했다. 프로덕션을 만들었던 이유는 첫째로, 언더그라운드 영화인들을 서포트하기 위함인 동시에 스스로 대본을 자주 쓰는 만큼, 내 방식대로 실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당시 제작한 “One-Third”라는 작품도 상당히 실험적이다. 영화는 시각 매체이기 때문에 대사가 오히려 영화 관람을 방해한다는 입장인데, 그래서 “One-Third”는 음악이나 효과음은 있지만, 대사는 없는 무성 영화로 제작했다. 영화를 나만의 방식으로 독특하게 만들어보자는 목적으로 프로덕션 회사를 만들고 스스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 사업과 스트리밍을 준비하면서, 프로덕션 쪽 일을 거의 못하게 됐다.
당신에게 영화와 비디오는 단순한 소장품, 사업 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 같아 보인다.
영화는 인간 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최고의 매개체다. 영화 얘기를 하면 국적, 언어와 상관 없이 모두가 마음을 연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어느 지역에서나 영화 얘기로 선입견이나 거리감이 단번에 줄어드는 경험을 많이 했다. 영화가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하는 거지.
자극적인 상업 영화들은 관람 후에 남는 것이 없다. 하지만 정말 좋은 영화라면 장면 하나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이런 장면을 서로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영화는 소통의 매개체로 단연 최고다. 영화가 가지는 힘을 깨닫고 서로 교류하는 것, 그것이 ‘킴스 비디오’가 케이터링을 강조했던 이유기도 하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킴스 비디오를 운영하면서, 또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이걸 좀 픽션화해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다. 나름대로 내가 살아온 인생을 줄여서 10페이지 분량의 이야기를 써보기도 했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이탈리아를 경유하는 여정이 상당이 흥미로울 것 같다. 현재 미국에서 제작자를 찾고 있다. 좋은 제작자가 나타나면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싶다.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서의 상영 당시, 수많은 한국의 젊은 시네필이 당신이 구축한 영화 제국에 큰 감동을 받았다. 한국의 관객 그리고 영화인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다면?
우선 지금은 1980~2000년대보다 영화를 만드는 환경이 훨씬 나아졌다. 그렇기 때문에 제발 주저 말고 저질러라. 자신만의 것을 일단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비슷한 사람들을 일단 모아야 한다. 독자적으로 진행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커뮤니티가 만들어져야 한다. ‘킴스 비디오’처럼 조그마한 플랫폼도 좋은 동력이 된다. 요즘 시대에 굳이 물리적인 공간일 필요도 없다. 온라인 공간에서 만든 작품을 많은 관객과 맞닿을 플랫폼을 구축하길 바란다. 지자체나 공기업 등을 통해 금전적인 지원을 받으려면 일정한 규모가 필요하다. 그런 커뮤니티를 조직하기 위해서 일단 저질러 보는 태도가 중요할 것 같다.
또 관객에게는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의 무모한 도전이 가능하면 한국의 젊은 관객에게 긍정적이고 생산적으로 보였으면 한다. 일각에서 불법 복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킴스 비디오’ 직원에게 자주 이야기 하던 말이 있다. 저작권도 물론 중요하지만, 작품에 혼신의 힘을 다한 작가들의 열정을 상업적으로 돈이 안 된다고 묵혀두는 건 더 큰 죄라고. 관객이 볼 권리가 당신들의 상업적 이익에 우선한다고. FBI가 우리 직원 10여 명을 체포한 적도 있다. 나는 그럼에도 다시 작품을 섹션에 올려놓았다. 직원과 손님 중 어느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지지해 줬다. ‘불법’이나 ‘부틀렉(Bootleg)’이라는 언어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그 안의 의도를 봐주면 더 좋겠다.
Editor | 장재혁, 최현수
Interviewer │최현수
Photographer | 유지민
이미지 출처 | NY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