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거(TENGGER), 몽골어로 ‘경계 없이 큰 하늘’이라는 뜻처럼 큰 하늘 아래를 여행하며 국경, 자연과의 경계를 두지 않는 여행자 가족 밴드가 새 앨범 [TENGGER]을 통해 초심을 되짚고자 한다. 한국인 있다(Itta)와 일본인 마르키도(Marqido)가 만나 그룹 10(Ten)을 결성했고, 둘 사이에 라아이(RAAI)가 태어나자 자연스럽게 3인조로 활동한 지도 약 10년. 가족이기에 사적인 연애사, 가정사를 들추는 게 아닐까 조심스러웠지만, 그들의 초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있다와 마르키도가 만나 텐거가 결성한 과정 또한 알아볼 필요를 느꼈다. 이제 하단에서 텐거 가족 개개인의 연혁을 두고 나눈 대화문을 살피자. 새 앨범 [TENGGER]와 함께 스크롤을 내리면 더욱 좋다.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여행하는 가족 밴드 텐거다. 한국인 있다, 일본인 마르키도, 둘 사이에 태어난 새 생명, 이제는 만 11세가 된 라아이가 그 구성원이다.
마르키도와 있다는 서로 어떤 계기로 알게 되어서 가족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있다: 불가사리(Bulgasari)’라는 실험 음악, 예술 공연 시리즈의 레귤러 멤버로 활동하던 2005년 무렵 마르키도가 ‘불가사리’에 아티스트로 참여하며 만났다. 해외 실험음악가가 꽤 많이 왔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아티스트가 마르키도였지. 사실 2004년 10월에 마르키도가 첫 한국 내한 공연을 진행한 적이 있다. 아쉽게도 공연 전날에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공연은 못 봤지만, 병원과 가까이 거주 중이던 음악가 사토 유키에의 집에서 처음 만났지. 불가사리는 이듬해 5월에 마르키도의 월드 투어 일환으로 다시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불가사리’라는 실험 음악 이벤트가 흥미롭다. 어떤 이들이 참여했나?
있다: 불가사리 이벤트가 열릴 때마다 마치 서클 활동처럼 참여하는 해외 아티스트 그리고 여러 가지 실험 공연을 함께하는 한국 거주 뮤지션을 통틀어 레귤러 멤버라고 칭했다. 그때 당시 레귤러 멤버는 사토 유키에, 서교동, 합정동, 연남동 등에서 ‘요기가 표현 갤러리’를 운영했던 이한주, 아스트로노이즈의 홍철기, 최준용, Joe Foster, Bonnie Jones, Alfread Harth, 이성록, 강민석, 김책, 김윤태, 박다함 그리고 나 정도였던 것 같고, 최선배 선생님이 가끔 함께한 걸로 기억한다.
‘불가사리’에서 마르키도 공연은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는지?
있다: 일본 인형 같은 짧은 단발머리를 한 마르키도가 테이블 위에 랩톱 한대를 앞에 놓고 서서 연주하는데, 너무 강렬했다. 내가 본 랩톱 연주 실험음악가들은 모두 사무직 일을 수행하는 듯한 심드렁한 표정의 연주자뿐이었는데, 이 사람은 완전히 달랐다. 몸의 움직임과 사운드가 일치했다. “그래서 센서를 달고 있는 걸까?”라며 공연이 끝나고 물어볼 정도였다. 무엇보다 눈이 너무 빛났다. 천진한 아이의 눈빛 그 자체였다. 그 공연을 보면서 나는 ‘아, 이 사람과 나는 이어져야 한다’ 같은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뭐 한마디로 말하면 첫눈에 반했다. 내가 마르키도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유키에에게 말했더니, 뒤풀이 자리에서 유키에가 “있다가 너를 러브러브 한다”, 이렇게 면전에 대고 말했다. 마르키도는 자신이 보헤미안이라고 대답을 했는데, 나중에 그때의 일을 물었더니 유키에가 장난을 치는 줄로만 알았다더라. 그 자리에서 이메일을 주고받고 아무렇지 않은 듯 헤어졌지만, 몇날 며칠을 울었다. 그러고 나서 투어를 응원하는 내용의 이메일을 시작으로 종종 이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했지.
과거 있다와 마르키도는 10이라는 그룹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0은 어떻게 형성된 그룹인가?
있다: 마르키도의 ‘불가사리’ 공연이 열린 2005년, 한국 출입국 사무소에서 외국인 뮤지션들이 여행 비자를 가지고 활동하는 것을 대대적으로 단속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불가사리’의 사토 유키에도 타겟이 되었다. 유키에는 그의 밴드 곱창전골 매니저들에게 사기를 당해서 계약이 파기되고 여행 비자로 서울에 체류 중이었는데, ‘불가사리’가 유료 공연이라는 이유로 벌금을 냈고, 벌금을 냈더니 잘못을 인정했다며 강제추방을 당한 사건이었다. 그렇게 유키에가 도쿄로 떠나고, 내가 도쿄를 방문하면서 다시 ‘불가사리’를 개최했는데, 그때 마르키도와 처음 협연을 시도했다. 또한 나의 첫 해외 공연이자 해외여행이었지. 공연 직후엔 내 마음을 통역하여 전했고, 그제야 내 진심이 전해져 함께 음악을 하는 것도 진지하게 논의하게 됐다. 그해 10월, 제주의 페스티벌에서도 마르키도와 협연하며 함께 팀을 만들 것을 논의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팀이 10이다.
텐거의 의미는 몽골어로 ‘경계 없이 큰 하늘’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10은 어떤 의미인가?
있다: 10은 있다의 존재를 뜻하는 1과 마르키도의 원이나 윤회를 의미하는 마르에서 0을 가져와 10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을 결정한 때가 2005년 10월 10일이었다. 정말 운명이라고 생각했지.
그렇다면 텐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있다: 있다의 1과 마르키도의 마르에서 0을 가져온 10은 개인이 만나 이루어진 그룹의 성격이 강했는데, 10의 활동이 계속되면서 음악적으로 융합되는 우리를 느끼고, 무엇보다 라아이가 태어나면서 우리는 보다 더 확장된 상태가 되었다고 느꼈다. 그 상태를 이름으로도 표명하고 싶어서 ‘텐’이라는 사운드에 무언가를 붙여서 의미가 확대되는 단어를 찾아보다가 얻게 된 이름이다. ‘Tenger’는 몽골어로 하늘, 헝가리어로 바다를 뜻하더라고. 그런데 이 고유 명사를 그대로 쓰기보다는 더 확장된 표현을 해보고 싶어서 g를 하나 추가했다. 구글로 TENGGER를 검색했을 때 음악가는 우리만 매치되는 상황이 되기를 원했다. 10은 구글 검색 시에 우리 두 사람이 매치되지 않는 게 내심 아쉬웠다. 근데 중국의 어느 팝 가수가 Tengri와 Tenger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 가수가 소유욕이 있는지 최근에는 Tengger까지 자기 것으로 표기하더라고. 위키피디아에도 기록됐는데 우리 것이 지워지기도 했고. 때문에 상표 등록 같은 것도 생각했지만, 그럴 마음까지는 없어서 스펠링 전체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TENGGER로 어필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마르키도의 10 활동 이전 음반 몇 장을 찾아본 적이 있다. 그중에는 한국에서의 라이브를 담은 CDr 포맷의 레코드도 있다. 혹시 한국 투어나 ‘불가사리’ 등의 공연은 어떤 계기로 진행되었는지 기억하는가? 2005년의 한국 노이즈, 일렉트로닉 신과 일본의 교류 또한 흥미로운 사실이다.
마르키도: CDr은 어떻게 알았나. 사토 유키에가 공연 기록으로 남긴 부틀렉을 참여 아티스트에게 선물로 준 극소량의 레코드다. 내가 한국에서 공연을 한 계기는 일본의 70년대 레전더리 뮤지션이었던 매지컬 파워 마코(Magical Power Mako)가 나와 협업 앨범 작업을 하던 당시 “한국으로 가라”라고 예언자처럼 이야기한 것이 계기다. 그 이전까지는 한국과 아무런 인연이 없었는데, 마침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불가사리’를 주최하는 사토 유키에가 있었고 그를 소개받아 2004년 10월에 처음 한국을 방문하여, 나의 첫 해외 공연을 개최했지. 불가사리를 통한 교류는 프리재즈, 아방가르드, 노이즈 등의 실험음악 장르 위주였다.
있다 역시 솔로 앨범을 발매한 이력이 있던데, 레프트필드, 앰비언트 갈래로 나뉜 것이 흥미롭다. 어떠한 앨범이었나.
있다: 사실 있다는 2002년에 [나는…. 있다]라는 EP로 데뷔했다. 혼자서 유통되기 힘든 패키지 음반을 만들어서 팬 커뮤니티를 통한 선주문과 게릴라 공연, 플리마켓, 페스티벌 무대에서 판매하는 DIY의 형태였다. 데뷔 전에는 지금의 ‘사운드클라우드’ 같은 역할을 했던 ‘밀림’과 신해철이 운영한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네이션’의 인디 차트를 통해 음악을 공유했다. 해외 플랫폼으로는 ‘마이스페이스’를 이용했는데, 지금은 찾기 어렵게 되었지… 워낙 게릴라로 극소량 발매한 앨범이라, 내가 발매한 앨범을 모두 갖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가 아닐까. 그중 몇몇은 밴드캠프에 남겨두기도 했다. 좀 더 정리하여 올릴 예정인데, 평범한 아카이브보다 더 재밌는 형식을 택해보고 싶어서 여러 가지 고민 중이다. 그림책을 작년에 만들었고, 올해는 믹스테잎을 만들고 있다. 텐거 활동이 바빠져서 투어를 다녀온 후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렇듯 두 사람은 2000년대 중반부터 2023년 현재까지 전자음악가로 활동 중이다. 2005년과 2023년, 두 해를 비교한다면 극명한 대비를 느끼는가? 우선은 동료 음악가가 많이 늘어난 것 같기도 하다.
마르키도: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전자음악가의 양적인 증가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카세트 MTR을 통해 테이프나 하드 신시사이저로만 하던 걸 컴퓨터 1대로 간단하게 할 수 있어서 큰 감동을 느낀다. 이후 컴퓨터의 성능이 올라가고, 저렴한 가격에 보급되면서부터 처음부터 음악을 만드는 일이 간단해진 게 그 원인으라 생각한다.
2010년대부터는 EDM을 만드는 사람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현상을 보았다. EDM을 쉽게 만드는 툴이 등장하고 그것을 사용하면 혼자 시작부터 완성까지 음악 제작의 프로세스를 완성하는 일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좋은 면도, 유감스러운 면도 있다. 음악에 접근하는 사람이 많아진 반면 툴이 제공하는 편의성을 바탕으로 쉽게 음악을 완성하다 보니 개성 있는 사운드를 찾기 힘든 현실이다.
그에 반해 아직 2000년 초중반까지 한국에서 전자음악은 대중적으로 즐기는 사람이 많다는 인상은 없었다. 일부 언더그라운드 클럽 문화로 접근하는 이들로부터 지지 받는 것으로 여겼다. 그 시기에 한국에서는 힙합과 래퍼가 많이 등장하고 대중적 호응을 얻는 듯했다. 당시 한국은 컴퓨터나 신디사이저 등의 장비 보급이 아직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전자음악을 소비하고 생산하는 인구가 점점 늘어나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생각한다.
있다: 지금은 학원이나 레슨도 많아져서 다들 쉽게 습득하고 금방 신에 합류하는 것 같다. DJ에 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극단적이고 좋지 않은 예로 한국의 아티스트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프리셋을 짜놓고 관객 앞에서 뭔가 만지는 척하면서 호응을 얻는 유명한 DJ와 그 퍼포먼스에 열광하는 관객이 즐비한 이벤트가 많이 생겨난 걸 보았다. 또 스마트폰으로도 쉽게 디제잉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미술이나 패션 작업하는 분들이 DJ나 전자음악에 다른 센스를 가지고 색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고, 다른 장르의 음악을 하다가 전자음악으로 전향하는 뮤지션도 꽤 보인다. 전반적으로 전자음악 인구가 늘어나는 현상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마르키도가 언급했듯 한국에서의 전자음악은 2000년대 당시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얻지 못하던 음악 장르다. 그럼에도 일찍부터 전자음악가로 활동한 두 사람. 어떤 음악과 함께 유년기를 보냈나.
마르키도: ‘닌텐도(Nintendo)’의 포터블 게임기 ‘Game & Watch’로 “동키콩”을 하고, 어머니에게서 30엔을 받아 게임센터에 가서 “벽돌깨기(ブロック崩し)”라는 아케이드 게임을 하며 처음으로 전자음을 체험했다. 그 이후로 ‘패미컴(Famicom)’, ‘MSX’를 거치면서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될 때까지 게임에 빠져 지내며 게임을 만들고 싶어서 설계도까지 제작했지만, 당시 컴퓨터 하드웨어가 너무 비싸서 게임 엔지니어는 될 수 없었고 대신에 게임 프로그래밍으로 “드래곤 퀘스트 I”을 카피하곤 했다. 그런 면은 요즘 라아이가 나를 닮은 것 같다 하하. 나만의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MSX’의 3채널 사운드 칩을 이용해 BASIC 기호를 입력하고 가공의 게임을 상정한 게임 음악을 제작했다. 게임 음악의 진화와 함께 내 음악도 함께 진화했다. 중학생 때는 FM(Frequency Modulation) 칩을 쓸 수 있게 되어서 소리를 더 많이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만든 음악으로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작곡 콩쿠르에 출전하여 상까지 받았다. 그리고 나서 난 스스로의 진로를 음악으로 결정했다. 부모님은 몰랐지만.
있다: 나의 음악 첫 경험은 그레고리오 성가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거의 매일 성당에 가서 미사 때 오르간을 연주하고 성가대의 알토 파트 리드를 담당했다. 그때부터 난 대성당이라는 공간에서 처음으로 접했던 ‘공명’에 매료되었고, 그래서 공명 없이 내 음악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라디오도 많이 듣곤 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고, 믹스테이프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주었고, 클래식, 팝, 재즈, 록, 메탈, 월드뮤직, 국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즐겼다.
중학생 때부터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시를 함께 쓰던 친구들과 누가 먼저 자신의 시를 가지고 음악을 만들어 내는지 내기 같은 걸 했는데, 그날 음악을 완성한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시를 바탕으로 음악을 만들고 수업 시간에는 작곡을 한 후 쉬는 시간에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여 친구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때 시를 쓰고 이를 바탕으로 음악과 미술로 확장하는 스타일이 정립되었다고 생각한다.
텐거는 여행자 가족 그룹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여행자로의 삶을 선택한 정확한 계기가 있나? 마르키도는 ‘불가사리’에서 있다에게 자신을 ‘보헤미안’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는데, 언제부터 그러한 삶을 살 것이라 추측했나?
마르키도: 우리는 한국과 일본 출신의 음악가로 10을 결성했지만, 한국과 일본의 특수한 관계상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이방인이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기분을 계속해서 느껴왔고 우리는 경계를 느낄 수 없는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Beginner’s mind, 여행자의 시선으로 여행하는 모든 곳을 바라보고 체험하면서 그 과정에서 만난 것들은 우리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라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도 자연스레 우리는 이 삶을 지속하게 되었다.
반면 여행하지 않는 평소 가족의 삶도 궁금하다. 현재 거주하는 서울에서는 어떠한 일상을 지내는지, 또 텐거 가족은 각각 개인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편인지도.
라아이: 주로 아이패드로 좋아하는 게임을 한다. “마인크래프트”, “지오메트리 대시”, “수련충”, “로블록스” 같은 게임들. 좋아하는 게임 음악을 ‘Ableton Live’로 카피하거나 게임하면서 기록하는 비디오 컨텐츠를 만들기도 하고, 곧 “마인크래프트” 이미지를 사용해서 제작한 뮤직비디오가 공개될 예정이다. 이 뮤직비디오는 텐거의 다큐멘터리 영화에도 삽입되었는데, 프라이빗 시사회 때 보면서 조금 감동했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하게 되었고 “WATERCOLORS” 라는 제목이다. 부산국제영화제 구경가고 싶었지만, 그때 미국에 있을 거라서 너무 아쉽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혼자서 가보고 싶은 빵집을 찾아가는 빵 투어를 하고, 엄마, 아빠와 함께 자연 보러 산책을 가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집 근처에 있는 백련산이랑 안산, 봉산에 자주 가는 편이다.
마르키도: 산책을 좋아한다. 작업과 집안일이 아니면 산책이 일상이다. 산책 중에 다음 작업의 아이디어를 정리하거나 작업하는 음악의 최종 체크도 한다. 요즘은 작업이 너무 밀려 있어 산책을 통 못했다. 이제 투어를 가면 공연 일정 중에 짬을 내서 새로운 장소에서 산책할 시간도 기대하고 있다.
있다: 난 개인 시간에 책을 보거나 애니메이션을 감상한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실사보다는 상상할 여지가 더 생기는 쪽을 선호하는 편이다. 무엇이든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성격이라 학생 때도 완결이 된 만화책만 단숨에 읽곤 했는데, 요즘은 유튜브나 넷플릭스처럼 전 세계의 컨텐츠들을 무한에 가깝게 찾아볼 수 있어 즐겁기도 하지만 나쁘기도 한 것 같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컨텐츠 홍수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위험도 있고, 새로운 상상이 마구 샘솟아서 설레이기도 한다.
여행하는 삶으로 세계 방방곡곡을 유랑하며 겪은 일이 아주 많을 것으로 예상한다. 여행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마르키도: 인도에서의 체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26살 때 2개월간 배낭 여행을 했었다. 인도로 떠나기 이전에 동양 사상, 철학 등을 책으로 공부하여 머리로만 생각해 왔는데,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에너지, 일본 일상에서는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풍경 같은 것에 압도당했다. 물론 사기나 배탈 등 힘든 일을 겪기도 했지만, 책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세상을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어린 나에게는 정말 신선한 자극이었다. 체험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때의 경험이 여행을 지속하는 삶의 힘이 되었다.
라아이: 올해 2월 유럽 투어 중에 스위스에서 기차 타면서 봤던 눈 덮인 산들의 풍경이 굉장히 아름다웠다.
있다: 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국경을 넘어 이동하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2005년 12월에 실크로드 문화교류 사절단의 일원으로 공연을 하러 갔는데,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서 먼저 공연하고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로 이동하는 수순이었다. 사회주의 국가라 경비가 삼엄했지만 그곳의 군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알마티에서 타쉬켄트로 이동하는 동안 비행기를 한번 타고, 비행기에서 내려서 전용 버스를 탔다. 비행기 안에서부터 심각한 생리통이 시작되어서, 가끔 기절하고 그러는데, 함께 갔던 뮤지션들이 부축해줘서 비행기에서 내렸다. 그리고 버스를 탔는데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서 아픈 와중에 창밖의 풍경이 고산지대, 초원과 사막 등으로 번갈아 변하는 것을 몽환적으로 보았던 기억이 꿈같이 떠오른다.
텐거의 음악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텐거 이전 있다와 마르키도가 각각 개인의 앨범을 제작하던 시기와 텐 활동 시기를 비교하면 그때와 지금은 어떤 것들이 달라졌나?
마르키도: 솔로로는 각자 개인의 표현을 자유롭게 했다. 내가 있다와 협력하여 공연을 진행한 것처럼 다른 아티스트와 콜라보레이션, 피처링 작업도 활발하게 했지. 10 또한 콜라보레이션 개념이 더 컸다. 각자 개인의 자아가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고, 서로 너무 다른 사람들을 만나오기도 했고, 즉흥성이 크기도 했다. 그때도 계속 솔로 작업을 활발히 하고 있었지.
있다: 텐거는 세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고 구성원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융합된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텐거가 되고 나서 솔로 작업보다 그룹의 작업에 더 힘을 쏟기도 했고.
마르키도: 텐거의 음악 제작 과정은 내가 베이스를 만들고 그 이후로는 어떤 이미지를 공유하면서 캐치볼을 주고받으며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살이 붙어가는 식이다. 처음부터 악보 같은 설계도가 있으면서 만들어지는 음악은 아니다.
라아이는 2년 전, 솔로 앨범 [Beautiful Ocean]을 제작하여 공개한 바 있다. 주변 친구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라아이: 학교 학예회에서 내 노래를 작은 카시오 키보드와 함께 마이크 없이 연주했는데, 끝나고 나서 친구들이 박수를 많이 쳐줬다. 그때 노래가 너무 좋다고 칭찬해 준 여자친구와 잠깐 사귀기도 했고. 팬데믹 때문에 만나서 놀 기회를 만들 수 없어서 멀어지고, 다른 반이 되고 나서는 헤어졌지만… 그때까지도 내가 데뷔했는지 알고 있는 친구들은 없었는데, 지난 2월 유럽투어 일정 때문에 종업식에 참여할 수 없어서 선생님이 친구들과 미리 작별 인사를 하라며 내가 어디로 떠나는지 얘기해주었는데, 그랬더니 몇 명 친구들이 싸인해달라고 했다.
최근 EDM에도 부쩍 관심을 갖는 중이라고 들었다. EDM 트랙도 준비하고 있나?
라아이: 좋아하는 게임 음악 중에 EDM도 있어서, 카피해보고 있다. 원본과 다른 내 방식대로 사운드도 만들어 보고 하는데 꽤 재미있더라고. 이러다 보면 나도 그런 음악을 만들어 볼 수도 있겠지, 싶다.
텐거 가족은 긴 머리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있다: 어쩌다 보니 길어졌고 그게 좋아졌달까. 특별한 이유는 딱히 없다. 사실 짧아졌다 길어졌다 한다. 지금도 라아이와 마르키도는 장발에서 단발 정도가 되었고, 나도 라아이가 태어나고 한번, 왼쪽인가 오른쪽 반만 짧게 자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는 그냥 방치해두었다.
지난 앨범 [Nomad], 그리고 라아이의 솔로 [Beautiful Ocean], 이번의 [TENGGER] 등. 텐거는 자연 요소 중 물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한 느낌의 음악이 유독 많다. 텐거는 물을 어떠한 관점으로 접근하고 음악으로 소화하는지.
마르키도: 물에는 신비한 이미지가 있다. 마음도 몸도 씻을 수 있는, 정화의 요소를 갖고 있는 물을 다른 원소보다 더 깊이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는 물을 음악으로 표현할 때 최대한 심플한 반복 표현으로, 순환을 이야기한다. 이번 앨범 [TENGGER]는 하늘, 우주를 테마로 하고 있다. 텐거를 처음 이름으로 택했을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의미이기도 하다.
앰비언트 음악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샘플로 일부 사용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텐거처럼 직접 마이크를 쥐고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며 메시지를 전하는 경우는 좀처럼 흔하진 않은 것 같다. 이에 관한 코멘트를 한다면?
있다: 먼저 시를 쓰고, 그것을 음악이나 미술 같은 아웃풋으로 확장해 드러내는 작업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런 형식의 아웃풋이 되었다. 라아이도 데뷔 앨범 만들 때 비슷한 방식으로 작업해서 신기했다.
마지막으로 텐거의 향후 일정은?
9월 20일부터 25일까지 호주 투어, 9월 23일에는 패션브랜드 ‘NACHE’의 패션쇼 음악도 맡았다. 그리고 새 앨범 바이닐 발매일인 9월 27일부터 출발해서 10월 26일에 돌아오는 일정의 북미 투어가 있다. 그동안 국내에서 디지털 유통되지 않았던 지난 앨범들도 대거 10월부터 순차적으로 유통이 시작된다.
영국의 ‘BBC 6 MUSIC’, ‘Threads Radio’, ‘Ransom Note’ 에서 스페셜 플레이리스트 혹은 믹스테잎 요청이 와서 유라시아의 여성 음악가들과 여행하는 과정에서 만났던 인상 깊었던 음악들, TENGGER 패밀리의 필드레코딩과 각자 솔로 음악과 더불어 구성한 각기 다른 믹스셋으로 어제까지 작업했고, 곧 공개될 예정이다. 믹스테잎 작업은 처음이었는데 즐거웠다. 그리고 우리는 투어 이후에 얻은 감흥으로 새 앨범 작업을 또 하겠지. 솔로 작업도 계속해서 이어갈 계획이다.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청자들과 만날 기회를 마련하고 싶다는 생각. 여러분도 저희와 같은 마음이기를 바랍니다.
Editor│황선웅
Photographer │한예림
Stylist│전인배
Hair, Make up│김가현
의상 협찬 │ NAC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