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 GALA

전자음악을 향한 독보적 관점으로 서울의 클럽 신(scene)에서 영향력을 발휘해 온 넷 갈라(NET GALA). 서울의 케익숍(Cakeshop)을 주 무대로 디제잉 및 라이브셋 공연을 펼치며, 지난겨울에는 서울에서 열린 보일러룸에서 특유의 감각으로 펼쳐낸 디제이 셋으로 관객들과 성공적으로 만났다.

또한 넷 갈라의 첫 EP인 [re:FLEX*ion]은 한국대중음악상 3개 부문 후보에 오른 데 이어 두 번째 EP [신파 Shinpa]는 밴드캠프의 2021년 베스트 클럽 릴리즈로 선정되었다. 특히 루이뷔통의 2021 F/W 온라인 런웨이와 2023년 캠페인 필름에 참여한 경력은 그의 음악적 영향력이 서울을 넘어 전세계에 있음을 증명한다.

그런 넷 갈라는 18일 첫 정규 앨범 [GALAPAGGOT]을 공개했다. 첫 정규 앨범은 지난 EP에 이어 정체성과 퀴어 문화 등을 자신의 언어로 제시하기 위해 깊은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약 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려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지, VISLA는 넷 갈라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넷 갈라의 깊은 답변을 하단에서 만나보자.


만나서 반갑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서울에서 전자음악을 하는 넷갈라다. 전자음악 프로듀싱도 하고 디제잉도 하고 기획도 하는데, 지금은 ‘광흥창’이라는 크루에서 활동하고 있다. 광흥창은 ‘미치고 흥많은 창것들’의 줄임말로 시작했는데, 동료 디제이 목졸라(Mokzholla)랑 장난식으로 주고받다가 무턱대고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다. 계속 무언가를 같이 하고싶다는 열망이 서로에게 있었고, 합을 맞추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언더그라운드 신(scene)에 관심과 이와 관련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한데.

원래 음악 듣는 것도 좋아했고, 부모님이 음악 CD 사는 거나 음악을 듣는 거에 대해서 크게 관여하시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불법 음원사이트가 있어서 거기서 대량으로 다운로드 받았다. 당시 아이팟 클래식이 있었는데 내 아이팟에는 온갖 음악들이 재생되었다. 또 사운드클라우드와 다피프(DatPiff) 등의 힙합 믹스테입이 풀린 사이트에서 음악을 받다 보니까 점점 취향이 언더그라운드로 많이 빠지게 되었다. 전자음악도 그때부터 깊이 빠졌다. 그러다 보니 공연에 관심이 생겼고, 고등학교 3학년 때 파티마 알 카디리(Fatima Al Qadiri)랑 론(Lone)이 케익숍으로 내한 오는 걸 알게 되었지. 미성년자였지만, 무작정 줄을 섰다. 당연히 입장을 거절당했고 스무 살이 되자마자 케익숍을 갔었다. 그러다가 케익숍 사람들 눈에 띄어서 디제이를 하지 않겠냐고 회유를 받았다. 사실 디제이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2016년에 무작정 학교를 잠시 휴학하며 유럽에 3달간 있었는데 그때도 3일에 한 번씩 공연과 파티를 갔다. 매일 공연과 파티를 다니니까 사람들이 날 알아봤고 ‘너는 뭐 하는 사람인데 계속 이렇게 칠렐레팔렐레 놀러 다니냐?’라는 질문까지 받게 되었다. 난 그냥 파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랬더니 나 같은 사람이 디제이를 해야 한다고, 거기서도 설득당했다. 서울에 돌아왔을 때 마침 린제이가 ‘셰이드(Shade)’의 멤버를 찾고 있다고, 프로모터 롤을 제안했고, 그때부터 무턱대고 디제이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전에 디제이를 해본 적은 전혀 없었나?

당시 ‘서울 커뮤니티 라디오’에서 토크쇼를 하나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CDJ를 다루는 방법은 알고 있었고, 그전에도 이벤트성으로 디제잉을 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장비를 다루는 데 익숙하긴 했지만, 케익숍에 선다는 것은 꽤 큰 일이지 않나. 난 본격적으로 무대에 설 준비가 안 돼 있었던 거지.

디제이 장비를 다룰 줄 알며 음악도 좋아한다면 자연스럽게 음악을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것 같다. 그러나 당신의 일화에서는 그러한 생각과 욕구가 억눌러진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 사실 대학 진학을 한 것도, 공연 기획사인 ‘페이크버진(Fake Virgin)’에서 일을 했던 것도 어떻게 보면 공연과 음악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음악가가 되기 전까지 음악적인 활동을 많이 했다. 글도 썼고, 공연도 만들었고, 라디오쇼도 했고, 그런 공연과 음악 관련 일을 많이 했는데, 우선은 내가 무대에 선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잘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을 때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앞섰던 고민은 ‘음악과 디제이를 내 커리어로 삼을 수 있을까? 주된 일이 될 수 있을까?’에 관한 것이었다. 이 불안함에 더욱 주저했던 거 같다. 특히나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불안함이 더욱 컸고.

그러나 지금은 음악을 만들고 디제이 활동도 활발하다.

그냥 무모함으로 들이받았지. 원체 성격 자체가 좀 일 년에 하나씩은 무대뽀로 밀어붙이는, 큰 일들이 하나씩 있는 스타일이다. 데뷔하기 일 년 전에 음악 공부를 했던 게 가장 무대뽀였던 거 같고. 그게 큰 원동력이기도 했지. 옛날부터 음악을 만들긴 했다. 고등학생 때 노트북을 사자마자 깔았던 게 ‘FL 스튜디오’였다. 본격적으로 만들진 않았지 않았을 뿐. 그리고 공부하면서도 습관적으로 공책에 악보와 가사를 적기도 했었다. 엄마 몰래 했던 짓이다.

부모님이 음악을 하는 데 반대를 했었나?

그렇다. 예체능으로 빠지는 것에 관한 반대가 심했다. 결국 예체능인 ‘시각디자인’을 전공으로 선택하긴 했지만, 부모님은 음향 엔지니어의 엔지니어만 보고 공대로 회유했었지. 부모님 입장에서는 노력이 아쉬웠던 것 같다.

당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잠시 들으니 Intoxxy가 생각났다. 당신의 쌍둥이라고. 둘 다 디제이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때부터 서로 음악적 교류를 했나?

우리는 고등학교가 달랐다. 그 친구는 기숙사 학교를 갔고 나는 통학을 했다. 사실 한 달에 한두 번 만나는 정도였고 연락을 엄청나게 주고받고 이런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멜론 계정을 서로 공유하며 음악적 교류를 했지. 근데 멜론 계정에서만 교류를 했고 사운드클라우드나 자녹게*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찾아 듣던 것은 인톡시와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취향이 살짝 갈렸지. 또 나는 고등학생 때는 힙합을 많이 들었고 보드 타는 형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그런 음악을 자주 듣게 됐다. 패션 공부를 하면서 패션쇼 음악들도 많이 찾아보곤 했다.

지금까지 싱글, EP,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정규앨범까지, 다양한 형태로 음악을 발매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레이블과 함께했다. 이 과정에서 특별히 느꼈던 바가 있을까? 혹은 때마다 레이블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나.

노바디노즈(NBDKNW)에서 나온 첫 EP는 단자건즈(Danja Gunz)와 음악적으로 교류를 많이 했던 때라 뜬금없이, 데모도 안 만들어져 있는 상황에서 던져본 것이다. 첫 EP가 나오고 후속 반응으로 싱글 LP를 소량 만들었다. 파리에서 활동하는 ‘Mind Records’에서 만들어준 거였는데, 바이닐과 음원들이 프랑스와 그 부근에서 활동하는 프로듀서들 귀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그러다가 녜게녜게(Nyege Nyege)에서 내 바이닐을 듣고 이메일을 주었다. 2020년도 경, 코로나가 한창일 때 레지던시를 함께하면 좋겠다고 연락이 와서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을 했다가 나중에 정규를 내겠다고 마음을 먹은 거다.

서브컬트(SVBKVLT)의 경우는, 첫 EP를 내고 나서 투어를 갔는데 우연히 상하이의 올(ALL) 클럽에서 당시 ALL의 사장이자 SVBKVLT를 운영하는 개즈(Gaz)를 만나게 돼서, 거기서 데모를 보내겠다고 했더니 듣고 싶다고 답장받았다. 이렇듯, 내가 레이블을 선택했다기보다는 레이블들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다. 개즈(Gaz)는 상하이에서 진행한 셰이드 파티를 계기로 종종 만났었다. 노바디노즈에서 계속 발매를 하고싶긴 했지만, 그 당시 가장 좋아했던 아티스트들이 모두 서브컬트 소속이라서 서브컬트 컴필레이션에 참여를 했다가, 녜게녜게는 아프리카 기반 레이블이다 보니까 당위성에 대한 의문이 스스로 생겨서 마음이 쉽게 안 갔는데, 결국은 나를 제일 잘 케어해줄수있는, 내 음악을 잘 이해하는 레이블이랑 일하는 게 편한 거 같다는 생각에 함께하게 되었지. 다른 레이블과도 연락했지만, 나보다 다른 아티스트들이 우선이거나, 내 음악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발매를 위한 발매를 하는 것만 같은 뉘앙스였다. 난 그렇게까지 같이 하고 싶진 않았고.

크게 프로듀싱과 디제잉, 라이브 셋까지 세 가지 형태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다양한 형태로 활동을 하면서 다르게 주안점을 두는 부분이 있을까.

과거에는 세 개의 영역을 각각으로 분리하여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최대한 접점들을 많이 만들려고 한다. 예를 들면 장르적으로 어떤 모호한 경계들을 파고든다든지, 디제잉 할 때 CDJ 서너 개씩 써가면서 피치벤드나 Quantize 같은 기능을 통해 음악 장비로서의 가능성을 탐구한다던지. 그리고 디제잉 하는 기술들을 프로듀싱에서 써먹는다든지, 역으로 프로듀싱에서 디제잉 할 수 있는 기술을 가져오는 등의 방식으로. 전체적으로 같은 맥락을 공유하는 걸 찾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히 요즘에는 곡들 사이에 공유하고 있는 어떤 악기의 텍스쳐가 서로 곡 안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거나, 믹서가 알아서 컴프레싱을 하면서 생기는 우그러지는 소리에 흥미를 갖고 디제잉을 하는 편이다. 어쨌든 내 이름을 걸고 하고 있다 보니 뿌리를 공유하게 된다. 디제잉은 클럽이라는 공간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현장의 PA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사운드시스템에 맞게 디제잉을 하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 공간과의 교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반면에 라이브 셋은 좀 일방적으로 쏘아붙이는 편.

아무래도 공연은 디제잉에서 느낄 수 있는 순간적인 감정보다는, 전체적인 흐름과 음향의 완성도에 더 다가가야 하는 순간도 많고, 특히나 타인이 만든 곡이 통째로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다양한 악기들이 함께 움직이다보니, “아 이사람은 어떤 이유로 이렇게 믹싱했구나 혹은 이렇게 프로듀싱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되기도 하고, 내 주관만 넉넉하게 채워넣으면 되는 것이다. 댄스플로어는 정말 아슬한 곳이라, 나의 주관이 들어갈 수 있는 임계치가 어느정도 정해져있다고 생각한다. 그 경계가 공연장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잠깐의 순간에 느끼는 아슬함으로 인해서 공연장을 박차고 나갈 일은 거의 없기에.

공연은 디제잉보다 신경써야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최대한 준비한 공연의 흐름에 맞게 오차를 줄여나가는 것에 신경을 쓰다보니, 디제잉을 하면서 “디제잉적 허용”이 있고 그것을 관객들과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면, 공연에서는 이 음악을 나만의 방식으로 어떻게 해석할 여지가 존재하고, 이것을 내가 어떤 방식으로 해석했는가를 전달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쏘아붙인다는 표현을 쓰는 것 같다. 예를 들면 “KATRINAKATRINAKATRINA” 같은 경우에는 신스 리드에 공을 많이 들인 곡인데, 믹싱을 하면서 어느정도 타협해야하는 지점이 생겼고, 그래서 공연때는 신시사이저를 최대한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전개한다. 모두가 그 신시사이저 리드 트랙을 다른 악기들 없이 오롯이 그것만 한번 들어봐줬으면 하는 마음에.

프로듀싱의 경우는,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게 가장 중요하다. 장르-매싱(Genre-Mashing) 등을 통해 새로운 사운드를 찾아가려고 하는 지점도 새로운 언어를 찾으려고 하는 일종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디제잉이나 라이브 셋에서 내 음악이 풀어지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지는데, 그러니까 디제잉을 위해서 만든 음악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라이브 공간에 특화된 음악도 아니라서 요즘에는 오히려 다시 프로덕션을 디제잉과 라이브 셋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본다. 이전에는 억지스럽게 디제잉과 라이브 셋을 굳이 생각하지 말아야겠다고 인지를 한 상태에서 음악을 만들었었다. 요즘은 점점 다시 디제잉과 라이브 셋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음악을 고민해 보고 있고. 공연을 위해 음악을 쓰고 싶기도 하다.

최근의 가장 큰 동력이 궁금하다. 삶에 대한 것 전반 혹은 음악과 관련해서 말이다.

친구들과 크로스핏을 한다. 단기적으로 목표치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으니까 짧은 시간에서 무얼 해야 하고, 이를 단기간에 성취하기 위한 스퍼트가 습관적으로 좋다.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고. 예전에는 지금처럼 에너지를 올리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나의 무모함도 큰 동력이다. 음악적으로는, 계속해서 배워갈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동력이다. 그리고 나의 오타쿠스러운 마인드 셋 또한 동력이다. 그렇게되면 음악이 지루해질 수가 없다. 좋아하는 아티스트 앨범이 나오면 다 뜯어봐야 하고, 그런 식으로 음악과 함께하다 보니까 그게 가장 큰 동력인 것 같다.

또 코로나 시기에 개인적인 목표들을 설정했다. 거기까지 정확히 도달하진 못하더라도 그걸 향해서 걸어가는 길을 아는 것만으로 동력이 된다. 모든 걸 정확하게, 원하는 게 있으면 그대로 해야 하고 이뤄져야 한다는 강박이 심했는데, 이번 앨범에서는 그 강박을 내려놓으니까 많이 편해졌다.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정해져 있는 길을 정확히 걷는다기보다 비슷하게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느끼며 감사히 살아야 될 것 같다. 친구가 얼마 전에 글을 하나 써서 보여줬는데 대충 긴장하고 기대하는 습관을 좀 버려야 된다, 다가오는 설렘이라는 그 감정 자체를 버려야 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크게 공감을 했고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번 앨범 [GALAPAGGOT]에서 트랙별로 제목을 정하게 된 계기나 과정이 궁금하다.

이번 앨범의 제목과 곡명은 내 생각과 가치관이다. 앨범 [신파 SHINPA]에서부터 음악에 주제를 더욱 명료히 담아내는 것에 관해 욕심이 생겼고 특히 이번 앨범은 제목이 전달하는 모티브를 더욱 직접적으로 담아내려 노력했다. [신파]는 컨셉추얼한 앨범이었으니까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게 편했다면, 이번 앨범은 나의 사적인 이야기와 가치관이 많아서 이를 직접적으로 풀어내는 것에 관해 조심스러웠지. 그리고 앨범 작업할 때 원래는 어느 정도 정해놓고 시작하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그동안 작업했던 것들을 모았다. 그리고 이를 모두 관통하는 앨범의 제목, 그동안 고민했던 것을 쭉 적어서 하나에 묶었지.

당신의 음악에 가치관을 녹였으나, 가사가 없기 때문에 청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데 있어서 어려울 수도 있겠다.

표현에 있어서 너무 직접적인 건 아직 조심스럽다. 다만 내가 사용하는 사운드와 스토리텔링 안에서 최대한 전달하려고 한다. 특히 이번 앨범에서는 사운드적으로나 영감받은 것에 관해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편이고 장르적인 모티프에는 더욱 과감해졌다.

음악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기승전결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드라마틱한 전개나 그 안에서 사용한 사운드. 그리고 음악적인 영감을 은은하게 녹이는 것. 이번에 란캅두이(Rắn Cạp Đuôi)와 함께한 곡의 경우, 기타 리프는 베트남 음악에서 사용되는 기타의 음률로 작업을 했었다. [신파 Shinpa]를 작업할 때는 첫 트랙의 영감이 신해철이었다. 프로그레션의 면에서 한국적인 맛이 있다고 생각해서 작업을 했던 거다.

앨범의 첫 곡인 “Joappa”는 지난 앨범인 [신파 Shinpa]의 첫 트랙이었던 “Shinpa Bonui” 와의 연결되는 것 같았다. 이는 의도된 지점일까.

맞다. 원래 “Shinpa Bonui”를 처음 작업했을 때는 EP의 가장 마지막으로 작업한 트랙이었다. 그러나 ‘신파’라는 주제를 관통할 수 있는 오프닝을 의도하고 수록했지. 두 곡은 모두 리듬의 기교를 의식하고 제작했다. 덩어리 감을 가지고 작업하려고 했고, 덩어리 감 위의 디테일들을 덧붙였다. 나에게 있어 음악적으로 가장 편한 비피엠이 그쯤이기도 하다. 폭발적인 리듬의 분출이라든지, 다양한 리드미컬한 소스들을 활용하여 리듬의 구조를 잡는다던지, 다이내믹을 형성하는 맥락 안에서 나에게 가장 편한 속도감이 있어서 그렇게 같이 작업을 하게 됐다.

그리고 [ReFLEX*ion]과 [신파 SHINPA], 그리고 이번 정규까지 해서 가볍게 이어주는, 관통하는 곡으로 의도된 작업이기도 하다. 처음 “Joappa”를 쓸 때는 이태원 참사가 있고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그래서 처음의 감정은 정치적인 소용돌이 안에서, 그 안에서 느껴지는 분노와 감정을 어떻게 하면 쉽게 풀어낼지에 관해 고민을 했었다. 그래서 당시에 작업했던 샘플들이나 쉽게 가져올 수 있는 모티프와 생각이 비슷하니 그 속에서 연결 지점이 생긴 거 같고. 결국에 앨범을 완성하면서는 루즈하지만,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 연결되는 맥락이 있는 모티브를 찾기 위해서 믹싱과 포스트 프로덕션의 과정을 거치며 더 끌어왔다.

특정 장르의 음악으로 인식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특히나 이번 앨범에서의 작업 과정은 어떤 편이었나.

특정 장르에 묶이는 걸 거부하지만, 어느 정도 한계는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특히나 특정 장르로 인식되지 않길 바라는 게 개인적인 욕심 같기도 하다. 디컨스트럭티드 클럽(Deconstructed Club)이 낮고, 장르적인 모티브를 강하게 잡고 가지 않기에 이번 앨범의 장르적 모티브들도 여기저기로 산발됐다. 이러한 작업 방식의 장점은 다양한 모티브를 사용했지만, 사운드로써 나를 표현하거나 내 음악이 굳이 어떤 메카니즘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라는 접근방식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아직 거기까지 도달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하하. 사실 그동안 너무 어렵게 접근한 거 같다고도 생각한다. 뭐랄까, 의식하면서 피하는 것? 청개구리 같은 마인드다. 사실 이번 앨범도 장르적 베이스를 깔고 있어서 크게 더 다르진 않았다. 예전엔 진짜로 지우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이번엔 더 다이렉트하게 접근했다.

아르카(Arca)도 그렇고,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이라고 얘기는 하지만 결국은 장르의 모티브는 라틴음악이나 레게톤에서 오고 있고, 특히나 초창기 작업은 힙합에서 오지 않나. 파티마 알 카디리(Fatima Al Qadiri)같은 경우도 그 당시에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이라고 했지만 그라임과 힙합에서 거의 메인 모티브가 오고 있다. 응우주응우주(Nguzunguzu)도 그렇고, 그 당시 아티스트들이 ‘해체’ 클럽이라고 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장르 음악에 베이스를 두고 거기서 다른 사운드스케이프를 탐구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장르를 벗어난다고 하는 개념 자체가 그렇게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음악적으로 변화한 지점들도 있다. 틱톡을 비롯해 전자음악, 댄스음악에 대한 문화 소개 방식이나 디제이 문화가 바뀌면서 사실 장르 신 자체의 의미가 조금씩 퇴색되기도 했다. 장르는 지리적인 요소가 강한데,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경로가 늘어나면서 이 의미가 다소 미약해지기도 하였다고 본다.

나의 경우에는 흔히 “제3세계”라 불리는 쪽의 음악을 들어보면서 느낀 게 크다. 예를 들면 바일레 훵크(Baile Funk) 아티스트가 저지클럽과 드릴, 정글 음악의 측면도 사용을 한다. 거기에 대고 이게 바일레 훵크가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하지 않나. 그 아티스트들이 그간 가지고 왔던 사운드스케이프가 오히려 중요해지는 거다. 그 사람들이 만드는 음악이 바일레 훵크의 색채 안에 들어있지만, 또 엄밀히 말하면 바일레 훵크가 아닌 거라서. 그렇다고 이분법적으로 ‘아니’라고 얘기할 수도 없다. 이러한 경우를 많이 접하면서 깨달은 거 같다. 흔히 지금 댄스음악 신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고 있는 음악들의 사운드스케이프라든지, 사운드 디자인이나 믹싱 등이 가져가는 스타일과 테크닉을 배우면서 장르에 대한 접근방식에 관해서도 많은 생각을 얻게 되었다.

그러한 고정관념을 가장 처음 바꿔준 게 케익숍이다. 케익숍에는 워낙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와 디제이들이 함께 플레이하다 보니까 장르 외에도 음악을 어떻게 연결 지을 수 있는지에 관한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다. 사소한 상호작용에서도 느꼈다. 예를 들어 레게톤과 네오뻬레오(Neoperreo) 류의 음악을 쭉 튼 날이 있는데, 그날 밖에서 누가 잘 들었다면서 오늘 ‘힙합’ 셋 너무 좋았다고 한다거나… 그럼 힙합이 뭘까라는 고민을 하다가 그다음 주에는 랩이 엄청 많은 거만 틀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베이스만 쭉 틀어보고… 이렇듯 스스로 탐구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미적 고정관념을 무시하고 댄스 음악의 한계를 시험한 것 같아 흥미롭게 다가온다. 조금 더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

음악의 컨셉 안에서 쓴 모티브들, 퀴어 혹은 장르 음악의 주제들 안에서 쉽게 쓰일 수 있는 컨셉추얼한 모티브가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좋아하는 아티스트에 영향을 받았다면 그것에 관한 사운드만을 답습한다거나, 그대로 가져온다던가. 그런 시도를 당연히 할 수 있는데, 이는 비교적 쉬운 접근방식인 거고. 그렇게 하게 되면 표면적인 접근방식에 가깝다고 생각해서, 작업하면서도 계속 그런 모티브의 사용도 조심스러웠다. 단순히 사운드만을 베끼거나 모티브들을 쉬운 방식으로 사용하는 건 요즘 세상에 누구나 할 수 있다. 스플라이스나 유튜브 튜토리얼도 엄청 많고. 나의 가치관이나 작업관 안에서 이런 것들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는지 하는 고민을 하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예를 들어 소피(SOPHIE)를 존경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사운드를 따라 하려는 게 아니라 그가 사용했던 악기나 작동 방식들을 오히려 더 찾아본 거지. 그렇게 하면서 내 것으로 만든 거다. 자신만의 작업 방식이나 과정, 혹은 악기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서 나만의 작업 방식과 루틴이 있으니까, 그들에게 나를 대입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아보았지.

베트남 밴드인 란캅두이와 협업 과정은 어땠나. 특히 란캅두이와는 최근 신도시(Seendosi)에서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란캅두이는 원래 좋아하고 자주 듣던 밴드인데 베트남의 아르칸(Arcan)에 초대받아 갔을 때 좋지 않은 경험을 했다. 베트남에 다시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날, 술자리에서 잭(란캅두이의 드러머와 프로그래머)을 만나고 친해지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휴가도 베트남에서 보내며 2주 동안 란캅두이와 함께 지내고 작업했고. 그렇게 탄생한 곡이 “Rac Cap Cu”다. 잭의 기타 리프가 너무 매력적인 곡이지.

해외에 가면 그 도시의 음악가들 만나는 걸 즐긴다. 왜냐하면 그 음악 신에서 진짜 음악을 만들고 활동하는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음악적인 가치관이나 지역적인 아이덴티티, 또는 모티프가 강하기 때문에. 특히 아시아권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들은 지역적인 아이덴티티가 더욱 강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이랑 음악 얘기하는 걸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술자리에서도 음악 이야기가 즐겁다. 베트남에서는 사람들을 많이 못 만나서 너무 답답했으나, 그때 잭을 만나서 거의 용트림처럼 별의별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들이 하는 음악 이야기, 가치관도 듣게 되었고. 어떻게 작업을 하는지 등. 란캅두이는 밴드이기 때문에 에이블톤을 다루는 방식부터 나와 달랐다. 그 친구가 다루는 방식이나 사운드 다루는 방식, 곡 작업할 때 폴리나 공간감을 잡는 기준이 너무 궁금해서 그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계속 얘기하게 됐다.

K특급모텔과도 협업했다. 그들과의 협업 과정은?

2021년에 밴드캠프를 통해서 ‘서울’ 태그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찾아듣게 되었고, 너무나 팬이 되어버렸다. 원래 그 트랙의 인스트루멘탈은 녜게녜게 레지던시 하면서 만들어둔 거였다. 원래 쓰려고 했던 아티스트의 보컬이 전체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 때문에 미완성이었던 곡이었는데, K특급모텔을 만나 교류하며 함께 작업을 하면 좋겠다고 논의를 했다. 원래는 영어 가사가 있었는데 너무 붕 뜨는 느낌이라 K특급모텔의 제안으로 그 자리에서 한국어로 변경하여 한 1시간 정도 녹음했다. 이런저런 단어들과 90년대 00년대 발생한 게이 은어 같은 것들을 랜덤하게 녹음했고, 녹음본을 집에 와서 자르고 붙이며 완성했지. 원래의 곡도 노골적이었으나 더 노골적이게 되었다. 오히려 곡을 더 업그레이드 시켜주었다. 그런 것이 협업의 묘미가 아닐까.

곧 기대할 만한 소식이 있다면?

다음 릴리즈를 최대한 빨리 내는 것. 이번 앨범을 제작하는 데 너무 오래 걸려서 다음 앨범은 빨리 작업을 하고 싶다. 지금 세워놓은 계획이라면 밴드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를 빨리 실행하는 것. 그리고 친구들과의 협업. 이번 앨범을 계기로 협업의 재미를 느껴서,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같이 하자고 미리 제안한 상태다. 그리고 다양한 무대, 큰 무대에서 활동하는 게 나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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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황선웅
Interviewer │ 이다영
Photographer │ 한예림
Stylist │ 구승혁
Hair, Make Up │김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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