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괴테 ‘파우스트’ 중
“아무리 해도 안 차 내 안에, 내 앞을 막는 한계를 파괴 / 내 손에 마이크처럼 쥐어진 기회, 죽을 듯 하고 난 편하게 살래”
비프리 “DEAD MAN” 중
노학자 파우스트는 자유로운 세상의 환상 속에서 죽음을 선택했지만, 래퍼 비프리(B-Free)는 자유롭지 못한 환경 속에서 세상의 죽음을 선택했다. 갓 전역해 홍대에서 관객 서너 명을 두고 공연하던 시절부터, 하이라이트 레코즈(Hi-Lite Records)의 선두 주자가 되었을 때도, 뉴웨이브 레코즈(New Wave Records)를 설립했을 때도, 심지어 올해 발매한 앨범 [Free Hukky Shibaseki & the God Sun Symphony Group : Odyssey.1]까지 비프리는 멈추지 않고 마이크를 잡고 순간을 향해 몰락이 없는 영원을 뱉는다. 그의 첫 EP는 어느덧 15주년을 맞이했고, 계속해 왕성한 활동을 이어왔다. 그간 한국 힙합은 물론이고, 비프리의 생각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꿋꿋이 자유를 외치고 있다는 점은 여전하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터. 비프리가 이런 자유를 위해 지핀 매서운 저항의 불길을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할 때보다는 차가울 때가 더 많다. 그가 원하는 자유란 우리 모두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작은 불씨를 더 크게 키웠다는 죄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최근 더트 바이크를 즐겨 타는 모습을 자주 공유했다. 때문에 오늘 촬영 또한 오프로드와 더트 바이크로 잡았다. 엔듀로의 어떤 부분이 매력적인가?
아마 코로나 때였을 거다. 코로나로 아무것도 못 하니까 집에 갇혀 살았는데, 정신병이 올 것 같았다. 집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막 안절부절못하고, 나만의 폭력성이든… 이게 폭발해야 하는데 해소를 못 하니까. 어떻게 하면 폭발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레드불에서 주최한 스페인 엔듀로 대회 영상을 보고 ‘이거다!’ 싶어서 오토바이를 검색했다. 그때부터 빠졌다.
오늘 촬영에 사용된 오토바이가 본인 소유인데, 소개 부탁한다.
KTM이라는 회사의 EXC-F 모델이다.
최근 허키 시바세키(Hukky Shibaseki, 이하 허키)와 함께 만든 앨범 [Free Hukky Shibaseki & the God Sun Symphony Group: Odyssey. 1]의 커버 아트워크나 제목에서 선 라(Sun Ra)의 영향이 느껴진다. 최근 공상과학과 음모론에서 받은 영감이 많은 것 같은데.
그것들에서 어떤 확신을 받았다. 내가 맞았구나,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하고. 그러니까 혼자 너무 외롭고 미쳐가고 있을 때, 난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이게 맞는 거였다. 전쟁, 우주, 우리가 흘러 온 역사, 외계인, 거인 등 모두 다 내가 혼자 생각하던 것들이다. 특히 코로나 때 많이 심심해서 유튜브를 찾아보며 토끼 굴에 빠졌던 것 같다.
영적인 탐험, 혹은 비현실적인 공상이 취미인가?
그렇다. 우선은 재미있기 때문이다. 외계인, 거인 등 모두 나에겐 흥미로운 소재들이다. 그냥 미친 얘기들이지. 예전에는 나도 믿지 않았고 미친 소리쯤으로 여겼는데, 피라미드를 위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피라미드를 위에서 보면 마이크로칩과 똑같더라! 그걸 보고 나서 100% 믿기로 했다. 매우 수학적이다. 또한 정부와 대기업의 시스템 통제가 코로나 때 심해졌다고 생각한다. 반항적인 사람이 많은 상태에서 통제가 심해지니 더욱 반항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이를 알리려고 하는 사람들의 메시지를 한창 찾아 듣기도 했다. 사실 이런 생각은 군대에 있을 때부터 많이 했다. 군대는 진짜 썩었다. 대한민국 남자들을 부려 먹는 노예 제도인데, 어떻게 아무도 이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모두가 세뇌당했다고 느꼈다.
군대에서 음악 작업을 시작한 걸로 알고 있다. 군대라는 강압적인 환경에서 음악이 탈출구였나?
그렇다. 미국에서도 나는 불법 이민자여서 항상 자유롭지 못했고 그래서 자유롭고 싶다는 갈망이 컸다. 그러다 한국에 왔더니 2년 동안 군대에 가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음악은 내 탈출구였다. 여전히 군대는 끔찍하고, 관계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음악으로 싸우고 있다.
불법 이민을 언급했다. 하와이도 캐나다에서 국경을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여정에 관해 듣고 싶다.
어느 날 아빠가 미국으로 가자고 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로 갔는데, 어느 날 새벽에 깨우더니 그냥 갑자기 옥수수밭을 건너더라. 건너니까 미국이었다. 거기서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로 이동했다. 솔직히 자세한 여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와이로 가기 전에 추억하는 한국의 장면이 있는가?
많다. 친구들과 축구하면서 놀고, 누나들이 용돈 줘서 맛있는 거 사먹고, 애들이랑 문방구 앞에서 “스트리트 파이터 2” 하고, “아기공룡 둘리”를 보던. 좋은 기억도 많고 좋지 않은 기억도 많다. 갑자기 선생님한테 싸대기 엄청 맞아서 코피 터지고… 그런 것도 많다.
얼마 전 6.25 전쟁에 참전하신 할아버지를 기리는 인스타그램 게시물이 인상 깊었다. 그런 게시물을 볼 때면 한국에 대한 애증 관계가 더 돋보이는 것 같다.
나는 한국을 사랑한다. 사랑하기에 모두가 자유롭고 잘 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사랑하기에 내 동생, 내 자식들이 다시는 군대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하기에 평화가 왔으면 좋겠다. 사랑하기에 다들 깨어서 용기를 내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좀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내 DNA에 있는 것 같다.
한때 소울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고 들었다. 맞나?
그렇다. 로린 힐(Lauryn Hill) 같은 음악, 이런 거 많이 들었다. 어렸을 때 미국 라디오에서 로린 힐이 많이 나왔다.
최근 애플 뮤직에서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을 역대 최고의 앨범으로 선정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단하다. 로린 힐도 소속사와 노예 계약을 해서 음원을 다 뺏겼다. 아마 그래서 최고의 앨범으로 선정되었어도 그녀가 아닌 소속사가 돈을 벌겠지. 그녀도 그러한 이유로 상처받고 다시는 앨범을 안 낸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나랑 비슷한 상황이지.
어렸을 때 어떤 음악을 즐겨 들었는지 궁금하다.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그 곡을 되게 좋아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팝송을 엄청 많이 들었다. 옆에 있으면 항상 좋은 노래가 많이 나왔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노래를 계속해서 찾아 듣는 것 같다.
당시 들었던 팝 중에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노래가 있나?
지금 바로 생각나는 곡은 잽 앤 로저(Zapp & Roger)의 “Computer Love”. 이 곡이 너무 좋다. 다들 아는 노래일 거다.
지난 비프리의 음악 커리어를 되짚어보자. 하이라이트 레코즈에 들어가서 첫 컴필레이션 앨범 [Hi-Life]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는데, 당시 작업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그냥 그 앨범을 발매할 때라는 걸 느꼈다. 지금 이걸 하면 잘된다, 지금이다, 하는 느낌.
그래서 코홀트(The Cohort) 등 기세가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 이끌어준 건가?
그렇다. 나는 사람의 가능성을 엄청 믿는 편이다.
하이라이트 내에서 가장 뜻이 잘 맞았던 아티스트가 있다면?
다 좋았다. 문제가 없었다. 사실 그냥 하자 그러면 하고, 아니면 말고. 별로 문제없었다.
함께 성장하면서 결과물이나 음악과 관련한 피드백으로 치고받은 아티스트는 없었나?
나랑 치고받고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오해받는 게, 나는 미국에서 자랄 때, 눈 뜰 때부터 잘 때까지 놀림과 욕이 일상인 전쟁 같은 곳에서 살아서 그런지 모든 사람에게 약간의 공격적인 태도가 드러나는 것 같은데, 사람들은 그걸 무서워하고 반박도 못 한다. 그런데 나는 싸우자는 의도가 아니고 딱히 감정이 없다. 그냥 내 모습대로 남들에게 하는 건데, 사람들은 항상 피한다. 살짝 이상하게 보기도 하고.
[Korean Dream]이 발매된 지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최근에 다시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니. 지금의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 같아서 듣지 않는다. 사실 모든 노래는 나오면 안 좋아진다. 발매하기 전까지만 번은 들으니까, 과거 노래 중 그 무엇도 기억하지 않는다.
10년 사이, 무엇이 달라졌나?
우선 신앙. 하느님에게 의지하고, 빌고, 허락받고 그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제는 스스로를 의지한다. ‘나를 도와줘라, 우주여’, 뭐 그런 느낌이지. 하느님보다는 이제 조상님을 섬긴다. 신앙이 좀 무속 쪽으로 넘어갔다.
종교와 믿음이 변화한 계기는?
내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셨고, 전쟁에서 총을 맞고 돌아가셨다는 말을 가족에게 전해 들었다. 그렇지만 직접 만나본 적이 없고 항상 할머님만 생각하다 보니 할아버지를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몰랐다. 자기 자식과 가족을 위해 희생했는데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광복절에 순직자를 비롯해 독립운동가들까지 부정하는 걸 뉴스로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혼자 엄청 소리 지르고 통곡하면서 할아버지께 절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게 무슨 운명인가 싶었다. 할아버지는 나라를 지키셨는데 나도 그래야 할 것 같다. 사실 내가 한국을 싫어하고 욕만 하는 것 같지만, 그만큼 한국을 사랑한다. 그래서 좋은 말도 많이 했고, 좋은 노래도 많이 만들었다. 그걸 모두가 알아야 한다. 이건 관심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밥그릇보다 미래 세대와 형제들이 나처럼 고통받고 또라이가 되면 안 되니까. 다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전히 앨범이라는 음악의 단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강한 것 같다. 비프리의 앨범은 어떻게 흘러야 한다는 본인만의 철칙 혹은 노하우가 있나?
우선 이전에 했던 거랑 똑같은 건 최대한 안 하려고 한다. 그리고 새 앨범을 작업하기 전에는 엄청나게 많은 새 음악을 접해야 한다. 앨범 하나를 끝내고 바로 다른 앨범 작업에 들어가면 사운드적으로나 철학, 생각이 비슷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다른 경험을 쌓고 새로운 음악을 많이 접하려고 노력한다. 여기서 새로운 아티스트를 찾고 영향을 받고, 또 어떤 방향으로 갈지를 감 잡고, 그게 기본이다. 그리고 새로 접한 음악에서 조금씩 나의 새 앨범을 떠올리며 ‘어떤 주제일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도를 정리한다. 그래서 다음 앨범의 주제는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한국에 유교를 퍼뜨린 최승로를 찾아가 족치는 거다. 그런데 막상 그런 생각을 하며 앨범을 제작하더라도 정확히 그 주제로 확정해서 앨범을 제작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만약 내 목적지가 백운대라면, 백운대를 가는 도중에 온갖 일이 생긴다. 큰 틀과 주제를 잡을 뿐, 앨범을 제작하면서 새로운 감정과 생각을 집어넣는 편이다. 그래서 앨범을 만드는 일이 재밌다.
이번 허키와 발표한 앨범의 경우에는 그 과정에서 어떤 음악을 들었는가?
허키가 내게 와서 단순한 붐뱁을 하자고 말하기 전에는 앞서 언급한 잽 앤 로저 등의 훵크 음악을 많이 듣고 있었다. 그래서 혼자 미디를 연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다음 앨범은 내가 연주하는 콘셉트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허키가 그런 앨범은 귀찮지 않냐고 묻더라. 대충대충 하자고. 그 말을 듣고 보니 혼자 연주하는 게 너무 골치 아팠다. ‘그래, 붐뱁이 제일 쉽고 재미있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붐뱁을 다시 파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혼자 훵크, 소울, 알앤비를 한창 듣다가 다시 완전히 붐뱁으로 돌아갔다. 샘플 차핑, 뭐 이런 느낌으로.
허키라는 프로듀서와 죽이 잘 맞은 건지?
친구는 지켜야 하는 선이 좀 두껍다. 친구는 서로 비슷하다 보니 어떻게든 이해해 준다. 허키는 나를 알고 충분히 예측하면서 긴장하고 왔다. 그런 모습이 고마웠다. 다들 나를 미쳤다고 멀리서만 지켜보고 지랄하는 와중에, 허키는 나에게 먼저 다가와서 “옛날에 붐뱁 좋았는데, 그런 거나 다시 한번 하자”라고 말해줬다. 그래서 믿음과 고마움이 교차하더라. 나 같은 사람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거기에 엄청 빠져서 헤어 나오기 힘들다. 뭐 하나에 집착하고 꽂히면 끝까지 파고 어떻게든 뭔가 해야 한다. 그렇게 부정적으로 빠져드는 상황에 허키가 나를 잘 빼내어줬다고 생각한다. 고마우니까 더 보답해주고 싶다.
[Korean Dream], [희망]도 비슷한 맥락으로 제작한 앨범이었다. 다시 말해, 모두 팬 서비스 차원에서 만든 앨범이다. 나는 군대를 엄청 욕하고 있던 상황인데, 나를 찾아오는 애들은 중학생 여자애들이었다. ‘얘들이 나 좋다는데 왜 좋지? 나는 그냥 군대 욕하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그 아이들을 위해 음악을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자 했다. 그런 마음으로 보답하고 싶고, 고마움을 가지고 있지만 내 목표 의식이 억세서 자꾸 날카롭게 드러난 거다.
2011년, 취랩이 당신의 첫 두 싱글 “Hey!”와 “Coffee Break”를 두고 ‘소프트’하다고 평가했다. 13년이 흐른 지금, 경험이 쌓인 비프리는 오늘날 후배 MC의 곡을 들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나?
나는 다 이해한다. 그냥 전부 이해한다. 후배들이 어떤 음악을 해도, 쉽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음악이 끔찍하더라도 모두 이해한다. 오글거리는 말을 해도 다 좋다. 모두 각자의 모험을 하고 있는 거니까. 각자 찾고자 하는 게 있다. 그래서 전부 응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음악을 하면서 무엇을 찾으려 했나?
가족. 가족을 잊고 살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래서 이제 음악을 좀 덜 하려고 한다. 너무 컴퓨터 앞에서 음악만 하고 있으니까 인생의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유명해질수록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 같고, 수군거리는 것 같고, 쳐다보는 것 같고, 놀리는 것 같고 미쳐가는 기분이었다. 좀 쉬면서, 오토바이나 타고, 가족과 놀러 다니고 싶다.
2016년부터 뉴웨이브 레코즈를 운영했다. 그간 홀로 레이블을 운영하며 느낀 한국 음악 산업에 관한 생각이 듣고 싶다.
힘들다.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밖에. 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 모든 것을 잃을 각오, 이혼할 각오, 집 팔 각오를 하고 뛰어들어야 한다. 그냥 다 잃어야 한다는 것.
처음 레이블을 시작할 때 당신 또한 그러한 각오를 했나?
당연하지. 난 평생 막노동하면서 음악을 할 거다. 내가 음악을 시작했을 때, 홍대에서 음악 하는 형들은 다 그러고 있었다. 다들 음악으로 돈 조금 벌면 그게 씨발 평생 가는 줄 아는데, 착각이다. 돈 생기는 게 축복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헤비메탈이나 록 밴드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돈이 안 되니까 일하면서 밴드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래퍼들은 일을 안 한다. 그게 이상한 거지.
콧대가 높아진 건가?
그것도 있지. 힙합이라는 장르가 어떻게 한국에 등장했는지 생각해 보면 쉽다. 돈 많은 강남 유학생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시작된 음악이니까 누가 배달 알바를 하겠나? 할 필요 없다. 돈이 많으니까. 그래서 내 윗세대 형들은 다 날라리 형들이었다. 잘 놀았다. 또 그게 멋있기도 했고. 그런데 다음 세대부터는 달랐고 나도 달라졌다. 선택지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연예인처럼 유명해지거나, 자유로워지거나. 나는 후자를 택했다. 내가 선택한 길이 제일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자유롭고, 하고 싶은 말하고, 마음대로 해도 “사건반장”에 안 나온다. 잠깐의 빛에서 안정성을 원하는 건가, 아니면 이 험한 길에서 길게 볼 것인가? 이걸 다들 생각해 봐야 한다.
‘시발’을 태극 문양으로 이어 만든 뉴웨이브 가방과 커버 아트 디자인 등이 인상적이었다. 음악과 디자인 등의 커버 아트를 동일한 결의 예술로 인식한 작업이었나?
그냥 모든 것을 음악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 지구, 이 현실에 있는 모든 사물은 파동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원자가 흔들리고 있는데, 그게 너무 촘촘해서 단단하다고 느낄 뿐이다. 모든 건 진동이고 파동일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모든 사물과 디자인, 그림 등도 음악이다. 그렇다고 음악이 예술의 형태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달라. 그냥 모두 동등하다는 것, 연결돼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깨달음은 언제 느꼈나?
계속해서 고통받고, 고생하고, 실수하고, 잘못하고, 반성하면서. 왜 내가 잘못했지, 왜 내가 그렇게 화를 냈던 거지? 뭐가 문제일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성격이 좀 욱했다가도, 그만큼 빨리 미안함을 느끼는 편이다. ‘오, 내가 왜 그랬지, 미안하다’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한다. 계속 돌아보고 어떻게 하면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앞으로 달려가는 인생에서 가만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스님들이 절에서 수련하는 것을 각자의 방식대로 하고 있다. 그들이 불경을 외울 때 나는 마이크를 잡았을 뿐. 나는 절에 관해 특별히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각자의 방식대로, 나는 나의 절에서 수련하고 있구나 싶었다. 그런 깨달음은 ‘어떻게 하면 평화가 올까?’와 같은 생각에서 오는 것 같다.
당신의 성찰에서 내려진 행복이란 무엇인가?
거제도 가서 조용히 평화롭게 산악 오토바이 타고 있으면 진짜 행복할 것 같다.
거제도라는 물리적인 장소에서만 당신이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서울에서는 행복할 수 없는 걸까?
지금은 행복을 느끼기 힘들다. 재판이 네 개가 있고, 벌금 500만 원, 카드 값도 500만 원 있다. 그래서 나름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다. 그걸 다 해결하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안 그래도 오늘 여기 오는 길에 경찰서에서 뭐 날아온 거 하나 받으려고 온갖 고생을 했는데, 그런 것들이 없어지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비프리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목표는 군대가 사라진 세상이다. 통일을 이루는 것. 그래야만 행복하고 자유로울 것 같다. 분단국가에서 가슴 아프게 남자들이 2년 갇혀 있으면서, 어떤 가혹 행위를 당하고, 누가 죽어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걸 계속 보는 이상 나는 죽을 때까지 싸울 거다. 죽을 때까지 욕할 거고. 우리 자식들, 우리 동생들 군대에 그만 보내야 한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남자들 군대 가서 뭐 하나? 잔디 깎고, 장군들 다니는 길, 눈 밟지 말라고 청소한다. 이건 나라를 지키는 게 아니다. 예비군 안 가는 거, 안 갔다고 벌금 내라고 협박 안 하는 거, 이런 게 자유다.
마지막으로 비프리의 팬에게 전하고 싶은 한마디.
그냥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문제 많고 사이코 같은데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들어 주는 게 신기할 뿐이다. 너무 고맙다.
Editor │ 황선웅, 서하비
Photographer │ 전솔지
*해당 인터뷰는 지난 VISLA PAPER 21호에 실렸습니다. VISLA 매거진은 VISLA 스토어에서 구매하거나 로컬 판매처를 통해 만나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