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대 범람의 시대. 스마트폰을 손에 쥐게 된 시점부터 이미 특이점은 왔을지 모른다. 예술, 패션 어느 분야를 가릴 것 없이 쉴 새 없이 스크린 위로 스쳐가는 온갖 사진과 화보를 보고 있자면 디지털 세상이야 말로 마르지 않는 영감의 보고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점차 가속화되어 들이닥치는 정보는 누가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냈는지는 고사하고 심지어 그 존재 자체도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워낸다.
누군가는 작금의 화보 대부분을 두고 90년대 이전 생산된 것들의 재탕의 재탕이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새로운 인물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으며 또 누군가는 그들을 카메라에 담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다듬어 낸다. 도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진작가 유리 호리에(YURI HORIE) 역시 본인의 화려한 색을 발하며 거센 물결 속에서도 차근차근 입지를 다져 왔다.
2016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서울 패션위크 스냅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유리의 렌즈에는 이제 메건 더 스탤리언(Megan Thee Stallion), 로살리아(Rosalia)를 비롯한 월드 클래스 스타는 물론, 패션 브랜드 히스테릭 글래머(HYSTERIC GLAMOUR)의 캠페인이 담긴다. 최근 히스테릭 글래머의 40주년을 기념해 촬영된 CL 화보 역시 유리의 작품.
올해로 10년 차를 맞은 유리 호리에는 지난해 첫 개인전과 사진집을 출간하며 또 한 번 그녀만의 독특한 세계를 확장시켰다. 가장 일본적인 ‘로망’을 포착 그녀의 사진 뒤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지, 서울을 찾은 유리와 명동 카페 포엠에서 딸기 와플을 즐기며 대화를 나눴다.
서울엔 어쩐 일로 오게 됐나. 방문이 꽤 잦은 편인 것 같다.
브랜드 룩북과 아티스트 촬영 차 방문했다. 사실 고등학생 때부터 K-POP을 좋아해서 영어는 뒷전이고 오로지 한국어만 공부하고 있었고, 대학교 3학년 때는 부산에서 1년간 유학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후 사회인이 된 뒤에는 쭉 일본에 있었지만, 주말을 이용해 한국에 놀러 오거나 한국 패션 브랜드 바이어들의 통역을 도우며 한국과의 관계를 쌓아왔다. 정말 수도 없이 많이 온 한국을 정말 사랑한다.
지난해 사진집 ‘浪漫-Roman-‘을 출간했다. 최근 당신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가득 채운 것도 이 프로젝트의 일부로 알고 있는데, 반짝이는 표지부터 강렬한 인상을 전하는 사진집을 소개해 달라.
작년 6월에 사진전을 개최했는데, 그 아카이브라 할 수 있다. 사진전의 주제는 제목 그대로 ‘로만(浪漫-Roman-)’이었다. 일본어에는 ‘칸노로만(漢の浪漫)’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성은 이해할 수 없는, 남성들만의 동경을 뜻한다. 그 예로는 데코토라[1]나 성인식, 가부키초의 밤 문화, 문신 같은 게 있다. 사실 어찌 보면 살면서 의미 없고 쓸데없다고 느껴지는 행위나 취미일 수 있지만, 이런 일들을 즐겁게 행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게 좋았다. 사진을 찍으며 주제를 생각했을 때 “아 내가 이런 남성들의 로망, 동경을 좋아하는구나”하고 느껴서 ‘로만’이라는 제목을 짓게 됐다.

특히 사진집에 다수 등장하기도 하고 전시 포스터를 장식한 데코토라가 인상적인데, 데코토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라면?
프리랜서가 된 지 1년이 지난 시점에 감사하게도 바쁘게 일을 하며 보낼 수 있었는데, 너무 정신없이 일을 쳐내다 보니 내가 왜 사진을 찍는지, 사진을 왜 시작했는지를 잊게 되더라. 그때 조금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하마터면 사진이 싫어질 뻔했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나를 다시 도와준 것도 사진이라는 게 웃기지만. 나는 예전부터 재미있는 이벤트나 신기한 사람들을 찾는데 꽤 도가 텄다. 그러던 중에 데코토라 이벤트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조사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그 이벤트로 향한 게 시작이었지. 다수의 데코토라가 모여 불을 밝히고 경적을 울리고 있더라. 정말 장관이었다.
사진집 제목이기도 한 ‘로만(Roman)’, 어떤 부분이 일본적인 낭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본적인, 혹은 일본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로망으로 생각하고 제목을 지었다. 다만, 일본어의 ‘로만(浪漫)’이라는 한자가 멋지달까? 굳이 이대로 해석하지 않아도 되니 해석은 각자에게 맡기겠다. 꼭 필요하지 않은 일임에도 열정적으로 실행하는 일본 사람들, 그 열정이 응집된 이벤트, 물건 같은 것들을 정말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로망이다.
사진집의 사진을 찍으며 생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데코토라를 촬영하는데 사람이 너무 몰려 경찰이 왔던 것.
사진집 출간 전 첫 사진전을 개최한 것으로 아는데 축하한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전시는 어땠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 줘서 너무 감사했고 즐거웠다. 사진전을 열고 싶은 계획은 있었지만 이런 형태로 보여줄 수 있어서 기뻤다. ‘전시’라는 단어가 싫어서, 재미있는 방식으로 풀고 싶었거든. 그래서 마치 놀이기구를 즐기는 것처럼 전시를 구성했다. 반짝이는 LED 액자에 들어 있는 사진이 가득한 방과, 어두운 방에서 손전등으로 사진을 비춰 봐야 하는 방을 만들어 관객이 중심이 되는, 즐겁고 기억에 남는 전시가 되도록 했다.

도쿄아트북페어에서는 특별한 버전의 ‘로만’을 내놓기도 했는데. VOL.1과 VOL.2의 차이라면?
두 버전 모두 공통적으로 ‘로만’이라는 주제를 공유한다. VOL.2는 나도 즐겨 가던 도쿄아트북페어에 처음으로 출전하며 새롭게 만든 특별판이다. 조금 더 어둡고 에로적인 요소들을 추가했다.
사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가 서울 패션 위크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사진을 시작하게 됐나.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
첫 사회생활을 카메라 회사에서 하게 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진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는데, 매일 같이 카메라를 보고 살다 보니 밖에 나가 사진이나 찍어볼까 생각하던 게 여기까지 온 거다. 좀 더 구체적인 계기는 당시에 한국의 패션 브랜드 바이어들의 통역을 돕고 있기도 했는데, 그들의 초대로 2016년도에 서울 패션 위크에 가게 됐다. 그때 동대문에서 패션 위크에 방문한 사람들을 촬영하며 사진을 찍는 일이 즐겁다고 느낀 게 결정적이라 할 수 있지. 스트리트 스냅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 뒤로는 나일론(NYLON)이나 보그(VOGUE) 같은 매체에 스냅을 찍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나일론의 서울 특집 편을 보고 드랍도쿄(Droptokyo)의 전 편집장이 보고 연락을 줬고, 그곳에서 4년간 인하우스 포토그래퍼로 근무했지. 지금은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2017년서울패션위크 2017년 서울패션위크
당시에 찍었던 사진들을 기억하는가? 당시를 회상해 보자면 서울의 풍경은 어땠나.
물론 기억한다. 근데 정말 엉망인 사진들뿐이다. 하하. 풍경이라기보다는, 서울 패션위크에서는 사람이 너무 많아 급하게 찍어야 했다. 그때 빠르게 촬영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서울의 풍경은 항상 내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일본과는 다르게, 옛 모습이 남아 있어서 정말 좋다.
처음 스냅을 찍을 때보다 지금 더 유리 호리에만의 개성이 뚜렷한 것 같다. 모델이 관능적으로 드러나는 점도 그렇고 화려하게 번지는 빛의 분위기도 그렇다. 이런 스타일의 사진에 꽂힌 계기라면?
스냅사진을 찍을 때도 사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일로서 촬영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강했다. “반드시 찍어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게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어서 내 개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게 아닌가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개성이 자연스럽게 생겨난 걸지도…?
성인식, 데코트럭 같은 어쩌면 의미 없는 일에 돈을 쓰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맥시멀리스트로서 요즘은 어떤 소비에 꽂혔나.
음… 뭐랄까… 귀여운 캐릭터 굿즈? 내가 중학생 일 때 유행했던 Y2K 시절의 물건들이 다시금 유행을 타고 있어 곤란한 상황이다. 최근에는 큰 다마고치 인형을 샀다.
한편 여태 수많은 패션 화보와 아티스트를 촬영해 왔으며 비교적 최근에는 메건 더 스탤리언과 로살리아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작가로서 어느 정도의 입지를 다진 것 같은데, 궤도에 올랐다고 느끼나?
아직 전혀. 하지만 사람들과의 만남과 촬영은 여전히 재밌다. 촬영장 분위기도 매번 달라서 질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진이 재밌는 거다.
가장 성취감을 느꼈던 작업이 있다면?
아무래도 사진전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2024년 최고의 일이었다.
무수히 많은 사진을 찍어왔을 텐데, 지금 사진을 대하는 태도는 어떤가. 여전히 새롭나? 조금 매너리즘에 빠질 만도 한 것 같은데.
매번 새롭고 재미있지만 물론 너무 바쁘면 짜증이 솟구칠 때도 있다. 균형이 정말 중요하더라. 이러나저러나 사진은 정말 너무 좋다!
어떤 카메라를 쓰고 있나.
주로 캐논(CANON)을 많이 쓰긴 하지만, 뭐든 다 사용하는 편이다.

당신의 근래 사진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개인적 감정은 쾌락 혹은 즐거움이다. 사진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역시 즐거움일까?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르니까. 내가 전하려고 한 것보다, 내 사진을 보고 뭔가 느꼈다면 그것 만으로 기쁘다. “밖에 나가면 재미있는 일이 정말 많다구요~”라던가. 하하. 그리고 일본의 조용한 문화뿐만 아니라, 이상하고 독특한 문화에도 꼭 주목해 주면 좋겠다.
요즘 심리 상태는 어떤가. 즐거운 편인가?
재밌다! 여러 사람들에게서 축복받는 기분도 든다.
즐거워 보여 좋다. 앞으로의 계획이라면?
아마 청소! 하하. 물론 짐 정리도. 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또 재미있는 곳에 가서 촬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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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장재혁
Photos | Yuri Hor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