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케일 모델링이란 물체, 구조물 혹은 장면, 상황을 특정한 비율로 축소하여 재현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축소된 형태, 재질의 재현을 목표로 한 작업이지만, 결과물에서는 그 이상의 것들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작업으로 완성한 장면의 역사, 이야기 혹은 작업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관람객으로부터 발견되는 무언가가 있다.
도쿄빌드(Tokyobuild)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알려진 스웨덴의 아티스트 크리스토퍼 로빈 노르드스트룀은 도쿄의 오래된 건물을 스케일 모델링한다. 20세기 일본 최전성기의 유산과 흔적은 일본의 건축물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일본 문화에 영향을 받은 전 세계의 특정 세대는 일본의 건물, 폰트, 공산품의 형태 등에서 습득된 감정적 유대감을 느낄 거라 확신한다.
도쿄빌드의 작업은 오래된 일본의 건물에 담긴 시간의 흔적과 이야기의 재현으로 느껴진다. 독창적인 디테일과 텍스쳐 재현에 대한 집념, 실험 정신이 담긴 그의 작품은 보는 이들 각자의 경험과 연결되는 지점에서 각기 다른 감정을 선사할 것이다. 작가의 작은 세계를 구현하는 도쿄빌드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크리스토퍼 로빈 노르드스트룀(Christopher Robin Nordström)이라고 한다. 스톡홀름의 남쪽 섬 쇠데르말름(Södermalm)에서 나고 자랐으며,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다. 가구 디자인과 순수미술을 전공했고, 이케아(IKEA)와 H&M과 같은 유명 브랜드에서 제품 디자이너로 일했다.
어린 시절 어떤 문화에 영향을 받았나.
어릴 때부터 “스타워즈(Star Wars)”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이 시리즈는 오랜 시간 내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장대한 우주 전투, 깊이 있는 철학적 주제, 상징적인 캐릭터가 결합한 이 시리즈는 내게 영화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했다. 또, 14살 때 몰래 본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의 영화, “저수지의 개들”이 기억난다. 타란티노 특유의 날카로운 대사와 강렬한 폭력, 비선형적 스토리텔링은 내게 큰 충격이었고, 누아르에서 사실적임면서도 독특한 서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깨닫게 했다. 무술 영화도 많이 봤다.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 3(Supercop 3)”는 여전히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로 독창적인 액션과 무술, 그리고 슬랩스틱 코미디가 인상적이지. 앞서 말한 모든 영화와 감독은 내 영화 취향을 만들었고, 모험과 창의성, 그리고 위험을 즐기는 마음을 심어줬다.
당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면, 스톡홀름이 아닌 일본에서 활동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건축물에 직접 다가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 주제를 택하고, 리서치하는지.
구글 스트리트 뷰(Google Street View)로 가상의 산책을 즐기고, 무작위로 골목과 거리를 탐색한다. 그 과정에서 눈에 띄는 건물의 스크린샷을 캡처하지. 특정한 아이디어로 건물을 찾는 건 아니고, 단순히 그때 끌리는 걸 발견하는 편이다. 이후 스크린샷을 참고해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Adobe Illustrator)로 간단한 설계도를 그린다.
전 세계 수많은 도시 중 도쿄에 끌린 이유라면?
12살 때부터 도쿄에 방문하는 게 꿈이었다.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으면 자연스레 그 모든 길이 일본, 그중에서도 도쿄로 이어진다. 2018년에서야 처음으로 도쿄에 갔는데, 그야말로 인생이 바뀌는 경험이었다.
주로 오래된 건물을 모델링 소재로 삼고 있는데, 이런 구축 건물에 매료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래된 집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각 건물은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고, 추억으로 가득 차 있지. 이런 건물이 수년간 목격했을 웃음과 슬픔, 고요하고 분주한 순간을 상상하곤 한다. 이런 건물의 벽이 만약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이루어진 삶의 순간을 어떻게 담아냈을지 궁금해진다. 오랜 집은 단순히 시간의 흔적을 넘어, 그 안에서 벌어진 모든 메아리를 간직하고 있다.
7년 전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서울의 건물과 도시 풍경은 도쿄와 또 어떤 점에서 달랐나.
당시 내가 일했던 회사의 출장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정말 즐거웠지. 서울은 훌륭한 커피숍과 맛있는 와플로 가득한 도시였다. 도쿄와 비교하자면, 조금 더 ‘유럽적’인 영향이 있더라. 건축이나 생활 방식,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도쿄가 전통적이고 동양적인 느낌이라면, 서울은 현대와 전통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아, 그리고 난 스트리트 댄스, 특히 팝핀(Popping)을 좋아하는데, 서울에는 정말 훌륭한 댄서가 많더라. 특히, 호안(Hoan)과 제이씨(Jaycee) 같은 댄서가 인상적이었다.
3D 프린팅의 발달로 디오라마와 스케일 모델링의 가능성이 무한해졌다. 하지만, 당신의 작품은 MDF부터 금속 가공, 플라스틱 성형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그 완성도를 높이고 있는데.
나도 3D 프린팅을 좋아한다. 최신 프린터의 성능은 정말 놀랍지. 하지만, 나는 본래 부품이 만들어진 방식과 유사한 기법으로 재현하는 시도를 즐긴다. 그 예로 간판을 진공 성형 방식으로 제작하는데, 이는 실물 간판 제작 방식과 동일하다. 이 모든 건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새로운 기법과 기술을 탐구하는 과정 그 자체가 즐겁다.
주로 어떤 비율로 작업하고 있나.
1:20, 머릿속에서 계산하기 편리하거든.
디오라마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평균적으로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작품마다 다르지만, 보통 3개월 정도 걸린다. 다만,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 종종 더 오래 걸릴 때도 있다.
가스관부터 환기구 에어컨 유닛 등 건물 외부 디테일이 눈에 띈다. 이런 요소가 당신의 예술적 비전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지.
맞다. 이런 요소는 단순한 디테일을 넘어 생동감 넘치는 도시의 상징이다.
이와 함께 작업물에서 종종 그래피티를 발견할 수 있다. 실제 건물에 있는 그래피티를 고스란히 옮겨내고 있나, 아니면 당신이 직접 창작한 작품도 있는지.
원본 디자인을 최대한 가깝게 재현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가끔은 내 창의력을 살려 몇 가지 개인적인 디자인 요소를 추가하기도 한다.
도쿄빌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 모델 키트나 디오라마를 제작해 본 일이 있나, 어떤 종류의 프로젝트를 다뤄봤는지.
어릴 때 에어픽스(Airfix)와 타미야(Tamiya) 같은 브랜드에서 발매한 2차세계대전 항공기 모델을 만들곤 했다. 아버지는 모형 기차에 관심이 많았고, 어머니는 인형의 집을 좋아해 난 항상 모형에 둘러싸여 살았다. 학교 친구 중에 피규어 페인팅의 대가가 있었는데, 지금도 함께 어울리며 그에게 많은 영감을 받는다. 어린 시절 원격 조종 자동차와 보트를 가지고 놀기도 했고.
디오라마의 질감을 재현하는 당신의 실력은 놀라운 수준이다. 지금의 숙련도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텐데.
분명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 내가 모델 제작자로 크게 성장한 순간은 ‘충분히 괜찮다’는 수준에 안주하지 않고, 필요하다면 다시 작업하는 자세를 받아들였을 때다. 지금 당장은 후퇴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실제로는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걸 깨달았고, 이 마인드셋으로 내 기술을 크게 향상할 수 있었다. 계속 시도하고, 항상 더 나은 걸 목표로 삼길 바란다.
도쿄빌드를 시작하는 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있나.
특별히 영향을 준 인물은 없었다. 내가 집에서 넷플릭스나 보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당시의 상황이 큰 영향을 미쳤지.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한 필요성을 느꼈다.
혹시, 본업이 있나, 아니면 지금 도쿄빌드를 운영하기 위해 부업을 하고 있다든지.
지난 2년 동안 미니어처 작업에만 집중하고 있다. 도쿄빌드부터 건축가와 영화 제작자를 위한 모델 제작까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전에는 H&M에서 가방 디자이너로 일했다.
인스타그램에서 공개한 것 외 진행 중인 또 다른 프로젝트가 있나.
“진정성(Authenticity)”을 주제로 한 예술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이 작업은 광범위한 아카이브 조사를 바탕으로 극사실적인 조각을 만드는 걸 목표로 한다. 미니어처 작업과는 구별되지만, 내 전반적인 예술적 접근 방식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스케일 모델링의 매력은 무엇인가.
모든 과정을 책상 위에서 내가 직접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다. 이 모든 게 내 손안에 있고, 눈앞에 있을 때, 마치 명상하는 기분이 든다.
도쿄의 오래된 건물 외 앞으로 작업해 보고 싶은 다른 건축 양식이나 구조물이 있다면.
산업 구조물과 다리, 특히 고전적인 주철 다리를 작업해 보고 싶다. 동시에 현대 건물이나 고층 빌딩을 만드는 것도 또 흥미로운 도전이 될 것 같다.
지금까지의 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
모든 작업이 중요하지만, 굳이 하나 꼽자면, 세 번째로 만든 레스토랑 모델이 떠오른다. 나만의 작업 스타일을 찾은 순간이었지. 또 작은 공중화장실을 만든 적이 있는데, 그것도 아주 재밌고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렇다면, 특히 어려웠던 프로젝트는?
그런 순간이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포기 수준에 이르렀던 프로젝트는 대형 건물 한쪽 면에 사용하는 비계(Scaffolding)를 제작할 때다. 모든 부품을 황동으로 맞춤 제작해야 했으며, 그 수도 정말 많았다. 그 구조물이 실제 비계의 역할을 해야 했기에 파이프 연결 등 모든 세부 사항을 구현해야 했지. 작업하는 내내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
앞으로 협업하고 싶은 아티스트나 브랜드는?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너무 많다. 지금은 토호 스튜디오(TOHO Studio)와 함께 “고질라(Godzilla)”의 70주년을 기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영화 팬으로서 영화 관련 프로젝트는 항상 즐겁다. 또한, 패션, 스니커 브랜드와의 협업에도 더 깊숙이 참여하고 싶다. 캠페인 작업이나 다른 창의적인 협업은 정말 멋진 기회가 될 것 같다.
당신의 작품을 보는 이들이 무엇을 느끼길 바라나.
일본에서 살다가 해외로 이주한 일본인이 내 작품을 보고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마치 도쿄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지. 반면, 내 작업을 통해 평범한 일상의 아름다움을 느꼈다는 이들도 있었다. 내 작품은 사람들이 주변에 숨겨진 매력을 잠시 멈춰서 감상하고, 그에 고마움을 느낄 수 있도록 초대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스케일 모델러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미니어처 모델링의 가능성을 더 넓히고, 더 많은 사람이 이 작업에 관심을 지니게 하는 것. 미니어처라고 하면 통상 기차나 2차세계대전과 같은 모델을 연상하기 쉽지만, 그 가능성은 무한하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여러 학교와 대학에서 모델링을 가르쳤다. 제작과 조립의 즐거움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게 정말 즐겁다. 학생들이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실력을 키우며, 자신만의 접근 방식을 발견하는 걸 지켜보는 일은 매우 보람차다. 앞으로 더 많은 단체와 협력해 워크숍을 개최하고 싶다. 더불어, 전통적인 모델과 최신 혁신 기술 간의 간극을 메우며, 이 취미를 더욱 풍성하게 키우고 싶다.
Editor │박진우 오욱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