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현인들은 입을 모아 ‘인간은 본래 비정형적인 존재’라고 설파했다. 우리가 살아가며 생각하는 방향과 느끼는 감정은 결코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흐른다고. 주변 환경과 인간관계 속에서 영향을 받고, 때론 예상치 못한 순간이 우리의 방향을 바꿔놓기도 한다. 그렇기에 삶이란 고정되거나 하나로 규정될 수 없으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서울의 프로듀서 리비게쉬(LIVIGESH)의 음악을 들을 때, 이러한 인간의 비정형성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그의 음악은 과거의 영향을 반영하는 동시에 현재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흡수하며 유동적으로 음악이 변해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리비게쉬는 클래식 작곡을 공부했지만, 전자음악을 탐구 중이다. 에티오피아에서 바이올린을 배웠고 시카고에서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을 접하며 전자음악의 실험 정신을 깨달았다. 아일랜드에서는 포크 뮤지션들과 어울리며 서사를 음악으로 풀어내는 방식을 익혔다. 이러한 경험 덕분에 리비게쉬의 음악은 특정 장르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스타일을 넘나든다. 변화무쌍한 행보는 그의 삶과 철학이 반영된 결과물인 셈.
필자는 2020년, 메일 한 통을 통해 처음 리비게쉬와 그가 운영하는 독립 레이블 ‘노슬랙 레코드(No Slack Records)’를 알게 되었지만, 지난 5년 동안 그가 어떤 생각과 환경에서 음악을 제작하는지에 제대로 들어본 적은 없다. 그가 평소 어떤 생각을 하며 음악을 만들고, 무엇에 영향을 받아왔는지, 그의 음악과 일상 사이의 이야기들을 듣기 위해 리비게쉬의 홈스튜디오로 향했다.
당신의 활동명 ‘LIVIGESH’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가?
콜로라도 칼리지(Colorado College)에서 클래식 작곡을 배우면서 철학, 역사, 물리학, 수학 등 다양한 과목도 함께 공부했다. 그리스 로마 철학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당시 역사 정보를 제공하는 앱을 사용해 서양 역사를 독학했다. 핸드폰으로 로마 역사를 공부하다가 리비(Livy) 또는 ‘Livi(Titus Livius)’라 불리는 로마 역사학자를 알게 되었다. 리비는 자신의 개인적인 명성이 어둠 속에 묻히더라도, 자신의 작업이 기억에 남으면 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철학이 마음에 들어 ‘Livi’를 기억해 두었다. 2014년에 2년 동안 1집 [Disco Island]를 작곡하고 프로듀싱했다. 2016년, 1집을 발매할 이름을 고민하다가 ‘Gesh’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Livi’와 ‘Gesh’를 합성해 ‘Livigesh’라는 이름을 만들었고, 이를 예명으로 사용하며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특별한 뜻이 없지만, 로마 역사학자 리비처럼 자신이 헌신하기로 한 일에 몰두하라는 영감을 담은 이름이다.
어린 시절 산타크루즈, 에티오피아, 시카고, 아일랜드, 콜로라도 등을 이주하며 성장했다고 들었다. 이러한 경험과 배경이 당신의 음악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나?
산타크루즈에서 살 때는 너무 어려서 음악적인 영향을 받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에티오피아에서는 8살부터 11살까지 살았으며, 그곳에서 클래식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생들이 함께 다니는 국제학교를 다녔고, 8살이었던 나는 고등학생 형·누나들과 어울려 지냈다. 그들은 2000년대 초반 힙합과 록 음악을 많이 들었고, 덕분에 자연스럽게 힙합을 접하며 그 문화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힙합을 즐기는 형·누나들만큼 록밴드를 하는 형들도 많았다. 고등학생 형들이 일렉 기타, 베이스, 드럼, 그리고 턴테이블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어쿠스틱 기타와 일렉 기타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시카고에서 살기 시작했다. 당시 인터넷을 매우 활발하게 사용하던 시기였고, 마이스페이스(Myspace)와 장가(Xanga)가 유행했으며,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막 등장했다. 이때 온라인을 통해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의 앨범 […I Care Because You Do]를 접했다. 이를 계기로 전자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친구가 구워준 에이블톤 라이브 CD를 컴퓨터에 설치하며 프로듀싱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마지막 1년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보냈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뮤지션들과 교류할 기회가 많았고, 특히 포크 뮤지션들이 많아 포크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009년에는 이러한 영향을 바탕으로 포크트로니카 앨범 [Late Night Lullabies]를 작곡하고 프로듀싱했다. 당시 친구들에게 CD를 나눠 주고, 인터넷 채팅 사이트를 통해 음원 파일을 공유하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돌아와 콜로라도 칼리지에 진학했다. 클래식 작곡을 전공하며 발리의 전통음악인 발리네시안 가믈란 앙상블 멤버, 아프리칸 전통음악 밴드 리더, 대학 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고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발히 활동했다.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동시에 놀기도 열심히 했다.
당시 콜로라도에는 전자음악과 록 퓨전 음악, 그리고 잼 밴드가 유행했다. 나는 ‘Moss Bonti’, ‘ET and the Jacksons’, ‘The Jo(h)n Band’에서 프로듀서이자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이렇게 여러 나라에서 살아오면서, 음악에 대한 선입견 없이 다양한 장르에 열린 태도를 갖게 되었다.

클래식 작곡을 전공했다고 알고 있는데, 전자음악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클래식과 전자음악을 접목하는 본인만의 방식이 있다면?
클래식 작곡을 전공하면서 클래식 음악의 이론과 역사도 함께 공부했다. 2013년 여름에는 독일 옥센하우젠(Ochsenhausen)에 있는 아카데미에서 클래식 작곡을 공부하며, 영화음악 작곡가로부터 작곡 방식을 배웠다. 같은 해 겨울에는 독일의 아이제나흐(Eisenach), 오드루프(Ohdruf), 뤼네부르크(Lüneburg), 바이마르(Weimar), 아른슈타트(Arnstadt), 뤼벡(Lübeck), 뮐하우젠(Mühlhausen), 그리고 라이프치히(Leipzig)를 여행하며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삶과 작곡 방식을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웬디 카를로스(Wendy Carlos)의 [Switched on Bach] 앨범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 앨범은 무그 신디사이저로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여 클래식 음악을 전자음악으로 재해석한 작품이었다. 이 앨범을 듣고 클래식과 전자음악이 매우 가까운 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014년에는 실험 음악 수업을 들으며 이아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존 케이지(John Cage), 크지슈토프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 모턴 서보트닉(Morton Subotnick), 죄르지 리게티(György Ligeti), 에드가 바레즈(Edgard Varèse), 피에르 셰페르(Pierre Schaeffer)와 같은 20세기 작곡가들을 연구했다. 이들은 전통 악기뿐만 아니라 전자 악기를 활용해 새로운 음악적 질감과 감정을 창조했다.
나는 전자음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음악 발전의 역사적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음악 역사와 이론을 이해하고 있다면, 클래식 음악과 전자음악이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영감이 떠오를 때는 직관적으로 작곡하지만, 영감이 부족할 때는 클래식 음악 이론을 활용해 전자음악을 구성한다. 이러한 방식이 클래식과 전자음악을 접목하는 나만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촬영 장소는 당신의 평소 작업 공간이다. 홈 스튜디오이자 당신이 거주하는 집이기도 한데, 이곳에서의 하루 루틴이 있다면 소개를 부탁한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시며 LP를 골라 음악을 감상한다. 음악을 들으며 인터넷 서핑을 하고, 커피를 한 잔 더 마신다. 그런 다음 저녁까지 음악 작업을 한다. 저녁을 먹고 다시 작업을 하다가 아이디어가 고갈되면 커피를 한 잔 마시며 LP를 들으며 휴식을 취한다. 새벽이 되면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놓고 침대에 누워 잠을 자려고 노력한다.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편안함이 작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방해 요소도 있을 것 같은데 작업할 때 몰입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나?
음악 작곡은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을 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컨셉이 잡힌 프로젝트가 떠오르면 작업을 시작하고, 반드시 끝을 내려고 노력한다. 시작한 작업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생각이 많아져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반대로, 홈스튜디오가 몰입을 극대화하는 데 있어서 가장 유리한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홈스튜디오에는 반려견 렉시가 함께 있다. 렉시가 잠이 들면 좋은 곡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스튜디오에 다양한 악기를 보유 중이다. 가장 자주 사용하거나 애착이 가는 것이 있나?
가장 자주 사용하고 애착이 가는 악기는 ‘Akai MPC 2000XL’이다. ‘MPC 2000XL’에 저장해둔 메모리 카드 속 사운드와 샘플이 있어서, 아이디어를 기록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최근 [Energy on the Floor] EP를 발표했는데, 이 앨범이 서울의 나이트라이프에 대한 헌사라고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 경험들이 음악으로 녹아들었나?
2014년 여름, 미국에서 한국으로 왔다. 약 2년 동안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인터넷을 통해 합정에 있는 클럽 벌트(Vurt)를 알게 되었다. 벌트 나이트의 흐름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당시 벌트는 잔잔한 앰비언트 음악으로 밤을 시작해, 거의 하드 테크노로 마무리하는 방식이었다. 벌트의 편안한 소파에서 잠들고, 인더스트리얼한 댄스 플로어에서 춤췄던 기억이 난다.
음악 시장에서 한 가지 스타일로 자리 잡는 것이 더 유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다양한 스타일을 실험하는데, 이것이 창작자로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특별한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여러 나라에서 자랐고,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관심사가 많아서 여러 스타일의 음악이 나오게 되는 것 같다.
또한 당신의 행보는 다작의 음반을 제작, 발매하기에 매우 즉흥적이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피지컬 음반까지 제작하는 점에서 체계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런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끊임없이 창작하는 원동력과 음악적 원천은 무엇인가?
음악으로 나의 생각과 철학을 표현하는 것이 말로 하는 것보다 편하다. 어릴 적부터 악기를 잡으면 멜로디나 리듬이 떠올랐다. 어릴 때는 그냥 하는 것이었지만, 성장하면서 악보에 아이디어를 적고 DAW(Digital Audio Workstation)를 사용해 음악을 만드는 것이 작곡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끊임없이 창작하는 원동력은 삶에서 오는 것 같다. 친구들과의 가볍고 무거운 대화들, 여행을 하며 본 새로운 환경들, 즐겨 보는 영화들, 즐겨 듣는 음악, 그림과 예술 작품. 이런 삶의 소소한 것들이 나에게 음악적 원천이 된다.

앨범을 만들 때, 청취자의 반응을 고려하는 편인가? 아니면 오로지 개인적인 표현을 위한 창작인가?
음악을 만들 때는 청취자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는 편이다. 내 생각에 청취자는 새로운 음악을 듣기 전까지 그 음악을 좋아할지 아닐지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청취자의 반응을 고려하고 음악을 만든다면, 음악적으로 발전하기 어렵다고 본다. 음악을 만드는 것은 내게 명상과 같다. 하지만 꼭 음악의 발전을 위해서만 창작하는 것은 아니다. 음악은 자유로운 것이니까.
최근 몇 년 동안 바이닐과 같은 피지컬 음반을 소장하려는 흐름이 강세였다. 당신도 꾸준히 피지컬 음반을 제작하고 있는데, 디지털 시대에서도 피지컬 음반을 만들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
어릴 적부터 좋아하는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CD와 카세트로 들었다. 턴테이블은 초등학생 때부터 있었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바이닐을 모으기 시작했다. 레코드 가게에서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앨범을 사고, 레코드 가게 사장님들에게 새로운 음악을 추천받고, 앨범 아트워크가 마음에 들어 음반을 사던 시절이 기억에 남는다. 이런 경험들은 긍정적으로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다. 디지털 시대에도 피지컬 음반을 제작하는 이유는, 어릴 적부터 음악을 소비해온 방식이 미래에도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당신에게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것은 자유를 만끽하기 위한 것 같다. 한 장르에 머물면 표현이 제한된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일 내 창작의 필연적인 과정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특정한 틀을 깨려는 시도도 아니다. 사실 음악 레이블을 시작하기 전에는 음악에 장르를 붙이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음악에 장르를 구분하는 일은 음악 평론가, 음악 저널리스트, 음악 이론가들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특정한 장르를 의도하고 작곡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SXSW Sydney’에서 공연했다고 들었다. 이 페스티벌에서의 경험이 어땠나? 공연 중이든, 백스테이지에서든, 혹은 다른 아티스트와의 교류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SXSW Sydney’에서의 공연은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시드니에서 열린 페스티벌이었지만, 멜버른 아티스트들과 교류가 가장 많았다. 오랜만에 록 밴드 공연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호주의 아티스트들은 서로 응원하는 분위기가 강해서 인상적이었다.

레이블 노슬랙 레코드를 운영하고 있다. 레이블을 설립하게 된 계기는?
2013년부터 2014년 여름까지 대학교 친구와 함께 살았다. 그 친구와 함께 홈스튜디오를 만들었고, ‘Moss Bonti’라는 밴드 이름으로 활동했다. ‘Moss Bonti’로 만든 음악과 우리의 친구들이 만든 음악을 발매하기 위해 레이블을 설립했다. ‘No Slack’은 ‘처지지 말자, 열심히 하자’라는 의미를 가진 슬랭이다. 작업 중에 게으름을 피우거나 집중이 흐트러질 때, 우리만의 구호처럼 외치곤 했다.
레이블의 웹사이트에 ‘Turn On, Tune In, Drop Out’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이 문구는 레이블과 동시에 당신의 행보를 관통하는 철학처럼 보였는데,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의 반문화적 철학과 사이키델릭 운동이 실제로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
‘Turn On, Tune In, Drop Out’이라는 문구는 자기 인식을 확장하고, 내면과 조화를 이루며, 기존의 사회적 규범·제도·기대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티모시 리어리의 반문화적 철학과 사이키델릭 운동은 내 삶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항상 잊지 않으려고 하는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은 각자 독특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음악을 만들고 발매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 사상에서 비롯된다. 음악이 사람을 연결하고, 각자의 생각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내 임무는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레이블은 다양한 아티스트와 협업해 왔는데, 아티스트를 선정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레이블로서 아티스트를 선정할 때는 물론 음악적 표현력과 실력을 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음악적 의도와 목적,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진심이다. 자신만의 창의적인 접근 방식으로 음악적 한계를 넓히려는 아티스트들에게 더욱 끌린다.
노슬랙 레코드에서 아방가르드 박(Avantgarde Vak)의 앨범을 발매한다고 들었다.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시작되었나?
2018년쯤, 아방가르드 박이 DJ하는 모습을 생기스튜디오에서 처음 보았다. 그 이후로 아방가르드 박의 피지컬 디스코그래피를 거의 다 모으면서 그의 활동을 꾸준히 지켜봐 왔다. 그리고 6년 후, 2024년에 다시 생기스튜디오에서 아방가르드 박이 DJ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날 박을 내 작업실로 초대했다. 2024년 7월쯤, 작업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No Slack Records에서 앨범을 발매하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아방가르드 박도 이에 동의했고,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앨범 [Flex the Rhythm]이다.
아방가르드 박의 새 앨범은 어떤 방식으로 유통하고 홍보할 계획인가?
아방가르드 박의 새 앨범 [Flex the Rhythm]은 바이닐과 디지털 다운로드/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유통할 계획이다. 홍보 방식으로는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고, 프로모션 비디오를 제작하며, 라이브 스트리밍 및 공연을 준비할 예정이다. 또한, 온라인 및 오프라인 커뮤니티와의 소통, 언론 보도 및 인터뷰를 통해 홍보를 진행할 것이다. 샘플링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작업을 하나의 채널로 여기는 아방가르드 박과, 실험적인 접근을 지향하는 노슬랙 레코드가 만나서 시너지를 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Livigesh 인스타그램 계정
No Slack Reords 밴드캠프 계정
Editor │ 황선웅
Photographer │전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