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by Intissare Aamri
한국 여러 매체에 소개되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페기굴드(Peggy Gould). 하지만 그녀가 DJ/프로듀서로 활동한다는 사실 외에는 의외로 잘 알려진 게 없다. 페기굴드라는 여성이 어떤 음악을 만들고 그 결과물이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 그 행보를 꾸준히 좇은 사람들은 아마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 한국 한 디제이와 이야기를 나눈 적 있는데, 그조차도 “페기구(Peggy Gou, 페기굴드의 또 다른 예명)? 난 페기구가 왜 그렇게 유명한지 솔직히 모르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녀가 국내에서 조명을 받은 건 오히려 패션계 행사, 패션 셀레브리티와 함께 모습을 비췄을 때니까.
그렇다면 네이버는 잠시 접어두고, 구글에서 그녀를 검색해봐라. 적어도 시답지 않은 케이블 방송 이야기보다는 멋진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페기구가 닌자튠(Ninja Tune) 산하 레이블인 테크니컬러(Technicolour)에서 새 EP를 발매했다는 소식 역시 구글 검색 창 한 쪽에 놓여있을 것이다. 그녀의 음악성을 인정하든 안 하든 여전히 그건 당신 몫이다. 다만 마우스 스크롤이 젤 아래에 닿았을 때 판단하는 건 어떨까? 지금 바로 페기구를 만나보자.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Peggy Gould’ a.k.a ‘Peggy Gou’.
페기굴드와 페기구, 두 가지 예명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정확히 이 둘의 차이가 뭔지 궁금하다.
오래전부터 ‘Peggy Gould’라는 이름을 써왔다. 그런데 패션에 관련된 일을 할 때 사용하던 예명이라 나름 음악적인 커리어와 장르를 나누고 싶었다. 굳이 새로운 이름은 필요할 것 같진 않아서 조금 더 발음하기 편하게 ‘ld’를 뺐다.
2009년쯤부터 디제잉을 시작했다고 알고 있다. 그 계기가 첫사랑 때문이라고 하던데 맞나? 어떤 스타일의 디제이였는지, 그 디제이의 어떤 매력에 빠진 건지 말해줄 수 있나.
그는 EDM을 플레이하는 디제이였지만, 늘 테크노 음악을 원했다. 그러나 테크노가 한국에서는 안 먹힐 것 같다고 말하더라. 덧붙여서 테크노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르지만, 그 맛을 알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음악을 좀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당시에는 테크노를 잘 몰랐기에 사실, 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다. 음악을 시작한 지금에 와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쨌든 처음 사랑에 빠졌다고 느꼈을 그 무렵, 그에게 디제잉과 프로덕션을 배우면서 음악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레코드도 하나둘 모았고, 친구들과 파티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CDJ, 세라토가 이미 자리 잡은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바이닐 디제잉을 선택한 이유라면? 본질적인 부분에 비중을 둔 건가?
난 바이닐을 특별하게 여긴다.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내가 ‘Respect’하는 디제이들이 주로 바이닐로 플레이한다. 그리고 올드스쿨을 좋아해서인지 디지털보다도 아날로그 사운드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바이닐의 매력에서 빠져나오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주로 어디서 디깅하나? 바이닐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독일에 있을 때 레코드 가게에서 몇 달간 일한 적이 있다. 세컨 핸드(Second Hand) 숍이었는데, 그때 일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다. 다양한 아티스트의 음악과 소위 말하는 레어(Rare) 바이닐도 꽤 모았다. 요즘은 베를린에서 자주 디깅하는 편이다. 참고로 베를린은 세계 바이닐 시장에서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도시다.
런던 기반 레이블 ‘Huntleys & Palmers’의 서브 레이블 ‘Highlife’ 소속이었던 에사 윌리엄스(Esa Williams)에게 에이블톤(Ableton)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패션 에디터 일을 포기하면서까지 음악에 끌렸던 계기는?
에디터는 아니었고, 일종의 잡지 통신원이었다. 당시 나는 패션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뮤직 프로덕션을 접하면서 많은 게 바뀌었다. 마지막 2년 정도? 비싼 학비를 내면서 정작 학교에는 가지 않았다. 프로듀싱에 빠진 뒤로는 에사의 스튜디오에서 살다시피 했다. 다행히도 과제는 꼬박했기에 간신히 졸업했다.
그때 느낀 강렬한 기분이랄까. 변화의 시기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듣고 싶다.
아 난 왜 몇 년간 패션을 공부했을까! 음악이야말로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건데! 음악은 나를 지루하게 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듯, 패션스쿨, 런던에서의 모든 경험 역시 인생에 도움이 됐다. 고맙게 생각한다.
패션에 상당히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최근에 꽂힌 스타일이 있나? 그것은 독특한 컬러, 브랜드, 패션 흐름, 관련 인물 등 어떤 이야기가 되어도 좋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여기서 특별한 영감을 얻는 편은 아니다. 종종 패션에 관해 “누구에게 영감을 받느냐?”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저 내 취향에 맞게 스타일링을 할 뿐이다. 딱히 브랜드를 꼬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대개 스트리트 브랜드를 선호한다. 힐보다는 운동화가 좋다. 베를린에서 살고 나서부터 편안한 스타일로 입지만, 여전히 컬러 매치하는 걸 즐긴다.
외국에서는 확실히 뮤지션으로 인정받는 듯한데, 정작 국내에서는 패션 스타 또는 셀레브리티로 알려진 것 같다. 이점이 아쉬울 것 같다.
딱히 아쉬운 부분은 없다. 난 연예인도 아닌데 뭐. 아는 사람만 나를 응원해준다고 생각한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내가 뭘 하는 사람이고 어떤 음악을 좋아하고 어떤 음악을 트는지, 내가 어떤 마인드로 음악을 대하고 얼마나 진지하게 임하는지 알아줄 거라고 믿는다. 사실 처음에는 패션 장르를 포기할까 생각한 적도 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지만, 어쨌든 나는 음악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니 패션 스타로 알려지든 다른 걸로 알려지든 상관없다. 한국은 아직 하우스나 테크노 신(Scene)이 크지 않다. 명성을 얻으면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이 내 음악을 듣지 않을까. 나는 내 음악을 알리는 게 가장 큰 목표다.
작년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디제이 서바이벌 프로그램 ‘헤드라이너’의 심사위원으로 등장했다. 어떤 계기로 출연했나? 경력이 오래된 DJ들에 우선해 본인이 선정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나를 섭외한 이유가 오직 실력이나 경력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땐 음반도 나오기 전이었으니까. 같은 한국인 디제이로서, 음악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시각의 ‘Opinion’을 듣고 싶기에 섭외된 게 아닐까?
프로그램이 연출한 상황 안에서는 단순히 믹싱, 어떤 퍼포먼스에 국한된 모습밖에 보여주기 힘든데, 그 점이 굉장히 상업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가? 또한 이러한 경쟁에 관한 솔직한 생각을 듣고 싶다.
처음에는 출연을 거절했다. 어떤 기준으로 디제잉을 평가해야 하는 건지 기준이 서질 않았다. 누가 누굴 심사한단 말인가. 믹싱에 실수가 있어도 관객이 열광하면 잘한 건지, 아니면 디제이가 음악을 잘 틀어도 사람들이 놀지 않으면 못한 건지 나로서는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제이 중 한 분은 비트매칭을 잘하는 건 아닌데, 테이스트가 워낙 좋아서 신에서 존경받고 있다. 디제이들에게 미션을 주면서 누가 더 잘했는지 판단하는 건 사실, 지금 생각해도 애매한 경쟁이었던 것 같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디제이의 의미도 많이 달라졌다. 그 프로그램은 디제잉의 성격 중 일부만을 가져와서 극대화한 듯하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 현재 한국 신은 디깅보다 테크닉에 훨씬 더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 내가 아는 디제이가 말하길 자신은 음악을 사랑해서 디제이가 된 건데, 어린 친구들은 조금 다른 의도를 가지고 디제잉을 배우는 것 같다고 했다. 디제이라는 직업이 힙해서? 예전 디제이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클럽 신에서 디제이는 존재감이 없었다고. 예전에는 사람들이 디제이가 누군지 신경도 쓰지 않고 놀기 바쁜데, 이제는 디제이를 보러 클럽을 간다고 하더라. 디제이의 의미가 많이 변했다.
디제이로 살아가면서 만들어진 신조 같은 게 있다면?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말을 되새긴다. 또한,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잊지 않는 거.
국내 언더그라운드 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궁금하다. 멋있다고 생각하는 크루 혹은 디제이가 있나? 어떤 움직임이든.
우선 한국어로 음악 인터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에는 VISLA를 몰랐는데,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디깅하는 웹 매거진이 있어서 기쁘다. DJ 소울스케이프(Soulscape)를 디제이로서 좋아한다. 올 카인드 장르를 플레이하는 DJ 코난(Conan) 오빠도 좋아한다. 유진 블레이크(Eugene Blake)도 테이스트가 좋다. 나와 비슷한 장르는 미스틱(Mystik) 디제이들, 이를테면 마지코(Magico), 앤트워크(Antwork), 신(Sin)이나 홍대 테크노 클럽 벌트(Vurt)에 있는 서나(Suna), 운진(Unjin), 디질로그(Dji)를 리스펙트 한다.
세계를 누비며 플레이한다. 기억에 남은 도시나 장소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
클럽 탑3 리스트에 있던 베르크하인/파노라마 바(Berghain/Panorama Bar)에서 한국인 최초로 음악을 틀었다. 항상 꿈꿔오던 일이라 음악을 플레이하기 2주 전부터 긴장했다. 그날의 기분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최근 잭마스터(Jackmaster)가 내가 음악을 틀 때 몰래 찾아와서 두 시간 셋을 듣고 간 적이 있다. 이후로도 그는 나를 계속 서포트 했고, 마스터 믹스 쇼(Master Mix Show)에도 초대했다. 최근 글래스고(Glasgow)에서 한 파티도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들과 함께여서 그런지 잊지 못할 것 같다.
세계적으로 좋아하는 뮤지션이 누군지 알려 달라.
장르마다 달라서 한 명을 꼽긴 힘들다. 제이딜라(J Dilla), 패트릭 크로울리(Patrick Crowley), DJ 소토펫(Sotofett), DVS 1 등 여러 뮤지션의 음악을 사랑한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음악을 많이 들었나? 당신이 직접 프로듀싱한 트랙에서 한국적인 요소들이 느껴지는데, 이러한 레퍼런스는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건가?
돌이켜보면 난 어렸을 때부터 항상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이거 좀 들어보라고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곤 했다. ‘한국 음악’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건 사실, 케이팝이 아닌 가야금, 장구, 판소리 같은 것들이다. 이 소리들을 가지고 댄스 음악을 만들고 싶었고, 처음 프로듀싱을 배우자마자 만들어낸 곡이 유아인 씨와 함께한 “Hungboo”다.
Peggy Gou – Troop
올해 [Art Of War] Part 1, 2와 [Day Without Yesterday / Six O Six, Art Of War] EP를 발표했다. 그 중 “Six O Six”, “Troop”이 팩트 매거진(Fact Magazine)과 바이스(VICE)의 음악 채널 ‘THUMP’에 각각 소개되었는데,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당연히 기쁘다. 좋은 매체가 내 음악을 소개하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다.
“Six O Six”에 삽입된 ‘일 이 삼 사’, ‘하나 둘 셋 넷’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아이디어에서 확장된 것인가?
6분 6초짜리 곡이라서 “Six O Six”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여러 국가의 언어를 시도해봤는데, 아무래도 한국어를 접목하는 게 재밌더라. 숫자를 부르는 게 외국인들도 추측하기 쉬울 것 같았다.
Peggy Gou – Six O Six
[Art of War]의 바이닐 아트워크도 직접 디자인했다고 들었다. 그림도 자주 그리는 편인가?
초등학교 때 만화가가 꿈일 정도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첫 번째 레코드만큼은 내 그림을 넣고 싶었다. 다행히 레이블 측도 마음에 든다고 해서 가능했던 일이다.
2016년, 당신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아티스트 5명을 소개해 달라.
잭마스터(Jackmaster), 뉴기니(Nu Guinea), 대니얼 왕(Daniel Wang), 지올로지(Ge-ology), 블랙 마돈나(The Black Madonna).
10월 14일, 닌자튠 산하 테크니컬러 레이블에서 새 EP [Seek For Maktoop]이 발매됐다. 이슬람 말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뜻하는 ‘마크툽(Maktoop)’을 타이틀에 차용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가장 친한 친구인 ‘바다’가 마크툽이라는 단어를 알려줬다. 의미도, 발음도 마음에 들었다. 초반부터 나를 지지해준 그 친구를 위해 이 말을 타이틀로 정한 이유도 있다.
‘마크툽’이라는 하나의 콘셉트 안에서 당신의 어떤 음악적인 세계관, 영역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샘플링 하지 않고 MPC 3000으로 그루브 파트에 더 신경 썼다. 아직은 나만의 사운드를 찾는 과정이다.
‘Rekids’ 레이블, ‘Phonica White’ 레이블에 이어 이번에는 테크니컬러와 함께한다. 지난 ‘Solid Steel Radio Show’에 소개되면서 긴가민가했는데, 이번에 웹 페이지 전면에 소개되면서 공식화되었다. 테크니컬러와 함께한 계기가 있다면?
테크니컬러의 오너인 딘(Dean)이라는 친구가 나에게 페이스북 쪽지를 보냈다. “Six O Six”를 테크니컬러에서 릴리즈할 의향이 있냐면서. 그 뒤로 런던에서 공연이 잡힌 날, 우리는 처음 만났다. 그 친구의 바이브도 좋고 레이블 소속 뮤지션들도 마음에 들어서 음악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다.
새 EP [Seek For Maktoop] 앨범을 본인 스스로 평한다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앨범이다. 세 곡이 스타일이 다 다른 데다가 여기에 사용된 신스, 드럼 머신도 제각각이다. 다른 스타일의 세 곡을 담으려고 했고, “Rose” 같은 트랙엔 작은 메시지도 넣으려고 했는데, 그 의도가 잘 전해진 것 같다.
곡 쓰는 방식이 궁금하다. 평소 어디에서 영감을 얻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내는지, 일련의 과정을 말해줘도 재미있을 듯하다.
영감을 찾지 않으면, 곡을 만드는 게 쉽지 않다. 좋아하는 뮤지션의 곡을 따라하다가 찾을 때도 있다. 보통 나는 내가 좋아하는 소울이나 레어한 곡을 틀어놓고, 그 위에 베이스라인, 사운드를 추가해보면서 시작한다. 드럼 파트부터 먼저 만들고 그다음 베이스라인, 스트링, 코드 보컬 등의 순서로 작업할 때도 있다.
MPC 3000, TR-606 드럼머신을 주로 사용한다고 들었는데, 당신이 선호하는 장비의 특징이라면?
MPC 3000은 한국 영화, 드라마 음악감독이신 모그(Mowg, 이성현) 감독님께 구입했다. 프로듀싱을 하는 친구들이 MPC 3000을 쓰면 1000이나 2000은 다시는 건들지 않게 될 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마따나 정말 다양한 사운드와 이펙트에 매료되었다. 난 내 MPC를 몬스터라고 부른다. ‘Pulse Wardolf’ 신시사이저도 자주 사용한다. 최근에는 친구에게 아날로그 신시사이저 ‘Kawai sx-420’을 구매했다.
한국에서도 당신의 음악, 그리고 신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한 움직임을 만들고 있는지?
난 한국도 테크노, 하우스 신이 커질 거라고 생각한다. 가끔 패션 행사나 여러 이벤트에서 음악을 틀 때면 관객들이 이게 무슨 노래냐고 물어본다. 협업의 기회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할 거다. 신이 커지려면 나도 나만의 노력을 계속해야겠지.
SNS에서 기린이 많이 보인다. 기린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항상 하이퍼(Hyper) 상태인 나를 진정시켜주는 존재. 평화를 다시금 떠오르게 하는 존재.
부지런히 활동하면서 아직 못 보여준 모습이 있다면? 자신의 어떤 부분을 더 표현하고 싶은가.
아직 나는 갈 길이 멀다. 해야 할 일도 많고 해내야 할 일도 많다. 음악 외적으로라면 예술적인 감각을 많이 드러내고 싶다.
진행 ㅣ 이철빈 최장민
글 ㅣ 이철빈 권혁인
사진 ㅣ Peggy Gou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