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에스(Jayass)를 처음 본 날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갈색으로 염색한 긴 장발과 잔뜩 내려입은 바지, 독특한 말투까지. 그 시절 보기 드문, 독특한 사람이었다. 그가 운영하던 첫 번째 숍 가라사대에 진열된 나이키 뱀피 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구석에 걸려 있던 티셔츠를 샀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나서 몇 번 더 방문했음에도 결국, 뱀피 포스를 사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나 압구정 로데오에 휴먼트리(Humantree)가 생겼고, 난생처음으로 도메스틱 브랜드의 옷을 샀다. 휴먼트리는 명백한 국내 서브컬처 신(Scene)의 선봉장이었다. 압구정 로데오에서 오랜 시간 터줏대감을 자처한 휴먼트리 쇼룸의 끝은 아쉽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11년이라는 시간 동안 휴먼트리는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겼을까. 휴먼트리 쇼룸의 종료를 알린 제이에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끝내 갖지 못한 ‘가라사대 뱀피 포스’가 지금 내 자취방에 있다. 휴먼트리 쇼룸이 닫기 전 근처에서 일하는 친구가 제이에스에게서 가져다줬는데, 이미 매우 낡은 상태라 신으면 당장에라도 바스러질 것 같았다. 겉의 먼지를 박박 닦아낸 뒤 신발장 위에 올려뒀다. 그것만으로도 그 옛날 가라사대를 방문하던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11년간 정말 많은 것을 이루지 않았나. 휴먼트리의 첫 브랜드라고 하면 역시 라 파밀리아(La Familia)가 떠오른다.
2005년 4월 쯤 동대문 가라사대를 정리하고 압구정에서 휴먼트리를 열었다. 당시 압구정 로데오를 중심으로 카시나(Kasina), 웍스아웃(Worksout), 에딕티드(Addicted), 쯔보(Zzubo) 등 여러 스트리트 브랜드 편집 스토어가 생겨나고 있을 때 나도 합류한 거지. 그때 여러 편집숍이 압구정 로데오를 일본의 하라주쿠처럼 만들어보자는 포부가 있었다. 하하. 이후 뉴욕발 스케이트보드 브랜드 주욕(Zooyork)이 압구정에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다. 그때만 해도 스트리트 브랜드 편집숍이 많이 없던 때라 주인끼리 두루 친했다. 매일 몰려다니면서 뭐 재밌는 거 없나 찾아다니다가 쯔보에서 압구정 로데오에 있는 숍 브랜드를 모아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시작한 게 바로 라 파밀리아(La Familia)다. 각자 돌아가며 콘셉트, 디자인, 생산을 맡아 몇 가지의 의류를 발매했다. 그때만 해도 소위 도메스틱 브랜드, 한국 브랜드에 대한 개념이 생소했기에 반응이 뜨거웠다. 후디와 데님, 코치 재킷 같은 걸 만들었고 어느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신이 점차 커지면서 각자 일이 바빠졌으니까. 아, 라 파밀리아라는 이름은 내가 지었다. 하하.
그뒤 휴먼트리에서 더스토리(theStori)라는 브랜드를 진행했는데.
그렇다. 휴먼트리가 처음 디스트리뷰션한 브랜드가 홍콩 스케이트보드 브랜드 날리지(Know1edge)였다. 이후 퍽킹어썸(Fuckingawesome), UXA, 인포메이션(In4mation), 제이머니(J-Money) 같은 브랜드를 들여오며 구색을 갖췄다. 그런데 수입하는 브랜드 대부분이 아우터에 취약한 면이 있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중 같이 일하던 직원이 브랜드를 만들어보자고 해서 시작한 게 더스토리였다. 바지와 재킷, 가방 등 구성을 늘리며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무신사(Musinsa)와 협업도 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 갈 정도였거든. 이후 그 직원이 휴먼트리를 떠나 독립할 때 더스토리를 가지고 나갔다.
그 다음 브랜드가 바로 지금의 휴먼트리를 있게 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B.A(Buried Alive) 아닌가. 첫 컬렉션부터 임팩트가 굉장했다.
몇 차례 컬렉션을 진행하면서 어느 정도 감이 생겼다. ‘진짜 우리 브랜드’를 해보자는 욕심이 생기더라. 내가 정말 하고 싶던 걸 이룰 때가 온 거지. 그때 영입한 친구가 바로 옥근남이다. 그를 처음 알게 된 일이 꽤 웃긴데, 가라사대에서 일하던 직원의 친구로 처음 만나서 함께 노래방 가서 놀았던 게 전부다. 하하. 디자이너를 찾던 중 그 직원이 옥근남을 소개해줘서 바로 연락했다. 첫인상 때문에 그저 노래 잘 부르는 웃긴 사람 정도로 생각했지. 그런데 디자인을 곧잘 하더라. 그렇게 둘이 머리를 싸매고 브랜드에 열중했다. 하하. 우리 모두 90년대 키드여서 미국 만화나 영화,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연히 말이 잘 통했다. 옥근남을 고용한 후 일보다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이런 게 나중에 좋은 상호작용이 되어 B.A가 탄생했다.
펑크와 스케이트보드가 절묘하게 결합한, 그 당시 ‘진짜배기’라고 느껴지던 스트리트 브랜드였다.
난 오래전부터 스케이트보드 문화를 좋아했고, 옥근남은 펑크 밴드에 심취했기에 이 두 가지 문화를 재미있게 섞을 수 있었다. 한국에도 트래셔 매거진(Thrasher Magazine), 반스(Vans), 안티 히어로(Anti Hero) 같은 브랜드가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후 직원 두 명을 추가로 영입해 본격적으로 B.A를 시작했다. 지금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우리가 B.A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한국 브랜드가 룩북을 찍는 환경은 생소했다. 그렇게 룩북과 카탈로그까지 제작해서 첫 번째 컬렉션을 공개했지. 다행히 반응이 좋았다. 그런 획기적인 구성이 도메스틱 브랜드가 발전하는 데 어떤 활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방금 언급한 홍콩 브랜드 날리지는 휴먼트리 이전에는 상당히 생소한 브랜드였다. 어떻게 이어지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날리지와의 인연은 가라사대 때부터 이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홍콩, 일본 등으로 스니커를 바잉하러 다녔는데, 그때 인연을 맺은 후 오랜 시간 친하게 지내고 있다. 오래전 협업도 진행했다. 사실, 날리지와의 협업은 어떤 계획 아래서 이루어진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함께 협의한 제품이 아니라 날리지에서 가을 컬렉션을 준비하는데 바지 하나에 너희 숍 로고를 넣어줄 테니 일러스트 파일을 보내 달라고 하더라. 그렇게 휴먼트리 로고가 삽입된 바지가 등장했지. 나름대로 휴먼트리를 존중해줬다고 생각한다. 외국 브랜드와 첫 협업을 진행한 좋은 경험이었다.
B.A를 통해 지금은 사라진 스케이트보드 브랜드 써카(Circa)와 협업 스니커를 제작했다. 꽤 신선한 행보였다.
B.A의 모토가 스케이트보드와 펑크 아닌가. 한창 우리가 로드 오브 독타운(Lords of Dogtown)이라는 영화에 빠져 사무실 인원 모두가 머리를 기르고 도산공원에서 매일같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던 시절이 있었다. 하하. 그쯤 프리즘(PR1ZM)에서 써카(Circa)라는 스케이트보드 브랜드를 들여왔다. 당시 휴먼트리 근처에 사무실이 있어서 왕래가 잦았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놀러 가서 쓸데없는 이야기나 늘어놓다가 써카와 B.A의 협업 스니커 이야기가 나왔다. 우린 바로 수락했고 빠르게 디자인해서 써카 본사에 넘겼다. 뭐 판매량은 적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정말 기념비적인 협업이었다. 사실 협업을 시작할 때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 이미 반스나 컨버스(Converse)같은 스니커가 스케이트보드 슈즈로 대두하고 있었기에 투박한 외형의 써카 스니커는 경쟁력을 갖추기 힘들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정말 귀중한 경험이었다. 보람찬 협업이었다는 사실 하나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국내 스트리트 브랜드에서 독일 리큐르 브랜드 예거마이스터(Jagermeister)와 협업을 한 일 역시 이례적이었다.
옥근남이 제작하는 그래픽은 정말 독보적이다. 휴먼트리에서 있을 때도 휴먼트리 업무 외에도 외주가 많이 들어왔다. 독일 허브 리큐르 예거마이스터에서 파티를 연다고 해서 옥근남이 포스터 디자인을 맡았는데, 예거마이스터 측에서 그의 그래픽을 굉장히 흡족해했다. 그때 포스터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활용해서 공식 로고를 삽입한 티셔츠를 만들었지. 예거마이스터 전용 케이스도 공수해 멋진 패키지까지 만들었다. 이런 사례가 처음이었기에 상당히 획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B.A에서 휴먼트리의 번뜩이는 재치가 많이 드러났던 것 같다. 패스트푸드를 콘셉트로 한 컬렉션이 아직도 인상 깊다.
2009년 여름 즈음 휴먼트리 크루 모두가 맥도날드(Mcdonald)에 미쳐있었다. 하하. 모두 패스트푸드에 꽂혀서 일주일 내내 맥도날드만 간 적도 있었지. 그것도 거기에서 착안한 컬렉션이었다. 우리의 일상을 고스란히 녹여냈다. 우리가 햄버거를 좋아하니까. 가상의 패스트푸드 브랜드를 만들어서 옷에 옮겨보자고 한 게 트래쉬 푸드 메이커(Trash Food Maker) 컬렉션이다. 로고도 만들고 종업원이 착용하는 유니폼을 콘셉트로 셔츠와 바지, 모자를 제작했다. 판매는 부진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휴먼트리 브랜드의 신조였으니까.
배드 투스(Bad Tooth)는 처음 B.A 컬렉션 중 하나로 시작해서 새로운 라벨로 발전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어떻게 진행하게 된 프로젝트인가.
배드 투스 첫 컬렉션이 나오기 전 여름 즈음이었다. 옥근남이 당시 이가 아파 치과를 다녔는데, 이게 또 영감이 된 거다. 하하. 썩은 이. 그래서 배드 투스라는 단어로 컬렉션을 진행했다. 풍자 코드를 살려서 나름 정치적인 의미도 담았지. 이게 또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만들어 놓은 캐릭터도 있겠다, 하나의 컬렉션이 아닌 캐릭터 브랜드를 만들자는 생각에 다른 라벨로 옮긴 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마침, 휴먼트리 직원 레디(Reddy)가 힙합 레이블 하이라이트 레코즈(Hilite Records)에 들어갔을 때라 하이라이트 레코즈에 제안해서 ‘충치’라는 음원까지 만들었다. 레이블 소속 래퍼가 대거 출동한 뮤직비디오까지 촬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그림이지만, 그땐 뭔가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대단한 프로젝트였지.
스케이트보드 문화와의 연관성을 뺴놓을 수 없다. 스케이트보드 데크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우리는 항상 스케이트보드 컬처에 리스펙트를 갖고 있었고, B.A 역시 그 연결고리를 놓고 싶지 않았다. 당시 스턴트 비(Stunt B)라는 스케이트보드팀의 리더인 백승현이 펑크와 록을 좋아했다. 지향하는 바가 맞아 협업을 제안했고, 스케이트보드 데크와 의류 컬렉션을 제작했다. 반응은 좋지 않았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고스란히 표현했기에 후회는 없다. 하하. 자기만족을 위해 안 해도 되는 걸 하는 게 휴먼트리의 자세다.
2011년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휠라(FILA)와의 협업 또한 상당한 이슈였는데, 대기업과의 협업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국내 스트리트 브랜드와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가 만난 첫 사례였지. 휠라가 자사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우리와의 협업을 제시했다. 슈프림(Supreme)도 휠라와 협업했는데, 우리라고 안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진행했지. 당시 상당히 큰 규모로 진행했는데, 스타디움 재킷과 카디건, 니트, 후디, 머플러 등 진짜 다양한 제품으로 컬렉션을 꾸렸다. 근데 뭐 잘 안됐다. 하하. 그땐 휠라가 지금 같은 쿨한 이미지를 선보이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그 헤리티지를 끄집어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나중에 보니까 어느 백화점 지하 매대에서 팔리더라. 하하. 이 협업 컬렉션을 위해 영상도 찍었다. 혹시 본 적 있나?
B.A에서 디자이너 옥근남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 항간에는 그가 휴먼트리를 떠난 뒤 브랜드의 정체성이 많이 흔들렸다는 얘기가 들리기도 했다.
옥근남이 나가기 1년 전부터 이미 국내 브랜드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시장도 급변하고, B.A의 호시절이 끝나가고 있었지. 도매업자들이 뛰어들고 나서부터는 여타 스트리트 브랜드와 엇비슷한 옷들이 그럴듯한 룩북과 함께 쏟아져나왔다. 우리가 후디 하나를 삼만 원 주고 만들면 그들은 후디를 삼만 원에 팔아버리니까. 가격경쟁에서부터 밀렸다. 처음에는 우리도 크게 신경을 안 썼다. 그런데 어느 순간 B.A에 대한 대중의 피드백이 사라졌다. 2014년 S/S ‘Life Sucks’ 컬렉션도 우리의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은 정말 냉혹했다. 그때 힘이 많이 빠졌다. 우리 행보를 응원하고 좋아하던 사람들이 사라진 거다. 휴먼트리, B.A의 정체성이 이미 옛날 것이 됐고, 그렇게 내놓은 컬렉션이 자기만족에서 더 나아가질 못했다. 옥근남도 그때 많이 지친 것 같았다. 이후 자신은 디자이너로 성공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곧 독립했다. 디렉터가 사라진 이후로 내가 그 자리를 도맡은 뒤 우먼 컬렉션도 만들고 영상, 룩북도 공들여서 촬영했지만, 이미 좋은 브랜드가 너무 많이 생겨난 뒤였다. 하하. 그때 문득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먼트리가 국내 스트리트 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360 사운즈(360 Sounds)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많은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휴먼트리가 처음 문을 연 2005년에 공교롭게도 360 사운즈 역시 첫 번째 파티를 열었다. 오래전부터 알던 친구들이다. 그들은 단순한 파티 크루가 아니라 멋진 활동을 보여주는 집단이었으니까. 항상 리스펙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 360 사운즈가 두 번째 파티를 열 때 믹스 CD를 같이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헙업 티셔츠도 만들었다. 그렇게 파트너십을 맺고 우리는 함께 다양한 머천다이즈를 출시했다. 휴먼트리가 들여오는 브랜드 제품을 협찬하고, 나도 360 사운즈가 진행하는 라디오에 나가면서 함께 재미있는 일을 많이 만들었다.
2010년대에 들어와 휴먼트리에서 시작한 또 다른 브랜드, 헤리티지 플로스(Heritage Floss)는 그간 휴먼트리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완벽하게 탈피했던 것 같다.
이윤호라는 친구가 휴먼트리 크루에 합류하면서 옥근남이 하던 디자인, 생산 업무를 분담했다. 둘이 추구하는 스타일이 다르다 보니 B.A 컬렉션을 진행할 때도 충돌하는 부분이 조금씩 생기더라. 스케이트보드, 펑크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브랜드에서 마운틴 재킷을 발매했으니까. 하하. 윤호에게는 나름 새로운 시도였지. 그래서 그런 아이디어를 새로운 브랜드로 구현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브랜드를 하나 해보자고 제안하니까 원단 브랜드를 이야기하더라. 좋은 실을 구해서 원단을 만들자는 게 그 계획이었다. 시중에서 찾을 수 없는 실을 찾아 원단을 짜고 브랜드 로고를 달아 타 의류 브랜드에게 넘기는 게 최종 목표였다. 마치 루프휠러(Loopwheeler), 해리스 트위드(Harris Tweed)처럼. 브랜드 라벨이 자연스러운 품질보증서가 되길 원했지. 근데 원단만으로는 보여줄 게 없으니까 우리가 옷을 만들어서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당장 후디와 크루넥을 만들었지. 스트리트 브랜드를 중점적으로 진행하던 휴먼트리로서는 큰 도전이었다. 또 다른 시장을 새롭게 개척하는 순간이었으니까.
반응은 어땠나.
당시 MSK 숍과 휴먼트리, 비이커(Beaker)에서 판매를 진행했다. 캐주얼, 헤리티지, 클래식 위주의 브랜드에 입점했지. 반응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는데, 엄청 좋지도 않았다. 하하. 결국, 우리는 원단으로 승부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다. 이전에 말했던 오리지널 컷(Original Cut)의 올데이 컬렉션도 헤리티지 플로스 원단으로 제작했다. 당시 우리의 이런 행보가 시대를 많이 앞섰다고 생각한다. 그땐 쿼터 집업 등의 아이템이 생소하던 시기니까.
비슷한 시기에 진행한 오리지널 컷 역시 뜨거운 반응을 얻었는데.
오래전 360 사운즈의 메이크 원(Make-1)과 DJ 스무드(Smood)가 부루마블 하우스(Burumarbul House)라는 브랜드를 진행한 적 있다. 티셔츠와 후드 정도의 간단한 구성이었다. 가라사대에서부터 판매를 시작했으니까 나름의 역사가 있는 브랜드지. 우리가 휴먼트리를 오픈하고 나서 메이크 원이 우리에게 공장을 함께 쓸 수 있는지 문의했다. 이때 B.A의 디자인과 의류 생산을 담당하던 옥근남이 원단과 부자재 등 의류 제작에 필요한 요소나 노하우를 공유했다. 어느 날, 부루마블과 휴먼트리 협업으로 바지를 만들자고 하더라. 그때 제작한 셀비지 진의 이름이 오리지널 컷이었다. 이때 360 사운즈와 휴먼트리 멤버가 모여서 룩북도 촬영하고, 꽤 공을 들였다. 이렇게 나온 제품이 이슈가 됐다. 결국, 오리지날 컷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브랜드를 만들어보자고 이야기가 나왔다. 다음 시즌에 프로 스태프(Pro Staff)라는 하나의 컬렉션이 나오고, 그 다음 올 데이(All Day) 컬렉션까지 나왔을 때 반응이 정말 뜨거웠다. 없어서 못 팔 정도였으니까. 하입비스트(Hypebeast) 외에도 외국 여러 매체에서 소개됐는데, 이정도면 뭐 성공한거 아닌가? 하하.
이렇게 나열해보니 정말 많은 브랜드를 만들고, 진행했다. 그러나 디스트리뷰션과 다양한 자체 브랜드를 진행하면서 사람들과의 충돌도 피할 수 없었을 텐데.
당연. 나 혼자 수입 브랜드를 핸들링해서 휴먼트리 자체 브랜드에 소홀했다. 그땐 각자 맡은 브랜드를 너무 잘하고 있어서 내가 관여할 틈이 없었다. 각자의 업무에 모두가 충실했다. 근데 직원들이 휴먼트리를 떠나면서 문제가 드러났다. B.A와 오리지널 컷은 내가 전담하던 파트가 아니었거든. 오랜 시간 신경 쓰지 못한 일을 혼자 하려니 금방 지치게 되더라. 만약 우리가 계속 함께했다면, 더 멋진 그림을 꿈꿀 수도 있었겠지만, 디렉터를 잃은 브랜드를 다시 살려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됐다.
휴먼트리 쇼룸을 마치며.
휴먼트리를 운영하면서 ‘오리지널리티’를 잃지 않으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다.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에 몸담는 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 자기 브랜드를 소망할 텐데, 난 브랜드를 다섯 개나 진행했으니까.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고, 충분한 아카이브도 쌓았다. 하고 싶은 일은 전부 이룬 거지. 여기서 더 할 일이 없어졌다. 오히려 너무 많은 일을 일찍 진행했다고 해야 하나. 여한이 없다는 표현이 알맞을 것 같다. 그동안 휴먼트리를 서포트해줬던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Humantree 공식 웹사이트
Jayass 개인 블로그
Humantree Crew Interview
나에게 있어서 휴먼트리란
옥근남 : 뻔한 대답이지만, 내게 휴먼트리란 두 번째 고향 같은 곳이다. B.A의 옥근남이라는 일러스트레이터, 그래픽 디자이너가 완성된 곳, 나의 아이덴티티가 만들어진 곳이 바로 휴먼트리다.
이윤호 : 내 20대 시절의 대부분을 휴먼트리에서 보냈다. 좋은 영감과 바이브, 좋은 사람들을 모두 휴먼트리에서 만났다.
배형찬 : 첫 직장. 지금 내 감성들의 시작점.
박세진 : 나에게 휴먼트리는 11+ 다. 휴먼트리가 생기기 전 10대 때 처음 가라사대에서 쇼핑했고, 그때부터 제이에스 형을 동경했다.
기억나는 일화
옥근남 : 2006년 즈음 입사 초기 때다. 당시에는 온라인보다 오프라인을 통해 먼저 발매했고, 발매일에 많은 사람이 오픈 전부터 줄을 섰다. 당시 카드 결제 시스템이 도입되기 전이라 현금만 받던 때였는데, 오픈부터 마감까지 준비한 제품을 판매하느라 녹초가 되곤 했다. 준비한 물건을 모두 판매한 뒤 정산을 하려고 보니 모든 현금이 들어있던 금고 – 금고가 없어서 나이키SB 신발 박스를 사용했다 – 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당시 제이에스를 포함해 오너가 두 명이었고, 직원은 나밖에 없어서 자연스레 내가 오해를 받는 상황이 될 것 같아서 너무 억울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나이키 신발 박스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윤호 : 제이에스와 함께 떠난 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외에도 휴먼트리 크루와 떠난 워크샵은 항상 즐거웠고,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배형찬 : 입사한지 두 달 만에 나의 사수 근남이 형이 뉴욕으로 한 달 간 여행을 떠났다. 그때 업무를 미처 배우지 못했는데, 덕분에 전반적인 업무를 혼자 습득했다.
박세진 : 뉴욕에 거주할 때, 티셔츠를 만들어서 제이에스 형과 근남이 형에게 주려고 휴먼트리에 처음 방문한 날이 기억난다. 쭈뼛쭈뼛 티셔츠를 주면서 같이 사진도 찍었다. 그 순간 정말 행복했고, 언젠가 여기서 꼭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보니 휴먼트리 쇼룸의 마지막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휴먼트리 쇼룸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옥근남 : 시원섭섭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지. 하지만 기형적으로 커져 버린 병신같은 스트리트 브랜드 시장에서 제이에스 혼자 너무나 힘들게 이끌어 가는 모습을 보며 하루빨리 정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휴먼트리 쇼룸의 마지막을 함께 보내며 시시한 위로나 격려보다는 제이에스 인생의 새 출발을 축하했다.
이윤호 : 아쉬운 마음과 동시에 내 모든 추억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계속 이어가는 방법도 고민했지만, 제이에스가 자신의 더 좋은 미래를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제이에스와 재미있는 작업을 많이 할 생각이다.
배형찬 : 아쉬운 마음보다는 마지막으로 제이에스 형이 쇼룸에 불러줘서 정말 고마웠다. 앞으로도 계속 볼 형, 사람들이라는 걸 느꼈지. 시작이 있으면 분명 끝이 있다. 끝났다고 해서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까. 신중하게 내린 결정이기에 오히려 앞으로 제이에스가 어떤 걸 보여줄지 기대가 크다.
박세진 : 손꼽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일이다. 휴먼트리에서 일한 사람들, 내 10대 후반부터 20대 전부 그리고 30살까지 큰 부분을 차지했던 곳이 없어진 지금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이제 압구정 로데오를 갈 일이나 있을지. 놀러 갔을 때 매번 시큰둥하게 반기던 제이에스 형의 모습, 그런 형이 내 사장이 되었던 모습까지 선명하게 떠오른다. 더 열심히 잘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다시 기회가 된다면, 새로운 모습의 휴먼트리 쇼룸이 생긴다면 말뚝 박으련다. 제이에스 형, 근남이 형, 민구 형, 재룡이 형, 윤호 형, 성모 형, 홍우 형, 형찬이 형, 살손, 정현이, 재선이, 만수르, 요다, 그리고 아낙이. 다들 계속 만날 수는 있겠지만, 휴먼트리라는 큰 울타리가 없어진 건 역시 슬프다.
덧붙여
옥근남 : 몇몇 이들은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휴먼트리 쇼룸의 끝은 우리가 열정적으로 좋아하고 사랑했던 한국 스트리트 브랜드 신의 완전한 끝을 의미한다. 누가 더 카피를 잘하고, 누가 더 싸게 팔고, 누가 더 1+1 행사를 자주 하느냐가 경쟁력이 되어버린 이 시장에서 스트리트 브랜드의 전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배형찬 : HUMANTREE = JAYASS = ONE AND ONLY. #HUMANTREEFOREVER
박세진 : 누가 뭐래도 제이에스 형이 제일 멋있고, 존경스럽고 좋다.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으니.
진행 / 글 ㅣ 오욱석
사진 ㅣ 백윤범 오욱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