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는 길거리 예술 세계에서 뱅크시와 더불어 가장 잘 알려진 아티스트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는 담벼락에다 스티커, 스텐실을 비롯해 자신의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남겼다. 프로파간다로 대표되는 셰퍼드 페어리의 강렬한 그래픽은 의류 브랜드 오베이(Obey)로 이어지며 대중적인 명성과 상업적인 성공까지 거머쥐었다. 이와 더불어 그가 대기업 클라이언트를 상대로 일하고, 옷 떼기를 팔아치우는 돈의 노예가 되었다며 손가락질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후술하겠지만, 셰퍼드 페어리는 정작 그들 – 스케이트보딩, 그라피티처럼 길에서 태동한 것들이 빠르게 상업화되어간다며 걱정하는 무리라고 치자 – 의 비판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모두 18번이나 체포된 길거리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이 남자는 자신을 스트리트 아티스트라 정의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과연, 모호한 회피성 발언이었을까?
셰퍼드 페어리는 지난 3월 15일부터 4월 30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위대한 낙서 셰퍼드 페어리전 : 평화와 정의’전을 성공리에 마쳤다. VISLA는 예술의전당 내 외부 가벽에 특별히 제작한 벽화 바로 밑에서 그와 대화를 나눴다. 인터뷰 중간중간 사인을 요청하거나 불쑥 근황을 묻는 팬 덕분에 셰퍼드 페어리가 아트 스타라는 사실을 새삼 체감했다.
오베이가 태동한 1989년으로 되돌아가 보자. 처음 길에서 스티커 바밍을 시작한 의도라면? 당시 주위의 반응이 어땠는지도 궁금하다.
주변 스케이터 친구들과 늘 하던 장난이었다. 스티커를 스케이트보드 스팟과 클럽, 아트 스쿨 근처에 붙이곤 했다. 언젠가부터 주변에서 이 스티커가 대체 뭐냐고 물어보더라. 그때 광고를 제외한 특정 이미지가 공공장소에서 노출될 때, 그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생각의 씨앗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문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그것을 단순한 농담이나 장난보다 더 정치적이고 진지한 질문으로 발전시켰다. 이 과정은 모두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처음으로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끈 건 시장(Mayor)을 위해 만든 빌보드 간판을 바꿨을 때다. 상당히 큰 작품이었고, 지역 라디오, 신문, TV에서도 내 작품을 소개했다. 그때가 아마도 1990년이었다.
정치, 사회적인 메시지를 그간 작품에 계속 담아왔다. 처음부터 정치적인 목적이 뚜렷한 프로젝트였나?
나는 밥 말리(Bob Marley), 클래쉬(Clash) ,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 등 정치,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그룹의 음악을 듣고 자랐다. 또한, 바버라 크루거(Barbara Kruger)나 로비 카날(Robbie Conal) 같은 아티스트의 작품도 좋아했다. 스티커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씩 알았다. 개인의 정치적인 행동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는데,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건 바로 조지 부시(George Bush)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뼈저리게 느꼈지.
당신의 의류 브랜드 오베이가 스트리트웨어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이건 예술 활동, 메시지를 전하는 일의 연장선인가?
물론이다. 사실, 의미 있는 옷을 만드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대다수의 의류 브랜드가 내놓는 옷에는 그다지 큰 뜻이 없다. 오베이 컬렉션 역시 하나하나가 큰 의미를 담지는 않더라도 대중을 내 작업, 예술로 잇는 통로 역할을 한다. 내 철학과 오베이 의류는 결국, 연결되어 있다. 다행히 나는 훌륭한 의류 팀과 손발을 맞춰왔기에 내가 맡은 역할에만 충실할 수 있었다. 패션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오베이의 시작은 길거리였다. 이 브랜드는 큰 반향을 일으키며 길거리 추종자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런 만큼 셰퍼드 페어리의 상업적인 행보가 그들의 반감을 사는 것 같기도 한데, 한국 ‘예술의 전당’ 같은 대형 갤러리에서 당신의 작품을 전시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내가 상업적으로 변질됐다는 비판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길에서 작품을 만들고, 그 사이 모두 18번이나 체포되었다. 무슨 말인지 알지? 나는 내 작품을 최대한 많은 사람이 봤으면 한다. 그 매개체는 길거리, 티셔츠 혹은 갤러리가 될 수도 있다. 내 커리어의 시작은 스트리트 컬처, 스케이트보드, 펑크, 힙합이었고, 그 안에서 티셔츠는 굉장히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나는 내 입으로 한 번도 스트리트 아티스트라고 말한 적이 없다. 여전히 길거리에서 일하고, 그 방식을 사랑하지만, 이 역시 여러 매개체 중 하나일 뿐이다.
어떤 작업은 많은 돈이 필요하기에 의류와 작품으로 얻은 수입은 대형 벽화나 더욱 큰 프로젝트에 투자한다. 더 많은 사람에게 내 작품을 도달시키는 과정일 뿐이다. 나는 이곳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어 매우 기쁘다. 길거리에 있는 내 그림은 산발적으로 퍼져있기에 일련의 연관성 혹은 메시지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러나 갤러리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로빈 후드 이론이 떠오르는데.
그렇다. 내가 지금보다 더 가난했을 때, 스프라이트(Sprite)를 클라이언트로 일한 적 있다. 그들의 요구대로 빌보드 광고를 만들고 나서 다시 그걸 내 작품으로 뒤덮었다. 간판에 “Obey Your Thirst”라고 쓰여 있었는데, ‘Your Thirst’ 부분을 내 로고로 덮어서 ‘Obey’만 보이게 했다. 15개 정도의 전광판을 모두 그렇게 훔쳤다. 샌디에이고, 샌프란시스코, 엘에이, 시애틀 등지에서. 하하. 그때 난 마치 로빈 후드 같았지.
당신의 예술이 사회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거라 예측했는지.
모든 행동은 새로운 시각을 창출해낸다. 그리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생각을 실천하는 과정은 내가 가진 자원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그것은 나와 관계를 맺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 놀라운 일로 번지기도 한다. 오바마(Obama) 포스터, 아웅 산 수지(Aung San Suu Kyi) 포스터 혹은 위 더 피플(We the People) 시리즈 같은 것들이 바이럴(Viral) 효과를 덕 본 케이스다. 지구환경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작품 역시 많은 그룹이 받아들였다. 예술은 좋은 커뮤니케이션 도구다. 물론, 대중이 감상하기 편한 작품을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걸 단지 데코레이션으로만 여기는 건 많은 기회를 낭비하는 것이다.
Ph. 김기남
이번 전시에는 작품에 제목이나 캡션이 달리지 않았다. 특별한 의도가 있는가?
내 소관이 아니었다. 나는 이 전시를 구성할 작품을 선별해서 보냈고, 그 구성은 미노아아트에셋 측에 맡겼다. 그보다 전시장 곳곳에서 다양한 비디오를 재생한 게 인상적이었다. 일일이 아트워크를 설명하는 것보다 한 편의 비디오가 작가, 전시에 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를 기념해 예술의전당 야외 가벽을 설치해 새로운 벽화를 그렸다. 간단하게 소개해줄 수 있을까?
내 아내를 그렸다. 그녀는 다양한 피가 섞인 혼혈인데,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이자 전시 제목인 ‘평화와 정의’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일부 작품에서 일본의 색채가 느껴진다. 전범기가 연상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서양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양권 국가에서 영감을 얻는다. 중국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도 있고, 한국 프로파간다 관련 책을 모으기도 했다. 내 작품 중 ‘Dark Wave Rising Sun’ 같은 경우는 일본의 쓰나미 사태 이후 그들을 돕기 위해 만들었다. 여러 국가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색과 선을 차용하는 방식인데, 표현적인 측면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라피티를 포괄하는 스트리트 아트 영역은 기존 예술과 다른 접근으로 발전했다.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고 민중을 대변하는 역할도 포함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당신은 사회적인 책임과 의무감을 느끼는가?
스트리트 아트는 이 세계에 목소리를 내기 힘든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한 예술이다. 갤러리, 상업적인 공간 등 작품을 보여줄 기회가 없는 이들에 의한 예술 형식이다. 작품을 선보일 공간을 길에서 찾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사회 정의 구현 의지를 갖추고 작업에 임한다. 그 수익을 바탕으로 사회적인 일에 쓰일 자금을 마련한다. 가난한 학교, 자선 단체, 법적인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돈이 절실하다. 이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다만 여기에 자금을 댈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쁠 뿐이지, 무거운 의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오바마를 그린 작품 ‘HOPE’로 대중적인 지지와 동시에 정치적인 효과도 얻어냈다. 현 미국 정부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끔찍하다. 오바마의 모든 정책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는 대중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트럼프는 자신의 에고(Ego)에만 집중한다. 그가 대통령이 된 이유는 또 다른 트로피를 받고 싶어서다. 정부는 국민의 요구에 반응해야 한다. 대다수의 미국인은 정치에 큰 관심이 없다. 현재 미국 정치 상황은 좋지 않기에 더 많은 사람이 이를 계기로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타산지석을 통한 배움이다. 트럼프 정부의 과실이 되려 정치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대중을 나서게 한다는 말이지.
최근 관심사는 환경문제로 확대된 듯하다. 컬러의 변화도 느껴지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환경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 경각심이 들고 나서부터는 쭉 환경 단체와 일해왔다. 환경, 기후 악화는 테러리즘이나 경제 위기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실질적으로 인류와 지구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주는 이슈라고 생각하기에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임계치를 넘어가면, 인류가 뒤늦게 환경을 되돌리고자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움직여야 한다. 자본주의가 세계의 모든 걸 바꿔놓고 있다. ‘환경’을 언급하는 일이 비즈니스에 방해된다고 느끼는 기업은 정부와 협력해서 대중의 눈과 귀를 먹게 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편협한 사고다. 사람이 모두 죽어 나가는 와중에 무슨 비즈니스인가.
스트리트 아티스트로 활동하면서 세계각국을 여행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가 어딘지 궁금하다.
많은 도시가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파리는 정말 아름답다. 역사적인 건축물도 많고. 다수의 스트리트 아티스트가 파리를 무대로 활동하지 않았나. 다양한 텍스처로 시각적인 영감을 주는 홍콩도 좋다. 서울은 공원과 나무가 많더라. 이건 다른 도시에서 찾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마지막 질문이다. 지금도 몰래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나?
그렇다. 다만 디트로이트에서의 사건 – 그는 디트로이트 지역에 남긴 벽화로 2015년부터 약 1년간 이어진 디트로이트 시와의 법정 공방에 지쳐있었다 – 때문에 매우 신중히 처리한다. 이제 내가 길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무슨 말인지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