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난 캔버스 안에 있어야만 예술 작품이라 불리는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그러나 ‘Thinking outside of the box ─ 상자 밖에서 생각하라 ─ ’라는 말도 있듯이 여전히 우리는 사각의 프레임 안에서 사고하는 게 익숙하다. 그리고 그 밖으로 뻗어 나가는 생각의 실마리를 사람들은 창의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본 예술가 야마구치 메구루(Meguru Yamaguchi)에게 정해진 캔버스란 없다. 그는 작품의 가장 큰 영감이 힙합이라고 말한다. 다만 힙합 뮤지션이나 음악을 주제로 한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힙합은 하나의 요소로 작용해 조금 더 추상적인 표현으로 반응한다. 도쿄 출생으로 현재 뉴욕 브루클린에서 활동하는 야마구치 메구루는 이미 본인만의 완성된 세계를 펼쳐놓고 있었다. 그 스타일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많은 단계를 거쳤을 터. 인터뷰를 통해 그의 작품 세계에 한 발 짝 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본인의 작업을 직접 소개한다면?
어렸을 때부터 오일 페인팅(Oil Painting)을 공부했다. 또한, 길거리 문화를 빼고는 내 유년기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경험과 영감을 바탕으로 페인팅을 연구하다 지금의 붓 자국(Brush Stroke) 스타일에 정착했다. 붓 자국을 이용한 테크닉은 사실, 르네상스 이전부터 전해지는 방식이다. 이 기법은 시대를 초월하고, 국경을 넘어서 사용되어왔다.
도쿄를 떠나 뉴욕에 정착하게 된 계기가 있나.
도쿄는 내가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하는 동시에 가장 싫어하는 도시다. 10년 전, 나는 예술 시장이 활발하지 않은 일본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일본 사회는 보수적인 분위기가 만연하다. 따라서 일정 틀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사회적 시선이 그리 곱지 않다. 튀어나온 못이 정을 맞는 것처럼 나 같은 이들이 그 틀에 속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뉴욕은 달랐다.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얽힌 것은 물론,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이 모두 모여 사는 곳이 바로 뉴욕이다. 이 도시는 다양성을 존중한다. 집단을 따르는 게 일본의 사회적 규범이라면 뉴욕은 완전히 그 반대다. 뉴욕에서는 온전히 내 작업에 집중할 수 있다.
뉴욕에서 활동하면서 도쿄와 어떤 차이점을 느꼈는지.
둘 다 대도시지만, 뉴욕에는 나를 방해하는 소음이 없다. 마치 그곳은 드래곤볼에 나오는 ‘정신과 시간의 방’ 같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지 바쁜 삶을 보내기 위해서는 침착함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거주하는 도시 외에도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있다면?
힙합이라는 장르의 개념, 배경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나는 ‘샘플링(Sampling)’이 일본인의 유전자에 깊이 스며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자동차 산업이나 라멘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오리지널 작업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누군가 혹은 무엇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앞선 세대의 것에 영감을 받아 각자의 맛과 색을 더한 결과물을 다시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이지.
힙합을 작품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는가.
내 작업 기술을 개발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바로 ‘Cut & Paste’라는 테크닉이다.
‘Cut & Paste’의 비결을 알려 달라.
아크릴 페인트가 지나간 붓 자국을 자른 다음에 다시 합치고 섞어서 결합하는 방식이다. 힙합의 샘플링이라는 개념에서 영감을 받아 이 스타일을 완성했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아티스트를 소개한다면?
‘Kazuo Shiraga’, ‘Akira Toriyama’, ‘Gerhard Richter’, ‘Vincent Van Gogh’, ‘Christin Baker’, ‘Katharina Grosse’. 다양한 시대와 여러 국적의 아티스트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작업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작업 초창기 때부터 지금까지 스타일이 변화한 과정을 설명해줄 수 있을까?
초반에는 붓 자국을 활용해 꽃을 그렸다. 그러고 나서 소셜 미디어에서 교류하는 친구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다음에는 거울을 깨서 흩뿌린 뒤 초상화 작업에 올렸다. 다시 붓 자국을 사각형의 캔버스 밖으로 내보냈다. 종국에는 캔버스도 제거했다. 불필요한 재료에서 벗어나 더 단순한 형태로 발전한 형식이다. 그래야 붓 자국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 아티스트는 한 장소에서 단 한 가지 스타일에 머무를 수 없다. ‘변화’가 곧 스타일인 피카소처럼 말이다.
캔버스에 경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이즈나 형태도 자유로운데, 어떤 작품은 바닥에서 시작해 천장 위로 올라가기도 하더라.
일본 캘리그라피(Calligraphy)와 오일 페인팅을 어렸을 때부터 배웠다. 일본 서예에서 사용하는 붓놀림과 서양 회화의 페인팅 나이프가 내 뿌리이자 정체성이다. 나는 예술에 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혼자서 토대를 쌓아 올렸다. 근본이 되는 마음가짐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규칙이 없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내 작품은 정체성이 자유롭고 활기차게 흐르는 이미지의 전형이다. 나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것은 천장, 벽, 빌딩이 될 수도 있다.
색 조합의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나?
과거 미국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사용한 색을 연구 중이다. 그들이 사용한 컬러를 찾은 뒤, 내 스타일로 표현하려고 한다. 최근 작업은 푸른 계열의 색상을 많이 사용했다. 이건 내가 피카소의 ‘청색 시대’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작업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가?
컴퓨터는 내 창작 과정에 필수적인 도구다. 일단 일러스트레이터로 붓 자국이 나아가는 방향을 그리고, 캔버스를 디지털로 만들어본다. 다른 과정에도 컴퓨터가 많이 개입한다. 도구와 매체를 가능한 한 많이 활용해서 다른 이들이 상상하지 못한 예술을 창조하고 싶다.
최근 작업, ‘Out of Bounds’는 어떤 의도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인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닌 붓 자국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시리즈다. 그 붓 자국은 캔버스, 규칙, 시스템 혹은 개념이나 구상을 뛰어넘으며 진정한 가치를 드러낸다. 나는 예술 학교에 등록할 여건도 되지 않았고, 사무직에 취업할 수도 없었다. 뉴욕에서 인종 차별도 겪었다. 이 시리즈에는 사회 속 외톨이인 나 자신을 붓 자국으로 표현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사실, 스포츠에서 주로 사용하는 표현인데, 경계선을 무시하고 엄청난 힘과 속도로 솟아오르는 공 같은 느낌이 들어서 개인적으로는 되게 좋아하는 말이다.
‘Splitting Horizon’은 또 다른 느낌의 작업 같다. 간단하게 소개해줄 수 있을까?
지난여름, ‘Out of Bounds’ 시리즈 중 몇 작품을 전시했다. 그때 어떤 남자가 전시 오프닝에 와서 작품을 촬영하고 돌아갔다. 그는 작품 다섯 점의 사진을 조각내서 하나의 정사각형 안에 모든 피스를 넣는 식으로 새롭게 작업한 결과물을 인스타그램에 내 태그를 걸어서 올렸다. 그 작업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정말 깊이 감동했다. 이미 내 작품은 그 자체로 완성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내 작품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뒤로 또 다른 전시회가 예정되었는데, 작품을 마무리하지 않고 더 발전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결국, 작품을 큰 조각으로 나눠서 형체나 개념 면에서도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조합했다.
‘Horizon’이라는 단어는 하늘과 땅을 가르는 수평선뿐만 아니라 마음가짐, 관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Splitting Horizon’은 이전까지의 방식과 관념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시도 끝에 완성한 시리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인터넷에서 작품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을 영감 삼아 새로운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완성된 작품을 다시 인터넷에 흘려보냈다. 이러한 종류의 사실주의적 표현 방식은 지금이 바로 인터넷 시대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지금까지 진행한 프로젝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모든 프로젝트가 엄청난 경험이었다. 진심이다. 그러나 꼭 몇 개를 꼽아야 한다면 2017년, 이세이 미야케(Issei Miyake)와 진행한 협업을 들 수 있다. 그는 오래전, 사설 학원에서 만난 내 오랜 친구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건 작년 오모테산도 나이키 킥스 라운지의 인테리어를 맡은 일이다.
당신이 속한 프로젝트 ‘Night Train’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Night Train’은 친구들과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아니, 예술 집단이라고 해야 더 올바른 표현일 것 같다. 그래픽 디자이너, 나이키 러닝 트레이닝 코치, 그래피티 라이터 그리고 페인터인 내가 속해있다. 우리끼리 모여서 재미있는 일을 벌여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룹을 만들었다. 이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인 대쉬 스노우(Dash Snow)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Night Train’ 타투를 가슴에 새겼다. 데즈카 오사무(Osamu Tezuka)의 ‘블랙잭’이라는 만화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이 만화의 마지막 에피소드에는 밤에 달리는 기차와 삶을 중첩시켜 표현한 삽화가 있다.
‘Night Train’이라는 이름은 뉴욕 지하철과도 관련 있다. 뉴욕은 지하철이 24시간 운행한다. 머릿속으로 친구들의 모습과 지하철을 중첩해서 쉬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창작하는 모습을 그렸다. 우리는 티셔츠, 모자, 후디나 코치 재킷도 만든다. 다양한 장소에서 팝업을 열기도 한다. 다만 정기적이지도 않고, 트렌드를 따르지도 않는다. 우리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들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살면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주변 사람들을 향한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싶다. 웃고 즐기며 살고 싶다. 내가 지금껏 보지 못한 예술을 창조하고 싶다.
당신의 작품을 보는 그 자체로 특별한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관객이 당신의 작품을 보고 나서 어떤 말을 건넸으면 좋겠나?
그 어떤 고정관념에도 좌우되지 않고, 자유롭게 감상했으면 좋겠다. 내가 빈센트 반 고흐나 크리스틴 베이커의 작품을 감상했을 때, 그리 했던 것처럼.
진행 / 글 │ 정혜인
사진 │ Kohei Kawashima, Rei Nakanishi
*해당 기사는 지난 4월에 발행한 VISLA Paper 4호에 실린 인터뷰입니다. VISLA Paper는 지정 배포처에서 무료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