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면을 가득 채운 유리창을 타고 들어오는 햇볕을 뒤로한 채 아프로 리(Apro Lee)는 응접실 한가운데 자신의 소파에 앉았다. 반대편 손님용으로 준비한 기다란 소파의 끝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셰퍼드, 다우드(Daud)의 전용석이었다. 나는 내 정면에 앉은 남자보다 덩치가 큰 개의 뜨거운 시선을 억지로 피했다. 다우드는 계속해서 내 발가락을 핥았지만, 멈추게 할 도리가 없었다.
아프로 리는 긴장을 풀 겸 담배를 한 대 피우자고 했다. 그제야 내가 이곳에 앉아있는 이유를 자각할 수 있었다. 천천히 공간을 둘러보았다. 국적을 알 수 없는 몇 가지 소품과 한국의 전통적인 가구 그리고 병풍이 묘한 분위기를 이루었다. 한 시간가량의 대화가 시쳇말로 물 흐르듯 이어졌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내 옆에서 털을 비벼대는 다우드 그리고 조용히 확신에 찬 말을 건네는 아프로 리의 모습이 한 장의 사진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타투를 한 지 10년이 넘었다. 타투를 처음 접한 계기를 떠올려보자면.
2005년 즈음부터 시작했으니까 십몇 년 됐네. 특별한 계기는 없지만 이걸 말하려면 학창시절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고 만화 보는 걸 좋아했다. 대여섯살 때부터 만화가가 꿈이었다. 그러나 나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공부를 못한 게 아니라 아예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결국 어떤 대학도 갈 수 없었지. 그렇게 성인이 되고 입대해서 제대 1년 남기고 생각해보니까 만화가는 너무 힘든 직업인 거지. 지금은 웹툰이 생기고, 만화가 영화로도 제작되면서 만화가들 벌이가 더 나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만화가만큼 어려운 길이 있을까 싶었다. 현실적인 걱정이 앞섰다.
그러다 우연히 군대에서 타투 관련 뉴스를 봤다. 타투이스트와 타투를 받은 사람이 함께 경찰에 소환됐다는 뉴스였다. 당시에는 몸에 일정 부분 이상 타투가 있으면 군대가 아니라 감옥에 갔다. 그때 경찰에 끌려가던 청년의 몸에 커트 코베인 얼굴 타투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타투를 보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타투라고 하면 이레즈미나 트라이벌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얼굴이 타투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지.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타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공부는 못해도 손재주는 그리 나쁘지 않았고, 그림도 계속 그려왔으니 타투는 한 번 도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했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면 당시 생소한 타투보다도 다른 장르의 예술가로 꿈을 키워볼 수도 있지 않았나?
물론 고민했다. 그러나 예술가로 성공을 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학력, 돈, 중요한 사람들과의 네트워크. 이 세 가지 중 내가 충족하는 조건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은 무명이어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쉬워졌지만, 십여 년 전에는 내 작품을 드러낼 수 있는 플랫폼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나는 너무 가진 게 없었으니까.
2005년 즈음이면 타투 문화에 관한 대중의 인식이 부정적일 때다. 지금이야 일종의 패션, 문화로 받아들이지만 당시에는 문신은 깡패들이나 하는 거라고 여기지 않았나.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소위 ‘감방 타투’라고 불리는, 못으로 새기는 타투가 많이 보이던 시기였다. 아마 나와 비슷하게 시작한 타투이스트 세대는 알 텐데 그 시절 학교 다닐 때 소위 일진이나 양아치들이 손가락에 왕(王) 자나 만(卍) 자를 새기곤 했다. 알고 보면 그게 사실 다 갱 타투다. 손가락에 새기는 왕은 본래 자신이 잡범이 아니라 큰손(빈집털이범)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타투를 배우는 과정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내가 타투를 시작할 무렵에도 타투를 가르치는 타투이스트가 있었다. 일종의 크루나 집단의 성격을 띠고 활동했지. 그러나 그들 역시 내공이 쌓였다기보다는 이제 막 타투로 자리를 잡아가는 비기너의 단계였던 것 같다. 다 같이 배우는 입장이었던 거지. 시각 자료나 전문적인 정보를 얻기 쉽지 않아서 인터넷을 통해 외국 타투이스트들의 작업 사진을 몇 날 며칠이고 쳐다본 게 전부다. 그때는 큰 작업을 할 수 있는 신체를 제공받기도 쉽지 않아서 돈을 받지 못하더라도 우선 타투를 연습할 수 있다는 기회가 소중했다. 그렇게 친구들 몸을 하나둘씩 망쳤지. 그 시절 사람들은 아마도 다 비슷하게 시작했을 것 같다.
영화 같은 매체를 통해 러시아 크리미널 타투에 익숙한 이들도 많을 텐데.
그건 견장의 의미지. 무릎에 별이 있으면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무릎 꿇지 않겠다”라는 의미다. 어깨에 있는 건 그 사람의 지위를 말한다.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자신의 신체에 크리미널 타투를 새기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그런 이들이 해외에 나가서 러시아 갱을 실제로 마주친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눈가에 점 세 개 찍는 타투를 쓰리닷(Three Dots) 타투라고 한다. 이것은 MS-13이라는 매우 위험한 폭력 조직의 심볼이다. 집단구타를 당하는 입단식을 거치고 나면 정식으로 멤버로 인정받고 엄지와 검지 사이 또는 눈 옆에 점 세 개를 찍는다. 실제 경험으로는 쓰리닷 타투 때문에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린 적도, 오히려 도움을 받은 적도 있다.
실제 조직폭력배들이 찾아왔는지?
이레즈미 작업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다.
타투를 독학하다가 돌연 외국으로 떠났다고 들었다. 왜 떠날 결심을 한 건지 궁금하다.
결국 생존이었다. 은행에서 현금 서비스를 받아 월세 메꾸던 시절이었으니까. 아마 그 무렵은 잘나가던 타투이스트도 큰돈을 벌지는 못 했을 거다. 심지어 나는 초보였으니까 불 보듯 뻔했지.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작업이 더 안 좋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알고 보니 작업을 이어가다 보면 타투 머신의 일부 파츠를 꼭 바꿔줘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몇 년을 그대로 사용했다. 망가질 수밖에. 나중에 고치려고 했지만 막상 의뢰할 곳도 없었다. 아는 사람들도 쉬쉬하면서 감추고 작업할 때다. 삶도 힘들었고 국내 실정도 좋지 않아서 이왕 죽을 거 외국에서 객사하는 거랑 뭐가 다르겠나 싶어서 무작정 지도를 들고 점 하나 찍어서 간 게 호주 브리즈번이었다.
호주에서 겪은 타투 신에 관해 들려 달라.
문자 그대로 충격이었다. 인구의 70퍼센트는 몸에 타투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타투를 즐기는 나라였다. 게다가 운 좋게도 타투숍에서 좋은 멘토를 만났다. 그때 작업을 열심히 하면서 실력이 많이 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와서 타투를 받고, 온 가족이 함께 오기도 하고, 친구들과의 내기에 져서 우스꽝스러운 타투를 받으러 온 남자도 있었고, 각양각색이었다. 타투에 굉장히 열려있는 나라였다. 내가 살아온 한국은 타투가 설 자리가 없는데. 심지어 같은 시대에 사는데도 장소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이렇게 문화가 다를 수 있는지.
타투를 배워나갈 때 영향을 준 아티스트가 있다면?
정체성이나 스타일이 구축된 시절은 아니라 장르 구분 없이 솜씨가 좋은 타투이스트의 작업이라면 다 좋아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필립 류(Filip Leu), 틴틴(Tin-Tin Tatouages), 아닐 굽타(Anil Gupta) 같은 인물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아닐 굽타는 한창 공부할 때 레퍼런스로 많이 활용했다. 그때부터 아닐 굽타는 이미 세계 톱 레벨의 타투이스트였다.
버드와이저와 함께 기획전 ‘TATTOO, 자유와 예술에 관한 담대한 재해석’을 준비 중이다. 이번 전시의 주안점이라면?
지하 4층 전체를 내가 사용하기 때문에 얼핏 개인전처럼 비칠 수도 있지만, 사실 버드와이저라는 대형 브랜드와의 협업이기에 내 작업과 브랜드 이미지 사이에서 조율이 필요했다. 민화라는 장르가 대중에게 고루한 이미지로 다가갈 수도 있기에 전시의 의도, 즉 미래로 나아가는 뉘앙스를 살리기 위한 소재와 구도를 고민했다. 너무 내 걸 고집했다가는 이미지가 따로 놀 것 같았다. 단순히 한지와 먹을 가지고 그리는 장르라는 인식에서 탈피해 완전히 새롭게 민화를 풀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주제를 다룰 예정인가.
접점(Contact)이다. 그것은 타투라는 다소 생소한 문화와 일반인과의 접점일 수도 있고, 민화라는 과거와 타투라는 미래의 접점일 수도 있다.
용과 호랑이라는 비교적 익숙한 동물을 중심 소재로 삼았다. 이번 전시 작품의 대략적인 구성과 표현 의도를 알고 싶다.
지금 내 작업의 주요한 관심사가 호랑이기도 하고, 왜 흔히 ‘용 문신’이라고 하지 않나. 타투라는 문화에서 일반인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가 용이 아닌가 싶어서 그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대표적인 소재, 즉 호랑이와 용을 택했다. 이번 작업의 재료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하나하나가 메타포를 지닐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인주와 붉은 실, 못, 가죽 같은 것들을 활용했다. 인간의 피와 가장 비슷한 재료를 찾고 싶었는데 마침 인주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진하고, 끈적하고, 무언가 찍는다는 의미가 타투와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았다. 붉은 인주를 바탕으로 무수히 박힌 못에 실이 연결되며 용의 형상을 이루는데, 모든 라인은 피가 흐르는 걸 상징한다. 못이 결국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혹은 타투이스트 한 명 한 명이 될 수도 있다.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부조리를 느끼는 수많은 타투이스트가 굉장히 용기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인 붉은색을 택했다. 저항, 투쟁의 의미로 비칠 수도 있다. 타투할 때 바늘이 한땀 한땀 들어가듯, 못 하나 툭 던져놓으면 별 볼 일 없지만 수천개가 모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형상, 그것이 곧 상징적인 무브먼트가 아닐까 하고 상상한 것이다.
민화라는 장르를 하나의 시그니처 스타일로 발전시켰다. 왜 민화인가?
계기는 별거 없다. 십 년 전쯤인가. 막연하지만 한국화로 타투를 해보고 싶었다. 한국화는 여백의 미를 중시한다. 또한 거침없는 맛이 있다. 물론 거침없이 표현하는 단계에 도달하려면 정교하게 그리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천 번의 붓질을 단 열 번, 단 한 번에 완성하는 것. 그런 경지야말로 조선 시대의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미학이 아니었을까 한다. 다만 그것을 타투로 표현하는 일은 어린 나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였다. 그렇게 잊고 살다가 해외에서 타투를 공부할 때 각국의 타투이스트와 대화를 나누면서 미국, 유럽, 일본, 태국 등 다른 나라의 스타일을 말하는 나 자신을 보고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한국인인데. 그때부터 김홍도의 호랑이와 같은 조선 시대의 민화를 내 방식대로 해석해서 타투를 하기 시작했다.
민화를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것으로 습득했는지 궁금하다.
막 민화를 공부할 무렵 우연히 알게 된 어떤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기가 무언가를 표현할 때, 그것을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의 차이가 극명하다고.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렴풋이 알던 지식을 바탕으로 민화를 표현하는 것보다도 민화의 역사부터 표현, 주제까지 알고 그린다면 모르긴 몰라도 뭔가는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갤러리나 박물관에서 민화를 접하고 자료를 찾아가며 공부했다. 특히 한국화는 그림을 본다기보다는 읽는다는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 형식과 역사 등 민화에 관련된 지식을 습득했지만, 도리어 너무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민화는 말 그대로 정식으로 교육받지 않았던 민중의 그림이다. 형식에 연연할수록 그것이 내 표현을 방해하는 것 같았다. 배움이 깊은 분들이 이 말을 듣는다면 우습게 여길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천 번의 붓질을 단 한 번으로 표현하는 것이 과거 예술인들이 추구하던 경지라 말했다. 본인의 경우에 빗대었을 때 오랜 시간 타투에 매진한 지금 그 시작을 돌이켜보자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타투를 하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하는 구간은 끊이지 않고 따라왔다. 슬럼프는 항상 예기치 않게 찾아오니까. 다만 3년쯤 지났을 때는 내가 잘하는 줄 알았다. 아장아장 걷는 주제에 우쭐했던 거지. 다른 이들의 작품을 무시하던 오만한 시기도 있었다. 7년 정도 됐을 때 “내가 뭘 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때 내가 뭔지도 모르면서 타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10년이 지나니까 이제야 “내가 이걸 ‘하고’ 있구나”라는 걸 느꼈다. 걸음마를 떼기까지가 10년이었다. 내가 내 두 발로 걷는다는 걸 느끼는 단계. 이제는 걷기 시작했으니 똑바로 걷는 법을 훈련하고, 어디로 걸어야 할지 봐야 할 때인 것 같다. 한 30년쯤 하면 누군가에게 걸음마를 가르칠 수도 있지 않을까.
기피하는 타투 장르도 있나?
어릴 때는 오만해서 내가 하지 않는 장르나 하기 쉬워 보이는 작품을 무시했다. 지금에 와 조금이나마 성숙해지고 경험이 쌓이며 타인의 장르나 스타일, 작업물을 존중할 줄 알게 되었다. 누가 더 잘났고 누가 더 못났고 하는 생각은 이제 아예 하지 않는다.
타투를 계속해서 열망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두 발로 걷기 시작했으니 이제 뛰고 싶은 거지. 그간 민화, 까치와 호랑이, 단청과 같은 주제에 집중했다. 특히 호랑이는 4~5년간 쉬지 않고 작업을 이어왔다. 매년 호랑이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처음에 그린 호랑이는 지금 보면 유치한데, 마치 그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다. 그때는 너무 많은 아이디어를 집어넣으려고 애썼지. 해가 지나면서 호랑이의 디자인이 바뀌는 것처럼 나 또한 변하는 게 아닐까. 가지치기, 즉 잡스러운 걸 빼는 과정이다. 그걸 돌이켜보는 과정도 재미있다. 호랑이를 어디까지 발전시킬 수 있을지, 내가 어디까지 만족할 수 있을지, 호랑이를 이제 좀 놔줘도 될 시점까지 가보는 게 짧은 목표라면 목표다. 그다음에는 단청에 집중해보고 싶다. 주제에 관한 목표를 정하고 도달하는 걸 즐기는 단계다.
호랑이를 놓아준다는 말이 흥미롭다. 어떤 의미인가?
지금까지 호랑이를 수백마리 그렸지만 여전히 고민이 많다. 어제의 호랑이는 어떻게 그린 걸까, 오늘은 또 어떻게 그릴까, 하고 말이다. 이미 호랑이라는 개체에는 어느 정도 규칙이 존재한다. 다리 넷, 꼬리 하나라는 개념 안에서 결국 미묘한 변화를 주는 일이다. 언젠가 고민하지 않고 물 흐르듯 나아가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이 곧 놓아준다는 단계가 아닐까. 그게 내가 경한 경지다. 내 한계일 수도 있다. 실제 호랑이의 크기로 호랑이를 거침없이 한 번에 그려내는 경지? 누군가는 이미 쉽게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아직 그러지 못하니까 거기까지는 가보고 싶은 거지.
어떤 경우에 타투 시술을 거절하는가?
내가 하지 않는 작업을 원하면 당연히 거절한다. 그리고 너무 많은 아이디어를 요구해도 거절한다. 그 식당의 고유한 음식을 먹기 위해 직접 찾아가놓고 레시피를 다 바꾸는 일 아닌가. 그리고 예의 없는 사람. 나는 예의를 중시한다. 예의 없는 사람은 나뿐만 아니라 누굴 만나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타투가 불법이다. 그런 이들의 몸에서 타투가 보인다면 일반인이 더욱더 색안경을 끼고 타투를 볼 것이다. 그 반대라면 타투라는 문화를 더 좋은 쪽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겠지. 그렇다고 내가 거창하게 어디 가서 타투 운동을 펼치는 건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인식의 변화는 이 정도의 작은 일이 아닐까 한다.
호랑이, 까치, 용, 단청 같은 전통적인 소재가 아닌 현대 도시에서 살아가며 얻는 영감이라면?
특별한 영감을 받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민화를 한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민화 작가로 살겠다는 의지는 없다. 타투라는 하나의 장르를 가지고 작업하지만 나는 결국 표현하길 좋아하는 예술가로서 다양한 매체를 즐긴다.
한국 타투 신을 바라보는 관점 또는 그 안에서 느낀 바가 있다면.
한국 타투이스트로서 한국에서 작업하지만 사실 나는 타투 신에서 굉장히 고립된 사람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느 타투 신과도 연관이 없다. 나 잘난 맛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그저 개인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타투를 한다는 이유로 타투이스트들과 교류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내게 영감을 주는 이들은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이다. 한국 타투 신을 잘 모르는 입장에서 조심스럽지만 한 가지만 말해보자면 실력 있는 타투이스트가 정말 많아진 것 같다. 인스타그램이나 웹에서 랜덤하게 한국 타투이스트의 작업을 접할 때가 있는데,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분명 해외 경험도 없고, 시작한 지 고작 몇 년 안 됐을 거 같은 분들인데도 이미 독특한 스타일와 정교한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한국에서 조용히 자신의 타투 작업을 이어가는 젊은 세대가 이미 세계적인 실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왠지 뿌듯했다. 한국의 타투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다. 나는 한국의 타투 신이 더 발전할 거라 믿는다. 물론 지금 등장한 타투 세대는 인간의 피부나 세월에 대한 이해도는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나 또한 그렇게 배웠듯 세월과 경험이 결국 그들을 더 성장시킬 것이다.
타투 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편인가?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는 종합예술이지 않나. 영화라는 종합적인 예술을 만들기 위해 음악, 그래픽, 미술, 장치 등 수많은 테크니션이 참여하는데, 그 한 명 한 명 또한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좋은 영화 안에는 그걸 그대로 갤러리에 두면 바로 예술이 될성싶은 장면이 많다. 따라서 영화에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도 많다.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영감을 받을 수도 있지만 나는 보통 손님을 응대할 뿐이지, 거의 돌아다니지 않아서 그럴 기회가 적다.
인간관계에서 피로감을 느끼는가?
그렇기도 하지만 일단 내가 집중해야 할 작업이 있어서다. 사십 대를 목전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시간이라는 개념이 젊을 때와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나에게는 이제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고 느낀다. 이상하게 들리나? 작업과 연관을 지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거다. 내가 만족할 만한 디자인을 하나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10년이라고 치면, 지금부터 고작 두 점을 완성했을 때 예순이 된다. 이러니 시간이 없다는 거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기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따라주질 않는 거지.
삶의 초점이 오롯이 본인의 작업에 맞춰진 것 같다.
이전에는 나도 친구들과 술 마시고 노는 게 휴식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방금 말한 것처럼 내가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 자신, 내 삶에 집중한 것 같다. 내 시간을 보내는 법을 터득한 거지.
타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
나는 사실 좀 유치한 상상을 하면서 살아간다. 원대한 목표 같은 건 없다. 타투 마스터, 세계적인 타투이스트, 뭐 이런 꿈은 없다. 중요한 건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인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후세계다. 나는 특정한 종교를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가 모두 죽으면 과연 그것으로 끝일지, 영혼이라는 게 있어서 어딘가로 향하게 될지 늘 궁금했다. 만약 영혼이 있고, 죽고 나서 어딘가로 간다면 나보다 먼저 온 이들에게 내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살아서 이건 좀 무서워서 못하고, 이건 좀 겁나서 못하고 그러다 보면 과연 그 세계에서 사람들과 나눌 이야깃거리가 있을까 싶은 거지. 그래서 위험해도 일단 해보는 거다. 도전하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조차 이야기가 아닌가.
다르게 말하면 다음 세대, 즉 앞으로 살아갈 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 아닐까 싶다. 내가 선택해서 이 땅에 온 건 아닌데, 막상 왔더니 죽기는 싫고, 잊히기도 싫고. 내가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있었다’, ‘나 여기 있었다’마저 없다면 꽤 슬플 거 같거든.
타투이스트에게 걸맞은 삶의 철학처럼 들린다. 살에 타투를 새기듯.
재밌는 건 타투 역시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는 거지.
진행 / 글 │ 권혁인
사진 │ 배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