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ushi Jain, 새 앨범 [Under the Lilac Sky] 발표

분야를 막론하고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문화 정체성’ 또는 ‘전통’은 항상 뜨거운 화두였다. 무수한 문화가 급격히 유입되고 혼재되면서 고유문화의 존립이 위태로워졌고 존재 당위성마저 공격받았기에, 많은 학자들과 아티스트들은 각자 고유문화의 정수를 유지하기 위해 ‘비판적 지역주의(Critical Regionalism)’ 등의 이름으로 담론을 이끌며 고유문화의 생명력을 이어왔다.

뉴델리와 샌프란시스코를 기반으로 활동 중인 아루시 자인(Arushi Jain)은 현재 이러한 담론의 중심에 있다. 그간 모듈러 신스(Modular Synth)를 이용한 힌두스타니 음악(Hindustani music)을 구축해온 그녀가 그동안의 고찰과 실험들의 결과로서 [Under the Lilac Sky]를 선보였다. 앨범 속에 담긴 밤의 라가(Raga/Raag)는 열대야보다 뜨겁고 인더스 강보다 깊다. 비옥한 땅과 꿀을 노래하고 민족에 대해 염원하며 자연을 찬미하는 6개의 시구들은 함수들의 계산이 만들어낸 절대 오차라는 간극에서 유영하고 있다.

그녀가 밤에 노래한 시에는 변증법에서의 갈등이 아닌 변증법의 호흡이 담겨있다. 일반적으로 변증법은 ‘정과 반’ 사이의 갈등에 주목하는데, 이 앨범의 경우 정과 반 사이의 간극에서 합이 탄생하는 호흡에 주목했다. 그것은 문명의 탄생과 흥망성쇠라는 역사의 호흡과 닮아있다. 호흡으로 일군 이 대지에서 하이테크는 춤추고 고전주의는 환희할 것임에.

통념 속 ‘전통’이 재고 없는 강박적 재현으로 사용된 것을 염두하면, 이 앨범의 전통은 비교적 단순하다. 단순히 라가의 형식과 구성만을 차용했다면 복잡했을 터. 재현을 배제하고 무드의 융숭함을 적극 이용해 단순해졌다. ‘라가’라는 인간, 시간, 공간, 자연을 바탕한 인도 전통 요소를 모듈러 신스와 에이블톤(Ableton)이라는 가장 기계적이고 수리적인 요소들로 매개하고 있다. 이렇게 성취된 엠비언트와 미니멀 글리치적 요소가 가미(加味)된 라가는 반석(磐石)을 동요하게 만든다.

앨범을 듣고 누군가는 테리 라일리(Terry Riley)를 떠올릴 수도 있다. 허나 이 둘은 ‘단순함’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이것은 아루시 자인 본인이 컴퓨터 엔지니어라는 점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음악은 블랙박스 이론(Black Box Theory)에서와 같이 투입과 산출은 명확하고 단순하지만 그 과정은 복잡하기에 인과 규명이 어렵다. 그 과정이 전통에서 기인된 것일 수도 있고, 수리적 함수에서 기인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3자인 우리 몫이 아니다. 그저 이원화된 연주자의 인도(引導)에 따르면 된다. 그에 반해 전자(테리 라일리)는 어렵다. 일원화된 연주자에 내던져진 청자에게 투입과 산출은 모호하며 수용과 해석, 규명은 온전히 3자인 청자 몫으로 남는다.

이번 앨범을 단순한 엠비언트 앨범으로 치부하는 것은 고등학교 사회문화 교과서에 나오는 밥버거, 불고기 피자와 이 앨범을 견주는 행위일 것이다. 이런 치명적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다른 눈과 귀로 그녀의 작품에 집중해보며 일렁이는 전율에 몸과 마음을 방치해보자.

Arushi Jain 인스타그램 계정
Ghunghru from NTS Radio


이미지 출처 | Leaving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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