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na Herlop, 새 앨범 [Pripyat] 발표

“장소는 발견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관찰하고 해석하고 글과 시각예술, 그리고 기존의 환경 속에서 구축되는 공간 개념이다. 장소는 시간이 흐르면서 복수의 해석과 재현이 구체적인 공간 주위에 합쳐지면서 서로 논쟁적이며 활발하게 영향을 미친다.” 더글라스 라이허트 파월(Douglas Reichert Powell)이 비판적 지역주의(Critical Regionalsim)를 두고 한 말이다.

이처럼 장소성이란 단순히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점유하는 단순 물리 공간을 넘어 사회적 총체의 개념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담론이 비단 건축계 내에서만 유효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결국 비판적 지역주의의 정수는 모더니즘의 유산을 적극 수용한 채 장소성을 획득함에 이야말로 기능주의 질서 속에서 고유문화의 존립을 도모하는 진정한 보존 아니더냐? 이러는 와중 마침 바르셀로나의 어느 아티스트가 막전 막후 비판적 지역주의의 범본이 될 앨범을 발표했다는 소식이다.

바르셀로나를 기반으로 활동 중인 피아니스트이자 프로듀서인 마리나 헤를롭(Marina Herlop)이 베를린의 레이블 PAN을 통해 새 앨범 [Pripyat]을 발표했다. [Babasha]와 [Nanook]과 같이 그녀가 앞서 발표한 앨범들과 상당히 대비되는 구성, 화법, 패턴, 디자인을 보이며 새로이 선보인 작품관은 완벽한 비판적 지역주의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그간 부진했던 지역주의와 관련한 담론을 넘어 비판적 지역주의의 확장 가능성까지 보여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Miu’와 같은 트랙의 경우, 남인도에서 통용되는 전통 성악 퍼커션인 콘나콜(Konnakol)의 어휘들을 재조합한다든지, 신시사이저와 에이블톤 라이브(Ableton Live)를 적극 수용하는 등 신구 그리고 동서의 유산을 바탕으로 익스페리멘탈 음악의 전형적인 문맥을 카탈루냐 지역 언어로 번역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 그녀의 음악에 구축된 장식언어들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분리했을 때 고유의 지역성이 느껴지지 않지만, 각각의 언어들이 어떤 질서(신텍스)를 통해 발화됨으로써 지역성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음악에서의 리듬 섹션을 건축에서 구조와 같다고 본다면, 이번 앨범이 취하고 있는 구조는 구조가 곧 장식인 셈이다. 이는 건축에서 말하는 ‘구조적 진실’을 들어내는 구조적 표현인 텍토닉과 닮아있다. 공교롭게도 비판적 지역주의는 텍토닉한 건축을 추구한다. 그렇다. 이 앨범, 공히 텍토닉하다.

한편, 목재가 지닌 취성을 소조화한 앨범 커버의 조형미는 앨범 내 조각의 방식으로 이룩한 사운드디자인 그리고 그 조형미와 대비된다. 이와 같은 부조화 테마는 평면적였던 그녀의 전작들과 확연히 대비되며, 물성과 대비되는 가공 방식은 실로 탁월하다. 표상과 물성의 측면에서 감상해 보는 것 또한 이 앨범을 감상하는 묘미가 될 것. 이와 같은 조형 공예적 특성은 수공예적 가치를 지역성과 결부시키는 지역주의와도 맞닿아있는데, 이처럼 지역주의와 비판적 지역주의라는 건축사의 일부가 마리나 헬를롭의 앨범과 닮아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di)와 주세프 마리아 소스트레스(Josep Maria Sostres)가 카탈루냐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게 된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 뿐이다.

로컬라이즈. 마치 ‘타임리스’ 마냥 손에 닿을 듯 말듯 우리의 뇌리를 맴도는 이 단어의 무게가 최근 너무 가볍게 범용 되고 있지는 않은지, 반대로 이를 교조화하여 감히 우리가 이룩할 수 없는 초월적인 행위로 인식하지는 않았는지에 대해 사카구치 안고의 말처럼 ‘우리는 지금 우선, 가장 엄격한 시선으로 응시할 필요가 있다’. ‘장소성’이라는 논제를 두고 앞으로 우리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될 마리나 헤를롭의 이번 앨범을 빠르게 확인해보자.

Marina Herlop 인스타그램 계정


이미지 출처 | 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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