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Francoise Sagan)은 물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필자는 이렇게 물어보겠다. “건축을 좋아하세요?” 아마 이 질문에 ‘네’라고 섣불리 대답 못 할 터. 우리는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가장 많은 시간을 건축과 함께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무관심하거나 어려워한다.
이런 느낌 많이 경험해봤고 많이 본 듯하다. 매년 VISLA 생일 파티가 펼쳐지던 모데시 앞에서 망설인 채 쉽사리 입장하지 못한 그런 느낌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안다. 문을 열기까지가 어렵지, 들어가면 신나게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건축도 마찬가지. 다만 큰 차이점이라면 낯섦이란 감정을 스스로 장벽이라 느끼는 서브컬처와 달리, 건축계에는 엘리트주의와 매너리즘이 만든 장벽이 실제로 있는 듯하다. 그 뿌리는 근대 이후 유수히 많은 건축가들 덕.분.에 시작되었고, 팔짱을 낀 그들은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를 견고히 하고 있다.
이 글은 황망한 허언과 허례의식으로 얻은 엘리트 예술이란 불명예에서 건축을 회복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모두가 건축을 편히 즐기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작성되었다. ‘Architecture’의 어원인 그리스어 ‘테크네(Techne)’는 생각과 지식의 개입을 강조한다고 한다. 건축에 관한 새로운 생각과 시도가 현재 한국 건축계에 개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족한 게 많은 이 이야기를 편한 마음으로 즐겨주길 바라며 친구와의 만담이 끊길 때쯤 이 글이 가벼운 대화 소재로 거듭나 새로운 생각이 촉매되길 소망해 본다. 끝으로 현대 건축이라는 난세 속 영웅 고(故) 버질 아블로(Virgil Abloh) 선생님과 고(故)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 선생님께 이 글을 바친다.
1. 건축이란 무엇인가?
‘건축(建:세울 건/築:쌓을 축)’ 또는 ‘Architecture’는 무엇인가?
거의 모든 건축학 개론과 건축사 교과서를 보면 대개 이런 질문으로 시작한다. 질문들이 난해하고 어렵게 느껴져 포기하고 싶지 않은가? 허나 포기하기엔 정말 시작도 안 했다. 쉽게 생각해보자. 카페에서 지인과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자신과 보험 ‘설계’를 하는 보험 설계사, ‘아키텍트’라 불리는 프로그래머부터 스토아학파의 ‘스토아’, ‘대들보’라 불리는 전국의 K-장남&장녀들까지. 알게 모르게 우리는 건축이란 용어를 일상 속에서 확장하며 많이 써먹고 있다. 이처럼 현대에 들어와 건축의 의미와 개념에 변화가 이루어졌기에, 건축을 단순히 제반 예술로서 ‘집이나 성, 다리 따위의 구조물들을 그 목적에 따라 설계하여 흙이나 나무, 돌, 벽돌, 쇠 따위를 써서 세우거나 쌓아 만드는 일(출처: 표준국어대사전)’로만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건축’과 ‘Architecture’란 개념을 다시 보고 달리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어떠한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도출한 해결 방안 및 그 도출 과정’. 그럴싸한가?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인간의 모든 행위를 건축으로 보는 것은 어떠한가? 이건 너무 멀리 간 것 같은가? 아니다. 수천 년 전 우리 조상들은 비와 추위, 맹수라는 문제에 해결하기 위해서 ‘집’을 쌓았고, 권력과 재산을 외부로부터 대응하기 위해 ‘국가’를 세웠다. 이러한 조상들의 건축적 기품은 오늘날 재무제표와 수험생들의 문제집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를 건축으로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어떤 행위를 행하고 있는 우리 모두 ‘Architect’. 즉, 건축가다. 마치 불교에서 모두의 마음에 석가모니가 될 수 있는 불성이 있다고 했듯, 우리는 건축가이며 마음속 잠자고 있는 건축가로서 자아를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국토교통부가 발행한 건축사 면허는 정말 종이 쪼가리에 불과함에, 일상을 살아가며 인류 역사 일부가 되어 가는 우리 모두가 실은 건축가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예제) 이 글을 읽고 있는 자신이 최고의 건축물이자 건축가인 이유를 마음 속으로 논하시오.
(예제) 새로 정의 내린 건축의 관점에서 ‘사랑’은 어떤 문제에 대한 대응 방식인지 머리 속으로 논하시오.
2.건축의 속성
방금 우리는 건축을 ‘어떠한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도출한 방안 및 그 도출 과정’이라 한 사실에 동의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 상황의 반대에 서서 문제가 문제인 이유에 저항하고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건축’이 근대 이후 서양에서 수입된 개념이라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 같다. 이렇듯 건축에 반항적인 뉘앙스가 묻어있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모델은 예술의 실행과정에서 볼 때 그 모습 그대로 반복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유형은 어느 누구에게나 전혀 닮지 않은 작품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대상이다.
카트르메르 드 퀸시(Quatremere de Quincy)
우리가 그전까지 건축이라 부른 것 중 이집트 피라미드를 생각해보자. 듬직하고 우직하게 쌓여 있는 피라미드는 중력에 저항한 채 오랜 시간 무너지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피라미드가 시간에 저항하고 있다는 표현도, 공간에 저항하고 있다는 표현도 탐탁지 않지만 어느 정도 수긍해줄 수 있다. 이처럼 시공간에 저항하고 있는 건축은 ‘저항 정신’에 투철해 보인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작용과 반작용’이란 그럴싸한 언어로 다시 한번 포장해도 되겠는가? 나름 수긍할 수 있는가? 우리는 현대 건축사 속 ‘포스트모더니즘’의 사례를 통해 건축의 속성 중 저항을 다시 확인해 볼 것이다. 건축에도 포스트 모던이 있냐고? 에이 그건 좀 섭섭한 언사다. 미술과 음악에만 ‘포스트모더니즘’을 적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건축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이 스며들었고, 나름 한때 전 세계 유행이었다.
1950년대 전후로 국제양식(International Style)이라 불리던 양식이 건축에서 유행한다. 이는 서울 종각에 있는 ‘SK서린빌딩’이나 ‘삼일빌딩’과 닮았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국제양식은 장식을 배제하며 표상성을 거부했고 엄격한 질서를 통해 규격화-모듈화를 도모했다. 쉽게 접근해보자. 여기 프라다(Prada) 슈트가 어울리는 수학 선생님이 있다. 이 사람은 한 번의 실패 없이 승승장구한 삶을 살아온 부잣집 자제로, 어떠한 상황에도 항상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유지했으며 엄한 규칙으로 학생들을 잡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꼭 이런 선생님을 이겨 먹거나 놀려 먹으려고 안달 난 문제아들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존재해왔다. 우리 경우, 선생님은 국제 양식, 문제아는 포스트모더니즘, 구체적으로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다.
벤투리라는 건축가가 있었다. 그는 국제양식이 아니꼬웠다. 가오 잡고 있는 저 입방체가 대중과 소통하지 않는 것 같아 싫었고, 재수 없는 국제 양식은 오리 모양으로 ‘나 오리 모양을 했소’라 호소하는 라스베가스 건축물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냉소적으로 비꼬았으며, 자신의 작품 속 장식을 유희적으로 풀어내며 대든 것이다. 과연 이게 포스트모더니즘만이 그랬던 것일까? 국제 양식 또한 반작용의 일환이었으며, 르네상스(Renaissance)던 아르누보(Art Nouveau)던 바우하우스(Bauhaus)던 어떤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좀 전에 필자와 함께 새로 정의한 건축을 봐도 마찬가지다. 어떤 문제 상황에 대한 해결과 대응이 저항과 같이 느껴진다. 어렴풋하고 애매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이유’ 때문이지는 않은가? 논의를 무리해서 확장하자면,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연속’으로 본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나 변증법을 말한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말이 상당히 건축적이라는 것이 ‘왠지 모르게’ 느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N.W.A와 건축이 닮았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지금 방금 고개를 끄덕였는가? 그렇다면 방금 우리는 건축이 다른 영역으로 확장되는 순간을 우리는 목격한 것이다.
(과제)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위니테 다비타시옹(Unite d’Habitation)에 대해 간단한 검색 후, 더 루츠(The Roots)의 앨범 [Things Fall Apart]와의 공통점을 찾아보시오.
(예제) 가장 최근 누군가에게 개겨본 일을 회고한 후, 자괴감이 들지 않는 선에서 자신과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의 차이점에 대해 마음 속으로 서술하시오.
3. 인접 영역으로의 확장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해보자. ‘자두, 포도 다음으로 올 말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사과나 복숭아 등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 ‘철강업’이나 ‘화요일’ 같은 답을 하는 사람도 있다. 분명 이런 대답을 하면 가차없이 빵점 처리와 함께 별종이란 낙인이 따라다닐 터. 그렇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같은 언어로 비슷한 무게의 주제를 말해야만 될 것 같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어떤 문제나 작용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항상 궤를 함께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질문을 두고 CPA를 준비 중인 수험생 A는 간절한 마음에 ‘제57회 공인회계사 시험’ 이라 답했고,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영국인 B는 무의식적으로 ‘Dictionary’라 답했다. 그럼 이들은 틀린 것인가? 필자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무질서해 보이는 답이라 할지라도 그 답이 도출되기까지 분명 어떤 질서와 규칙이 작용했을 것이다. 오히려 서로 달라 보이는 것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궤변이라고? 맞다. 궤변이긴 한데 당연한 것들을 돌아보고 의심하게 만들어 준다. 오! 그런 의미에서 이 궤변도 상당히 건축적이구먼.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그리고 이게 건축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럼 다시.
‘금연구역 내 담배꽁초 무단 투기’란 문제를 생각해봤을 때, 그 대응이 ‘목성(Jupiter) 대기 중 수분 측정’이 안 될 이유는 없다. 왜? 어떤 문제에 대해 일정한 규칙과 질서를 갖고 도출된 해결 방안이니까. ‘금연구역 내 담배 꽁초 무단 투기’에 대한 무수히 많은 반작용이 개연성이나 인과성이란 이름으로 간과되면 안될 것. 그렇게 설정된 서로 다른 두 항(작용/반작용) 사이에는 ‘나’가 있다. ‘나(개인)’로 인해 서로 다른 곳에서 떠돌던 것들이 작용과 반작용 자리에 앉게 되었고 통신망처럼 연결되기 시작했다. 결국 ‘나’를 통해 서로 다른 것들이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우리는 매체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 답변을 한 우리는 결국 매체이면서 그 매체를 사용하는 주체이다.
매체를 탐구하고 이해하는 데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가에 대해 비밀스러운 한마디를 하고 싶다. 확신컨대, 매체는 언어학과 회화의 구조주의자들의 학설을 응용하고 있다.
그레고리 배트코크(Gregory Battcock) <비디오 예술>
좀 전에 건축이 인간의 모든 행위라고 했던 것을 여기에 적용하면, 결국 건축이란 소통의 문제이자 매체의 문제다. 그러고 보니 어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중세 시대에는 건축이 대중 매체 역할을 했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맞다. 대응시켜 보면 건축은 그 자체가 목적이자 수단이 된다. 서로 달라 보이는 것 사이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이어주는 것이 건축의 결정적 존재 이유다. 이렇게 새로운 관계를 맺어주는 행위를 서로 다른 매체로 확장하는 것도 가능하다. 일단 말해보자. 그리고 이에 대한 질서와 규칙을 만들어서 설득시키면 된다. 우리 머릿속 새로운 가능성들을 물리 세계에 말하면 알아서 자동으로 번역되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으니, 아무 매체에 아무 형태로 말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 것. 말이 너무 장황했는가? 그냥 영역 구분하지 말고 최대한 다른 영역끼리 붙여서 생각해보자는 것. 우리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믿어보자. 우리가 지닌 ‘이카로스의 날개’는 녹지 않음에.
(과제) 랜드스케이프(Landscape)-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소울스케이프(DJ Soulscape) 사이에 얽혀 있는 복잡 미묘한 관계를 자유롭게 생각해보시오.
(과제-심화) 지인 중 철학 전공자를 찾아 ‘에피쿠로스주의’에 대해 물어보고, 이에 근거하여 건축가 이시가미 준야(Junya Ishigami)의 작품 ‘풍선(Balloon)’을 해석해보시오.
3.1 패션과 건축
건축물도 옷을 입는다. 정말이다. 그 겉옷을 ‘입면’ 또는 ‘파사드(Facade)’라 부른다. 심지어 옷을 갈아입을 수도 있다. 그걸 리노베이션(Renovation) 또는 개축이라 부른다. 우리가 지금 사는 집만 보더라도 확실히 ‘겉옷-입면’ 이게 무슨 말인지 대강 알겠다. 자, 그렇다면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하 DDP)’와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의 사례를 통해 옷의 종류와 옷 입는 방식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DDP의 경우, 거대하고 화려한 겉옷 때문에 속마음이 감춰져 있다. 다시 말해, 엄청 복잡하고 현란한 곡면들로 이뤄진 입면 때문에 건축물의 뼈대(구조)가 어떻게 배열되었는지 내부 공간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이런 공상영화에서나 볼 법한 부류를 ‘비정형 건축’이라 부르는데, 비정형 건축의 대명사인 DDP는 19세기 뉴 로코코 패션과 닮았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자신의 몸보다 큰 스커트를 겹겹이 입기 시작한다. 이를 연출하기 위해서 크리놀리(Crinoline)이라 부르던 틀을 사용하게 된다. DDP도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과장된 입면을 구현하기 위해 스페이스 프레임(Space Frame)이라는 불리는 크리놀리와 비슷한 틀을 만듦으로써 이런 외관을 가능케 했다. 결국 규모의 문제지 과장된 옷을 입고 그 옷을 입는 모습이 매우 닮았다.
DDP와 정반대로 퐁피두 센터는 겉옷 없이 발가벗었다. 건축물의 구조체는 훤히 드러나 있고, 건축물의 장기와도 같은 설비 또한 건물 밖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니까 퐁피두 센터는 뼈와 장기를 드러낸 모습 자체가 이 건물의 겉모습이다. 뼈와 장기를 들어낸 채 알몸으로 있다라… 기괴한 표현과 달리 공사 현장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니 걱정 말 것. 근데 계속 보고 있자니 허세나 가식 없이 참 솔직해 보이는 이 건물이 어쩌다가 이런 외관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복합 문화 시설인 이곳은 공간이 계속 바뀐다는 점, 전시라는 행위를 담아야 한다는 점에서 최대한 제약이 없어야 한다. 그러니 겉옷 따위는 거대한 내부 공간을 만드는 데 방해가 되기에 애초에 관심 밖이었다. 그렇다. 퐁피두 센터는 약 45m의 기둥 없는 공간을 위해 몰빵한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최신의 구조 기술과 설비 기술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런 부류를 ‘하이테크(High-Tech)’이라 부른다. 흠… ‘인간 구찌’, ‘인간 프라다’ 이런 표현을 빌려서 ‘건축 아크테릭스(Arc’teryx)’라 표현하면 확 이해되는가?
(과제) 독자적인 디자인 언어를 도출하는 데, 루이스 칸(Louis Kahn)과 버질 아블로가 ‘고전성과 현대성’을 활용한 방식에 대해 공통점을 중심으로 무리되지 않을 정도만 생각해보시오.
(과제) 포스트 아카이브 팩션(Post Archive Faction)과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대표 수식어인 ‘해체주의’에 대해 간단히 검색해보시오.
(예제) 루이비통(Louis Vuitton)의 2021 FW 쇼에서 사용된 미스 반 데 로에(Mies van der Rohe)의 건축 언어를 찾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버질 아블로가 건축가로서 남긴 의의에 대해 자유롭게 서술하시오.
3.2 영화와 건축
영화는 시간에 구애를 받는 매체이지만, 건축은 시간에 구애를 거의 받지 않는 매체다. 반대로 영화는 공간적으로 자유롭지만, 건축은 공간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건축과 영화가 닮았다’는 것이 ‘어쩔건축사법제4조제1항’이라 하는 것만큼 황당한 것 아닌지 의심이 든다. 하지만 일전에 말한 독일 표현주의와 ‘코야니스카시(Koyaanisqasti)’ 사례에서 보았듯, 영화와 건축은 꽤나 오랜 시간 서로 밀접하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자,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관람한 적이 있다면 떠올려 보자. 돌이켜 본다면 그의 영화 속 모든 요소가 낯설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배우의 연기, 카메라, 편집, 플롯, 심지어 배경마저 낯설게 다가온다. 우리는 북촌과 건국대학교 교정을 익히 잘 알고 있으나, “풀잎들” 속 북촌이나 “옥희의 영화” 속 건국대학교 교정은 우리 기억과 많이 달라 보인다. 겉모습만 같을 뿐 그걸 경험하고 느끼는 우리에게 영화 속 도시와 건축이 너무 낯설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많은 평론가와 전문가들은 홍상수 감독을 두고 ‘통념에 저항하는 감독’이라 평하며 그의 영화를 ‘반복과 차이의 미학’이라 말한다. 이를 두고 어떤 네덜란드 건축가의 건축물이 떠오르는데, 둘은 얼마나 닮았는지 판단해 보길.
건축가 렘 콜하스(Rem Koolhaas)는 근대 건축에 도전한 건축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새로운 접근과 여러 인용으로 근대건축에 도전하며 현대 건축의 거목이 되었는데, 그가 설계한 ‘쿤스트할(Kunsthal)’은 이를 전적으로 잘 보여준다. 우선 이 건축물의 동선은 시작점과 끝점이 같다. 뫼비우스의 띠 형상을 한 동선은 반복적으로 같은 공간을 지나치게 계획되었는데, 순서에 따라 같은 공간을 달리 경험하도록 미묘한 차이를 두며 시작과 끝이 같지만 다르도록 구성했다. 어? 수미상관 구조와 ‘반복과 차이’를 통한 ‘시간의 재구성’은 홍상수 감독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던데. 오! 일단 비슷한 점 하나 찾았다.
둘째로, 쿤스트할의 경우에는 긴 경사길(램프)을 많이 배치하여 내부를 산책하게 하는 ‘건축적 산책’을 유도했다. (*‘건축적 산책’은 필자가 만든 말이 아니라 실제 자주 사용하는 용어) 이는 홍상수 감독이 자주 쓰는 롱테이크 기법과 닮았다. 시간을 길게 늘려서 그 사이에 우연이 개입할 여지를 남겨 배우/사용자는 제약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게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둘은 일상적인 소재/재료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한쪽은 술자리라는 가장 일상적인 상황을, 한쪽은 기성 철판이나 플라스틱같은 투박한 일상 재료를 적극 활용하며 아름다움에 대한 기성 통념에 도전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인제 보니 정말 비슷한 점들이 많다.
와! 이처럼 내러티브를 전개하고 시퀀스를 구성하는 데 영화와 건축은 결과물의 형태만 다를 뿐, 서로 본질은 결국 같다는 생각은 전혀 과장이 아니구나… 영화는 시간적으로, 건축은 공간적으로 배울 게 많다. 그러니 새로운 것이 필요할 때, 해법을 안에서 찾을게 아니라 좀 멀리 보면 힌트를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과제)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를 감상하며 자신이 경험했던 경주와 비교해보고, 차이가 있다면 그 이유를 혼자 골똘히 고민해보시오.
(과제)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Alejandro Jodorowsky) 감독의 영화 “홀리 마운틴(The Holy Mountain)”과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A Space Odyssey)”를 공간 중심으로 관람해보고, 이에 대한 감상을 기록해보시오.
3.3 음악과 건축. 그리고 소결
우리는 이미 음악과 건축이 만든 화학작용의 힘을 익히 경험해봤다. 과거 모데시(Modeci)에서 진행되었던 보이스(VOICE)가 기억나는가? (*VOICE는 앤드워크(Antwork)와 마지코(Magico)가 이끄는 파티 브랜드) 시간이 좀 지났지만, 파티에서 느낀 낯선 비일상적인 감정과 경험들은 여전히 우리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하지만 그 원인을 대강 음악과 공간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퉁치기에는 동틀 녘까지 춤춘 우리 마음이 허락 못 하는 것 같다. 뭐랄까, 초월적인 감정과 인상에 사로잡혔다고나 할까.
모데시는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Luis Barragan)이 연상되는 공간이다. 강렬한 색채의 두꺼운 벽, 자연채광을 적극 받아드린 천장, 투박한 오브제들, 이국적인 향 등 바라간을 인용한 건축 언어들은 이곳을 토속적이고 절제된 공간으로 만든다. 이러한 공간에서 앤트워크와 마지코의 절제되고 응축된 테크노 음악에 몸을 맡겨 움직이다 보면 초월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사람들의 춤추는 모습이 때로는 샤머니즘적이라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있다. 하지만 모데시라는 공간과 보이스라는 파티의 목적은 유희에 있다. 이와 같이 경험과 본래 목적 사이에 부조화가 이 공간 속 이 파티에서 벌어진다. 그럴싸하게 현학적으로 포장해보자면, ‘호모 렐리기오수스’와 ‘호모 루덴스’가 내부에서 격렬히 충돌하는 기이한 현상이 펼쳐진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더욱 특별하게 기억하는 것. 이처럼 공간과 음악을 묶는 어떤 것이 있는 것 같고, 거기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의 결과인 ‘어떤 것’ 때문에 우리는 강렬한 비일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 맞다. 음악과 건축은 닮은 점이 많다. 보이지 않은 것을 공간적으로 풀어내기 때문에 두 영역은 더더욱 쉽게 붙을 수 있다. 하지만 둘 사이를 매개할 무엇이 필요하다. 서로 달라 보이는 두 영역이 만나려면 매체 역할을 할 ‘그것’이 필요하며 둘이 만들어 내는 가치 또한 그 추상적인 ‘그것’이다. 좀 전의 사례 속 ‘초월적인 부조화 비스무리한 그 어떤 것’을 ‘그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여전히 뜬구름 잡듯 애매모호한 말들의 연속이지만, 일찍이 노자께서 ‘도를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불멸의 도가 아니다’라 하시지 않았는가?
道可道, 非常道 。
노자 <도덕경>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 말하여진 도는 상도가 아니다.
음악과 건축은 같은 ‘그것’에서 파생되었고 그들은 ‘그것’으로 다시 묶일 수 있으며 그들은 다시 ‘그것’을 낳는다. ‘그것’의 힘은 강하다. 1980년대 불법 레이브가 자행되던 영국, 열악한 사운드시스템과 조악한 공간임에도 당시 젊은이들이 무엇 때문에 열광했을지 생각해보면 결국 ‘그것’이다. ‘그것’은 당시 영국 사회를 움직였고, 다른 ‘그것’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무엇일까? 레이브? 대처리즘? 청춘? 뭐든 좋다. 우리 인간은 ‘그것’으로 음악을 만들고, ‘그것’ 때문에 옷을 입었고, ‘그것’에 의해 숨 쉴 수 있다. ‘그것’으로 인해 시간은 흘렀고, 새 생명은 계속 탄생해왔다. 얘기를 듣자 하니 무슨 신흥 사이비 종교 같아서 등골이 서늘해진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위에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것’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맺어주는 매체는 ‘나’다. 자, ‘그것’의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나’. 각 개인이다. 그럼 그 주체가 행하고 있는 행위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이다. 이 돌고 도는 같은 질문은 무한히 반복하면 ‘그것’과 ‘나’는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다(고등학교 시절 배운 적분을 생각하면 쉽다). 그 점은 다시 폭발해서 다시 무한한 질문의 굴레를 만든다. 그럼으로서 ‘나’의 존재가 성립될 수 있다. 결국 우리 존재는 ‘그 자체가 목적이자 수단’라는 결론과 만난다. “나는 나로서 나를 행하여 나를 만든다”. 그렇다. 한 개인은 작은 우주다. 그렇기에 개인은 목적일 수 있으며, 수단일 수 있다. 소우주 속에서 모든 가능하고 그건 우리가 우리를 향하는 것. 미친 소리 같다고? (문과생들에게 미안하지만) 이건 치환적분인데 어찌 이게 미친 소리란 말인가.
위에서 말했던 황당한 과일 이야기 생각나는가? 그것을 좀 더 멀리 보아 ‘건축과 인간’으로 확장한 것일 뿐. 모두의 마음에는 많은 점이 시냅스처럼 복잡하게 연결된 소우주가 있다. 그리고 소우주끼리도 충분히 서로 연결될 수 있다. 그렇다. 신문과 SNS부터 벽화와 건축까지. 인류는 항상 그 소우주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믿고, 서로 의지해왔기에 인류 역사는 이어올 수 있었다. 대우주의 관점에서는 소우주는 점으로 연결되어 대우주를 이루며 대우주를 행하고 있다. 필자는 분명 초반에 건축을 인간의 모든 행위라고 했다. ‘쌓고 세운다’라는 의미의 건축은 결국 자신이 만든 소우주의 창조자이자 피조물인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건축가로서 각자 인생을 구축하면 된다. 자, 이제 각자 생각해 본 건축을 각자의 인생에서 행해보자.
(과제) 씨피카(Cifika)의 [HANA]를 극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어떠한 제약 없이 상상해보시오. (ex. 원자와 원자 사이/6억년 전 어떤 바다 속/쌍곡선 그래프 위/어제 첫사랑과 이별한 5273번 째 사람의 뇌세포 내부/숫자 0이란 개념의 경계)
(과제) 밀톤 나시멘토(Milton Nascimento)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의 앨범을 디자이너 샘 앤투핏(Sam Antupit)의 아트워크 중심으로 감상하고, 아트워크 속으로 음악과 자신이 빨려 들어간다면 어떤 형태로 빨려 들어갈지 진중하게 상상해보시오
(예제)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의 국회의사당(National Congress)을 처음 봤을 때 느껴진 조형미와 살라만다(Salamanda)의 [Sphere]와 함께 감상하며 느껴진 국회의사당의 조형미에 대해 마음 속으로 비교 분석하시오.
4. 부록: 건축을 향하여
그럼 어쩌란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각자 내릴 수 있도록 충분히 이야기했다 생각한다. 그럼에도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 앞선 이야기들을 돌려서 더 쉽고 직접적으로 다시 말해보겠다.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그 본질이 사라지기 때문에 앞으로의 이야기가 퇴색되지 않고 전달되기를 바라며, 이해하는 순간 바로 이를 전부 잊어버릴 것을 당부한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에 의하여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논리-철학 논고>
새로 정의한 건축을 행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우리의 소우주는 어떠한 제약 없이 완전하다는 점. 둘째, 우리는 3차원 물리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 어디까지 확장하고 어디까지 축소할 수 있는지 나아가 그것을 3차원 물리 세계로의 이행(Transition), 다시 말해 건축(建築/Architecture: 세우거나 쌓아 만드는 일)은 이 전제로부터 시작된다. 잠깐! 이행이 어째서 건축이지? 앞서 필자는 어떤 매체에 아무 형태로 말하면 번역이 된다고 했었다. 그 과정과 결과를 ‘이행’이라는 단어로 치환한 것일 뿐.
우선 우리의 소우주가 얼마나 완전하고 얼마나 제약이 없는지 보여주겠다. 머릿속에서 두 점을 찍어보자. 점A와 점B. 점A에서 점B까지 1초만에 이동했다고 상상해보자. 상상했는가? 사실 이 두 점 사이의 거리는 600경 광년(Light Year)이었다. 와! 방금 우리가 한 상상으로 수많은 물리 법칙들이 부정당했다. 혹시 이 상상은 틀렸는가? 전혀 틀리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발 딛고 있는 3차원 물리 세계의 지식이나 논리로 증명이 어렵고 그걸 뒷받침할 기술을 갖추고 있지 못할 뿐, 분명 우리 머릿속에서는 가능했다. 같은 맥락에서 선형대수학, 양자역학부터 도가사상, 실존주의까지 모든 것은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3차원 계 내에서 부유하는 것일 뿐, ‘나’란 소우주에 비해 무한히 자유롭지 못함에 불완전한 것들이라 볼.수.도 있다.
차원이 어쩌고저쩌고.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차원을 말해 보자. 머릿속으로 6억 차원 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해보자. 6억 차원의 좌표를 떠올리기도 무척 어렵지만 그 좌표상에 선을 그리기도 어렵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새로운 복잡계에 대해 ‘나(주체)’ 이외는 사유할 수 없기 때문에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는 법. 어쩌면 6억 차원에서는 점-선-면 따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 그 복잡계에서는 세계라는 사유도, 밥을 먹는다는 행위도, 태어나고 죽는 순리도, 감정이라는 작용도, 끝으로 시공간의 개념도 다를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정의되거나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정의’나 ‘존재’마저 담지 못한 ‘그 어떤 것의 것의 것’ 정도의 것들만 존재할 것이다. 이로 인해 60억 차원이 적용되는 계에서는 ‘쉽다-어렵다’, ‘빛-어둠’, ‘삶-죽음’, ‘사랑’, ‘성찰과 반성’, ‘시간과 공간’ 같은 개념이 다를 것이며 이러한 것들이 무(無)로 정의될 수 있는 법. 왜? ‘나’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반대로 차수를 낮춘다고 생각해보자. 3차원에서 2차원으로 말이다. 라이노(Rhino)의 ‘Set XYZ coordinates’ 명령어처럼 Z축을 배제하는 정도로 말이다. 3차원 계 전체를 2차원 평면에 이행한다면 만물은 어떤 원리 아래 어떤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 계속해서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3차원과 같은 음수 차원, 파이(π) 차원과 같은 무리수 차원도 생각해 낼 수 있다. 결국 어디까지 확장하고 어디까지 축소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걸 경험 가능한 세계로의 이행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한편 3차원 계에 부유하던 사유와 논리가 개입하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 것인가 의구심도 든다. 하지만 ‘나’가 어떤 일련의 과정과 논리로 매체이자 주체가 되어 그런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그 소우주 내에서는 가장 타당한 ‘것인 것’이다. 이처럼 개인은 ‘완전과 불완전’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간극(Estrangement)과 발화(Parole)로, 다시 이행으로 이어진다. 거기까지 논하지 않겠지만 간극을 통해서만 발화될 수 있고 간극을 통해서 이행될 수 있다는 것만 말해두겠다.
중력이 있기에 무엇을 세우고 쌓는 것이 정의될 수 있는 법. 중력이 없으면 건축은 그 존재 이유도 없어지며 정의조차 할 수 없는 개념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력과 역학을 빼보자. 그럼 더 이상 건축이 아니지 않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건축’은 엄연히 3차원 계 내의 개념이다. 그런 관점에서는 틀린 것이다. 하지만 그 밖에서는 맞은 게 된다. 다시 말해, 차원을 확장 또는 축소 시 기존 건축의 관점에서 건축이 아닌 게 건축일 수도 있다. 이로써 ‘어쩌란 말이냐‘는 질문에 ‘지금처럼 건축이 아닌 건축을 건축하면 된다’라는 대답이 가능해진다.
종합해서 봤을 때, 더 이상 건축은 콘크리트와 같은 재료로 구성된 점-선-면 형태가 아니 될 것이다. 파동이 될 수도 있고, 문학이 될 수도 있고, 화학의 영역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3차원으로 이행한 결과를 평면도와 단면도라 했을 때, 도면 또한 점-선-면의 구성이 아닐 수 있으며 이에 따른 새 작도법 또한 도입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설령 건축과 관련이 없다고 경험 가능한 세계가 말할지라도. 그렇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하면 된다.
끝으로 개인이 지닌 소우주는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어 새로운 것을 쌓고 세울 수 있는, 즉 건축하기 제일 좋은 환경이자 ‘건축’ 그 자체라는 것을 재차 강조해서 말하고 싶다. 자, 약속대로 이 모든 게 이해됐다면 말끔하게 잊으면 된다. 부족한 게 많고 볼품없던 긴 이야기들을 잊도록 하자.
5. 부록: 건축적 마리아주(Mariage)
바쁘디 바쁜 현대인들이 빠르고 재밌게 건축을 즐길 수 있도록 특별히 선별한 10곳과 이곳을 더욱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비밀 레서피를 공유하고자 한다. 시간 뺏긴다고 생각하지 말고, 속는 셈 치고 한번 경험해 보길 강요해본다. 혹시 누가 아는가?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목적으로 온 다른 누군가와 만나 친구가 될지. 그럴 때는 이렇게 물어보도록 하자. ‘혹시… VISLA를 좋아하세요?’
-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서울시 중구 을지로 281)
크레프트베르크(Kraftwerk)의 [Tour de France]와 함께한다면, 단언컨데 인생을 바꿀 가장 가슴 벅찬 순간으로 기억될 예정.
-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경기도 파주시 문발로 253)
천천히 혼자 내부와 외부를 산책한다는 느낌으로 거늘다보면, 인스타그램 속 ‘셀피맛집’이 알바로 시자(Alvaro Siza)의 건축으로 변할 예정.
- 창덕궁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99)
이난영의 ‘과거몽’을 들으면서 멀리서 눈물 한 바가지 흘리다 보면, 두보가 노래한 인생무상이 아른거릴 예정.
- 공간사옥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83)
앞에서 차가운 콜라 한잔 벌컥 마시다 보면, 김수근이 제법 손에 닿을 듯 말듯 머리 속이 간지러울 예정.
- 리움 미술관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전시보다 공간을 중점으로 경험해 본다면, 거장 3명의 손맛에 한번 놀라고 섬세한 디테일에 두번 놀라서 멀미약이 필요할 예정.
- 터방내 (서울시 동작구 흑석로 101-7)
시간이 빚은 공간과 음료들에 자신을 던지다 보면, ‘뉴트로’라 불리는 이 단어는 뻘쭘해질 예정.
- 종묘 (서울시 종로구 종로 157)
림지훈의 [Organ, Orgasm]을 곁들인다면, ‘빈자의 미학’을 몸과 마음으로 배워볼 예정.
- Cosmo 40 (인천광역시 서구 장고개로231번길 9)
공간을 구석구석 뜯어보며 베르크하인(Berghain)을 상상해 본다면, 레이브를 위해 재생될 수 있는 공간을 방방곡곡 물색하게 될 예정.
- 이촌 한강공원 (서울시 용산구 이촌로72번길 62)
‘뿌리벤치’에 누워서 에리카 바두(Erykah Badu)의 [Mama’s Gun]을 듣다보면, 서울이 그간 보여주지 않았던 도시 건축을 맛볼 수 있을 예정.
- QUEST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99-14)
사랑방으로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방문 권유에 응한다면, 일렁이는 역사의 일부가 될 예정.
이미지 출처 | Archdai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