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동안 얼어있던 땅이 봄 공기와 햇살로 부드러워지면 만물은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꽃들은 봄의 정령이 찾아왔음을 노래한다. 이처럼 매년 찾아오는 풍경이지만 우리의 짧은 추억은 계절의 미시감만을 고조시키기 충분한데, 이별과 만남을 속절 없이 반복하는 사이 꽃은 시들고 꽃내음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최근 현대 건축계가 이러했다. 파격적인 개성은 스타일 또는 양식으로 자리 잡기도 전에 서서히 쇠퇴하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하지만 이러한 흥망성쇠의 굴레와 무관하게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건축을 일군 어느 건축가가 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쌓은 성취와 공로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올해로 53회를 맞은 2023 프리츠커 상(The Pritzker Architecture Prize)의 영예는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에게 돌아갔다. 그의 이름 ‘데이비드 치퍼필드’와 그가 설계한 ‘아모레 퍼시픽 사옥’은 건축에 관심이 없어도 모를 수가 없을 만큼 우리에게 익숙할 것. 최근 몇 년간 공공 건축과 재생이 뜨거워지며 로컬 건축가들이 주목받는 분위기 속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건축가의 이번 프리츠커 수상이 마냥 이변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1953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데본(Devon)의 시골 농장에서 자란 치퍼필드는 실내 건축 장식업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일찍이 받아 킹스턴 예술학교(Kingston School of Art)에 진학해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 건축협회 건축학교(이하: AA School)에서 본격적으로 건축을 익힌 그는, 졸업 후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 등 하이테크 건축을 이끈 건축가들을 사사하며 실무를 익혔을 뿐만 아니라 당대 건축가들과 함께 9H 갤러리(9H Gallery)라는 모임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실무 경험을 쌓은 그는 1985년 비로소 자신의 설계 사무소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의 런던 부티크를 디자인하게 된 그는 런던 패션계를 넘어 점차 해외의 이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처럼 그가 처음 주목받게 된 것은 사실 건축이 아닌 인테리어에서 두각을 보이면서였다. 이후 1989년 영국 옥스퍼드셔(Oxfordshire)에 위치한 조정 박물관(River and Rowing Museum)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설계하며 얻어진 국제적인 명성은 현재까지도 진행형이다.
‘과도한 상업화, 과도한 디자인, 과도한 과정의 시대에 치퍼필드는 항상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배심원의 평가처럼 과잉과 결여가 지배적인 현대 건축가들과는 대조적인 그. 평범한 것들의 특별한 순간을 포착하는 작업 방식은 여타 현대 건축가들에 비하면 제법 얌전한 편이다. 그의 작품은 조형적으로 단순하고 간결하며, 구조적 진실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으며, 사회적 문화적 지리적 맥락을 유기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자연스러운 맥락을 위해 자신이 돋보일 것을 내려놓되, 단지 몇 걸음만 뒤로 했기에 그의 작품은 결코 무색무취의 몰개성하지 않다. 오히려 정교하고 치밀하게 설계된 마감 디테일과 공간 언어를 자세히 보고 있자면 압도되기 충분하다.
개성의 과잉 주장으로 사람들에게 괴리감을 주는 건축물부터 동시대에만 유효한 디자인으로 짧은 감흥을 주는 건축물까지, 주변만 돌아봐도 우릴 포옹할 건축이 없다는 사실은 직관적으로도 알 수 있는 법. 이처럼 과잉과 결여가 지배하고 있는 현재의 관점에서 치퍼필드의 작품이 제법 밋밋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모레 퍼시픽 사옥’은 어떤가? 한국 ‘달항아리’의 절제된 아름다움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위 작품은 1층부터 3층까지 과감하게 비워내 실내 광장을 조성하고 이를 도시에 개방하며 상업 건축이 지닌 공공성을 극대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면모는 복잡하고 격변하는 용산구를 포용하되 그 안에 고요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도 그가 밋밋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한편, 대개 많은 건축가들과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출신 학교와 스튜디오의 영향을 많이 받기 마련이지만 치퍼필드는 조금 달랐다. 실험적이고 이론을 기반한 ‘AA School’의 학풍을 비롯해 그가 사사한 노만 포스터나 리처드 로저스의 건축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건축은 이론보다 실질적인 건축 행위에 무게가 실려있고, 동시대 최전선이 아닌 현재와 과거 그 어디를 향해 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신 베를린 박물관(Neues Museum) 리노베이션 작업과 이를 두고 ‘새로운 해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국제 양식의 이 랜드마크 건축물을 공손히 수리하는 것’이라 말한 그의 설명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여타 건축가들로부터 영향받았음을 말하는 데 두려움이 없다. 그가 안도 다다오(Ando Tadao)와 알바로 시자(Alvaro Siza)와 같이 모더니즘 정신을 각 지역에 맞게 계승한 ‘보편적 비판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그의 작업 기저에 깔린 존중은 단순한 차원이 아닌 건축과 사회, 건축가와 도시 구성원 간의 관계를 재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표적으로 ‘바르셀로나 정의 도시(Ciutat de la Justíia)’나 ‘헵워스 갤러리(Hepworth Gallery)’에서 확인할 수 있듯 공공이든 민간이든 기능, 형태, 도시적 맥락 등 다양한 요소들을 골고루 고려하며 사회 구성원 간의 공존을 모색하였다.
4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100여 개의 작품에 깃든 그의 절제미와 정직함, 그리고 중용과 존중의 미덕은 이번 프리츠커 수상 소감에서도 드러난다. “건축의 본질과 의미, 기후변화와 사회적 불평이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건축가로서 계속 관심을 기울이라는 격려 받아들인다”는 말은 비단 건축적으로만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닐 터인데, 그렇다면 어김 없이 찾아온 봄처럼 프리츠커 시즌이 돌아오며 왁자지껄 시끄러운 건축계와 무관하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무게는 우리에게 사시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가 평양냉면에 환호하고 단색화에 열광했던 이유를 돌이켜 보면, 균형을 이룬 중용의 미덕에서 비롯된 정신적 안정감 때문일 것이다. 이와 달리 피상적인 이미지만 답습한 나머지 균형과 절제가 배제된 채 구성 요소들이 폭주하고 있기에 소위 ‘미니멀’하다 불리는 동시대 디자인들이 우리에게 자극적으로만 다가온 것은 아닐지. 자신이 돋보이고 싶은 조급함과 ‘왜?’에 질문하지 못한 채 이미지의 잔상만 쫓는 가벼움으로 인해 도시 구성원에 대한 배려와 요소 간의 균형은 완전히 배제되었고, 결과적으로 시각적으로는 단순할지언정 우리의 감각 전체와 정신이 피로하기만 하다.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것에 길든 현재,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이번 수상이 신기루라 여긴 ‘타임리스’의 가치가 실재함을 증명하는 일대 사건은 아닐까? ‘타임리스’라 불리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평범함에 대한 영예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더니즘은 아직 살아있고, 우리와 맞닿아 소통할 수 있는 모더니즘이 비로소 도래했음을 감각할 필요가 있다. 평범함이 일종의 죄악으로까지 여겨지는 요즘, 영국의 어느 건축가가 이룩한 평범함의 미학과 이를 향한 진중함이 주는 울림은 깊고 오래간다. 아름다움과 아찔함을 선사하는 제철 절경도 좋지만, 독야청청 소나무가 다시 각광받아야 할 이유를 찾은 것만 같은 지금, 앞으로 우리는 이미지의 권력에 어찌 대응할지에 대해 신속하게 생각해보자.
The Pritzker Architecture Prize 공식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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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The Pritzker Architecture Pr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