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속 숨은 보물 5

만개했던 벚꽃이 언제 피었냐는 듯 거짓말처럼 지는 4월 중순에 접어들고 나면 매해 의식처럼 행하는 일이 있다. 바로 한국 영화제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국제영화제의 상영작을 찾아보고 나만의 스케줄을 만들어 예매하는 일. 올해 25회를 맞이한 전주국제영화제는 43개국에서 총 232편의 작품을 선정하여 작년과 동일한 슬로건 ‘우리는 늘 선을 넘지(Beyond the Frame)’를 내걸 예정이다. 행사까지 보름도 남지 않은 지금, 어느 정도 예매는 끝났겠으나 영화제의 묘미는 영화제의 마지막 날까지 영화를 취소하고 다시 예매하는 등 끝없이 바뀌는 스케줄이 아닐지. 후회 없는 영화제 경험을 위해 올해의 슬로건에 걸맞도록 정해진 액자를 넘어 새롭거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좇고 수색하는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의 리스트가 다음 주말 계획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1. 양양

‘벽장 속의 해골(skeleton in the closet)’이라는 영어 속담이 있다. 누구나 비밀이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본래 뜻은 모든 집의 벽장 속에는 숨겨둔 해골, 즉 어느 가족이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다는 것이다. “양양”은 숨겨졌던 가족의 비밀을 발견하며 가족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혹은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가는 감독의 여정을 담은 작품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족은 아버지가 권력을 갖는 지배구조를 존속시키거나 그러한 사회적 규범과 전통에 어긋난 이들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묵인하곤 한다. “양양”은 자신에게 생전 들어보지 못했던 고모가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그 고모가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여 가족 내에서 절대 거론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한다. 이미 숨을 거둔 고모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옛날 사진, 가족과의 인터뷰 등을 기반으로 고모의 지난 인생에 대한 작은 퍼즐 조각을 모아간다. 흔적 없이 감춰진 이야기를 발굴하고 이에 대답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세상이 기억해주지 않는 규격 외 이야기에 주목하는 시선을 갖추게 될 것이다.


2. 라이카 시네마

영화제를 방문하면 영화 혹은 영화 산업을 주요 소재로 다루는 작품 하나 정도는 꼭 시청하려고 한다. 본인과 같은 취미와 영화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는 다른 방문객들과 함께 어두운 극장 안에서 그러한 영화를 감상하면, 일말의 동지애와 영화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달까. “라이카 시네마”는 이 목적에 완벽하게 걸맞은 작품이다. 핀란드의 남부에 있는 카르킬라(Karkilla)는 위키피디아 페이지의 3가지 여담 항목에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Aki Kaurismäki)가 거주민이라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다.

언젠가 카우리스마키는 “영화관을 짓는 일을 나무를 심는 일과 같다”는 말을 남긴 바 있다. 그렇게 카우리스마키는 카르킬라에 자신의 나무를 심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시인 겸 작가 미카 라티(Mika Lätti)와 함께 오래된 주조 공장 건물에 카르킬라의 첫 영화관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카우리스마키와 리타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협업하여 다양한 금속과 나무, 중고 가구 등을 재활용하고 리모델링하여 아름다운 자연 한가운데 그들만의 ‘키노 라이카(Kino Laika)’를 만들어간다. “라이카 시네마”는 영화가 지역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포착한 다큐멘터리로, 코로나 팬데믹 악재로 인해 실제 영화 극장이 줄줄이 폐쇄되거나 다른 공간으로 전환된 시점에서 이러한 프로젝트는 영화 문화를 사랑하는 관객에게 더더욱 의미 있는 시도로 느껴질 것이다. 공간의 일차적 용도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문화적 위력과 공동체적인 가치를 상기시키는 작품으로, 영화제와 극장을 사랑하는 이라면 꼭 시청하면 좋을 영화. 짐 자무쉬(Jim Jarmusch) 등 반가운 얼굴과의 만남도 놓치지 말자.


3. 정의되지 않는 것들

시각 장애인에 대한 영화를 제작하던 편집 감독 에바는 함께 작업하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소중한 친구이자 동료의 죽음을 경험한 에바에게 편집 과정은 그를 기리고 추모하는 계기가 되며, 영화 편집만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야기와 고민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본업을 이어가며 영화 편집을 통해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지만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장면을 담는 매체로서의 영화는 비물질적인 가치를 본연 의미대로 반영하고 전달할 수 있을까? 또한 그러한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그러한 과정에서 촬영물과 결과물 사이에서 호흡과 리듬을 조절하는 편집은 어떻게 그러한 의미를 증폭할 수 있을까? 본 다큐멘터리는 제목 그대로 정의되지 않는 것을 영화에 담고자 했으리라 예상된다. “정의되지 않는 것들”은 영화의 매체적 특성을 새로운 맥락과 시각에서 바라볼 계기가 될 테다.


4. 약칭: 연쇄살인마

작년에도 6년 만의 신작으로 전주를 찾았던 아다치 마사오(Masao Adachi) 감독의 “약칭: 연쇄살인마”는 기념비적인 정치적 풍경 영화로서 그를 일본 언더그라운드 영화계의 최전선에 진입하게 한 작품이다. 영화는 1969년 당시 도쿄, 교토, 하코다테, 나고야에서 무차별 총기 살인사건을 일으킨 19세 청년 나가야마 노리오의 당시 행적과 돌아다닌 장소를 담는다. 마사오 감독은 청년이 태어나고 자란 곳부터 시작해 그가 거쳐 간 풍경을 나열하며 사건을 철저히 물질적 환경의 차원에서 재구성하고자 한다. 살인자의 신상에 대한 자세한 사항이나 이름, 별명 등은 언급되지 않고 오직 가난한 농업 노동자 가정 출신이었던 그가 상경 후 도시에서 목도했을 법한 풍경만을 비출 뿐이다. 실제로 마사오 감독은 “약칭: 연쇄살인마”에 대해 말하며 눈앞에 펼쳐진 도시 풍경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그림엽서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60년대 후반 빠른 속도의 경제 성장을 거친 도쿄는 엽서 속 풍경처럼 멈춰있고 생동감이 없는, 모종의 압박감을 주는 풍경으로 가득하다는 것. 급속하게 진행된 경제 성장과 개발로 동질화되는 도시의 경관을 비가시적 권력으로 파악하는 일본 영화계의 풍경론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마사오 감독은 이러한 풍경의 한가운데 있었을 청년을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이 사건을 이해하는 최적의 방법임을 암시한다. 이번 상영은 일본 영화 평론가이자 연구자 히라사와 고의 강연과 함께 병행되니, 본 기회를 통해 아다치 마사오의 작품 세계와 풍경론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 


5. 페페

1980년대 코카인 거래로 주요 마약 유통망을 평정하고 막대한 부와 권력을 쌓았던 콜롬비아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Pablo Escobar)는 개인 별장에 동물원을 만들어 하마와 코끼리, 기린 등을 키웠다. 에스코바르가 사살된 뒤 동물원으로 팔린 다른 동물들과 달리 하마들은 인근 강과 습지에 자유롭게 풀려나 특유의 번식력으로 생태계를 교란하고 주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등 마약왕의 일전 펫 동물답게 무시무시한 장악력을 보여줬고, 콜롬비아 정부는 하마 개체 수를 조절하기 위해 체계적인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언뜻 픽션보다 더 이상한 이 현실 하마 이야기는 “페페”의 거시적인 배경으로 작용한다. 페페는 2009년 실제로 콜롬비아에서 독일 전문 사냥꾼에 의해 사살된 수컷 하마의 별명으로, 에스코바르가 살아있던 당시 그를 반대했던 준군사 조직의 이름 로스 페페스(Los Pepes)에서 따왔다. 작품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페페의 보이스오버에서 시작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 정치적 이슈들과 식민지로서의 역사를 다양한 문화적 레퍼런스와 엮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앞으로 하나의 대륙으로서 나아갈 미래에 대한 감독만의 비전을 제시한다. 페페가 직접 회고하는 본인 인생에 대한 일종의 사변물(speculative fiction)로서 장르와 형식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도전적인 작품 “페페”를 놓치지 말길.


소개한 영화 밖에도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Manoel de Oliveira)의 매혹적인 여성 수난극 “아브라함 계곡”이나 미국 구조주의 영화의 개척자로 알려진 어니 기어(Ernie Gehr)의 작품도 찾아볼 수 있으니, 체력과 시간 그리고 추후 개봉 가능성을 고려하여 자신만의 최적의 관람 일정을 완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외에도 차이밍량(Tsai Ming Liang) 감독의 “행자” 연작 시리즈도 상영하는 만큼 영화제 측에서는 감독과 이강생 배우가 직접 심사하는 ‘행자 퍼포먼스 콘테스트’, 즉 영화의 거리에서 느리게 걷는 대회도 개최하는 등 다양한 이벤트가 준비된 이번 전주국제영화제, 자세한 내용과 전체 상영작 목록은 아래 웹사이트를 통해 직접 확인해 보도록 하자.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웹사이트


이미지 출처 | J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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