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nchiko를 둘러싼 이야기와 로스트 미디어 발굴의 두 얼굴

영국의 록 밴드 판치코(Panchiko)를 둘러싼 이야기는 흥미롭다. 밴드의 시작과 해체, 긴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한 인터넷 사용자로부터 시작된 발굴과 재결합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는 음악 애호가를 흥분시킬 만하다. 그러나 만화 같은 판치코의 여정은 음모론을 낳기도 했거니와, 로스트 미디어(Lost Media)[1]를 발굴하는 행위에 대해 재고해 볼만한 질문들을 던지기도 한다.

1997년, 영국 노팅엄의 한 작은 마을에서 결성된 밴드 판치코는 마음 맞는 학교 친구들끼리 만든 그들만의 놀이터였다. 네 명의 친구는 3년 남짓의 시간 동안 작은 공연장에서 지인을 관객 삼아 몇 번의 공연을 했고, 집 지하실에서 데모를 녹음해 가며 EP를 한 장 완성했다. 완성된 EP를 음반사에 돌려보았지만, 연락이 오는 곳은 없었고, 4명의 학교 친구는 성인이 되어 각자 갈 길을 갔다. 그로부터 약 20년 뒤, 밴드의 보컬과 기타를 맡았던 오웨인 데이비스(Owain Davies)는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쉽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밴드의 해체도 누구는 대학에 가고 누구는 일을 시작하며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었죠.

그렇게 소량 제작한 30장가량의 CD는 음반사에 보내지거나 가까운 친구들에게 선물하며 마무리되었고, 밴드의 멤버들도 가끔 이사를 할 때에나 한 번씩 꺼내 보며 추억을 회상하는 물건이 되었다. 16년이 흐른 뒤 한 인터넷 사용자가 CD의 존재를 회자하기 전까지는.


2016년 7월 21일, 미국의 이미지 보드 사이트 포첸(4chan)의 음악 게시판 뮤(/mu/)에 익명의 사용자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린다.

2016년 7월 21일 4chan /mu/ Thread

익명의 사용자는 자신이 중고 가게에서 구한 판치코의 CD에 대한 정보를 묻고자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그러나 밴드의 정보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CD에서 찾을 수 있는 정보가 오직 발매 연도와 밴드 멤버들의 성을 제외한 이름만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또한 CD의 상태가 좋지 않아 잡음이 많이 낀 상태였기 때문에 이것이 의도된 소리인지 아닌지를 두고도 논쟁이 벌어졌다. 잡음의 이유는 디스크 부패라는 현상 때문이었다. CD는 일반적으로 반영구적 매체로 알려져 있지만, CD-R(Compact Disc–Recordable)의 경우에는 디스크 부패가 일어날 수 있다. CD-R은 레이저로 CD에 도포된 화학 염료를 태워 정보를 기록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여기서 도포된 화학 염료가 자외선이나 높은 습도에 장시간 노출될 경우, 염료가 변형되며 디스크 부패가 일어난다. 판치코의 CD 역시 긴 시간 동안 제대로 보관되어 있지 않았기에 부패가 일어난 것이다.

Disc Rot

하지만 열화된 음원임에도 많은 이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로부터 약 3년이 지나, 커뮤니티에서는 다시 판치코의 멤버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다만 정보가 매우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정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CD의 바코드 정보로 CD가 판매된 지역을 찾아내었고, 페이스북 등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노팅엄에 살고 있는 사람 중 밴드 멤버들의 이름을 가진 계정에 마구잡이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밴드 멤버인 오웨인을 찾게 된 것은 그로부터 3개월 뒤이다. 

오웨인이 판치코의 이전 멤버였던 것을 확인한 후, 그를 통해 다른 밴드 멤버에게도 연락할 수 있게 되었기에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판치코의 기타와 키보드를 담당했던, 현재는 음향 엔지니어로 활동하고 있었던 엔디 라이트(Andy Wright)가 조금 더 상태가 괜찮은 CD를 지인으로부터 구해 리마스터링 과정을 거친 덕분에, 사람들은 잡음을 제거한 상태의 음원을 들어볼 수 있게 된다.


[D>E>A>T>H>M>E>T>A>L]은 2020년 2월 16일 밴드캠프를 통해 공개되었다. 앨범에는 기존 CD의 곡들과 함께 몇몇 미공개 곡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곡들은 슈게이징(Shoegazing)과 드림 팝(Dream Pop)의 요소가 아름답게 담겨 있는 수작이었다. “Kicking Cars”, “Laputa”와 같은 곡에서는 라디오헤드(Radiohead)의 영향이 물씬 묻어 나오고, 무엇보다 멜랑꼴리한 소년미를 담은 “D>E>A>T>H>M>E>T>A>L”의 마지막 멜로디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판치코의 음악은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고, 밴드의 기존 드러머 존(John)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멤버들이 재결합하며 노팅엄에서 20년 만의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만화 같은 이야기에 음모를 제기하는 사람 또한 있었다. 한 인터넷 동인잡지에서 <Panchiko: Real or Fake?>의 제목으로 게시된 글에서는 판치코가 교묘한 마케팅의 수단으로 로스트 미디어를 자처해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닌지 의문을 표하고 있다. 과거에도 로스트 미디어의 아이디어를 악의적으로 이용해 스토리텔링을 통한 마케팅이 이루어졌던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글 작성자는 판치코의 음반 발굴부터 리마스터링, 그리고 홍보 및 음반 제작까지의 과정이 너무 빠르고 부드럽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다. 

판치코는 이런 의혹을 여러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해명했는데, 이 과정에는 판치코를 찾는 데 일조한 인터넷 사용자들의 도움 또한 있었다. 결정적인 단서는 2000년, 판치코가 여러 음반사에 자신들의 EP를 돌렸을 당시 관심을 보였던 유일한 레코드 레이블 피어스판다(Fierce Panda)의 설립자가 자신의 노트에 메모해 둔 기록을 공개한 것이었다.

Fierce Panda의 설립자 Simon Williams의 노트. 두 번째 문단에 판치코에 관한 메모와 우측에 메모 일자가 작성되어 있다.

이로써 판치코에 대한 음모론은 일단락되었다. 판치코는 2020년대 들어 로스트 미디어 발굴 사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가 되었으며, 그들은 제2의 음악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판치코의 이야기는 음악 애호가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좋은 음악에 대한 애정이 창작자에까지 닿아 기적적으로 성사된 멋진 무용담이 되었지만, 로스트 미디어의 발굴이 애호가와 창작자 모두에게 득이 되는 것이 아닌 경우 또한 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삭제된 비디오, 영화, 이미지 등의 미디어를 뜻하는 로스트 미디어는 단순 온라인상의 자료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에서 만들어진 무성 영화 중 약 70%가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자료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로스트 미디어의 유명 사례로 남아있다. 이는 자료가 완전히 유실된 경우이지만, 매우 제한적인 자료로 남아있거나 소수 사람의 기억으로만 확인되는 경우도 로스트 미디어라 칭할 수 있다. 

로스트 미디어를 발굴하는 과정은 역사나 문화에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고고학자의 작업과는 다르다. 그저 인터넷이나 자료실의 정보를 뒤져 자료의 흔적을 쫓아 따라갈 뿐이다. 인터넷 시대의 로스트 미디어는 해당 매체에 향수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애정을 담아 찾아 나서거나,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 재밌는 취미의 일환으로 소비되곤 한다.

그러나 로스트 미디어를 찾는 과정, 혹은 반대로, 미디어를 잊혀지지 못 하게 하는 행위는 종종 해적질을 포함한다. 인터넷의 올라온 자료는 쉽게 도용되고, 악의를 지닌 채로 편집되기도 한다. 인터넷 문화의 발달은 시대와 지역적 한계를 건너 디깅의 가능성을 무한히 늘렸다. 미국국립기록보관소보다 인터넷 아카이브(Internet Archive)의 자료가 방대한 세상에서 디깅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어낼 수 있다는 심리가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여전히 디깅, 혹은 로스트 미디어의 발굴은 인터넷 문화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난 9월 6일 파란노을이 라이브 공연 잠정 중단을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 알리며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겼다.

알려지길 싫어하는 어느 사람의 작업물들이 백업되어 모두에게 멋대로 낭만화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해당 문장에서 언급되는 작업물은 나의머리카락뭉치의 작업물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자신의 음악을 전부 삭제하고 사라진 그의 음악을 한 청취자가 백업해 두었고, 이를 외부로 공유한 것. 

판치코 역시, [D>E>A>T>H>M>E>T>A>L]의 음악을 만들었을 때, 청자를 두고 제작한 것은 아니었고, 오웨인은 한 때, 이 음악이 인터넷에 올려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전한다. 다만 긴 시간이 흘러 많은 인터넷 사용자가 자신들의 음악을 좋아해 준 것에 감동해 리마스터링된 음원을 정식 발매하기로 한 것이다.

판치코와 나의머리카락뭉치는 로스트 미디어의 낭만적 발굴 사례와, 로스트 미디어를 자처하였지만, 실패한 사례로 대조된다. 인터넷 문화의 확산은 아주 많은 것을 기록하며 기억에서 잊히기를 거부한다. 인터넷으로부터 숨을 곳은 없다. 이제 세상에 나온다는 것은 곧 인터넷에 기록된다는 뜻과 동일하다.

어쩌면 판치코의 사례는 로스트 미디어 발굴의 마지막 낭만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태안여자중학교 밴드부 홍보 영상이 바이럴이 되어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하는 오늘날, 음원을 인터넷에 올리지 않는 선택지는 없다. 

판치코는 인터넷 문화의 태동기에서 이를 가까스로 벗어난 사례로, 역설적으로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에게 다시 기억되었다. 덕분에 훌륭한 음악을 조금 더 즐기게 되었지만, 로스트 미디어 발굴의 가능성이 있는 곳은 여전히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 있다. 

아직 인터넷에 점령되지 않은 오프라인 공간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주변의 작은 공연부터 시작하자. 친구의 밴드 공연에 참석하자. 진정 잊히는 때는 기억하기를 멈출 때이다. 우리는 판치코 신화의 시작이 영국 노팅엄의 한 중고 매장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미지 출처 │4chan, Reddit, Wikipedia, Last.fm

[1]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삭제된 비디오, 영화, 이미지 등의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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