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전자음악 콜렉티브 ‘박쥐단지’는 서울 전자음악 신(Scene)에서 독립적인 빛을 발하고 있는 여덟 명의 전자음악 뮤지션 이이언(eAeon), 차(Cha, 차종환), 제이클레프(Jclef), 메사니(Mesani), 김아일(Qim Isle), 김도언(Kim Doeon), 김한주(Kim Hanjoo), 휘(HWI)가 의기투합한 창작 집단이다. 이들은 마치 밤의 박쥐들처럼 도시의 어둠, 밤을 배경 삼아 각자 고유의 주파수로 소통하며 새로운 음악 지형을 탐험하고자 한다. 또한 박쥐가 어둠 속에서도 정확히 소통하고 군집을 이루는 것처럼, 박쥐단지의 멤버들 또한 각자의 영역에서 또렷한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로 모일 때 더욱 짙은 색채를 발휘한다. 그들의 첫 번째 컴필레이션 [Bat Apt.]가 그러하다. ‘89BPM’, ‘Eb 키’라는 공통된 요소로 제작된 여덟 개의 곡은 결코 단편적이지 않으며, 끈끈한 유기적 연결성을 추구하여 군집체로의 강렬한 인상을 전한다.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
휘: 우리는 ‘박쥐단지’라는 음악가 집단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꾸준히 좋은 음악을 만드는 일이 평생의 목표라는 공통점이 있다. 작년까지는 멤버를 충원하며 활동 계획을 구상하는 시간을 보냈고, 올해 컴필레이션 앨범 Vol. 0 [Bat Apt.] 발매를 시작으로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구성원은 김도언, 김아일, 김한주, 메사니, 이이언, 제이클레프, 차 그리고 나까지 여덟 명이지만, 내년부터는 새로운 멤버를 천천히 영입하며 활동 반경을 키워가자는 논의를 나누고 있다.
각 멤버가 박쥐단지에 참여하게 된 과정과 결성된 배경이 궁금하다.
메사니: 나는 지방에서 외로이 지내고 있었는데, 감사하게도 21년도 2월에 차종환이 먼저 찾아줬다. 친분을 유지하며 지내다가 2년 전 내가 서울로 이사 온 후, 차종환이 이이언과 함께 크루를 제안해서 이이언과 만나 어떤 태도로 이 모임을 이끌어가야 할지, 또 어떤 것들을 좇아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며 시작했다. 그렇게 이름 없는 모임이 몇 개월간 지속되며 그동안 천천히 정체성과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멤버를 찾고 있었는데, 이이언이 김한주와 김도언을 섭외하자는 의견을 냈고 머지않아 두 뮤지션이 합류하며 이 단체의 윤곽이 드러났다. 재밌는 사실은 그다음 김아일과 제이클레프를 섭외하기 위해 김한주와 김도언은 ‘무료 가상악기 추천 모임’이라는 명목으로 모임을 만들고 그 둘을 섭외했다. 쉽사리 모시기 어려운 두 사람이라서. 그리고 곧 우리의 2기 리더인 다재다능한 휘가 김한주의 추천으로 합류하게 됐고, 그제야 이 모임의 이름도 정할 수 있었다. 이름하여 ‘박쥐단지’.
박쥐단지라는 하나의 그룹으로 기능할 때 여덟 명의 멤버가 맡은 롤이 있나?
김아일: 멤버 전원이 조금씩 분담하려고 노력하지만, 아무래도 1기, 2기 리더인 이이언, 휘가 기획, 소통, 각종 프로모션, 재무 등 가장 많은 실무를 맡고 있다. 메사니는 모든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보태고 있고, 회의록을 작성하는 등의 서기 롤도 맡고 있다. 나는 피지컬 판매 관련한 일을 핸들하고 있고, 차종환은 재고를 관리하는 롤을 수행 중이다. 제이클레프와 김도언은 앨범의 트랙리스트 구성 등 앨범 발매 과정에서 크게 힘을 보탰고, 김한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주요한 조언을 해주는 편이다. 사실 김한주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김도언과 함께 귀염뽀짝을 메인 롤로 맡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박쥐단지’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박쥐라는 존재가 당신들의 음악과 어떤 연관성을 내포하고 있는지?
김한주: 멤버들 인상이 여러 의미에서 밝은 편은 아니다 보니, 그런 점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캐릭터로서 ‘박쥐’를, 거점 중심형의 음악가들이 한 곳에 밀집했다는 점에서 ‘단지’를 붙이게 됐다. 넓은 시야를 확보하진 못하지만, 우리만의 주파수로 커뮤니티를 형성하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박쥐를 모티브로 한 박쥐단지에게 서울의 밤은 어떤 의미인가?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닌 특징이 박쥐단지의 소리와 감성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알려달라.
김도언: 밤에 막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리듬, 지하철이 철로와 닿으며 생성되는 무거운 리듬, 네온사인과 신호등이 깜빡이며 밝히는 시각적 리듬 등 다양한 리듬이 한데 발생하는 곳이 서울의 밤인 것 같다. 박쥐단지의 음악은 이러한 밤의 리듬과 어우러지기도 하고 분절되기도 하며, 다양하게 상호작용한다.
첫 번째 프로젝트인 [Bat Apt.] 앨범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도 궁금하다. 어떤 방식으로 협업하고 아이디어를 교환했나?
이이언: 많은 의견 교환과 회의를 통해 앨범의 콘셉트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 집중적으로 고민했던 것 같다. 스타일이나 작업 방식에 독특한 제약을 두는 등의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의견이 많이 나왔지만, 이번에는 박쥐단지의 첫 번째 앨범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서 각자 멤버가 자기소개를 잘할 수 있는 트랙을 만드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메사니: 이이언의 말대로 각자 가장 잘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게 우선순위였다. 또한 컴필레이션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교집합이 필요하다는 걸 다들 느꼈기에 각자의 작업에 무리가 안 가는 선에서 템포와 조성(89BPM, Eb)을 맞추기로 했다. 작품의 탄생 과정은 늘 그렇듯 순탄치만은 않았다. 발매일이 예상보다 늦춰진 것도 있지만, 그로 인해 조금 더 정성을 쏟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작업 과정에서 멤버끼리 중간 점검을 하기로 했는데, 세 차례 정도 서로의 미완성된 곡을 공유하는 과정은 서로에게 꽤 많은 동기부여가 됐다.
특히 앨범의 두 번째 곡 “BAT APT.”는 이이언, 김아일, 제이클레프 이렇게 세 명이 함께 이름을 올렸는데, 이 트랙의 협업 과정은 어땠나?
제이클레프: “BAT APT.”는 이언이 89BPM, 8/9 박자, Eb 키의 루프 몇 개를 보내준 게 시작이었다. 그중 셋이 함께 고른 “9over8”이라는 제목의 루프가 완성되었고 후에 “BAT APT.”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지. 트랙의 작·편곡을 이이언이 먼저 완성했고, 완성 전까지 셋이서 곡의 테마, 작사에 관한 아이디어를 모으는 기간이 가장 길었다. 개인적으로 가사의 첫마디조차 떼기 어려워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김아일과 이이언이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어서 원만하게 완성될 수 있었다.
각 멤버의 개성과 스타일이 다르다 보니, 곡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상호 간의 대화가 중요했을 것 같다. 서로 간에 어떤 대화와 피드백이 오갔나?
차: 중간중간 단톡에서 작업 중이던 음원을 몇 번 공유한 적은 있지만, 곡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음악적인 대화나 피드백이 오간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곡은 앨범 작업 중반부에 방향이 크게 바뀐 적도 있다. 통일된 조성과 BPM(Eb, 89)만을 최소한의 규칙으로 두고 모두가 개인적인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었다. 나는 발매 이후에 진행한 인터뷰에서 멤버 각자의 작업 과정을 처음 들었는데 감명을 참 많이 받았다. ‘박쥐단지’라는 음악적 자아를 미리 예측하지 않고, 여덟 마리의 박쥐가 한 단지에 모여 자신만의 고유한 주파수와 진동으로 이웃과 첫인사를 나누는 느낌도 들어서 재밌었다. 그리고 앨범 제작 후반부에 김도언과 제이클레프가 트랙 순서를 정해주었는데, 이 순서가 정말 큰 몫을 한 것 같다. 다른 순서는 상상이 안 된다.
개인 창작의 순수함을 유지하면서도 집단의 색채를 살리기도 했다. 비결이 있다면?
김한주: 최소한의 규칙만 잘 합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번 앨범의 경우, BPM과 조성에 대한 설정 외에는 자유로운 창작이 허용되는 상황이었는데, 음악적으로 봤을 때는 하드한 설정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규칙만 지킨다면 뭐든 해도 된다는 점에서 구성원의 색채를 표현할 기회가 주어진 게 아닌가 싶다. 흔히 이야기하는 유기성이란 것은 별것 아니다. 공동으로 합의한 작은 규칙만 잘 지킨다면.
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음악 지상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용어에 관하여 자세한 설명을 부탁한다.
이이언: 말 그대로 ‘음악’에 최우선순위를 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다. 많은 뮤지션에게 이미 당연한 태도일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 거대한 ‘음악 산업’의 측면에서는 대중의 취향과 시장을 겨냥한 ‘상품으로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좋은 상품’과 ‘좋은 작품’이 꼭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라서, 좋은 상품이면서 동시에 좋은 작품일 수도 있다고 보고, 우리의 음악 역시 ‘좋은 상품’이 되는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것이 ‘좋은 작품’을 향한 추구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에 올 일은 없지 않을까.
박쥐단지를 통해 새로운 음악적 시도나 접근이 이뤄진 부분이라면? 혹시 새로운 기술이나 사운드 디자인을 접목했다면 그것이 어떤 기준으로 박쥐단지의 스타일에 적합한지 판단했나?
김아일: “BAT APT.”를 프로듀싱할 때 이이언은 MPE(MIDI Polyphonic Expression)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말했다. 곡의 시작부터 등장하는 신시사이저 사운드가 바로 MPE를 사용해서 만든 소리인데, 이이언이 보내준 작업창 스크린샷을 보니, 거의 모든 노트마다 피치 커브가 복잡하게 그려져 있더라. MPE를 아주 최신의 기술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DAW(Digital Audio Workstation)의 어떤 기능 자체를 작곡의 콘셉트로 밀어붙인 경우는 이번 앨범 수록곡 중 “BAT APT.”가 유일한 것 같다.
박쥐단지의 멤버별로 각각의 캐릭터가 있다. 캐릭터의 탄생 비화가 궁금하다. 또 시각적인 예술이 박쥐단지의 음악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을 부탁한다.
휘: 혜화의 한 스터디 카페에 정좌한 채 내가 10년 차 아트 디렉터가 되었다고 상상하고 아이디어를 짜내 보았다. 주요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았다. 향후 활동을 고려했을 때, 박쥐단지의 첫 번째 컴필레이션은 박쥐단지라는 팀 이름과 멤버 구성, 가능하면 정체성까지 리스너에게 각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비주얼 작업은 콘셉추얼하기보단 단순하고 직관적이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단순화하니, 굉장히 자연스럽게… 멤버별로 박쥐 캐릭터를 만들어 보자는 결론이 나왔다.
콘셉트가 확정된 뒤 작업자를 물색하는 과정에서는 이이언과 김도언이 함께 고민했고, 결과적으로 일러스트레이터 TOIKA에게 캐릭터 디자인을 부탁했다. 귀엽지만 어딘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기는 TOIKA의 카투닉한 그림체가 박쥐단지라는 콘셉트와 잘 어울린다는 판단이었다. TOIKA가 1차로 보내준 시안에는 캐릭터별 특징이 한 줄 코멘트로 달려있었는데, 몇 가지만 공개해 보자면:
- 김도언: 시력이 있는데 눈을 날개로 가리고 다니는 박쥐
- 휘: 나비와 박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박쥐
- 김아일: 피부나 살 없이 골상만으로 이루어진 박쥐
- 이이언: 실험을 통해 위의 박쥐들을 만들어낸 매드 사이언티스트 박쥐
이번 앨범은 BPM과 조성 외엔 음악적으로 통일된 콘셉트가 없었지만, 자칫 산만하게 흩어질 수 있는 여덟 개의 트랙을 하나로 묶어줄 장치가 필요했는데, 비주얼 작업이 그 역할을 해줬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박쥐단지 프로젝트에서 시각적 요소가 더 다양하게, 더 큰 비중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을까? 오프라인 이벤트 및 공연과 비주얼라이징 그리고 그 외에는 어떤 방식으로 청중의 시야를 확보할 예정인지 궁금한데.
김도언: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멤버의 캐릭터와 캐릭터 간의 화학작용이 일어난다고 했을 때, 그것이 비단 음악적인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시각적 요소로서 맺어질 수 있다. 이번 앨범에서는 이이언, 김아일, 제이클레프가 함께한 “BAT APT.”가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합치될 수 있는 타 시각예술 분야에 제한을 두고 있지 않고 열린 자세로 소통하려는 마음이 중요하다.
박쥐단지로 활동하면서 각 멤버가 예술가로서 어떻게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나? 서로의 예술적 역량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알고 싶다.
차: 각 멤버가 예술가로서 어떻게 성장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할 자신은 없지만, 개인적인 마음과 감상은 뚜렷하다. 아직 내 고유한 음악적 언어를 찾아가는 초기 단계의 뮤지션으로서는, 박쥐단지라는 단지 내에 머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안정감과 위로가 된다. 이 단지가 조성되면서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최대 수혜자는(?) 나인 것 같다. 이번 [Bat Apt.] 컴필레이션 앨범 작업에 임할 때도, 지금도 내가 더 즐겁고 순수하게 음악적 정진을 해나가는 것이 박쥐단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라고 믿고 있다.
향후 박쥐단지가 음악적 또는 예술적 방향성에서 도전하고 싶은 분야나 새로운 영역이 있다면 무엇인가?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이이언: 계속 고민하고 의견을 나누며 나아가야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컬렉티브’로서 그야말로 ‘집합적’인 맥락에서 더욱 흥미로워지는 작업물을 시도해보고 싶다. 개별적인 곡으로서도 좋은 작업이면서 동시에 다른 박쥐단지 멤버들의 곡들과 함께 놓였을 때 더 재미있고 의미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실험들을 해보았으면 한다.
제이클레프: 박쥐단지의 다음 앨범은 멤버끼리 협업할 때 어떤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서로를 경험하는 기간을 갖고 만들어지면 좋을 것 같다. 사실 이번엔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았거든. 또 공연을 만들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라이브로 대부분의 사운드를 구현하는 방법에 관한 연구도 필요해 보인다.
Editor │ 황선웅
Photographer │ 한예림
Stylist │조해듬
Hair, Make Up │김유민
*해당 인터뷰는 지난 VISLA PAPER 21호에 실렸습니다. VISLA 매거진은 VISLA 스토어에서 구매하거나 로컬 판매처를 통해 만나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