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등장인물이 착용한 아이템의 의미를 곱씹는 순간이 찾아온다. 먼저 주인공이 애용하는 물건은 영화 내 노출 빈도가 높아 자연스레 영화 전체에 특정한 영향을 미친다. 한 인물이 특정 상황에만 사용하는 소품이 있다면, 그 상황과 소품의 연관성을 유추해볼 수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캐릭터를 되돌아보며 그 인물이 걸친 의상이나 액세서리에 혹시 중요한 은유가 담겨있는 건 아닌지 온갖 해석을 펼칠 수도 있다. 또 어떤 아이템이 고착화한 이미지를 벗어나 영화적으로 새롭게 탄생한다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찾게 된다. 이제 필름 드 모드(Film De Mode) 5화에서 소개할 영화를 따라가며 등장인물이 착용한 패션 아이템의 영화적 의미에 다양한 접근을 시도해보자.
장갑과 스카프로 전하는 사랑의 시그널.
– 영화 “캐롤(Carol, 2015)”
영화 “캐롤(Carol, 2015)”의 작품 완성도를 논의할 때, 1950년대 뉴욕을 생생하게 재현한 미술과 의상은 연출과 촬영만큼이나 의미 있게 다뤄져야 할 영역이다. 특히 영화가 2차 세계대전 이후 50년대의 과도기적 시대 배경을 그리고 있기에 객관적인 고증을 통해 설득력을 갖춰야 한다는 점에서 그 기여도가 더 크다. 또한 이 시기는 레즈비언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을 때라 두 주인공의 사랑을 표현할 은유가 중요했을 것. 이를 바탕으로 등장인물의 의상, 그 안에서도 액세서리를 통해 숨은 의미를 확장해보자.
캐롤과 테레즈의 첫 만남을 성사시킨 연결고리는 장갑이다. 테레즈가 점원으로 일하는 장난감 가게에 들른 캐롤은 장갑을 두고 나간다. 이를 돌려주기 위해 테레즈는 캐롤에게 연락하고, 캐롤이 답례로 음식을 대접하며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돌이켜보면 장난감 가게에서 마주한 그 순간이 두 사람이 첫눈에 반하는 중요한 장면이었다. 장갑을 주고받은 행위가 그 매혹적인 기류의 연장선으로 작용한 셈이다.
상류층과 중산층, 가정이 있는 여성과 20대 여성, 여자에게 끌리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캐롤과 아직은 혼란스러운 테레즈를 둘러싼 수많은 대립항은 의상에도 반영되었다. 50년대 패션은 액세서리의 조화를 중시했는데, 캐롤의 경우 귀걸이와 팔찌, 스카프 등을 착용하며 그 당시 유행의 첨단을 걷는 인물로 묘사됐다. 반면 테레즈의 의상은 단순하고 캐주얼하다. 그러나 캐롤에 대한 확신이 생긴 그다음부터 테레즈의 의상이 원색 계열로 바뀌는 걸 알 수 있다. 자기 확신이 뚜렷한 캐롤이 이미 오래전부터 테레즈와의 만남에서 붉은색 스카프를 착용했던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미루어 봤을 때 ‘빨간색’은 서로를 원하는 욕망의 색으로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와이안 셔츠, 하와이엔 파라다이스가 없다.
– 영화 “디센던트(The Descendants, 2011)”
하와이안 셔츠는 하와이를 대표하는 의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적인 휴양지에 대한 사람들의 다채로운 열망을 형상화한 듯, 하와이안 셔츠에 가미된 색감과 패턴은 독특하고 과감하다. 천국의 섬 하와이는 여유롭고 한적한 풍경과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섬을 거니는 관광객을 떠올리게 한다.
이 조건에 부합하는 영화가 “디센던트(The Descendants, 2011)”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조건을 제외하면 디센던트에서 하와이가 주는 환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소재는 비극이지만 장르는 코미디인 영화 디센던트는 소위 ‘웃픈’ 이야기다. 이 웃기면서도 슬픈 이야기는 하와이에 사는 남자 맷 킹으로부터 시작한다. 변호사인 맷은 뜻하지 않은 아내의 사고로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생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내는 식물인간이 되었고, 첫째 딸은 아내의 불륜 사실을 털어놓는다. 가족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흡사 완벽해 보이던 그의 일상에 잠재된 불완전함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하와이에 사는 그를 보고 부러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맷은 “Fucking Paradise”라고 중얼거린다. 하지만 감독 알렉산더 페인은 본인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담아온 메시지를 다시 던진다. 삶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고 때로는 비극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그의 작품 속 인물은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한다.
“디센던트”는 하와이라는 장소와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주인공을 통해 환상에 머물러 있기보다 현실을 직시할 때 행복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평온해보이던 한 남자의 일상과 그에게 닥친 피치 못할 시련, 그가 대처하는 태도가 어찌됐든 모두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비극이지만 코미디이고, 웃긴데 슬픈 우리 삶의 아이러니는 언제 어디서든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의도적 단절을 위한 소품, 선글라스와 이어폰.
–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Baby Driver, 2017)”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Baby Driver, 2017)”가 그리는 음악과 액션의 결합은 굉장한 흡입력으로 그 리드미컬한 세계에 몸을 맡기게 한다. 주인공 베이비는 은행 강도의 임무 수행이 끝날 때까지 차에서 대기하다 일을 마친 그들을 태우고 빠르게 도주하는 천재적인 운전 실력을 갖춘 드라이버다. 이 인물의 특성은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드러난다.
그가 은행 강도들을 기다리며 익숙하게 존 스펜서 블루스 익스플로전(Jon Spencer Blues Explosion)의 “Bellbottoms”를 재생할 때, 바로 이때가 베이비라는 평면적인 캐릭터가 꿈틀대며 입체적으로 살아나는 순간일 것이다. 리듬에 맞춰 와이퍼를 좌우로 흔들고, 운전대를 치기도 하면서 베이비는 음악과 혼연일체가 된 모습을 보인다. 밥 앤 얼(Bob & Earl)의 음악 “Harlem Shuffle”이 흘러나올 때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는 롱 테이크로 커피를 사러 가는 베이비를 따라가는데, 그는 주위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그저 아이팟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에 집중한다. 그의 제스처가 비트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질 때마다 느껴지는 짜릿함에 빠져들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제 이 영화에서 음악이 주는 리듬감의 중요성 그리고 음악이 언제나 베이비와 함께 한다는 것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겠다. 그러나 음악 외에도 그가 항상 몸에 지니는 물건이 있다. 바로 선글라스와 이어폰이다. 이 두 아이템은 단순히 패션의 일부로 기능하지 않고 베이비라는 캐릭터를 감싼 논리를 확장하는 데 일조한다. 자신의 삶을 음악으로 채우는 그의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하려면, 교통사고로 얻은 이명으로 늘 이어폰을 꽂고 다니며, 선글라스를 쓰는 행위로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은 세계를 차단하는 특유의 설정이 필요했을 터. 즉, 언제나 선글라스와 이어폰을 끼며 외부와의 단절을 자처하는 현실적인 캐릭터 ‘베이비’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베이비가 자신에게 분신과도 같은 선글라스와 이어폰을 기꺼이 벗어 던질 때가 있다. 사랑하는 그녀, 데보라를 만날 때다.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도 역시 음악으로 연결된다. 선글라스를 벗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것, 이어폰을 빼고 그녀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는 것, 베이비는 점차 데보라와 함께하는 삶이 자신이 속하고 싶은 세계라고 확신한다. 자신이 잘하는 일과 원하는 삶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베이비가 선글라스와 이어폰이 불필요한, 오직 음악과 사랑만이 가득 찬 그곳으로 갈 수 있을까.
카우보이 햇, 전형성의 탈피.
–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Dallas Buyers Club, 2013)”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Dallas Buyers Club, 2013)”에서 매튜 맥커너히(Matthew McConaughey)가 맡은 배역 론 우드루프는 마초 성향이 짙게 밴, 전형적인 미국 남부 텍사스 남자다. 그는 동성애를 혐오하는 자신의 성향을 표출하는 일에도 서슴없는 호모포비아로 설명된다. 술과 섹스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마약과 로데오까지 즐기는 이 남자의 방탕한 생활은 어느 날 시한부 선고를 받으며 전환점을 맞게 된다. 병명은 ‘호모’들만 걸린다고 생각했던 에이즈. 이 충격적인 사실에 론은 현실을 부정한다. 즐겨 쓰던 챙 넓은 카우보이모자가 그의 얼굴 한쪽 면에 그림자를 드리운 것처럼, 론에게 불행은 이미 예견되어 있던 것일까?
허나 ‘되는대로’ 살던 카우보이는 오히려 저돌적인 자세로 끝나가는 삶을 향한 의지를 분명히 한다. 효능을 확인한 약을 발견했지만, 미국 식품의약청(FDA)의 승인이 나지 않자 론은 불법으로 약을 밀수해 사람들에게 되판다. 이것이 동성애자 레이언과 함께 꾸린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 탄생한 배경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약 그리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동성애자 에이즈 환자에게도 공급하며 론은 마음의 변화를 경험한다. 정상이 아니라고 규정 지은 사회적 편견에 맞서 싸우며, 그토록 혐오하던 동성애자 또한 자신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론의 치열한 생존 의지가 타인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동성애를 혐오하던 ‘전형적’ 마초 카우보이가 동성애자의 대표적 질병인 에이즈에 걸린다는 모순적 상황이 빚어낸 한 인격체의 변화는 가히 경이롭다. 이 영화가 지닌 강력한 매력은 그가 선포한 삶에 대한 투쟁이 억지 감동을 요구하는 식상한 도식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론은 마초의 이미지를 벗어던진다. 더는 카우보이모자도 쓰지 않으며 실체 없는 구원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백인 보수주의자로, 이성애자로 남는다. 타고난 사업가 기질을 발휘해 자신의 병을 이겨낼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방식을 택하면서 말이다.
론이 쓰는 카우보이모자는 이제 미국 남부 남자의 전형을 상징한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론에게는, 에이즈 환자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당당한 의지 표명이자 그림자 진 얼굴의 반대편에 어렴풋이 깔린 희망의 빛이다.
필름 드 모드 5화에서 소개한 영화 속 아이템은 ‘패션’의 일부로만 취급받지 않는다. 각자의 서사를 지닌 엑스트라 역할을 수행하며 영화 내에서 등장인물의 의상, 패션이 더는 1차원적으로 소비되지 않는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들의 물건은 그 자체의 생명력으로 영화적 의미를 갖추기에 충분하다.
글 │ 최세담
커버 이미지 │ 박진우
제작 │ VISLA, MUSINSA
- 이 기사는 무신사(MUSINSA)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