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일 국내 개봉한 데이미언 셔젤(Damien Chazelle)의 신작 “바빌론(Babylon)”을 관람한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갈릴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영화를 향한 셔젤의 애정을 의심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영화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제 데이미언 셔젤의 이름이 낯설지만은 않을 테다. 평단의 압도적 찬사를 받은 “위플래쉬(Whiplash)”부터, 할리우드의 고전 뮤지컬 장르를 현대적으로 찬란히 부활시킨 “라라랜드(LA LA LAND)”, 그리고 닐 암스트롱의 전기를 진진한 일인칭 시점으로 풀어낸 “퍼스트맨(First Man)”까지. 위 굵직한 필모그래피는 데이미언 셔젤을 작품성과 흥행성, 그리고 무엇보다 독보적 개성을 갖춘 감독으로 입지를 굳히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데이미언 셔젤의 작품을 특징짓는 주된 요소는 무엇일까. 인물의 감정을 궁지에까지 몰아붙이는 타이트한 심리 묘사?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화려한 미장센과 폭발적인 롱 숏? 혹은 저스틴 허위츠(Justin Hurwitz)의 재지한 사운드트랙? 아마도 여러 가지 응답을 제출할 수 있을 테다. 이는 그만큼 데이미언 셔젤이 오늘날 누구와도 구별되는 독보적 인장을 필름 위에 새겨넣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감독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큰 특징을 꼽아야 한다면, 나는 그것을 데이미언 셔젤이 견지하는 삶에 대한 이중적인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바로 일면에 아름다움이 있으면 이면에 추함이 있고, 성공이 있으면 실패가 있다는 삶의 한계에 관한 것이다. 즉, 삶은 무게추가 제한적인 저울 같아서 어느 한 편에 무게를 기울이면 어느 한 편은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완벽히 모든 걸 거머쥔 균형 잡힌 삶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이는 감독이 오랜 시간 천착해온 모티프이자, 그의 작품세계 근간을 관류하는 통찰이다.
이러한 시각은 감독의 작품 속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로 제시되어왔다. 일류 음악가로서 위대해지기 위해 점차 주변 관계를 파괴해가는 재즈드러머(“위플래쉬”), 꿈과 사랑의 타협점 사이에서 갈등하다 끝내 서로 멀어지고 마는 피아니스트와 배우(“라라랜드”), 원대한 인류의 꿈과 개인이 짊어진 갈등 사이에서 고뇌하는 우주비행사(“퍼스트맨”). 위 이야기들에는 특정한 꿈에 매혹당해 자신의 삶을 투신하는 이들의 열정과, 동시에 그럼으로써 점차 예기치 못한 결과로 휩쓸리게 되는 생애의 불가피한 슬픔이 함께 담겨있다. 위대한 꿈의 성취와 소중한 사랑이 함께할 수 없다는 것. 때때로 원대한 꿈과 내 곁의 소중한 이들은 병존할 수 없다는 것. 즉, 완전무결한 행복은 일개 개인이 거머쥐기엔 너무 벅찬 것이라는 안타까운 사실.
신작 “바빌론”에서도 역시 이러한 시각은 동일하게 감지된다. 두 남녀 주인공인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 扮)와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 扮)는 기본적으로 “라라랜드”의 세바스찬과 미아의 연인 구도를 따른다. 각자의 꿈을 안고서 할리우드에서 만났지만, 꿈을 좇는 과정에서 결국 함께할 수 없게 되는 관계가 바로 그것. 하지만 “바빌론”은 여기서 나아가 전작들에 비해 좀 더 이야기의 몸집과 층위를 불리게 되는데, 그건 바로 한 분야에 매진하는 이들의 직업적 생애주기와, 그들이 몸담은 산업이 강제하는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 그리고 그것에 불가항력적으로 휩쓸리게 되는 개개인들의 나약한 면모다. 그렇기에 왕년의 스타였지만 점차 인기가 기울어가는 영화배우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 扮)가 등장해 전작들과는 구별되는 세 인물의 축을 완성한다. 1920년대 말 할리우드 영화사의 흐름에 올라타 분연히 극을 이끌어가는 세 인물의 벡터는 서로 포개지기도, 나름의 선을 그리기도 하면서 영화가 구현하고자 하는 이 모든 서사를 남김없이 그려낸다.
어쩌면 이 모든 질곡을 묘사하기에 당대 할리우드보다 더 적합한 배경은 없어 보인다. 영화가 겨냥하는 무성영화로부터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1920~1930년대의 할리우드는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영화 산업의 폭발적 성장에 힘입어 너도나도 각자의 욕망을 안고 달려들기 바빴지만, 그것에 대한 올바른 규제와 도덕적 규범은 부재했고, 영화는 그 지점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대중을 향한 꿈의 공장이었지만, 그 뒤안길에 산재한 것은 지독한 근로환경과 각종 차별, 돈과 향락만을 좇는 황금만능주의가 얽히고설키며 만들어내는 추악한 병폐들인 상황. 여기에 인기와 영향력에만 혈안이 된 업계인들의 매정한 속물성, 문화산업과 대중예술 사이 모호했던 당시 영화 장르의 미묘한 스탠스, 숨 가쁘게 변화를 재촉하던 기술 시대상까지 더해진다. 그런데 절묘한 건, 이 모든 야만을 딛고 일어나 완성되던 꿈과 환상의 결과물들이다. 이런 아수라장에도 불구하고 당시 탄생한 영화들은 대중들에게 유례없던 체험을 선사하며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을 노래했고, 장대한 개척 신화를 마련해주었으며, 미래를 타진해나갈 꿈과 희망을 약속했다. 시네마는 대중들에게 환상을 제공하는 도시의 상상계였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황홀경. 미친 듯이 아름답지만 동시에 미친 듯이 추악한 이중성과 아이러니가 그 시기 할리우드의 명암을 상징한다.
데이미언 셔젤이 묘파하는 이러한 명암의 점이지대들은 때때로 그의 영화가 다소 비관적이고 비극적이라는, 심지어 냉소적이라는 주장이 비롯되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동경하던 문화적 환경의 이면에 추악한 본질이 양립하고 있다는 것. 또한 꿈과 사랑처럼 양립했으면 하는 것들이 사실은 가장 양립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 그렇다. 때때로 삶이란 끝에 가닿아 마주하는 결말과 상관없이, 그저 세계에 존재하는 상충 지점들을 낱낱이 살피는 것만으로도 냉소를 품게 한다. 영화 속에서 부침을 겪는 인물들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행복한 삶은 불가능하며, 완전무결한 것이나 영원한 것은 없고, 서로의 맹세나 바람과는 별개로 인생은 종종 불가항력적인 완력을 쓴다는 지극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종종 이 사실은 우리 삶을 비극에 가까운 것으로 느껴지게 한다.
그렇다면 “바빌론”은 역시 이런 삶의 비극성을 담고 있는 작품인 걸까. 유념해야 할 점은 사실 생의 요소요소에 편재한 여러 양면성이란 가까운 거리에서만 비로소 바라봐질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품은 양가적 모순은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서 더 잘 살펴지고, 특정 문화가 품은 어두운 이면은 애정을 쏟는 분야에서 더욱더 잘 감지된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대상이 품고 있는 여러 가지 모순과 명암을 낱낱이 바라보고 짚을 수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우리 사이의 도타운 거리를 반증하고, 그것에 대한 관심을 증명한다고. 이 영화는 무엇보다 영화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고. 사실 대상의 모순을 샅샅이 적시하는 것만큼 우리를 심정적으로 괴롭게 하는 일은 없다. 그것은 대개 관계의 파탄을 의미하니까. 이건 우리의 일상에서 따끔한 조언이나 진솔한 고백이 이뤄지기 어려운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자신이 발 딛고선 뿌리와 생산조건에 대해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려 한다. 이는 지극한 애정과 정성이 없으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때때로 주변인의 따끔한 작심 발언에서 애정과 관심의 증거를 읽어낸다. 바꿔 말해, 사랑은 애정과 증오를 동반한다.
이 지점에서 할리우드 영화사의 명암을 명명백백히 포착해내는 데이미언 셔젤의 렌즈는 애정하는 대상을 구석구석 진맥하려는 사려 깊은 시선이 된다. 더불어, 그와 시네마가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순간 역시 초고도의 밀도로 표현해내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 특히 세 시간을 상회하는 긴 러닝타임 동안 무서운 기세로 질주하던 영화가 종착지에 가서 마주하게 되는 극적인 엔딩은, 그야말로 시네마에 대한 장대하고 화려한 헌사를 가득 담고 있다. 영화사가 지닌 흑백을 표시하고, 아이러니를 포함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것에 몸담기를 그만두지 않고 경외심을 거두지 않는다. 이건 영화사를 향한 맹목적인 찬탄이나 칭송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애정과 존경을 잃지 않은 채, 아픔과 슬픔을 동시에 두루 살피기. 나는 이보다 명백한 사랑의 증거를 상상하기 어렵다.
영화 “바빌론”을 두고 관객들의 평가는 많은 부분에서 엇갈리는 게 사실이다. 상술한 많은 이야기에도 불구, 나 역시 누군가 이 영화가 완벽히 훌륭한 영화인지 묻는다면, 또는 짜릿한 쾌감이나 즐거움을 선사하는 영화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긴 머뭇거려진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이 영화의 장단에 대해 가리고 있던 게 아니라, 이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지, 그 마음 쏟음에 관해 이야기했다. 평단 사이에서도 의견이 제법 나뉘듯, 내러티브의 어떤 부분은 다소 과잉으로 보인다거나, 또 어떤 부분은 흐름이 늘어지고, 다소 사족처럼 느껴지는 것도 맞다. 영화 전반에 감지되는 이런 일종의 포화상태는 본 영화를 혹평하는 평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사항이다. 이러한 과잉됨은 어쩌면 해당 시기 할리우드가 가지고 있던 명암 중 어떤 것도 놓치지 않고 포괄해보려는 감독의 야심에서 비롯된 일인 것처럼 보인다. 할리우드의 욕망과 영화에 대한 그 모든 꿈을 은막 위에 영사해보려는 명백한 야심. 이제 다시 글의 서두에서 했던 이야기를 불러올 차례다. 이 영화에 대해 무엇보다 뚜렷하게 말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에 대해. 우린 적어도 “바빌론”에서 영화에 대한 그의 야심을 목격한다. 누구도 데이미언 셔젤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기는 어렵다. 사랑은 언제나 야심을 품게 하니까.
이미지 출처 |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