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붐은 온다, 그 이면의 의미

한국 대중음악 시상식 2024 올해의 음악인

“밴드 붐은 온다” 최근 이 문장이 인터넷에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회자되고 있다. 국내외 밴드 소식을 서포트하는 동명의 인스타그램 계정이 5만이 넘는 팔로워의 지지를 얻으며 매 게시물 뜨거운 반응을 나타내는 것만 봐도 결코 농담으로만 소비될 말은 아닌 듯하다. 사실 답은 과거 게임 커뮤니티의 “이지(Iji) 붐은 온다”라는 유행어처럼,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붐에 대한 자조와 희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짧은 문장 안에 이미 나와 있다. 그리고 이 복잡성이 현재 록(Rock) 음악의 위치를 나타낸다.

이러한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록 음악의 재부상은 분명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국내에서는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과 같은 대형 공연들의 성황, 실리카겔 돌풍, 그리고 혁오의 화려한 복귀 등이 록 음악의 재부상을 시사하는 듯하다.

이는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영국의 악틱 몽키스(Arctic Monkeys)는 틱톡(TikTok)을 통해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고, 90년대 브릿팝의 상징 오아시스(Oasis)는 끊임없이 재결합 루머를 양산하며 주목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올리비아 로드리고(Olivia Rodrigo)와 같은 젊은 아티스트가 록 사운드를 재해석해 새로운 팬층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유행은 돌고 돈다’라는 식의 순환론적 관점으로만 해석하기엔 미흡한 점이 많다.

오히려 여기엔 마크 피셔(Mark Fisher)가 지적한 현대 사회의 으스스한(eerie) 단면이 드러나는 게 아닐까? 따라서 록 음악의 재부상이 과연 진정한 ‘붐’인지, 아니면 현대 사회의 이면이 나타난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다양한 관점을 통해 현재의 ‘밴드 붐’ 현상을 확인하고, 탐구해 나갈 것이다.


Simon Reynolds – Retromania: Pop Culture’s Addiction to Its Own Past

1. 시간의 정체(停滯)와 노스탤지어​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역사의 종말’ 선언 이후, 우리 사회는 일종의 정체 상태에 빠진 듯하다. 자본주의 외의 대안적 이데올로기(Ideology) 부재는 현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본주의 리얼리즘’ 상황 속에서, 미래를 상상하기란 더욱 어려워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중 화는 과거에 집착하는 현상을 보인다. 이는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복고(復古)풍 패션부터 레트로(retro) 게임까지, 이 모든 것은 정체된 현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가 소비하는 과거는, 하위문화의 역할을 상실한 채 피상적 소비 대상으로 전락했다. 록 음악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때 반항과 혁신의 상징이었던 록 음악은 이제 단순한 스타일이나 분위기로 소비되는 경향을 보인다.

노스탤지어(nostalgia)는 이 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다. 여기서 노스탤지어는 단순한 과거를 지칭하지 않는다. 흐릿한 기억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돼, 향수(鄕愁)라는 이름의 환상으로 변모한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과거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도 이러한 노스탤지어를 느낀다는 것이다. 이들의 노스탤지어는 아카이브(archive)화된 기록으로 재구성된 또 다른 판타지다.

새로운 세대에게 록 음악은 경험해 보지 못한 ‘쿨한’ 과거에 대한 동경이자, 현재 문화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다시 지적하자면, 이들은 록 음악의 본래 정신과는 다른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다. 현대 소비를 주도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개인이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의 글로벌리즘(Globalism) 확산은 적과 동지의 경계를 허물고, 투쟁의 의미를 희석했다. 아즈마 히로키(Hiroki Azuma)가 말한 ‘동물화’, 즉 단순한 욕구 충족만을 추구하는 인간성의 퇴화가 여기서 드러난 것이다.


Youtube 요정재형 채널

2. 완벽의 허상과 노이즈

이걸 자초한 게 우릴 수도 있잖아.
튠을 시켜서 되도록 완벽한 걸 원했고
숨 다 자르고 편집해서 그런 목소리를 낸 게 우리잖아.
누군가 카피할 수 있는 완벽함을 추구했잖아.

정재형

기술의 발전은 음악 제작에 있어 전례 없는 ‘완벽성’을 추구하게 했다. 완벽한 음정과 리듬, 오류 없는 녹음과 편집이 가능해지면서 음악에 ‘인간적’ 요소는 점점 사라져 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기술의 완벽성 추구가 오히려 인간의 불완전함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완벽’은 일종의 정해진 답과 같다. 모두가 ‘완벽’이라는 동일한 지점을 향해 나아갈 때, 개인 간 차이는 기술적 정밀함 외에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완벽의 허상은 개인의 독창성을 압박하고, ‘라이브가 라이브 같지 않아야’ 만족하는 모순을 낳는다. 즉 기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인간적 요소가 결여된 공연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완벽 추구는 동시에 본질을 위협하기도 한다. 모창 가수부터 AI까지, 최근 우리는 타자(他者)의 음악과 실제 가수의 노래를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이는 음악에서 가수와 노래의 전통적 관계가 역전됐다는 것을 나타낸다. 노래가 가수보다 더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시뮬라크르(Simulacre)[1]적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또한 ‘완벽’이란 근본적으로 달성 불가한 목표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음악에서 노이즈(불완전함)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는 현실적으로 성공하기 힘들다. ‘완벽’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상이기에,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음악 자체를 훼손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밴드 붐’은 기술 주도의 완벽성에 대한 인간성의 회복으로 해석될 수 있다. 록 음악이 지닌 특성, 즉 아날로그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감정과 불완전함이 현대 음악 산업에서 대안적 위치를 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이 과거의 맹목적 재현에 그친다면, 혁신이 아닌 퇴행으로 귀결될 여지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록 음악의 재부상이 갖는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인식해야 한다.


Spotify CEO Daniel Ek

3. 문화권력의 양면성과 파편화

디지털 시대의 도래는 음악 산업의 권력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디지털 공간의 개방성은 역설적으로 문화 생산과 유통을 자본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실리콘 밸리(Silicon Valley)의 스트리밍 서비스, 숏폼 플랫폼, 그리고 이를 지배하는 알고리즘(Algorithm)은 음악의 소비 방식을 완전히 재편했다.

플랫폼 기업들이 축적한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은 강력한 진입장벽으로 작용해 독점 체제를 강화한다. 동시에 이들은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2]를 주도하며, 사용자의 시간과 관심을 상품화한다. 이 두 가지 요인의 결합은 음악의 대안적 기능을 자본으로 대체해, 시장 경제에 예속시켰다.

이러한 플랫폼 독점은 표면적으로 음악의 다양성을 위협하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취향의 극단적 파편화를 촉진했다. 드와이트 맥도널드(Dwight Macdonald)가 우려했던 대중문화의 획일화가 정반대인 개인화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록 음악과 같은 특정 장르가 새롭게 주목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상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대중문화의 상품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록 음악의 재부상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겉으로 다양해 보이는 이 현상도 결국 자본에 종속된 ‘개인화된 획일성’에 불과할 수 있다. 알고리즘이 유도하는 수동적 선택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능동적이라는 착각에 빠진 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동시에 주류와 하위문화의 경계가 더욱 공고해지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구분해 내는 취향은, 더 이상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표현하지 못한다. 오히려 과거의 피상적 이미지만이 소비되는 한계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록 음악의 재부상은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또 다른 소비 트렌드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


Incheon Pentaport Rock Festival

4. 욕망의 대상으로서 록 음악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볼 때, 록 음악의 부상은 현대 사회의 ‘결여’에 대한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완벽해 보이는 디지털 세계 속에서, 우리는 불완전함을 통해 실재와 조우하고자 한다. 록 음악이 추구하는 거친 사운드, 즉흥성, 그리고 ‘라이브다운’ 느낌이 바로 이런 욕망의 표현이며, 무의식적인 저항일지도 모른다.

또한 록 음악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일종의 ‘증상’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완벽과 효율을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 불완전함에 대한 갈망은 억압된 진실을 표면화하는 기점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대안으로 작동하려면 과거의 형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맥락에서 새로움을 창조해 내야 할 것이다. 과거의 유산을 재활용하는 데 그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상실했음을 암시할 뿐이다.

결국 ‘밴드 붐’ 현상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끊임없이 과거를 돌아보고 있는가? 현재의 정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시대만의 고유한 정신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를 넘어,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향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단순한 ‘붐’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활’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 Korean Music Awards, Farrar, Straus and Giroux, CNBC, Incheon Pentaport Rock Festival


1 정무적 감각으로 듣기 – ‘공장장’ 네이버 블로그

[1] 시뮬라크르: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발생한 개념. 원본 없는 복제,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가상을 의미한다.
[2] 주목 경제: 소비자의 관심과 시간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 돼, 기업들이 이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는 경제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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