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홍콩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배우이자 감독 주성치(Stephen Chow). 최근 그와 관련된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자신의 주택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았고 대출금은 영화제작비로 사용된다고. 공교롭게도 지난 6월은 그가 태어난 달이었다. 불행하게도 아직 홍콩을 방문한적은 없지만, 홍콩의 후덥지근한 날씨가 생각나는 계절도 찾아왔기에 그의 작품이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매월 보고싶거나 다시 보면 더 좋은 작품을 소개하는 시간, 비즐라 비디오 방(VISLA VIDEO ROOM)의 첫 번째 주제는 주성치 작품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007 북경특급 (From Beijing with Love)”
이 영화는 영화 “007”의 패러디다. 걸출한 엘리트 특수요원이 임무에 성공한 후 본드걸과 사랑을 나누는 전형적인 이야기를 허무맹랑한 개그와 장르적 파괴를 자행하며 코미디 장르로 탈바꿈시켰다. 주성치는 평상시에 정육점을 운영하지만, 중국 인민군의 비밀 첩보원이며 임무를 위해 홍콩으로 떠난다. 주성치의 영화답게 마음껏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오락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그의 작품 중에서도 유독 냉소 섞인 풍자가 존재하는 작품이다.
#1 유능한 첩보원이라면 항상 스타일에 신경써야
“007 북경특급”에서 주성치의 모습은 치명적이다. 홍콩의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블랙 슈트에 무지개색 넥타이, 중절모로 마무리한 스타일과 올백 정장은 첩보원으로서의 비밀스러운 모습 따위 안중에도 없다. 하지만 이유가 다 있다. 항상 유능한 요원일수록 겉모습에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 얼마나 스타일에 예민한지는 아래의 영상을 보도록 하자.
주성치는 “트레일러 파크 보이즈 (Trailer Park Boys)”의 ‘줄리안’이 항상 잭콕을 들고 있는 것처럼 항상 담배를 물고 있다. 심지어 머리를 손질할 때도 담배는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스타일 유지의 정점을 찍은 장면은 바로 절친 양조위(Tony Leung)가 짧지만 인상 깊게 등장한 작품 “아비정전”의 마지막 장면을 주성치가 패러디한 파트. “아비정전”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한다면 아래의 영상을 보며 비교해보자.
#2 냉소적이고 강렬한 풍자
1994년 개봉한 이 작품은 홍콩 반환이 3년밖에 남지 않았던 해였다. 당시 홍콩인과 문화예술계는 반환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중국 본토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동반되었던 것 같다. 이런 사조를 이 작품에서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펄럭이는 오성홍기 앞에서 펼쳐지는 슬랩스틱 코미디와 주성치가 공산군으로부터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지폐 몇 장으로 풀려나는 장면은 단순히 개그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중국 대륙에 대한 조롱과 공산당의 부패를 꼬집은 것이나 다름없다.
가장 냉소적인 장면은 뜬금없이 등장하는 프로파간다 벽화다. ‘有理想 有文化 有秩序(이상이 있고 문화가 있고 질서가 있다)’라고 적힌 벽화를 뒤로하고 주성치는 걸어간다. 프로파간다에 적힌 이 내용은 덩샤오핑의 연설 중 “사회주의 정신문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민족 모두가 이상적이고 도덕적이며, 문화적이고 질서를 지키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에서 ‘도덕’만 제외하고 넣은 것이다. 결국 이 벽화는 중국 대륙인 또는 공산당에게 도덕이 없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비판하고 있다(거의 혐오에 가깝다).
시의적으로 지금 더욱더 그 의미를 진하게 아로새기는 “007 북경특급”은 단지 주성치의 코미디 영화라는 이유로 그동안 저평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현재 중국에서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 2020년 현재 중국은 홍콩보안법을 시행하려 하고 있다. 이 영화를 지금의 홍콩인들이 다시 본다면, 결코 가볍게 웃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최승원(Contributing Editor)
“소림축구 (Shaolin Soccer)”
10명이 넘는 친구들이 모여도 딱히 다른 할 일이 없었던 우리는 결국 축구를 했다. 축구화가 없었던 건 물론, 축구공조차 닳을 대로 닳아 속가죽이 다 드러나 있었다. 경기 시간은 해가 질 때까지고, 경기의 형식은 프리킥 대결, 페널티킥 대결, 적당히 인원수를 나눠 하는 시합 등등 그때그때 할 수 있는 것으로 골랐다. 우리의 목과 팔, 종아리의 피부색은 점점 짙어졌고, 피부 위로는 늘 땟국물이 흘렀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가릴 것 없이 친구들이 모였다 하면 위와 같은 풍경은 언제나 반복됐다. 벌써 15년도 훌쩍 지난 일이다.
축구를 설명할 때 따라 붙는 말들, ‘노동자의 스포츠’, ‘규칙을 몰라도 공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스포츠’, ‘전쟁의 전술과 가장 닮은 스포츠’ 등등 많은 수식이 붙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축구를 성에 차도록 설명하진 못한다. 아마 그건 말이란 도구, 그러니까 직선적이고, 세밀하고, 명확한 도구인 말과 축구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 축구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축구를 통해 공유할 수 있는 시간과 그 안에 빼곡히 들어찬 수많은 감정에 관하여 얘기하는 것은, 축구를 좋아하고, 더군다나 그가 작가라면 포기하기 힘든 유혹이다. 축구란 원초적인 강력한 끌림이 있는 스포츠인 것이 분명하고, 그 끌림의 근원에 관하여 알고 싶고, 설명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성치의 “소림축구”는 축구를 소재로 한 한 편의 가벼운 코미디 영화로 치부되곤 하지만, 내겐 그 어떤 말보다 축구를 완벽하게 설명한 영화로 느껴진다.
“소림축구”는 흩어졌던 친구들이 모여 축구를 하는 영화다. 세부적으로 나누자면 훨씬 더 많은 설명이 붙겠지만, 흩어졌던 친구들이 모이고, 축구를 한다는 것보다 “소림축구”에서 중요한 건 없다. 그리고 주성치를 지난 생일을 떠올리며 쓰는 이 글에 위의 지점만큼 어울리는 것이 또 있을까. 생일은 1년의 수많은 날 중 눈치 보지 않고도 친구들을 불러 모으기에 가장 적합한 날이니까. 그렇게 모인 친구들이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건 축구이거나, 혹은 그 시절 모여 하던 축구와 닮아 있는 빛바랜 추억팔이일 테니까.
최직경(Contributing Editor)
이미지 출처 | IMDb, 네이버 영화, 영상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