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인생사로 20세기를 장식했던 국내외 인물들을 조명하는 시리즈 ‘VISLA 인물 열전’. 그 두 번째 주인공은 일본 팝 음악사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수많은 힙스터들의 우상, 호소노 하루오미(細野 晴臣)다. 최근 ‘나 음악 좀 듣는다’는 이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시티 팝의 유행으로 20세기 일본 음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호소노 하루오미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중 그의 삶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 본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호소노 하루오미를 ‘시티 팝’, 혹은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Yellow Magic Orchestra, 이하 YMO)’만으로 퉁쳐버리는 것은 그가 남긴 발자취에 실례를 범하는 일. VISLA 인물 열전과 함께 일본 팝 음악의 대부, 호소노 하루오미의 삶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자.
“일본인들은 튀어나온 못을 내버려 두지 않고, 망치로 내려치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다. 나는 호소노 하루오미가 그 튀어나온 못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는 결코 눌러지는 법이 없었다.”
반 다이크 파크스(Van Dyke Parks)
호소노 하루오미는 1947년 7월 9일, 도쿄 미나토구에서 태어났다. 좀 더 깊이 들어가기 전, 그와 항상 같이 언급되곤 하는 그의 친할아버지에 관해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그의 친할아버지 호소노 마사부미(Masabumi Hosono)는 RMS 타이타닉호의 유일한 일본인 탑승자이자, 침몰 사고의 생존자였다. 사고 당시 살아남기 위해 원칙을 어기고 먼저 구명정에 탑승했다는 소문이 퍼져 일본 언론과 대중들로부터 ‘수치스러운 일본인’이라는 낙인을 받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은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호소노 마사부미의 결백은 그가 사망한 이후인 1997년, 제임스 캐머런(James Cameron) 감독의 “타이타닉(Titanic)”이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밝혀지게 된다. RMS 타이타닉 재단이 그의 수기와 타 승객들의 기록을 대조해본 결과 당시 비겁하게 행동했던 동양인은 호소노 마사부미가 아닌 중국인 탑승객이었으며, 그는 구명보트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자리에 정당하게 탑승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비록 호소노 하루오미는 친할아버지를 직접 만난 기억이 없다고 하나, 2012년 타이타닉 사고 100주년 당시 유족으로서 관련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럼 이제 호소노 하루오미의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의 외할아버지 나카타니 타카오(Takao Nakatani)는 피아노 조율사였으며, 어머니 역시 음악과 할리우드 문화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각종 문화 예술을 접하며 자랐다. 게다가 그가 태어난 1947년은 세계 2차 대전 이후 일본이 미국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던 시절. 호소노 하루오미는 미군의 극동 방송 네트워크(Far East Network)와 78 rpm 레코드를 통해 미국 음악을 즐겨 듣는 한편, 일본의 망가와 라쿠고(落語, 일본의 전통적인 이야기 예술)도 함께 즐기는 문화적 ‘혼종’으로 자라게 된다.
이후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에서는 물질적 풍요에 반해 정신적 결핍을 느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히피 무브먼트와 사이키델릭 록이 탄생한다. 이 문화는 먼 일본 땅의 호소노 하루오미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결국 그는 중학교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결성하면서 음악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에이프릴 풀(Apryl Fool)과 핫피 엔도(Happy End)
15살부터 여러 밴드를 거치며 음악적 기량을 다진 호소노 하루오미는 1969년, 밴드 에이프릴 풀(Apryl Fool)에서 동명의 데뷔 앨범을 발표한다. 대중의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에이프릴 풀은 디스코텍에서 밤무대 공연을 펼치는 등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이어가는데, 당시 이들의 플레이리스트는 대부분 오리지널이 아닌 커버 곡들이었다고. 더 도어스(The Doors), 아이언 버터플라이(Iron Butterfly),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등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플레이리스트는 춤추기에 적합하지 않은 곡들이 대부분이었고, 이 같은 분위기를 전환해보고자 탄생한 밴드가 바로 핫피 엔도(Happy End)다.
에이프릴 풀 출신의 마츠모토 타카시(Takashi Matsumoto), 스즈키 시게루(Shigeru Suzuki), 오오타키 에이치(Eiichi Ohtaki), 호소노 하루오미로 이루어진 핫피 엔도는 포크적인 요소를 가미한 록 음악을 선보였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핫피 엔도는 일본인들에게 선구적인 밴드로 남아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록과 포크 음악에 일본어 가사를 처음으로 도입한 밴드이기 때문. 이들의 실험 정신은 밴드의 이름에서부터 강하게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일본에서는 외래어를 가타카나로 표기하는데, 이들은 히라가나를 사용해 ‘Happy End’를 ‘핫피 엔도’라고 표기함으로써 외국 음악에 일본인의 정신을 담아내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활동 초기만 해도 핫피 엔도의 실험은 다소 낯설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이들의 두 번째 앨범 [Kazemachi Roman]이 발표되자 세간의 우려와 비판은 깨끗이 사라졌다. 젊은이들의 낭만을 연상케 하는 이 앨범은 마츠코토 타카시의 가사가 특히 돋보이는 명반으로, 2007년 9월 롤링 스톤 재팬이 선정한 ‘역대 일본 록 명반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972년경, 핫피 엔도는 2집의 흥행을 뒤로한 채 3집 녹음을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 작업을 위해 도착한 선셋 사운드(Sunset Sound) 스튜디오에서 호소노 하루오미는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의 음악적 파트너로 알려진 반 다이크 파크스(Van Dyke Parks)를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을 통해 그는 여러 악기와 보컬을 층층이 쌓는 미국의 레코딩 방식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비교적 평면적이었던 당시 일본 음악들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으로, 자국 음악계의 전통과 관습에 다소 지쳐있던 그에게 색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미국 여행의 성과는 분명했지만, 정작 핫피 엔도는 여행 이후 미국에 대한 환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듯 보였다. [Kazemachi Roman]에서 “하이칼라(‘서양풍’, ‘이국적’이라는 뉘앙스로 쓰임)는 아름답다”라고 노래하던 이들이 3집에서는 “사요나라 아메리카, 사요나라 니뽄”이라고 노래했을 정도로 말이다. 훗날 마츠모토 타카시는 “당시 우리의 마음은 이미 일본을 떠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요나라 아메리카 사요나라 니뽄”을 통해 미국에도 안녕을 고했던 거지. 그 어느 곳에도 얽매이지 않겠다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아쉽게도 3집 [Happy End]는 핫피 엔도가 남긴 마지막 앨범이 된다(1집과 3집의 제목은 ‘Happy End’로 동일하지만, 3집의 경우 히라가나를 사용하지 않고 ‘해피 엔드’로 표기했다). 밴드의 두 축을 담당했던 호소노 하루오미와 오오타키 에이치의 음악적 지향점이 달랐던 탓에 이들은 1972년을 끝으로 해체한다. 흥미로운 점은 호소노 하루오미가 해체 후 완전히 다른 성향의 음악으로 활동을 이어나갔다는 점. 밴드 활동 당시 대중적인 포크 음악을 선호했던 호소노 하루오미는 이후 YMO를 결성하는 등 다양한 장르적 도전을 통해 해외에도 그 이름을 알리게 된다.
틴 팬 앨리(Tin Pan Alley)와 솔로 활동
핫피 엔도가 해체한 뒤 호소노 하루오미는 스즈키 시게루 등과 함께 사운드 프로듀스 집단 틴 팬 앨리(Tin Pan Alley) 활동을 시작한다. 틴 팬 앨리는 일본 팝 음악의 기초를 세웠다고 평가받는 그룹으로, 야마시타 타츠로(Tatsuro Yamashita)와 오오누키 타에코(Taeko Onuki) 등 국내에도 비교적 잘 알려진 아티스트들에게 음악을 제공했다(이들은 아라이 유미(Yumi Arai) 등의 앨범에도 참여했는데, 이 때에는 옛 이름인 “캬라멜 마마(Caramel Mama)”를 사용했다). 호소노 하루오미는 핫피 엔도 때와 마찬가지로 베이스를 담당했으며, 이 기간동안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사운드와 스타일을 시도한다. 틴 팬 앨리는 1977년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한다.
호소노 하루오미가 그룹의 멤버가 아닌 솔로 아티스트로서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도 이 무렵이다. 핫피 엔도가 해체된 후 그는 주일 미군 가족들이 머무는 아메리칸 빌리지(American Village)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미국도 일본도 아닌 그곳에서 1973년, 자신의 첫 솔로 앨범 [Hosono House (1973)]를 발표한다. 당시 그는 ‘엑조티카(Exotica, 2차 세계대전 이후 교외 미국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장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틴 데니(Martin Denny)의 카세트를 거의 매일 들을 정도로 그의 음악에 빠져있었는데, 특히 미국과 일본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한 듯한 하와이의 정서에 깊게 공감했다고. 마틴 데니의 영향은 이후 ‘트로피컬 삼부작’이라고 불리는 [Tropical Dandy (1975)], [Bon Voyage Co., (1976)], [Paraiso, (1978)]까지 이어지며, 호소노 하루오미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확장하는 데 크게 일조한다. 호소노 하루오미의 스테이지 네임인 해리 호소노(Hosono Harry) 역시 이 당시 지은 것으로, 하와이에 사는 일본계 미국인들과 일본 코미디언들이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에서 그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트로피컬 삼부작 외에도, 호소노 하루오미의 [Cochin Moon (1978))] 역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앨범 중 하나다. 시대를 앞서간 일렉트로닉 명반으로 평가받는 이 앨범은 일본의 그래픽 디자인 거장 요코오 타다노리(Tadanori Yokoo)와의 인도 방문 경험과 발리우드(Bollywood) 영화에서 얻은 영감을 통해 완성된 것. 앨범 작업 당시 요코오 타다노리는 한창 UFO와 인도가 주는 신비로움에 심취해있었다고 한다. 호소노 하루오미 역시 이국적인 사운드에 빠져있었지만, 그렇다고 인도를 직접 방문할 생각까지는 없었다고. 요코오 타다노리는 그런 그를 끌고 인도로 향했고, 호소노 하루오미에게 “여행이 끝나면 앨범을 하나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이후 호소노 하루오미와 친구들은 인도에서 큰 탈이 나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UFO를 목격하는(!!) 등 다소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경험은 이후 [Cochin Moon]을 위한 영감이 된다.
훗날 YMO의 멤버가 되는 사카모토 류이치(Ryuichi Sakamoto)와 음악 프로그래머 마츠타케 히데키(Hideki Matsutake, YMO의 ‘제4의 멤버’) 역시 [Cochin Moon] 작업에 함께했다. 당시 호소노 하루오미는 신시사이저로 연주된 토미타 이사오(Isao Tomita)의 “달빛(Clair De Lune)”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해당 곡에 참여한 마츠타케 히데키를 직접 찾아갔는데, 디지털 장비에 무지했던 그와 달리 마츠타케 히데키는 이미 무그(Moog)와 ARP 등 고가의 장비들을 갖췄으며, ‘슈퍼마켓 캐셔만큼’이나 빠르고 능숙하게 장비들을 다루는 수준이었다고. 마츠타케 히데키의 전폭적인 도움 아래 앨범은 무사히 완성되었고, 그의 영향은 YMO의 음악에까지 이어진다. 여담으로, 호소노 하루오미는 훗날 마츠타케 히데키와의 관계에 대해 “그가 가진 장비들의 가격이 떨어지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라며 장난스레 발언하기도 했다.
YMO의 세계 정복
“내 인생 최대의 충격, ‘YMO’. 그들은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렸다. 게임의 서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게임 개발자 이노 겐지의 자서전 ‘게임’ 中
[Cochin Moon]과 [Paraiso]가 발매된 1978년 말, [Paraiso] 작업으로 인연을 맺은 호소노 하루오미, 사카모토 류이치, 타카하시 유키히로(Yukihiro Takahashi)는 음악계에 큰 충격을 남긴 밴드, YMO를 결성한다. 지금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만능 아티스트로 거듭났지만, 밴드 결성 당시만 하더라도 팝 음악에 익숙지 않았던 사카모토 류이치는 합류를 망설였다고. 그의 소극적인 모습에 호소노 하루오미 역시 끈질긴 설득으로 맞섰고, 결국 사카모토 류이치는 훗날 자신이 표현한 것처럼 ‘상상도 못했던 세계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이후 이 3인조는 제이팝(J-Pop)뿐 아니라 일렉트로니카, 시부야계(Shibuya-kei), 신시사이저 팝, 하우스, 테크노, 심지어 칩튠(Chiptune)까지, 현대 음악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멤버 개개인의 뛰어난 기량과 일본의 거품 경제를 등에 업고 탄생한 양질의 장비들로 YMO는 음악계를 차례차례 정복하기 시작한다(여담으로, 드럼머신의 전설 Roland TR-808을 무대에서 처음 사용한 아티스트도 YMO다). 이들이 발표한 앨범들은 모두 각각 다른 이유로 상징적이다. 데뷔 앨범 [Yellow Magic Orchestra (1978)]는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의 스타일을 동양화해 큰 호평을 받았으며, [Solid State Survivor, (1979)] 역시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뉴 로맨틱스(New Romantics)’ 흐름에 오리엔탈리즘을 가미해 큰 성공을 거뒀다. 이외에도 [Public Pressure (1980)]는 자신들의 스타일을 라이브로 풀어놓은 앨범이며, [X∞Multiplies (1980)]는 멤버들이 좋아하던 라디오 개그 프로그램 “스네이크맨 쇼(Snakeman Show)”와의 협업을 통해 음악과 코미디의 융합을 이뤄낸 작품이다. 그 후 멤버들은 [BGM (1981)]과 [Technodelic (1981)]을 발매하며 음악으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뤘다고 자평했으며, 이후로는 ‘놀이’의 개념에 좀 더 집중하여 [Naughty Boys (1983)] 등의 앨범을 제작한다(물론 놀이처럼 만들었다고 해도 이 역시 테크노 팝의 대중화를 이끈 명반이다).
활동 당시 일본은 물론, 서구권에서도 이들의 인기는 상당했다. 영국과 미국에서 큰 관심을 받아 빌보드 200(Billboard 200)과 R&B 앨범 차트 등에 이름을 올렸으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뮤직 댄스 프로그램 “소울 트레인(Soul Train)”에도 출연했다. 해외 유명 아티스트들도 이들의 곡을 탐낼 정도였는데, 마틴 데니의 곡을 커버한 “Firecracker”는 이후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와 제니퍼 로페즈(Jennifer Lopez)가 샘플링했으며, “Behind the Mask”는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그레그 필린게인즈(Greg Phillinganes),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 다시 해석했다(마이클 잭슨의 사후 기념 앨범에 포함).
이처럼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던 이들이지만 1983년, YMO는 약 5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해체한다. 팀의 해체를 둘러싼 여러 가지 설 중 하나는 지나친 유명세가 오히려 독이 되었다는 것. 사카모토 류이치는 걷잡을 수 없는 인기로 인해 대인기피증을 앓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호소노 하루오미 역시 “YMO의 음악이 차트에 오를수록 나는 더욱더 괴로워졌다.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해지자 유명 야구 선수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이후 이들은 1993년과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재결합하게 되지만 YMO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도록 하자. 팀이 해체한 1993년 이후에도 호소노 하루오미는 꾸준히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냈고, 이 역시 충분히 다뤄져야 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YMO 이후의 삶
1983년, YMO의 무거운 타이틀을 내려놓은 호소노 하루오미는 한층 더 자유롭게 자신의 활동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한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에서는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의 앰비언트 시리즈와 환경음악(Kankyo Ongaku)을 중심으로 앰비언트 음악을 향한 리스너들의 관심이 늘어나는데, 호소노 하루오미 역시 이 무렵 앰비언트에 깊게 몰두하게 된다. 그의 작업물 중 대표적인 것은 1984년에 공개된 [Watering a Flower (1984)]. 무인양품(MUJI) 매장을 위해 만들어진 이 음악은 간결함을 추구하는 브랜드의 철학과 아주 잘 맞아떨어지며, 이후 카세트로 발매되어 많은 장르 팬들의 위시 리스트에 올랐다.
그가 이룬 또 한 가지 성과는 같은 해에 발매된 [Video Game Music, (1984)]. 비디오 게임과 팝 음악의 접점을 가장 빠르게 발견한 프로듀서 중 한 명인 호소노 하루오미는 YMO 활동 당시 이미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s)와 “서커스(Circus)” 같은 아케이드 게임 속 사운드를 활용한 음악을 만든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에는 식당, 카페 등 어디에서나 아케이드 게임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으며, YMO 멤버들 모두 이를 즐기는 편이었다고. 특히 “제비우스(Xevious)”는 거의 모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정도로 열심히 플레이했다고 한다. 이 같은 열정과 호기심을 바탕으로 완성한 [Video Game Music]은 남코(Namco) 사의 게임 속 사운드를 이용해 완성한 앨범으로, 온전히 게임 음악만으로 채워진 최초의 앨범으로 기록되어 칩튠 장르의 효시가 되었다.
이외에도 호소노 하루오미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1984)”, “은하철도의 밤(1985)”, “어느 가족(2018)”과 같은 작품들의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월드 뮤직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튀니지 출신 가수 아미나 아나비(Amina Annabi)와 협업하기도 했다. 무한한 음악적 스펙트럼과 도전을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에 전 세계 많은 후배 아티스트들은 존경심을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맥 드마르코(Mac DeMarco)와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호시노 겐(Hoshino Gen)은 그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그는 요즘 다음 세대를 위해 20세기 음악들을 재발굴하고, 소개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다.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며 대중 음악의 흐름을 이끌어 온 그지만, 정작 본인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선구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 때 그 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집중했을 뿐이었다는 그의 답변은 얼핏 고루하게 들리지만, 분명 그의 원동력은 선구자가 되어야겠다는 야망이 아닌, 음악에 대한 끝없는 열정과 호기심이었던 것이다.
1996년, 일본 최초의 아웃도어 테크노 레이브 “레인보우 2000(Rainbow 2000)”의 다큐멘터리에서 그가 남긴 말을 끝으로 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모두가 테크노에 열광하고 있는 그 곳에서 묵묵히 앰비언트를 플레이한 그는 마치 은둔의 현자 같은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앞으로 앰비언트 음악이 발전하면서 다시 한번 앰비언트로 관심이 쏠리기 시작할 거야. 하지만 그때쯤이면 나는 이미 다른 걸 하고 있겠지”
호소노 하루오미, “Rainbow 2000” 다큐멘터리 中
이미지 출처 | “NO SMOKING” FILM PARTNERS , MIKE NOGAMI / LIGHT IN THE AT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