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1년…. 세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과열된 주식과 부동산 시장, 새롭게 요구되는 글로벌리즘의 정의 등 진정한 21세기는 지금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과연 세상은 미쳐가고 있는 걸까? 시대의 변곡점을 맞이할 때마다 달라지는 변화에 두려움과 기대감이 공존하기 마련. 2021년 첫 번째 VISLA VIDEO ROOM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등장했던 새로운 패러다임의 배경을 다룬 작품을 이야기해본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Inglourious Basterds)”
새로운 패러다임 같은 건 사실 없지 않나. ‘역사는 반복된다.’, ‘유행은 돌고 돈다.’ 뭐 이런 뻔한 관용구처럼 패러다임이라는 것 역시 조금씩 변형될 뿐, 어둠 끝에 보이는 빛줄기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보다 나은 앞으로를 얘기하는 일을 멈출 순 없으니, 역시 이럴 땐 어떤 과거가 다시 반복되고, 돌고 돌아 앞으로 필요할 것인지 계산해보며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할 거다. 많은 영화들이 과거의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 얘기하는 것 역시 같은 까닭일 것이며, 이 과정에서 과거의 사건은 변형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선 변질되기도 하며, 현실에선 실행되지 못했던 결말을 부여하기도 한다.
쿠엔틴 타린티노(Quentin Tarantino)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은 이런 선택지 중 ‘실행되지 못했던 결말’을 골랐고, 타란티노가 가장 잘 해내는 방식, 즉 영화 그 자체로 악을 응징하는 방식으로 히틀러와 괴벨스, 나치 당원들을 벌집으로 만든다. 타란티노는 캐릭터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히틀러의 죽음을 두고 실제 벌어진 사건과의 괴리를 고민하다 다음과 같이 종이에 큼지막하게 써버렸다고 한다. ‘젠장, 그 인간을 그냥 죽여버려!’ 그리고 이튿날 그 글을 다시 읽은 뒤 결론지었다. ‘그래 이건 좋은 아이디어야’.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 세상에 등장했을 때, 미국과 영국, 독일의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다. 가디언, 뉴욕타임스 등의 미국과 영국의 주요 매체는 천박하다, 혐오스럽다, 자기만족적이다 등 타란티노에게 늘 따라붙는 평을 이어갔다. 하지만 독일에선 고루해져 가던 영화 이미지의 혁명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고, 히틀러와 그 일당들이 거침없이 난사 당하는 장면에선 극장 안의 대다수가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고 전해진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 개봉한 2009년 독일에선, 여전히 나치를 향한 분노가 유효했고, 실제와 다른 결말은 적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전염병의 불안과 그 불안의 대피처로 광기어린 부동산과 주택 열풍이 식을 줄 모르는 2021년, 우리에게 적절한 과거는 어디쯤 있을까.
최직경(Contributing Editor)
“빅쇼트(The Big Short)”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로 주가가 폭락하자, 지금이 주식 매수의 적기라는 유튜브 콘텐츠가 즐비했다. 그동안 저성장과 낮은 임금에 극심한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었을 터, 지금이 아니면 내 신분을 바꿀 기회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사람들은 주식, 부동산 시장에 뛰어들었다. 바로 이것이 ‘동학 개미 운동’이다. 2021년 1월 주식이 급등하면서 수익을 실현한 개인이 생겼고, 사회 곳곳에서는 주식을 하지 않는 것이 손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했다.
팬데믹발 경제위기 이전에 2008년 미국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subprime mortgage crisis)는 세계 경제 재앙을 초래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그로 인해 저성장의 늪에 빠지고 양극화는 더욱 심해졌다. 즉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구축한 변곡점이었다. 당시 월가(Wall Street)의 실화를 다룬 작품 “빅쇼트”는 현재 과열된 한국 주식 시장을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 여기서 ‘Short’는 ‘공매도’를 뜻한다. 쉽게 말해 투자 대상의 가치 하락에 없는 주식을 빌려 나중에 갚아 차익을 실현하는 투자 기법으로, 영화에서는 공매도로 큰 이득을 본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미국 은행의 허술한 주택 담보 대출과 그 연체율이 높았다는 실체를 포착한 월가의 투자자 마이클 버리(크리스천 베일)는 언젠가 다가올 폭락을 예견하고 13억 달러를 공매도 상품에 투자한다. 즉 미국이 망한다에 배팅한 것. 이에 미국 부동산 시장이 망할 리가 없다는 맹신으로 은행들은 부동산 시장 폭락에 배팅한 마이클 버리를 비웃으며 상품을 팔았다. 이 소식은 월가에 퍼져 은행원이었던 자레드 베넷(라이언 고슬링)이 투자가 마크 바움(스티브 카렐)과 함께 공매도에 뛰어들게 한다. 그러나 2005년부터 약 3년간 시장의 폭락은 오지 않아 그들은 고통스러운 인고의 시간을 보낸다. 은행과 언론에서는 부동산 시장이 결코 망할 수 없다는 이야기만 해댔다. 결국 2007년, 은행들의 대출금 회수가 이루어지지 않자 줄줄이 무너졌다. 마이클 버리와 ‘존버’를 탄 마크 바움은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두었지만, 그들은 어딘가 씁쓸한 표정을 남긴 채 결말을 맞이한다.
영화 “빅쇼트”는 어려운 경제 용어와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물들의 관계 탓에 몰입하기 어려울 것 같은 우려와 달리, 상당히 재치 있고 박진감 넘치게 진행된다. 경제를 다룬 것뿐이지 사실상 재난 영화와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당시 실존인물을 맡은 주연급 배우들의 입체감 있는 연기도 이 영화가 인정받는데 한 몫했지만, 무엇보다 감독 아담 맥케이(Adam McKay)가 당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여러 장치와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때의 이야기를 재조명하고 있다.
“옛날에 코인 사놓았으면 어땠을까?”, “내가 삼전 사놨으면 지금쯤 어땠을까?”, “그때 빚내서 집을 샀어야 했는데..” 등의 이런 말들이 오가는 2021년 1월의 한국. 또 ‘영끌’ 대출과 ‘마통(마이너스 통장)’ 개설로 시장에 뛰어든 배경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 암담한 현실, 팬데믹으로 인한 생계의 위협을 어떻게든 타개해야 하는 지푸라기 같은 심정이 있으리라. 한편 더 이상 기관과 외국인 공매도에 당하지 않고 승리할 것이라는 개인 투자자의 의지 역시 시장에 퍼져있다. 그러나 경제 위기 이후 회복의 과정에서 우리의 주머니는 은행과 거대자본에게 여지없이 털려왔다. 바라건대 우리가 빚을 못 갚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마음속 깊이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빅쇼트”는 지금 우리가 놓인 상황을 대처하기 위해 참고할 만한 작품이라고 본다. 더는 속지 않고 이겨내기 위해서 어떤 현자의 말을 새겨두고자 한다.
“인간의 실수는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최승원(Contributing Editor)
에디터 │ 최승원
이미지 출처 ㅣ Naver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