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생각보다, 일본의 음악 신(Scene)은 더욱 방대하게 얽혀 있다. K-POP이 세계 음악 시장을 점령하기 이전 J-POP이 황금기를 맞이했으며, 더욱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야마시타 타츠로(Tatsuro Yamashita)를 위시한 80년대 넘버링의 팝 레코드들이 ‘시티팝’이라는 이름으로 리바이벌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일본의 유산이 되었던 그것들은 지금 시대에 들어 나이트코어(Nightcore), 퓨처 펑크(Future Funk)와도 같은 작업 방식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으로, 언더그라운드로 내려가면 지금도 정식적으로 발매되지 못한 레코드와 CD들이 인터넷 어딘가 혹은 오프라인 음반 시장 구석에 박혀 있다. 보리스(Boris)와 보어덤스(Boredoms)를 위시한 일본 슈게이즈 신과, 피쉬만즈(Fishmans)로 대표되는 인디 록, 지하 아이돌 음악, 그리고 오프라인 음악 시장인 ‘M3’와 코미케(Comiket)에서 발매되는 수많은 CD들의 양은 일본의 음악 시장이 더욱 깊고 방대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 흐름이 중심 없이 우후죽순 양산되었다는 의견도 있어, 갈라파고스 제도를 비유로 들어 비판하곤 한다.
서문에 일본의 음악 시장을 짧게 언급한 이유로는 비밀스러운 일본의 음악 서클(Circle), ‘훈제 레코즈(燻製レコーズ, Kunsei Records)’ 또한 딥하고 매니악한 일본음악 시장의 형성에 한 몫 거들었기 때문이다. 구글에 해당 이름을 검색할 시 디스코그(Discogs)의 CD 구매 인증 정보만 나오며, 사운드클라우드를 제외한 어느 곳에서도 이들의 음악을 청취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토록 폐쇄적인 행보를 취하는 것일까? 이들은 어떤 음악을 하길래 대중에게 불친절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걸까?
燻製レコーズ
훈제 레코즈는 2017년, 그들의 첫 앨범 [燻製コンピ]을 오프라인 음반 시장 ‘M3’에 배포하며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공개적으로 이들의 음악을 청취할 수 있는 유일한 플랫폼인 텀블러(Tumblr) 공식 사이트의 소개문에는 ‘Not Net Label’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 뜻이란, 스트리밍을 포함한 어떠한 인터넷 플랫폼에도 음악을 유통하지 않으며, 오로지 오프라인 음반 시장인 ‘M3’를 통해 CD를 구매하여 CD 리핑을 해야만 그들의 음악이 대중에게 닿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는, 음악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다는 것. 정말 그럴까? 훈제 레코즈를 구성하는 멤버들을 살펴보자. 애니메이션 “팬티 스타킹 & 가터벨트”의 음악 프로덕션을 담당한 미츠노리 이케다(Mitsunori Ikeda), 일본의 로컬 DJ 유닛으로, 10년대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하이퍼주스(Hyperjuice)의 멤버 페이즈락(fazerock), 한국에선 스프레이박스(Spraybox)의 멤버로 익숙한 오브롱거(Oblonger), 버추얼 유튜버의 음악 제작으로 한층 더 주가를 높인 노련한 프로듀서 타쿠 이노우에(Taku Inoue) 등. 20년대에 들어 그들이 훈제 레코드의 이름을 빌려 비밀스럽게 음악을 릴리즈한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음악 외의 어떠한 프로덕션 또한 생각하지 않는, 소위 ‘돈이 안 되는’ 음악이라도 하겠다는 열정이 엿보인다.
그들이 처음 세상에 냈던 [燻製コンピ]을 포함, 현재까지 4장의 레코드들이 이들의 유일한 작업물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대의는 굵직한 장르를 기점으로, 현재의 유행을 예견한 것만 같은 장르를 주로 했다. ‘개러지, 드럼 앤 베이스, 테크노, 빅 비트(브레이크)’가 바로 그것. 아래 문단을 통해 그들의 작업물들을 더욱 자세히 풀어보도록 하겠다.
1. 燻製コンピ (2017.04.30. Released)
데뷔 앨범이자 첫 장르 컴필레이션인 [燻製コンピ]. 개러지를 중점으로 모인 7인은 각양각색의 개러지 하우스를 중점으로 앨범을 완성했다. 마치 디제잉을 전제로 하는 듯, 보이스 샘플을 흩트려놓아 120~130 BPM을 위시한 파티 튠의 하우스로 시작을 끊은 오브롱거의 “Feel Alive”부터, 발랄한 튠의 클래식한 개러지 하우스의 흐름으로 이어지다가, 중간중간 베이스를 곁들이는 모습까지. 그들의 데뷔 앨범부터 진부하지 않은 흐름의 작업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개러지와 베이스가 중점인 해당 컴필레이션 가운데, 프로듀서 타쿠 이노우에가 제작한 6번 트랙 “I Need Your Love”는 주목할만하다. 개인 사운드클라우드 계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본 트랙은 현란한 보이스 샘플링 컷팅 실력과 초기 덥스텝의 앰비언스, 변칙적인 브레이크와 정박의 4×4가 3박자로 조화롭게 맞물리는 명곡으로, 지금의 타쿠 이노우에를 있게 만든 시그니처 트랙으로 자리 잡는다. 비교적 최근인 2021년 6월 19일 훈제 레코즈의 공식 트위터 계정에 리포스트된 짧은 영상은 14라는 유저가 해당 곡을 디제잉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여러모로 해당 레코즈가 애정하는 트랙으로 입지를 다진 셈.
2. 燻製コンピ弐 (2018.04.29 Released)
[燻製コンピ]의 발매 후 1년 뒤, 훈제 레코즈는 새로운 장르로 다시 우리 곁을 찾아온다. 훈제 레코즈의 두 번째 장르 컴필레이션인 [燻製コンピ弐]는 드럼 앤 베이스를 중심으로, 영국에서 탄생한 클래식한 드럼 앤 베이스보다는 좀 더 업 템포의 파티 튠을 중점으로 한 악곡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눈썰미가 좋은 독자들은 눈치챘을 수도 있겠지만, 훈제 레코즈에 참여한 프로듀서들은 전부 로컬 DJ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그렇기에 파티에서 사람들의 흥을 돋울 수 있는 뱅어 트랙 위주로 컴필레이션을 작업한 것.
클래식한 드럼 앤 베이스, 나아가 정글로 이어지는 UK의 그것을 지향하지 않지만, 첫 번째 컴필레이션 [燻製コンピ]에서 보이던 진부하지 않은 흐름은 여전하다. 걸출한 드럼 앤 베이스 DJ인 메트릭(Metrik)이나, 최근 신을 뜨겁게 달구었던 체이스 앤 스테이터스(Chase & Status)의 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전체적으로 파티 튠을 중점으로 하면서도 실바니안 패밀리즈(Silvanian Families)의 웡키(Wonky) 트랙이나, 오브롱거의 리퀴드 펑크 트랙 “Singularity”처럼 여러 곳에서 변주를 놓는다. 하지만, 앨범을 견인하는 페이즈락의 첫 트랙 “Terror Smoke”는 강렬하다. 잔망스러운 색소폰 코드 후 이어지는 강렬한 베이스의 향연은 시작부터 리스너들을 강하게 사로잡는다.
3. 燻製コンピⅢ (2019.04.28 Released)
매년 봄이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두 번째 컴필레이션 [燻製コンピ弐]의 발매 1년 뒤 다시 새로운 장르, 그리고 한 층 업그레이드된 볼륨으로 돌아왔다. 세 번째 컴필레이션을 견인하는 장르는 테크노. 이에 멈추지 않고 그것의 파생 장르인 하드 그루브(Hard Groove)를 위시한 악곡들로 구성됐다.
하드 그루브. 웹진 레지던트 어드바이저(Resident Advisor, 이하 RA)가 투고했던 기사에 따르면, 하드 그루브란 굵직한 드럼을 베이스로 그루브를 유도하는 90년대 테크노 신에서 파생되었던 서브 장르를 일컫는다. 최근 펑크의 유행과 맞물려 드럼이 만들어내는 잔향 속 그루브가 테크노 신에도 밀접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
신의 유행을 조금 앞서간 시기인 2019년에 릴리즈되었던 [燻製コンピⅢ] 또한 테크노를 기반으로 한 드럼의 밀도가 높은 트랙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인디 레이블 트리키 트랙스(Trekkie Trax)를 운영하는 카페인터(Carpainter)의 컴필레이션 첫 트랙 “Postman”이 바로 그것으로, 정박의 강한 킥을 중점으로 하여 그루브를 이끌어내는 본 트랙은 하드 그루브의 유행을 정확히 예측한 트랙으로 기능한다. 디트로이트 튠과 하드 그루브, 그리고 업템포의 테크노가 맞물려 앨범을 이끌어가는 가운데 페이즈락의 퓨전 하드 그루브 트랙 “Dickies”는 이 앨범의 킬링 트랙으로 다가온다. 모두가 테크노를 주로 하는 와중에도 단연 튀는 색을 지닌 타쿠 이노우에의 퓨전 댄스홀, 그리고 실바니안 패밀리즈의 멜로우한 신스 웨이브 트랙까지. 세 번째 컴필레이션인 [燻製コンピⅢ]은 모두의 취향을 만족할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다.
4. 燻製コンピF (2020.10.25. Released)
매년 봄 잊고 있을 때 찾아올 것만 같지만 조금 시기를 늦춘 2020년 가을에 발매된 4번째 컴필레이션 [燻製コンピF]. 4를 상징하는 ‘F’가 붙은 [燻製コンピF]은 빅 비트를 기반으로 브레이크를 곁들인 퓨전 트랙들이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메이져한 레이블에 덥스텝 장르를 자주 출품하던 DJ이자 프로듀서 덥스크라이브(Dubscribe)가 참여한 앨범으로, 거친 드럼과 사이렌 샘플링이 돋보이는 트랙 “Front to the Back”을 드롭하며 앨범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 외 정석적인 브레이크 트랙인 이사겐(isagen)의 “Unite”, 칸 타카히코(Kan Takahiko)의 애시드한 브레이크 등 다양한 퓨전 브레이크가 앨범을 수놓으며 4번째 컴필레이션의 대미를 장식한다.
[燻製コンピF]에서 단연 주목할 만한 트랙은 미츠노리 이케다의 아이코닉한 트랙. “Game”으로, 특유의 캐치한 리듬과 피쳐링 아티스트 코코(KOKO)의 랩, 스크래칭이 맞물려 초반부를 견인하고, 중반부 이어지는 차임벨 멜로디와 변칙적인 브레이크를 교차시켜 상당히 정교한 빅 비트 트랙을 만들어낸다.
일본의 언더그라운드 중 하나인 동인 음악 신의 2017년은 격동의 해였던 것으로 필자의 기억에 남는다. 퓨처 베이스의 서브 장르인 카와이 베이스(Kawai Bass)가 더티 안드로이즈(Dirty Androids)의 악곡 “Cosmic Cat”을 시작으로, 스네일즈 하우스(Snail’s House)의 손에 의해 재해석되어 조금이나마 일렉트로닉 신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해였으며, 서양 DJ들이 이 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해도 2017년 무렵이었다.
그중에서도, 남다른 인사이트로 모여 비밀스럽게 레이블을 조직해 비범한 작업물을 만들어내던 레이블 훈제 레코즈를 잊을 수 없다. 10년대의 동인 음악 신은 서양의 그것에 견주기엔 미약한 퀄리티였기 때문에 그들의 작업물들이 더욱 빛을 발했다. 하지만 오프라인 행사가 주로 이루어지던 동인 음악 신의 폐쇄성 탓에 대중에게 닿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20년대가 도래한 지금, 그들은 4장의 레코드 외 아무런 작업물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껏 유행을 앞서간 장르를 선보여온 그들이기에 언젠가 릴리즈할 다음 작업물을 하염없이 기다리게 된다. 마지막 작업물로부터 4년이 흐른 2024년 지금, 훈제 레코즈가 다루게 될 다음 장르는 무엇일까? 어쩌면 현 일렉트로니카 신에 큰 반향이 도래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잠적하는 것은 아닐까. 짧은 생각을 남기며 글을 마친다.
이미지 출처 | Kunsei Reco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