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이러하다. G-1은 알겠는데, 옆에 있는 AN-J라는 것도 G-1과 상당히 닮았다. 여기에 M-422까지 등장하니 도무지 뭐가 진짜인지 알 수가 없다. B-3 역시 AN-J와 비슷하게 생겼고, M으로 시작하는 형제도 있다. 그러나 여러 복각 브랜드에서는 심지어 각 개체를 구분해서 생산하고 있다.
A-1, B-3, MA-1, D-1, CWU 36, 45, 문제의 AN-J까지…. 수많은 제품명을 가진 항공 점퍼인데 막상 비교해보면 그 외형은 또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이 엇비슷한 녀석들의 명칭을 왜 따로 부르는 걸까. 각각의 알파벳과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천정부지로 오른 뒤 도무지 떨어질 일이 없어 보이는 절망적인 이베이(eBay) 시세 앞에서 구매력이 자꾸만 급감하는 이 시점, 할 일도 없는데 각 제품의 대략적인 역사까지는 힘들겠지만, 관심 있는 제품군 사이의 관계와 혹시라도 추측 가능한 라벨의 의미를 간단하게나마 정리해보자는 것이 이 글의 출발점이었다.
시작은?
시작은 아마도 WW1일 것이다. 초기 미군의 비행기에는 조종석에 캐노피가 없었고, 당연히 존나 추웠다. 1917년 설립된 에비에이션 클로딩 보드(Aviation Clothing Board)는 조종사가 비행 중 얼어 죽지 않도록 소위 말하는 헤비듀티 아우터를 만들어야 했고, 사실상 여기에서 오늘날 항공 재킷 대부분의 디테일이 정해진 모양이다. 가령 장갑을 착용한 조종사가 지퍼를 여밀 수 없으니 다른 이의 도움을 받기 위해 왼쪽에 지퍼가 달려있다던가, 오늘날에는 묘하게 거추장스러운 MA-1 내부의 윈드 플랩(Wind Flap), 혹은 가죽 제품의 퍼 라이닝(Fur Lining) 등의 디테일이 당시 비행 여건을 고려한 디자인 일부다.
[같은 제품은 그닥 관심이 없을 테니까 초기의 제품 사진을 싣는다. D.G. Logg가 1916년 캘리포니아의 비행 훈련 학교에서 훈련받던 중 자세 잡고 찍은 사진]
바야흐로 플라이트 재킷의 조상님으로 분류되는 듯하다. 이름부터 에어 포스(AIR FORCE)의 A, 처음을 뜻하는 ‘1’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A는 하계용, B는 보통 동계용에 붙었다. 1922년 개발되기 시작한 본 제품의 본격적인 출생 시기는 1927년 11월 7일. 늘 그렇듯 제작사에 따라 모양새는 제각각이겠지만, 기본적으로 우리가 좋아하는 스탠드 칼라(Stand Collar)와 7개의 단추 여밈, 플랩 포켓(Flab Pocket), 허리와 소매 밴딩이 짱짱하게 들어간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1931년에 나오는 이 바닥 전설의 역작 ─ 리얼 맥코이 A-2 ─ 덕분에 실제 군복으로 사용된 역사는 대략 1927부터 1931까지 4년 정도로 분류하지만, 누군가는 오히려 다양한 소재로 변주되며 WW2까지 여기저기 사용되었다고도 말한다. 지금에도 다양한 브랜드가 열심히 복각할 뿐 아니라 단추 여밈과 스탠드 칼라와 같은 특유의 클래식한 디자인 덕에 발스타(Valstar)를 비롯한 이탈리아 클래식 브랜드들조차 본 모델을 베이스로 한 블루종을 내놓기도 한다.
[A-1의 과거와 현재]
[울 소재로 제작한 WW1 시절의 모델]
[유럽 브랜드에서 재해석한 A-1 블루종 모델]
참고로 해군에서도 비행기를 운용할 일이 있다 보니 항공 재킷을 착용했는데, 나름 그쪽에서 A-1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제품은 뭐니 뭐니 해도 37-J1이다. 37-J1 역시 1927년부터 1932년까지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복각 마니아들에 따르면 A-1이 37-J1을 베이스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일본의 복각 브랜드 페로우즈(Pherrows)의 제품 소개 글은 A-1을 해군 컨디션에 맞춰 개선한 게 37-J1이라고도 하는 거로 봐서는 확실한 역사를 장담할 수 없다.
[해군용으로 제작된 가죽 모델]
[실제 이베이에서 4,550달러에 판매된 제품]
A-2
그리고 드디어 나왔다. 오늘날 ‘가죽으로 이루어진 항공 재킷’이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기준이자, 감히 일본발 복각 브랜드의 자궁이라 불러도 무방한 그 제품. 실제 90년대 일러스트레이터인 오카모토라는 양반이 ‘제대로 된 A-2를 갖고 싶다’라는 동기로부터 시작해 A-2를 만들다 이걸 팔아보자 해서 뽀빠이 매거진(POPEYE Magazine)과 함께 300벌 한정을 만들어 판 것이 리얼 맥코이(Real Mccoy)의 시발점이다.
1927년 제작된 이래 1930년 테스트를 거쳐 1931년 5월 9일 비로소 정식 제품이 완성됐다. 밀스펙은 94-3040, 드로잉 넘버는 30-1415로 분류하지만, 초기 디자인 시트(Designation Sheet)에는 31-1415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A-2니까 당연히 A-1의 후속작이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A-1에서 나타난 몇 가지 단점을 개선했는데, 지금이야 멋이 우선이나 어쨌든 군복으로 지급된 옷이니 개선의 포인트는 언제나 효율성이다. 가령 그 전에는 이런저런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말가죽(Horsehide)을 주력 사용했다. 이유는 말가죽의 질이 좋아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당시 말가죽 수급이 제일 쉬워서…. 더불어 30년대 지퍼가 실용화됨에 따라 단추는 지퍼로 교체했다.
이런 A-2이지만, 심지어 오늘날 복각되는 제품조차도 기능성 면에서는 선뜻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 지나치게 단단한 말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비행기를 조종하는 일이 워낙 힘들었는지 1943년 무렵부터 A-2를 다른 제품으로 바꾸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 눈이라는 게 그때나 지금이나 얼마나 큰 차이가 있으랴. 워낙에 간지가 나서인지 군인 사이에 인기가 많았던 탓에 실제 한국전쟁 당시 사진을 봐도 꽤나 많은 군인이 A-2를 입고 있다. 심지어 초기 전쟁사의 사진을 보면 높은 고도를 오르지 않더라도 일단 입고 있다. 그야말로 항공 재킷의 멋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제품 되시겠다.
[오래전 일본 바이어의 항공 점퍼 구매 광고, A-2와 B-3, G-1, B-10의 제품을 구매했다]
G-1
여기서 갑자기 나온다. 사실 공군 쪽은 아니고, 사실상 해군의 A-2라 해도 좋을 옷으로 이미 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밀스펙을 바꿔가며 꾸준히 제작되어 온 전설의 옷이다. A-2가 득세하던 시절 대략 M-422, 혹은 M-422A 등으로 불리던 제품. 다만, 상술한 바와 같이 공군 쪽에서는 A-2의 인기가 워낙 좋아 G-1 계통의 디자인은 WW2까지도 전혀 기를 펴지 못했다. 기록에 따르면 플라잉 타이거즈(Flying Tigers) 출신은 해군과 함께 지내며 해군 쪽의 장비를 꽤나 많이 썼다고 하고, 그러면서 G-1(M-422A)을 입기도 했다.
[플라잉 타이거즈 페인팅이 새겨진 M-422]
해군은 아무래도 배를 타고 여기저기를 이동하는 일이 많아 공군에 비해 가죽 수급이 좀 더 용이했던 모양. 그래서 빳빳해서 불편한, 그렇다고 또 내구성이 좋다고 하기도 민망한 말가죽 대신 페르시아나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얻은 염소 가죽을 사용했다 ─ 강도 랭킹에서 염소 가죽이 2등, 말가죽이 5등이었다고 한다 ─ .
여기까지만 하면 해군 옷인지라 다루는 모양새가 조금 그렇지만, 1943년에 공군(The Army Air Force: AAF)과 해군이 M-422A를 베이스모델로 한 ‘플라이트 재킷의 공동화’를 목표로 AN-J-3(AN-J = ARMY + NAVY + Jacket)를 제작한다. 그렇게 대전 중에는 M-422 내지 AN-J-3 등으로 불리며 점차 그 세력을 넓힌 본 제품은 대전이 끝난 후 1947년 공식적으로 G-1이라는 이름을 달며, A-2에 이어 공군의 주력 재킷 중 하나가 된다. 이게 얼마나 뒤늦냐 하면 후술할 B-15이 발매된 이후에나 G-1이 공군 피복으로 등장했다는 사실.
그러나 사실 공군이고 해군이고 연도고 그런 것은 별 관심이 없고, 사실상 오늘날 우리 동네에서는 A-2, B-3와 함께 가죽 항공 재킷을 논할 때 가장 손꼽히는 제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여러 밀스펙 마니아는 G-1이 흔해서인지 해군 제품으로서의 진정성을 워낙 중시해서인지 모르지만, M-422, M-422A, AN-J-3 같은 역사적인 제품을 좀 더 인정하는 것 같다.
[좌측부터 G-1 두 벌과 M-422A 한 벌, 이렇게 봐서는 무슨 차이인지 알기 어렵다]
[이럴 때는 목 뒤 칼라를 펼쳐보면 알 수 있다]
외관상 나타나는 A-2와의 가장 큰 차이라면, 실은 무척 멋있지만, 실상 기능상 부족함이 많았던 A-2의 보온성을 개선하고자 ─ 실제 초기 납품명은 A시리즈의 의미가 그렇듯 ‘하계 항공 점퍼 A2’ 정도였다고 한다, 여름에도 말가죽을 입는 아메카지 수호신들이 어쩌면 진짜 굉장한 멋쟁이였던 것이 아닌가… ─ 칼라에 무지막지한 무통 퍼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A-2의 부족한 활동성을 개선하기 위해 팔 쪽에 스윙백 옵션을 첨가했고, 필요 이상으로 짧았던 A-2에 비해 기장이 살짝 늘어났다.
[영화 탑 건(Top Gun)에도 등장한 바로 그 제품]
B-3
이쯤 동계용 제품 쪽을 보자면, 아무래도 여기가 ‘봄버 재킷’이란 말이 어울릴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말 그대로 고도 25,000피트에서 폭탄을 떨어뜨려야 하는, 즉 엄청 추운 곳까지 올라는 조종사가 주로 입었던 제품이다. 그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건 역시나 B-3 재킷이다.
[B1 혹은 B2라 추정되는 재킷도 있다, 아마도 최 우측의 인상 쓴 사람이 입은 게 B-2. 이쪽은 말가죽으로 된 제품도 있고, 무엇보다 주머니가 없다. 이때의 B-1이나 B-2 자체가 동계용 원피스 슈트를 그냥 반으로 잘라서 만든 옷인데,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1934년부터 본격적으로 적용된 B-3의 경우 앞서 본 A-시리즈, 하계용 재킷보다 더 터프하고 따뜻해 보인다. 일단은 무조건 양가죽이 쓰이고, 그 안에는 양털 라이닝이 두껍게 들어간다. 칼라를 세웠을 경우에도 앞서 본 제품처럼 단순히 단추 몇 개로 여미지 않고 아예 가죽 스트랩으로 단단히 묶을 수 있게 했다. 기장도 앞 제품보다 좀 더 길고, 하단 역시 가죽 스트랩을 사용한다. 하계용 제품에 있던 소매나 허리춤의 울 소재 밴딩 대신 옷 밖에 양털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그야말로 방한용 재킷이다.
[B-3를 입고 35,000피트로 올라가기 직전의 테스트 파일럿]
그러나 무식하리만큼 털을 빡빡하게 채워 넣어 곱창처럼 밖으로 마구 빠져나와 있는 통에 관리 측면에서 불편을 호소하는 조종사가 꽤 있었다. 그들이 주로 선택하는 대안이 바로….
[외부로 돌출된 양모 내피]
AN-J-4
아까 해/공군 캡슐 협업 4번째 시리즈, 해군 쪽에서는 비슷한 제품으로 M-445가 있었는데, 따라서 AN-J-4는 역시나 B-3과 M-445를 베이스로 해 약간의 디테일들을 수정한 버전인 듯하다. 그러니 대략 G-1 / M-422 / AN-J-3가 매칭된다면 B-3 / M-455 / AN-J-4라 할 수 있겠다.
디테일의 수정이라면 앞서 보았던 옷 밖의 양모가 더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확실히 외관상 더욱 깔끔하고, 군복의 관점이 아닌 일상에서 입기에는 좀 더 좋다. 그리고 주머니 쪽의 기능성도 B-3 대비 훨씬 좋다. 일단 고맙게 양쪽 모두 주머니가 있으며, 감사하게 버튼이 달린 덮개도 있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오리지널을 고집하는 마니아 입장에서는 B-3에 비해 훨씬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대체품이다.
[손목 밴딩을 추가한 M-445 모델]
따로 섹션을 나누지 않고 적자면, B-3는 워낙에 입기 힘들기도 했거니와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운전실의 내부 온도도 조금씩 따뜻해지기 시작했기에 그에 따라 효율과 비용에 근거해 발전을 꾀하며 조금 경량화한 버전이 나왔고 그중 하나가 바로 B-6다. 일단 기장이 짧고, 무통 털 길이도 반 정도로 줄였다. 실루엣 역시 꽤나 슬림하다. B-3을 헤비 존(Heavy Zone)으로 분류한다면, 이쪽은 인터 메디에이트 존(Inter Mediate Zone)쯤 되겠다.
[좌측부터 B-3, A-2, B-6를 착용한 군인들]
여기 B-6와 유사하게 생긴 D-1은 ‘D-1 메카닉 재킷(D-1 Mechanic Jacket)’ 등으로 불린다. 대략 시기상으로 B-6가 나오던 시절 나왔던 제품이라는데, 조종사용은 아니고 지상의 엔지니어를 위해 만들어진 옷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기장은 보다 더 짧고, 품은 좀 더 크다. 뭔가 이런 무심한 디자인 탓에 A-2 위에 D-1을 입는 조종사도 있었다고 한다. 스펙이 단순할 뿐 아니라 디자인 역시 다른 B시리즈에 비해 상대적으로 얌전한 탓에 다양한 복각 브랜드의 단골 모델이기도 하다.
경량화와 동시에 엄청나게 헤비한 버전도 만들어졌다. B-7이 바로 그것. 알래스카에 가는 조종사용으로 제작된 재킷으로 경량화가 ‘짧아지고 얇아진다’ 였다면, B-7은 ‘길어지고 두꺼워진 제품이다. 거기에 코요테 털이 달린 후드까지 달린 이 제품은 1942년 이후 도무지 이윤이 안 남아서 생산 중단되었다. 사실상 공군 계통 옷 중 가장 따뜻하고 무거운, 무시무시하게 무식한 옷이리라.
[리얼 맥코이가 복각한 D-1, 단순하고, B-3보다 저렴하다]
[보기만 해도 더운 B-7, N-3B의 모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下편에 계속…
글 │ 김선중
커버 이미지 │ 박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