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 모두(Chi Modu)는 1990년대 힙합을 상징하는 위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포토그래퍼다. 그는 당시 소스(Source)지에서 경력을 쌓으며, 지금 전설로 추앙받는 래퍼들과 어울렸다. 투팍 샤커(Tupac Shakur, 이하 투팍), 노토리우스 비아이지(Notorious B.I.G, 이하 비기), 우탱 클랜(Wu-Tang Clan), 레드 맨(Red Man), 이지 이(Easy-E), 스눕 독(Snoop Dogg)…… 그들이 자신의 라임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갈 때, 치 모두 역시 그 순간과 함께했다. 소스 지 표지를 장식한 30장의 인상적인 사진 외에도 그는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모든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했다.
치 모두가 지난 2월,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 커뮤니티 라디오와 스테레오 바이닐스가 협조한 덕분에 인터뷰는 원활하게 진행됐다. 지천명을 넘긴 포토그래퍼의 관록, 새로운 세대를 바라보는 감상 그리고 힙합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공유한다.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힙합은 메인스트림과는 거리가 먼 문화였다. 당시 분위기를 듣고 싶다.
힙합은 거짓이 없기에 아름답다. 요즘은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래퍼에게 진정성은 어떤 필수적인 덕목과도 같았다. 90년대 힙합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역시 날 것의 본질(Raw Essence)을 유지하는 자세다. 90년대는 새로운 문화가 태동하는 시기였고, 우리는 미지의 땅을 밟고 있었다. 오늘날의 힙합 뮤지션을 절대 깔보지는 않는다. 다만 당시 신(Scene)에 있던 이들은 흙밭에서 길을 닦았다.
포토저널리즘을 공부하다가 힙합 신에 뛰어들었다. 어떤 계기로 래퍼들과 작업하게 되었나?
할렘 지역 신문에 기고하고 15달러를 받았다. 그러나 필름이 8달러, 인화하는 데 8달러, 신문사까지 지하철로 가져다주고 오는 데 5달러가 들었다. 손해 보는 장사였지. 하하. 그렇게 사진 작업을 이어가다가 ‘소스’라는 잡지를 알고 나서 사무실로 찾아갔더니 마침 소속된 포토그래퍼가 없다고 하더라. 그 기회로 많은 뮤지션과 어울리며 사진을 찍었고, 소스 지의 위상이 올라갈 때마다 포토그래퍼로서 내 위치도 같이 격상했다.
사실, 힙합은 내 세대 이전부터 살아 숨 쉬던 문화였다. 런 디엠씨(Run DMC),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 엘엘 쿨 제이(LL Cool J)와 같은 레전드를 보라. 다만 내가 한창 사진을 찍을 때는 힙합이 분명 더 높게 도약하던 시기였고, 이 문화가 커질 때 나는 마침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 그 움직임에 일조했을 뿐이다. 90~91년도의 힙합 에너지는 정말 신선했다. 미디어가 그들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았지. 나는 그들을 더 유명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 아티스트를 찾고 있다는 건 세계가 그들을 찾고 있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세계란,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에 더 가깝다.
작년 9월 13일, 투팍 샤커 사진집 ‘언카테고라이즈드(UNCATEGORIZED)’를 냈다.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투팍의 사진을 다시 펼쳐보면서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책임을 완수했다. 투팍은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친 래퍼지만, 사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이 사진집은 투팍이 하늘로 간 지 20주기가 되는 2016년 9월 13일에 공개되었다. 20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이제 그의 죽음을 기릴 수 있는 시간이 왔다고 느꼈다. 투팍은 만인이 사랑한 뮤지션이었다. 그러니 이 사진은 내 것이라기보다는 결국, 대중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사체로서도 그는 프로였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사진을 찍는지 정확하게 이해했고, 그 방식을 따랐다.
왜 20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사진을 묵혀둔 건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투팍이 죽은 지 10년이 지났을 때는 그저 오래된 사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는 이 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추앙받았다. 2007년으로 시간을 되돌려보자. 대중은 넬리, DMX, 에미넴과 같은 래퍼에게 열광했고, 아무도 90년대를 되돌아보지 않았다. 사이클이 돌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 지미 헨드릭스, 롤링 스톤즈, 비틀즈와 같은 밴드가 전설이 되었고, 비기, 투팍 그리고 나스가 다시 전설이 되어가는 중이다.
투팍과 비기가 전설이 되었듯, 당신이 촬영한 이들의 사진도 오랜 시간 팬들의 뇌리에 머무를 것이다. 당신이 이 둘을 찍을 당시 동, 서부의 관계가 상당히 악화되지 않았나? 얼마나 험악한 분위기였나?
스위스라는 국가를 알고 있나? 포토그래퍼는 마치 스위스 같은 거다. 그들은 동, 서부에 관한 내 의견을 듣기 위해 나를 그 자리에 부른 게 아니다. 나는 오직 사진을 찍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양쪽을 모두 좋아했고, 잘 알았다. 그리고 사실, 동부와 서부의 문제는 별일 아니었다.
미디어가 부추긴 것일까?
미디어 이전에 팬이 있다. 내가 비기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여전히 ‘Fuck Biggie’라는 댓글이 달린다. 그들은 투팍과 비기를 만나본 적도 없지만, 한쪽의 열렬한 팬이라는 이유로 다른 편을 증오한다. 중요한 건 자신의 싸움이 아닌 걸 지금까지도 이야기한다는 사실이다. 성숙하지 않은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다. 동부와 서부 래퍼들은 성숙하지 않을 때 다퉜다.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도 그 숱한 싸움에 큰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오’다. 투팍과 비기는 세상에 중요한 존재였고, 나는 그 둘 모두에게 경의를 표한다. 당신이 투팍을 더 좋아하든, 비기를 더 좋아하든 간에 나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때 당신은 몇 살이었나?
나는 그들보다 세 살 정도 많았다. 그 둘의 나이는 멈췄지만, 나는 이제 50살이 됐다. 이게 현실이다.
Ph. Chi Modu
당신이 촬영한 래퍼들은 피사체로서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었나.
서울 길거리에 있는 일반인이나 래퍼나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중심에 뭐가 있는지 카메라에 담을 뿐이다.
사람들의 인간성, 중심에 자리 잡은 무언가를 사진으로 끌어내는 특별한 기술이 있다면.
내가 이곳에서 당신을 편안하게 만든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거다. 사진을 찍을 때도 최대한 그들이 나를 편안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나는 내가 촬영하는 사람을 완전하게 존중한다. 당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한다면 그들도 당신을 믿을 것이다.
처음 찍은 사진을 기억하는가.
뉴저지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찍은 셀프 포트레이트 사진이다. 1986년, 아마도 스무 살 즈음 내 첫 필름 카메라로 찍었다.
사진 기술의 발전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필름 사진은 도전이다. 침핑(Chimping: 사진을 찍고 나서 바로 LCD 스크린으로 확인하는 행위)도 할 수 없고 실수하기 쉬운 장비라 반듯하게 배워야 한다. 계산이 필요한 수학이나 물리학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오랜 경험을 쌓으면 사진을 찍고 현상했을 때 어떤 이미지일지 예측할 수 있다. 한 번의 슈팅 이후로 피사체가 자리를 떠날 수도 있고, 촬영한 뒤 즉시 사진을 확인할 수도 없으니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사진이 쉬워진 거지. 디지털카메라는 모든 사람을 포토그래퍼로 만들었지만, 좋은 사진을 찍는 게 어렵다는 교훈도 줬다. 하하. 20년 전쯤 유명한 사진작가가 많았지만, 지금도 그 명성을 유지하는 이는 몇 명 없다. 시간이 좋은 사진을 골라준다. 작가가 어떤 것에 집중해왔는지, 뭘 지켜내려고 했는지는 세월이 흘러야 알 수 있다.
지금의 10~20대에게는 외려 필름 카메라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필름에 익숙한 세대가 아니라 그런지 그 불편함까지도 즐긴다고 해야 하나.
나는 필름과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디지털카메라와 구분되는 분명한 장점도 있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나는 요새 필름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필름 사진은 나에게 전혀 새롭지 않다. 이건 그냥 내 인생이었으니까. 젊은 세대가 필름 사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물론 흥미롭다. 많은 이들이 요새 인스타그램에 삽입하는 ‘Film Photography Only’와 같은 문구가 나를 웃음 짓게 한다. “70년대도 아닌데 왜 저러는 거지?” 하면서. 하하.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은 사진의 핵심이라면?
사진의 핵심은 여전히 타이밍과 구성요소(Composition)다. 아무리 장비가 발달한다고 해도 이 두 가지 요건을 바꿀 수는 없다. 첨단 기술이 당신의 사진에서 무엇을 지켜나갈지 가르쳐주진 않는다.
90년대 힙합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치 모두라는 이름은 몰라도, 당신이 찍은 사진은 분명 한 장쯤 어디선가 봤을 것이다.
그렇다. 그 덕분에 나는 바르셀로나에서도, 런던에서도 지금 서울과 비슷한 수준의 좋은 대우를 받는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내 사진이 지금도 사랑받고 있어서다. 나는 방금 만났을 뿐인데, 그들은 이미 내 사진과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교감한 것이다.
비교적 근래의 힙합도 즐기는가?
에이샙 라키(A$AP Rocky), 칸예 웨스트(Kanye West), 드레이크(Drake) 등등 많이 듣는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내가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를 좋아할 것 같다고 묻는데 사실, 그렇진 않다. 물론 그는 훌륭한 래퍼지만, 아직 자신의 모든 걸 펼쳐내지 않은 채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버린 것 같다. 다시 그걸 기억해내기엔 이미 늦은 것 같다.
그래도 그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다.
명성이 스타로 살아남기 위한 필수조건은 아니잖나. 엠씨 해머도 엄청나게 유명한 시절이 있었다고. 아까도 말했듯 유명한 사진작가는 몇십 년 전에도 많았지만, 지금까지 그 이름이 들리는 이는 몇 없다. 오늘날까지 내 이름이 존재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계속 내 일을 했고, 다른 영역으로 눈 돌리지 않았다. 뮤직비디오를 찍은 적도 없고 다른 일을 해본 적도 없다. 나는 내 것에 계속 집중했고,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내 작업이 인정받는 건 아닐까 한다. 나는 힙합 포토그래퍼가 아니지만, 굳이 나를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다. 투팍 포토그래퍼라고 불러도 개의치 않는다. 내 사진이 정말로 좋았다면, 그것 말고도 내가 찍은 사진들을 찾아볼 테니까. 리서치하기도 쉬운 시대 아닌가. 굳이 내 정체성을 내가 규정할 필요는 없다. 나를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불러라. 나는 그저 사람들이 내가 찍은 사진을 좋아하면 그만이다.
Ph. Chi Modu
언제 셔터를 누르는가?
사각 프레임 안에 무엇을 안에 넣고 뺄지 빨리 결정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인지한 채 셔터를 눌러라.
힙합 뮤지션을 찍은 사진 말고도 어떤 작업을 좋아하는지 말해 달라.
여행을 다니면서 사람을 찍는 걸 좋아한다. 사진작가로서 사람과 그 사람의 인생을 보여주고 싶다. 예멘의 사람이건 래퍼건 말이다. 대상은 변해도 기술은 같다.
한국 의류 브랜드 스테레오 바이닐스(Stereo Vinyls)와 협업 컬렉션을 선보였다. 어떤 기준으로 사진을 골랐는지 궁금하다.
스테레오 바이닐스 크리에이티브 팀을 믿고 권한을 넘겼다. 그들이 고른 사진이 내 마음에도 들었다.
Ph. Chi Modu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 앞에서 찍은 비기 사진은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뉴욕의 왕’이라는 콘셉트였다. 당시 뉴욕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배경에 보이는 세계무역센터였다. 이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이 사진이 지금처럼 큰 의미로 남을 줄은 몰랐다. 그로부터 1년 뒤에 비기는 죽었고, 다시 4년이 지나 트윈 타워가 무너졌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지.
당신이 한참 활동할 시기에 유명세를 누리던 래퍼들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다. 다음 세대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소회라면.
몇 십 년 전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이전 세대는 우리가 하는 일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언제나 새로운 세대는 더 유명해질 것이고 승리할 것이다. 새로운 세대가 이전 세대에게 표현하는 존중도 중요하지만, 이전 세대 역시 새로운 세대를 반갑게 맞아야한다.
진행 / 글 ㅣ 권혁인 최장민
사진 ㅣ 김현수, 권혁인
도움 ㅣ SCR Radio, Stereo Viny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