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로 운을 띄워야 할지 모르겠다.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그 모습에 압도당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닥에는 이미지 자료가 흩뿌려져 있었고, 방 안에는 온통 유화를 연습한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카오스’라고 소개했지만 글쎄. 그의 사상과 목표가 또렷한 언어로 구현되자 ‘혼돈’은 오히려 낯선 단어처럼 들렸다. 그림쟁이 박현호와의 인터뷰를 하단에 공개한다.
그라피티로 처음 이름을 알렸다. 어떤 계기로 길거리를 택한 건가?
디제이 크러쉬(DJ Krush)가 내 세상을 열어주었다. 크러쉬뿐만 아니라 힙합이라는 음악을 알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음악이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게 마치 앞에 무언가 그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힙합이라는 것에 속하고 싶었고, 자연스레 그라피티(Graffiti)를 택했다.
학창시절, 호주로 유학을 떠났다. 그 시절의 경험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순전히 조기유학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께서 공부 좀 하라고 호주 시골 동네에 보냈는데, 그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거주지를 멜버른으로 옮겼다. 힙합을 접하고 나서 뒤늦게나마 멜버른이 세계적으로 그라피티가 유명한 도시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부터 스프레이를 들고 연습했다. 태깅하다가 남들과는 다른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결심했다. 한국인을 너무 몰라주니 답답한 마음에 한국을 드러낼 수 있는 소재를 그렸다. 장승을 주로 그렸는데, 그게 나를 지켜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태그네임도 한국어에서 따온 걸 쓰고 다녔다.
음악과 박현호의 그림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 같다. 음악의 어떤 점이 당신을 사로잡았나?
음악의 모든 것에서 영감을 받았다. 가사, 곡의 특성 같은 것들. 모웩스(Mo’wax) 사운드가 대체로 영화나 소설에서 샘플을 많이 따오지 않나? 영화 대사나 구성요소를 음악에 입히면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모웩스 아티스트가 곡을 쓰는 방식처럼 나도 작업할 때, 내 삶을 이루는 여러 가지를 작품에 섞는다. 힙합의 코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억압받던 흑인이 내는 진실한 목소리가 아닐까. 그 정신, 음악, 삶이 나와 잘 맞았다. 그건 한국인의 역사와도 일맥상통한다. 오랜 역사에 걸쳐 외세에 침략당한 민족 아닌가. 그 한(恨)의 정서가 미국 땅에서는 재즈, 힙합이라는 문화로 발전했다. 지금 세계의 흐름에 반대하는 것.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한번 되돌아보자는 그 정신이 나와 잘 맞았다.
음악 외에도 끌리는 게 있다면.
카모플라주에 완전히 빠져있다. 침낭에서 잘 정도니까. 카모플라주는 아름다운 무늬지만, 정작 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서로 총을 쏘고 죽이지 않나. ‘위장’이라는 말이 지금 이 세상을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 아름다운 겉모습과 다른 아이러니지.
그렇다면 군대에서 더 많은 영감을 받았을 것 같은데.
군대 생활이 몸에 잘 맞았다. 예술가에게 악영향을 끼친다고 느낄 법한데, 뜻밖에 책 읽는 습관도 들이고 다양한 경험을 체득할 수 있었다. 언제 또 군 생활을 해보겠냐는 마음에 DMZ 수색대까지 지원했다. 무전병으로 근무하면서 GP 기록을 읽던 기억이 난다. 무척 재미있어서 꽤 오래된 기록까지 찾아봤지. 당시 상황을 상상하면서 나만의 이야기를 그려나갔다. 근무를 제외한 시간은 전부 그림 그리는 데 썼다. 아크릴로 그리면서 색도 화려하게 써보고, 아주 기고만장하던 시기였다.
빨간 배경에 그린 제비 무리가 굉장히 인상적이다.
이것도 군대에서 겪은 일을 바탕으로 그린 거다. 인적 하나 없는 854m 고지에서 끝없이 펼쳐진 나무와 산맥에 둘러싸인 채 근무를 섰다. 가을쯤 되면 안개가 죽 깔리는데, 이게 마치 꿈이나 영화에서만 나올 법한 정경이다. 철이 되면 제비가 요새 위로 날아가곤 했다. 제비 떼가 근무지에 딱 붙어서 지나가는데 그때 날아가는 그 생생한 소리가 내게 살아있다는 어떤 강렬한 느낌을 줬다.
그라피티 태그네임을 여러 번 바꾸었다. 어떤 의미에선가?
그냥 여러 가지를 해보고 싶었다. 조금 더 포장해서 말한다면, 한국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었다. 2005년, 처음 그라피티 작업을 할 때는 불안정한 나 자신을 스스로 독려하기 위해 ‘STEADY’로 정했다. 2007년에는 ‘BIT(=빛)’으로 바꾸어 본격적으로 시가지 태깅을 시작했다. 답답하고 앞이 깜깜했던 시기라 빛이라는 모토를 가지면 그거라도 보면서 달려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거기서 ‘BITKR-11/BITAU-MEL’로 또 한 번 바꿨다. 서울, 대한민국을 알리고 싶었다. 어떤 강박 같은 게 있었지.
결국,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도 잘 모르는 사람이 ‘나 한국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없으니까. 필연적으로 다시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대학교에서 배운 디자인이 많은 도움을 줬나?
2010년,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디자인을 계속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원체 모험하는 걸 즐기는 성격인데, 컴퓨터 앞에 앉아있어야만 하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그라피티를 그렸다. 그 뒤로 더 그림에만 집중하고 살았던 것 같다.
어느 날부터 그라피티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됐다.
그라피티에 회의감이 들었다. 벌금으로 스트레스도 받았고, 언제부턴가 더는 새롭지 않다고 느꼈다. 그러다 보니 그냥 캔버스에 뭔가 그리고 싶었다. 초창기에는 퓨츄라(Futura)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디제이 크러쉬의 앨범 커버로 그린 작품 스타일을 많이 따라 했다. 지구가 멸망할 것 같은 아포칼립스 무드라고 해야 하나. 내가 느끼는 감정과도 잘 맞는 것 같았다.
어떤 감정 말인가?
현대인은 모두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단절되어 있기도 하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소통이 더욱 편리해졌는데, 왜 우리는 더 외로워졌을까? 당시 감정과 그 음울한 무드가 잘 맞았다.
유화에 집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작년 12월부터 유화를 그리고 있다. 최두수 작가님이 언젠가 한 번 찾아와 “현호야, 난 왜 네가 유화를 그리지 않는지 모르겠다”라고 딱 한 마디하고 가셨다. 그때 내가 쏜 로켓의 방향이 잘못 계산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단순히 재료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것만 같았다. 많이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작가님은 언제나 내 아크릴 작업을 보고 나서 ‘너무 힘들다. 사람이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라며 현실적인 조언도 잊지 않으셨다.
길거리에서 그라피티를 하다가 이제 갤러리에 캔버스 작업을 걸게 되었다. 힘든 점은 없었나?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분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싫었지만, 나 역시 그들의 예술 세계를 모르고 으스댔던 것 같다. 내가 경솔했다. 많은 작가분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내 나름의 배경과 문화를 작품을 통해 선보이고, 인정받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길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주제넘지만, 나아가 후대에 나오는 재능 있는 예술가가 사회나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
작가로 살아가는 일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이야기 같다. 그림을 팔아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 아닌가.
그림을 몇 점 판매했느냐의 이야기는 마치 성적표 같은 거다.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름 고민했다. 내게는 두 가지 옵션이 있다. 첫 번째 옵션은 종이로 비행기를 접어서 잘 나는지 보는 일이고, 그다음은 글을 쓰고 이야기를 잘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나는 내 인생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서 휴대폰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 시대에는 필수적인 물건이라고 다들 말하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이 없을 때도 다들 잘 살지 않았나.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첫 번째 옵션을 택했다.
화가 루시언 프로이드(Lucian Freud)가 말했다. 내가 집중하고, 투자하고, 모든 걸 쏟아부으면 그림에서 자연스럽게 어떤 생명, 에너지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그걸 내 신념으로 삼았다. 질문에 다시 답하자면, 현실적으로 당연히 걱정되는 문제다. 그래도 뭐 어떡하나. 여기까지 왔는데, 계속 밀고 가봐야지. 더 많이 팔고, 이름을 알리려고 그림을 그리니 마음이 꼬이더라. 유학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그때 그림을 되게 가식적으로 그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역시 과정이니까. 아직도 배우는 중이고, 방향을 잘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재는 어떤 작업을 하고 있나
최두수 작가님이 작년 10월쯤, 블루스퀘어에서 새로운 형식의 아트페어, ‘유니언 아트페어 2016’을 열었다. 지난 6월 23일에는 100여 명의 예술가가 참여하는 두 번째 유니언 아트페어를 인사동 폐 교회에서 열었는데, 이때 나도 참가했다. 허영만 선생님, 이환 작가님, 최선 작가님을 비롯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작가를 이때 접했다. 최두수 작가님께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아직 멀었다. 더 많은 캔버스를 채워야 한다. 내 그림을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다. 예전에는 그저 ‘나는 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화를 그리는 시점부터 많이 변했다. 내가 느끼고 그리는 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인데, 그 과정을 너무 이기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가장 뿌듯할 때는?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내가 뭔가 할 줄 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가장 행복하다. 마치 맙딥(Mobb Deep)의 “Cradle to the Grave” 같은 곡을 듣고 길거리에 나갔을 때, 내가 무적이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나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 마음이 강렬하다. 그래서 그림을 그만두지 못한다.
관객의 입장에서 어떤 그림에 끌리나?
메시지, 의미 다 떠나서 그림 그 자체만으로 다른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다. 좋은 그림은 테크닉으로 시선을 사로잡든지, 특유의 분위기로 압도하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 들끓는 아우라가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 루시언 프로이드, 마티스, 퓨츄라의 작품을 보면 굳이 그 작가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타오르는 게 있으니까. 그러면 된다. 사람들 대부분이 그 작품을 보고 무언가를 느끼면 그 작가는 명장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 같다.
그림 인생에서 최종적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우선 한국에서 길을 다져놓고 떠나고 싶다.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은 파리다. 몇몇 프랑스 흑백 영화를 보며 파리의 낭만에 매료됐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나 낭만적인 이미지 역시 파리에 있다. 불어를 하는 여자 역시 매력적이고. 마흔이 되면 암스테르담에서 1년 정도 살고 싶다. 파사이드(The Pharcyde)의 곡, “She Said” 뮤직비디오 배경이 암스테르담이다. 영상을 보면서 그 도시에 반했다. 그곳에서 1년을 살다가 전시회를 한번 열고 다시 떠날 생각이다. 그다음 종착지는 런던. 영국이 서양 사회의 근원이 되는 나라가 아닌가 싶다. 내가 내 그림에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그리려 한다. 살면서 지금까지 그린 걸 모두 압도할 그림 한 점 완성하는 순간 붓 딱 내려놓을 거다. 딱 한 피스. 그것만 그리면 이 모든 여정이 끝난다.
진행 │ 정혜인 최장민
글 │ 정혜인
사진 │ 유지민(Zee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