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SH JONES

브롱스(Bronx) 출신의 프로듀서, 디제이 쿠쉬 존스(Kush Jones)는 현재 뉴욕을 중심으로 댄스 음악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 가고 있다. 하우스(House)부터 풋워크(Footwork)까지 이어지는 오랜 댄스 음악의 계보 안에서 그는 자유롭게 장르의 영역을 넘나들며 자신과 자신의 크루, 주크 바운스 워크(Juke Bounce Werk, 이하 JBW)의 족적을 남기는 중이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서 쿠쉬 존스는 자신이 물려받은 흑인으로서의 정체성, 흑인음악의 계보를 통해 2022년 현재의 음악을 만들어낸다. 뉴욕 언더그라운드 클럽 신(Scene)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름 중 하나인 쿠쉬 존스가 지난 10월 8일 케이크샵(Cakeshop)을 통해 한국 팬들과 만났다.


서울에 온 걸 환영한다. 오늘 밤 어떤 쇼를 선보일 계획인가?

오늘 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알다시피 나라마다 터지는 노래가 다르다. 투어하면서 곡을 업데이트하고 현지 아티스트의 트랙들을 좀 구매했다. 재능 있는 프로듀서들이 참 많더라. 뉴질랜드, 호주에서 새로운 트랙을 많이 받았고, 미국에서도 나한테 꽤 보내줬어.

한국에 처음 방문했다고 들었다. 무엇을 기대했나.

케이크샵을 가장 기대했지. 내가 한평생 음악과 함께하며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을 때 ‘오, 뉴욕 밖에서도 디제잉을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 클럽이 케이크샵이거든.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당시 런던에 있는 버스데이즈(Birthdays)도 관심 있었지. 이렇게 보니까 모두 원점으로 회귀하는 근사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아. 오늘 밤 케이크샵에서 디제잉하는 게 마치 뉴욕 밖에서 공연하고 싶었던 그 시절의 꿈이 이뤄지는 기분이라 즐겁다. 오늘 정확하게 무엇을 선보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뽑을 거다.

케이크샵을 언급해서 말인데, 디제이 라샤드(DJ RASHAD)가 내한한 걸 알고 있는가? 풋워크는 여전히 틈새 장르로 서울에서도 즐기는 이들은 극소수다. 본인이 느끼는 풋워크 장르의 에너지와 가능성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물론, 알고 있지. 그래서 더 케이크샵이 궁금했다. 나는 내가 겪은 것만 말할 수 있다. 풋워크를 만들고, 듣고, 들려준다는 건 꽤 혼란스럽거나 신비한 경험일 수 있다. 이러한 음악에 익숙하거나 개방적이지 않은 이들에게 나는 풋워크가 일종의 하우스 분파라고 말하고 싶다. 주크(Juke)도 마찬가지고. 난 하우스를 이해하는 친구와 동료가 있다. 풋워크는 하우스의 직계다. 풋워크를 들을 때 그 장르가 내게 주는 에너지는 클래식 시카고 하우스와 같다. 풋워크, 주크 다 마찬가지지. 이것들이 작은 베뉴를 휘어잡고,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걸 난 직접 봤다. 앉아있어도 여전히 움직이는 듯한 느낌. 사람들은 언젠가 이해하게 될 거다. 전등이 켜지는 순간 ‘아하’라고 하는 것처럼 비로소 한 번에 이해하는 거지.

풋워크나 주크와 같이 북미에서 파생되고 통용되는 장르를 즐기는데도 특이하게 린스 FM(Rinse FM)의 레시던트를 맡았다.

나는 브롱스에서 힙합과 함께 자랐고, 린스 FM을 통해 전자음악의 감상과 디깅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샘플링(Sampling)과 함께 자랐기에 그것을 이해하고 싶었고, 샘플을 통해 클래식 소울(Soul)을 알았다. 마치 부모님에게 “이 노래 누구예요?”라고 물어보면 “네가 이걸 어떻게 알아?”라는 대답을 듣는 그런 순간처럼. 친구들과 그렇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초기 전자음악에 관한 이해가 여기서 비롯됐다. 특히 ‘LUCKYME’ 쇼에서. 나를 초대한 조세프 마리네티(Joesph Marinetti)와 JD 리드(JD Reid)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청취자로 시작해 레지던트로 초대받아 믹스셋을 선보이기까지의 과정은 상당히 쿨하다. 그들이 나를 끌어올린 것처럼 나도 다양한 사람들을 초대하려고 노력했다. 큰 원을 그리고 다시 그 원점으로 돌아온 경험이지.

한국인에게 브롱스는 그리 익숙한 동네는 아닐 것이다. 브롱스에서 온 쿠쉬 존스라는 사실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고, 이 동네를 어떻게 소개하고 싶은가?

난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부터 소개한다. 브루클린에 있는 모든 이들을 샤웃아웃(Shout Out)하고 싶다. 브루클린에서 벌어지는 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탄탄한 클럽과 재능 있는 DJ, 프로듀서가 정말 많다. 그러나 뉴욕의 음악은 일종의 스펙트럼이고, 단 하나의 동네만 뉴욕을 대변할 순 없다. 브루클린, 브롱스, 퀸스(Queens), 맨해튼(Manhattan) 모두 다 중요하다. 할렘(Harlem)에 재능 있는 프로듀서가 몇 있고, L.E.S.(Lower East Side)는 언제나 전설적인 동네로 자리했지. 스태튼 아일랜드(Staten Island)라고 하면 사실 우탱 클랜(Wu-Tang Clan) 외에는 잘 모르겠다. 뉴욕의 댄스 음악을 이야기하려면 뉴욕의 5개 구에 존재하는 모든 뮤지션을 언급해야 한다. 내가 어릴 때 브루클린 출신과 브롱스 출신은 언제나 라이벌 관계였지만, 누군가 뉴욕을 무시하면 곧바로 단결하곤 했다. 그게 바이브였다.

최근 릴리즈한 [6 Days]와 [Funk Provider]를 기분 좋게 들었다. 부드러운 하우스 프로덕션이 인상적이었는데, 최근 집중하는 프로듀싱의 주요한 영감은 무엇인가?

그 두 프로젝트와 하우스 음악에 관련해서 사람들은 요즘 내게 “왜 풋워크를 기피하는가?”라고 묻는다. 나는 여전히 그런 트랙을 만들고 튼다. 언제나 풋워크를 만들고 대부 알피 부(RP BOO)를 올려다본다. 그가 새로운 사운드를 시도할 때, 예를 들어 그의 [Legacy] 앨범과 브레이크, 하드코어를 섞은 적 있는데 앞뒤가 맞고 끝내주게 어울리더라고. 이걸 직접 그에게 언급한 적은 없지만, [Legacy]를 죽 들으며 샘플이 잘린 방식, 스네어를 치는 방식 등을 보며 하드코어와 섞고 싶었다. 둘이 완벽하게 섞였다. 그는 그 앨범에서 하드코어를 만들었지만, 그것은 또한 풋워크였다. 하드코어 정글에 RP의 특별한 맛이 가미된 느낌이었다. 난 이걸 존경한다. 특정한 무언가로 알려진 프로듀서가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

알다시피 난 멜로디와 딜레이 있는 드럼, 펀치감 있는 소리를 좋아한다. 나는 또한 다양한 사운드에 손을 대는 걸 좋아한다. 간혹 장비와 악기 앞에 앉아 ‘오늘은 이거 하나만 할까’라고 작정할 때가 있지만, 그러면 곧 피곤해진다. 내가 원하는 자리에 멜로디를 배치하고, 스윙 드럼은 여기에 넣고, 써보지 않은 퍼커션을 활용하고… 터무니없을 필요는 없지만, 새로운 걸 시도하는 건 괜찮은 일이다. 특히 당신의 창의성이 그렇게 하라고 할 때 따르면 더욱더 좋다.

창작 과정을 더 깊게 이야기해 보자. 왕성한 창작의 배경이 되는 영감에 관해 묻고 싶다. 완전히 집중하기 위한 환경을 선호하는가 아니면 알코올이나 대마초 등 좀 더 자유롭고 칠한 환경에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걸 캐치하는가? 스튜디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 달라.

그날 기분에 따르다. 보통은 스위샤(DJ Swisha), 베이스베어(BASSBEAR!!)와 함께 작업실에 가는데 보통 서로 “오늘 뭐할 거야?”라고 물어본 뒤 각자의 에너지를 토대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결정하는 편이다. 이런저런 샘플을 들어보며 뻘짓 하는 날도 있다. 그래도 최소한 초안을 잡든지, 어떤 프로젝트를 시작하든 간에 뭔가 하나는 부러뜨리겠다는 마음으로 임한다.

나, 스위샤, 베이스베어, 에이스모(AceMo), 모마 레디(MoMa Ready), 캔욘(Kanyon) 모두 서로의 모든 트랙에 참여하는 건 아니지만 유기적으로 협업하고 있다. 모두가 함께 있을 때 그냥 그 바이브가 좋은 날이 있다. 하여간 우리는 스튜디오에 갈 때 일을 끝내고,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한다. 해가 떴을 때 작업하러 들어가서 새벽쯤 다시 집에 들어온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 또는 모레 다시 만나 작업한다. 집에서 쉴 때는 다른 뮤지션들의 음악을 듣거나 구매하고, 음악을 분류한다.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도 있으니 집에 악기가 있는 편이 좋다. 말이 길어졌지만, 어쨌든 나는 그래, 뭐든 떠오르는 걸 잡으려고 한다.

최근에는 매번 스튜디오에서 홈런 칠 필요는 없다고 되새기는 편이다. 물론 매일 잘 풀리면 좋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있으니 그것보다는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나고 그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쿠쉬 존스의 프로덕션을 살펴보면 풋워크나 주크에만 치중하지 않고 하우스, 테크노, 브레이크 비트까지 그야말로 광범위하게 댄스 뮤직을 포용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로 다른 장르들이 창작에 미치는 상호작용에 관해 묻고 싶다.

음, 다 똑같은 방식이다. 예를 들어 시카고 하우스(Chicago House)의 속도를 높인 다음에 보컬을 추가하면 그것은 게토 하우스(Ghetto House)의 영역에 놓이고, 또다시 가속하면 주크가 된다. 또는 풋워크라든지. 이러한 패턴과 장르의 역사를 숙지한 시카고 친구들이 내게 말한 바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공존하는 관계이자 그 근원은 하나. 언젠가 909로 찍은 그라임(Grime)을 들은 적 있는데, 여기에는 또 제프 밀스(Jeff Mills)가 있다. 제프 밀스가 이 패턴에 조금만 변화를 줘도 당장 MC가 와서 그 비트 위에 올라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난 다양한 장르 안에서 쉬운 접점을 찾으려고 한다. 난 이것저것 다 듣는다. 사람들이 내 믹스를 듣고 나서 “넌 플레이할 때 여기저기 다 돌아다니잖아!”라고 말하던데, 난 이게 잘 짜인 카오스라고 생각한다. 비트와 멜로디, 노래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통하는지 알고 엮는 거지. 컴프레셔가 내장된 장비처럼 좀 더 수준 높은 환경에서 디제잉을 한다면 그 즉석에서 노래를 만드는 셈이다. 최근 세라토(Serato) 업데이트는 내 말을 증언한다. 이제는 믹서로 즉석에서 드럼, 보컬, 멜로디를 딸 수 있다. 기술은 변화에 관한 확실한 증거다. 난 디제잉을 하거나 트랙을 만들 때 ‘음악을 선보인다’라고 말하기보다는 “그거 씨발 어떻게 했어?”라는 말이 나오는 데까지 콜라주를 만들려고 한다.

올해 초 베를린의 HOR에 출연했다. 베를린 테크노 신 최전선에서 양키스 옷을 입고, 풋워크를 트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는데, 이때의 셋에 관해 코멘트해줄 수 있을까?

사람들은 가끔 나한테 “요, 너는 뭐시기를 이끄는 저시기 중 한 명이다”라는 식의 말을 건넨다. 풋워크의 주요한 인물이라든지, 하우스나 테크노 신의 뜨거운 아티스트라는 말 같은 것들. 이걸로 논란이 되거나 누군가는 지랄 좀 했겠지. 여기서 말하자면, 그냥 네가 할 일이 있으면 그걸 해라. 나는 다른 걸 묻지도, 원하지도 않고 그냥 아침에 일어났더니 HOR에서 메일이 왔고, 바로 오케이했고, 디제잉에 충실했다. 나는 대충 후디랑 조끼만 챙겨서 베를린에 갔는데 날씨가 생각보다 더 추웠다. 그래서 친구 리치가 옷장을 뒤지다가 양키스 재킷을 꺼내 준 거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가지고 싶긴 했지만 돌려줬다. 하하.

그날 나 바로 뒷타임에 DJ T1000, 그러니까 앨런 올덤(Allan Oldham)이 들어왔다. 나한테 방금 튼 거 쿨했다고 하는데 믿기지 않는 거야. 그래서 내가 “요, 브로. 너 언더그라운드 레지스탕스(Underground Resistance)잖아. 디트로이트 레전드잖아”라고 했더니 “어, 맞아” 하고 쓱 들어오는데, 멋있더라고. 참고로 나는 사람들이 그곳을 화장실이라고 부르는 게 싫다. 그곳에는 변기도 없다고.

유럽 쪽 긱에서 풋워크, 뉴욕 하우스, 발티모어, 브레이크와 같은 장르를 접목했을 때 청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암스테르담에서였나? 거기서 테크노, 하우스, 주크, 풋워크를 틀고 나서 정글(Jungle)로 넘어갔다가 다시 댄스홀(Dancehall)로 바꿨는데 그때 절반이 눈 뒤집혀서 서로 부비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여성 관객이 부스에 와서 내게 왜 이렇게 부드러운(Soft) 음악을 트냐고 하더라. 그녀는 내가 그전에 틀었던 장르에 익숙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저 남자가 여자를 들어 올리고 다들 미치기 시작한 거 안 보이냐고 대답했다.

쿠쉬 존스의 하우스 트랙에서 소이치 테라다(Soichi Terada), 타쿠야 마츠모토(Takuya Matsumoto)와 같은 일본 뮤지션의 냄새가 난다. 실제로 직접적으로 소이치 테라다를 샤웃아웃한 트랙도 있으며, “YUEH CHIN RIDDIM”처럼 직접적인 아시아의 영향이 사운드로 드러난 트랙도 있다. 일본 또는 아시아의 어떤 사운드에 매력을 느꼈는지 궁금하다.

난 어려서부터 게임을 즐겼다. 그래서 게임 OST나 BGM은 내게 의미가 크다. 일할 때 사람들이 음악을 듣는 것처럼 나도 책을 읽거나 이메일을 보내고 뉴스를 읽을 때 게임 OST를 튼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예전에 플레이스테이션으로 플레이했던 “원숭이 탈출”이라는 게임이 있는데, 난 이때 각 레벨에 등장하는 음악이 전부 생생하다. 한번 시애틀에서 그중 한 곡을 틀었더니 어떤 관객이 자기가 살면서 들어본 음악 중 최고라고 하더라. 난 그 트랙을 “Frosty Retreat”이라 소개했다. 그 음악이 등장하는 “원숭이 탈출”의 레벨이 ‘Frosty Retreat’거든. 아마도 Frosty Retreat (Outside)”가 트랙 이름 같다. 그걸 작곡한 사람이 바로 소이치 테라다다. 그를 작곡가로 먼저 알게 됐는데, 미친 하우스 트랙도 많이 만들었더라고. 자기가 원하는 걸 만들고 사는 사람이다. 난 언제나 그를 샤웃아웃한다. 또한 푸드맨(Foodman)도 항상 언급하는데, 그는 항상 살면서 본 적도 없는 장비를 들고 와서 기가 막힌 소리를 뽑는다. 나도 언젠가는 CDJ를 버리고 라이브 셋업을 가지고 공연하고 싶다. USB만 고장 나도 CDJ 플레이는 좆되지만 라이브는 그런 거 없잖아.

본인 또한 꽤 다양한 장비를 선호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실제 라이브 셋 욕심은 없는가?

음, 왠지 내 집에서 악기를 꺼낸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거 같다. 하하. 소수를 위한 자리에서라면 즐거울 거 같다. 또한 그 자리가 청음회인지, 댄스파티인지도 중요할 거 같고. 내가 정확하게 어떤 경험을 원하는지부터 고민해봐야 할 거 같다. 물론 그걸 둘 다 해내는 뮤지션도 있다. 내친김에 내 친구 에이스모를 한 번 샤웃아웃해야 할 거 같다. 그는 나우어데이즈(Nowadays)에서 내가 본 최고의 라이브 셋을 선보였다. 그것도 공연 시작하기 직전에 장비를 쓰기로 결정한 거다. 설명서 한 번 읽어봤으니 괜찮다며, 세팅만 하면 바로 할 수 있겠다고 하더라. 그러고 나서 엄청난 셋을 뽑았고, 사람들이 다 미쳐 날뛰었다.

어려서부터 일본 음악과 문화를 접했던 것 같은데, 앨범 커버 또한 일본 애니메이션 “아키라(AKIRA)”를 비롯해 일본 대전 격투 게임 그리고 사무라이와 같은 그래픽을 차용하는 등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 더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나는 아시아 음식을 즐기고 예술도 좋아한다. 그러나 게임이야말로 내가 어려서 처음 접한 일본 문화다. 내가 즐긴 콘솔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모두 다 일본산이라고 적혀있었다. 난 포켓 몬스터도 좋아했거든. 만화나 게임을 통해 나 자신을 아시아의 문화적인 공간에 배치한다. 내가 앨범에 삽입하는 아트워크나 음악적인 영향 모두 게임과 만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것은 조금은 뜬금없는 시티팝(City Pop) 립이나 일본 재즈로 변화하기도 했다.

좀 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어떤 음악적인 배경과 영향이 너를 프로듀서와 디제이로의 길로 이끌었는지 궁금하다.

음악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억 중 하나는 뉴욕의 98.7 KISS FM이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 당시 그곳에서 활동하던 디제이들은 여전히 만날 수 있다. 레니 그린(Lenny Green) 같은 이들. 그는 예전에 심야 R&B 쇼를 진행하기도 했고, 아침에 하던 쇼도 정말 좋았다. 엄마는 나를 학교에 데려갈 때마다 아침 방송을 틀었는데, 네오 소울(Neo Soul) 같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디안젤로(D’Angelo)나 훵크, 소울 같은 장르를 주로 들었다. 클래식한 음악을 듣는 데는 할아버지의 영향도 컸다. 그는 두왑(Doo-Wop) 뮤지션이었다. 동료들과 결성한 파이브 윌로우스(Five Willows)라는 그룹에서 활동하셨다. 할아버지는 내가 음악을 만드는 데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가르침을 준 적은 없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지지해줬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내가 어떤 곡을 만들어서 들려주면, “이걸 네가 만들었다고? 쿨한데?”, 뭐 이런 식으로. 그에게 최고의 악기는 목소리였고, 따라서 전자음악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한 번은 “진짜 전자음악을 보여줄까”라고 하시며, 커다란 오픈릴 테이프를 보여주더라. 그에게 그 테이프가 전자음악이라는 사실이 상당히 재밌었는데, 돌아가시고 나서는 새로운 세입자들이 그 테이프를 폐기했다고 들었다. 이런 것들이 내 음악에 관한 첫 기억이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일에 빠져든 건 고등학교 때 들었던 방과 후 수업이다. 나는 학생 대상 교육 프로그램을 지지하고 싶은데, 바로 내가 그 방과 후 수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즐기긴 했지만, 그 수업을 통해 프로그램을 다루고 트랙을 만드는 방법을 터득했다. 프로듀싱의 초석이었지. 집 어딘가에는 그때 만들었던 트랙이 USB로 굴러다니겠지만, 개같이 만들었더라도 내가 만든 첫 곡과 마지막 곡을 언제나 기억해서 그런지 가끔 들어보면 겸손해진다.

하하. 처음 만든 트랙을 지금도 듣는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어떤 트랙인가?

내가 만든 첫 번째 노래는 그때 사용하던 프로펠러헤드 리즌(Propellerhead Reason)의 레드럼(Redrum)이라는 드럼 프로그램을 사용해 만든 비트다. 하이햇과 909 킥을 깔긴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럽다. 무슨 느낌인지 알지? 그리고 처음 만든 트랙과 함께 가장 최근에 만든 트랙을 같이 공유하는 게 스스로 성찰하기에는 좋은 방법인 것 같다. 걸어온 길도 되돌아보고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점검하면서. 과거와 현재의 상호작용을 통해 성장하는 거다.

쿠쉬 존스와 함께하는 동료들을 이쯤에서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뉴욕 로컬 라디오, 더 랏 라디오(The Lot Radio)를 통해 에이스모, 모마 레디, 디제이 스위샤와 꾸준히 B2B를 하며 친목을 과시하고 있다. 뜻이 맞는 동료들과 로컬 라디오에 모여 음악을 틀고 행아웃하는 건 뮤지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프로젝트를 열 때 당신을 이해하고 마음이 잘 맞는 사람과 함께해야 한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본인 또한 뭘 원하는지 아는 사람끼리 행아웃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나는 늘 순탄하진 않더라도, 언제나 서로 질문을 던지고 문제의 원인을 찾고 해결하는 사람들과 일하고 싶다. 무엇을 어떻게 고칠 것이며, 현실화할지 고민하는 사람들. 우리 넷이 뭉치면 정말 제대로 된 모임으로 굴러간다. 나는 음악으로 만난 동료는 똑같이 대하려고 하는 편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의도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는데, 나는 저 셋과 뭉칠 때 이상한 의도를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나 조심해야 할 것. 네게 다가가서 갑자기 “요, 브로. 우리 호미잖아”라고 대뜸 말하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한다. 상대방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경험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믿으면 안 된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믿고 또 이해하기에 우리가 초대하는 새로운 사람 또한 우리가 그를 이해하는 경우에 한정한다. 최근 에이스모와 모마 레디가 레갈86(Regal86)이라는 멋진 프로듀서를 라디오에 초대해 멋진 쇼 하나 뽑았다. 이러다 갑자기 내가 B2B 말고 솔로로 쇼 하나 뽑고 싶다고 말해도 바로 “요, 넌 네가 할 일 한 거야”라고 곧바로 말할 애들이다.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전부 각자 움직이면서 또 뭉친다.

아티스트에게 사생활과 비즈니스를 구분하는 일 또한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 4명이 모였을 때는 어떠한가?

우린 자주 만나서 토의하는데,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도 많다. 예를 들면 베뉴가 아티스트를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든지, 돈 문제가 발생했다든지 등등. 누군가는 우리가 함께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주술사들이 모여 뉴욕에서 벌어지는 일을 논하는 것 같다고 하더라. 당연히 그 정도의 힘은 없다. 다만 우리 4명은 호미이자 업계 동료이니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비즈니스까지 이야기한다. 서로 믿고 잘 통하니까. 한 명이 “요, 이거 어떻게 생각해?” 하고 문제를 제기하면, 우리는 각종 통계부터 각자 개인적으로 느낀 바까지 모두 이야기한다. 우린 사업과 사생활을 분리하려고 하지만, 둘은 결국 공생 관계라 존중이라는 가치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뉴욕의 댄스 음악 히스토리를 다시 쓰고 있는 에이스모, 모마 레디, 쿠쉬 존스, 스위샤 프리메이슨 모임에 관해 더 이야기하고 싶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뉴욕 클럽 신에 어떤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나눴을지 궁금한데.

예를 들어 *보사(보사노바 시빅 클럽, Bossa Nova Civic Club : 뉴욕에 자리한 유서 깊은 클럽)나 팰리세이즈(Palisades)처럼 주옥같은 베뉴들은 크지 않아도 신에 필수적이다. 과거의 뉴욕에는 백인을 위한 공간이 많았고, 사실상 도시는 흰색이었다. 신에서 활약하는 흑인, 퀴어들을 수용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작업물은 활발하게 공유되는 아이러니가 존재하는 도시였다. 물론 우리가 흑인들의 활로를 열었다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거창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함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당장 생각나는 이들이 많은데, 디 딕스(Dee Diggs), 디보이(Devoye)도 샤웃아웃해야 한다. 그들이 플레이하는 베뉴 중엔 꼭 흑인을 위한 곳이 있었다. 디제이 와와(DJ Wawa) 또한. 2014년, 내가 신에 막 들어왔을 때쯤 이미 음악도 만들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뉴욕 신의 정치가 닿지 않는 거리에서 술이나 마시고 주사위나 던지고 앉아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게 와서 “보사에서 디제이하는 거 봤는데, 그곳에서 풋워크 들은 건 처음이었어”라고 말했다. 실제 보사는 다양성을 수용하는 공간으로 알려졌는데, 실체는 막상 달랐던 거지. 이게 2015년이었고, 그 뒤로 신이 변하면서 요즘은 머틀(Myrtle Avenue)나 브로드웨이(Broadway Avenue)에 가면 흑인 장르, 디제이가 자리를 잘 잡은 거 같다. 만약 누군가 겉멋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면, 최소한 이 문화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유색 인종, 퀴어, 흑인 아티스트를 더 서포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 흑인 문화의 정서, 음악적인 뿌리에서 비롯된 행보라는 점에서 그 4명이 다른 프로듀서들과 구분되는 독특한 지점이 있다. 댄스 음악의 계보 속에서 흑인 아티스트가 만들어놓은 업적을 통해 어떤 영감이나 전략을 캐치하는가?

난 알피 부를 매번 샤웃아웃할 거다. 정말 큰 사람은 바로 그 형이다. 사람들은 풋워크의 파이오니어, 대부 뭐 이런 식으로 그를 수식하지만 정작 본인은 겸손하고 엄중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편이다. 절대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는 법이 없다. 나는 스승을 대하듯 바라보지만, 그는 그저 겸손하다. 음악을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다. 나는 알피 부를 친구이자, 멘토라고 부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 그는 흑인음악 그 자체다. 그럼에도 신입들에게 “넌 아직 우리 판에 낄 수 없어”라고 말하지 않고 모두를 포용하려고 한다. 흑인음악은 긴 선이 아니라 복잡한 콜라주 같은 일종의 네트워크다. 이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음악은 내가 아닌 이 세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이해한다면, 인생의 여정에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먼 이국땅의 한국인이 이러한 흑인의 문화적인 배경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다. 흑인음악이 머나먼 단일민족 국가로 유통되는 그 순간부터 상품으로써 당도한다. 이런 나라에서 흑인음악이 성장한 풍토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는 일이 왜 중요한지 듣고 싶다.

그냥 이거야. 네가 무언가에서 영감을 받아 음악을 만들었다면, 사람들은 너의 음악을 듣고 그 원천을 유추할 수 있다. 너 스스로 사운드의 계보를 소개할 능력이 있다면, 사람들은 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이게 디제잉의 방법론이나 드럼 사운드를 고르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트랙의 스트리밍 통계보다는 무엇이 진실로 영감을 주는지 더 귀 기울여야 한다. 물론 사람마다 답변은 다르겠지만 음악은 항상 ‘이 음악이 오늘 내게 영감을 준다’라거나 ‘이 음악 덕분에 내가 나를 표현하는 일이 더 편해졌다’와 같은 맥락에 근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음악을 사랑하는 내 진심을 담아 매일같이 음악으로 표현한다.

쿠쉬 존스의 밴드캠프를 훑어보자. 네 작업 방식을 보면 마치 쉬지 않고 믹스테이프를 만들거나 다른 래퍼들의 피처링에 참여하는 치프키프(Chief Keef)처럼 보인다. 작업한 트랙을 하드에 묵히거나 수정하는 대신 빠르게 릴리즈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2020년도 1월쯤 디제이 누아르(DJ Noir)와 와와에게 올해는 한 달에 한 번씩 EP를 낼 거라고 얘기한 적 있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렇게 하냐고 물어봤지만, 나는 그냥 그 말이 하고 싶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좋은 음악도 아닌데 자주 발매할 필요가 있냐고 헐뜯기도 한다. 그렇다면 트랙 하나를 내는 데 왠종일 걸리는 아티스트는 대체 뭐하는 애들인가? 그래. 뭐, 4곡짜리 EP 하나 내는 데 평생 걸리는 듯이 만들고, 프로모션, 마스터링까지 돈을 써가면서 했는데 음악이 그저 그렇다면? 난 리스너에게 내 음악을 거의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선보이고 있다. 어제 만들어서 오늘 드랍하면 다들 놀란다. 나는 다들 놓아주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무슨 말인지 알지? 난 그래도 내가 한 말을 지켰어. 그러다 *밴드캠프 프라이데이(Bandcamp Friday : 음악 유통 플랫폼 밴드캠프에서는 매 달 첫 번째 금요일에 음악을 발매하는 아티스트와 레이블이 판매를 통해 100% 수익을 얻을 수 있다)가 생겼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달렸다. 그러다 한 번씩 속도를 늦추고 좀 더 큰 프로젝트에 몰두했다.

레이블을 통하면 발매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반면에 그들이 하는 일은 다 내가 할 수 있다. 이러한 독립성은 내 음악에도 많이 담는 메시지인데, 사실 내 트랙의 아트워크도 친구가 한 거고 믹싱, 마스터링 또한 내가 했다. 뭐, 난 이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어. 디제이 디온(DJ Deeon)도 수많은 트랙을 뿌렸다. 진짜 OG와 파이오니어들은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 할 일을 했다고. 디온도 지금 이렇게까지 달리고 있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 있나? 난 돈도 없어서 모든 작업을 집에서 한다. 친구들에게 줄 몇 달러는 있으니 친구 지갑에 몇 달러 찔러 넣고 함께 뭔가 만드는 거다. 사람들이 가끔 애플 뮤직에서 내 얼굴을 봤다고 하는데, 내 사진이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 좆도 모르겠어. 난 진짜로 그런 일을 할 줄 모르거든. 그러다 내 친구가 갑자기 “요, 나 이제 유통사에서 일하는데 회사에서 요즘 흑인 전자음악 아티스트를 띄우고 있던데?”라고 하더라. 보니까 로레인 제임스(Loraine James), 에이스모마(AceMoma)도 있고 뭐 그랬다. 전반적으로는 좋은 일이겠지? 하여간 난 스트리밍 횟수에 얽매이지 않아도 내가 할 일을 한다. 레이블이 거절한 내 음악도 누군가는 원하고 있거든. 뭐 가끔 뒤숭숭한 반응을 보일 때도 있지만.

거대 스트리밍 플랫폼보다 독립적인 유통 플랫폼, 즉 밴드캠프나 사운드클라우드 같은 플랫폼이 인디펜던트 아티스트에게 주는 긍정적인 영향에 관해 묻고 싶다.

로열티를 받기 위해 몇 달씩 기다릴 필요가 없다. 창의성을 두고 다툴 필요도 없다. 난 훌륭한 아이디어 또는 완성된 앨범이 반려되어 처음부터 다시 일이 시작되는 안타까운 경우를 많이 봤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냔 말이다. 이번 트랙에 자신 있나? 지금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앨범인가? 이 질문에 아티스트가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레이블은 바로 주사위를 던졌으면 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아까 방과 후 수업에서 얻은 긍정적인 경험을 이야기했는데, 이러한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프로그램이 뮤지션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가?

그 영향도 크지. 많은 이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난 아이들 대상으로 진행하는 여름 캠프에서 오랜 시간 일했다. 걔네들은 진짜 빡센 동네에서 왔거든. 그런 동네에서 자란 애들은 지원을 받지 못하며 자란다. 그냥 존나 살기 힘들어. 난 그 캠프에 1번으로 참가했고, 그 뒤로 아홉 번 정도인가? 아무튼 엄청나게 오랫동안 그곳에서 일했다. 아이들은 도시보다 캠핑장에서 훨씬 더 개방적이고 아이답게 놀 수 있다. 나는 음악 할 때 그 경험과 에너지를 상기하려고 한다. 만약 당신이 태생적으로 많은 걸 누린 채 인생을 시작했다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정체될까? 모든 사람은 이 질문에 당연히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 그러면 나도 누군가를 돕거나 누군가의 삶을 조금이나마 덜 힘들 수 있게 할 기회에 참여한다. 그게 나를 더 행복하게 하니까.

좋아. 이제 [Strictly 4 My CDJZ]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Stricktly 4 My Cdjz]는 쿠쉬 존스가 꾸준히 이어오는 일종의 연작 시리즈로, ‘내가 직접 만든 노래를 바로 클럽에서 틀어 제끼겠다’라는 일종의 선언처럼 들린다. 스튜디오에서 만든 트랙을 클럽에서 선보이고 이를 토대로 다시 작업에 들어가는 시리즈의 끊임없는 과정은 상당히 사이버네틱한 구조를 지니는 듯하다. 이를 토대로 생각하면 단순히 ‘프로덕션’이 아니라 그 음악을 틀 ‘베뉴’까지의 연결성, 즉 클럽/댄스 뮤직에 방점을 두고 있는 거 같은데 이에 관한 코멘트 부탁한다.

나에게 [Strictly 4 My CDJZ]란 나를 거절했던 레이블이 자아낸 산물이다. [Strictly 4 My CDJZ]는 원래 믹스셋에 섞기 좋은 트랙으로 구성했고, 디제이 툴(DJ Tool)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마가 듣더니 “요, 너 이거 디제이 툴이라기엔 완전한 곡들이 많잖아”라고 하더라. 이 앨범은 내 음악을 유통하기 원치 않았던 레이블에게 반대로 내 음악을 증명했다. 클럽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자신감이 생긴 거지. 내가 계속해서 창작물을 내놓을 수 있는 여유를 마련해줬고, 꾸준히 앨범을 제작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긴장감을 주는 데 한몫했다.

시카고 신에서는 이러한 작업 방식을 ‘트랙 만들기(Making Tracks)’라고 일컫던데. 프로듀서들이 삼삼오오 모여 한두 시간 동안 뭐라도 만들고 세션이 끝나면 그게 1곡이든, 2곡이든 함께 나눠 갖는 문화다. 나도 비슷한 방식으로 음악을 만든다. 나름의 과정도 정립했다. 악기들이 주욱 늘어섰고, 작업 흐름도 있고, 과정이 잡혀있으니 중간중간 악기만 바꿔주면 된다.

그렇다면 [Strictly 4 My CDJZ]를 시리즈로 유지하는 일은 본인이 앞서 언급한 ‘트랙 만들기’를 실천하는 방식인가?

[Strictly 4 My CDJZ]라는 이름과 관계없이 트랙이야 계속해서 만들겠지만 [Strictly 4 My CDJZ]를 유지하는 이유는 좀 메타적이다. 언젠가 내 커리어에 큰 도움을 준 누군가가 내게 좀 더 수익성을 생각하며 움직이라고 충고했다. 그게 무슨 뜻인데? 살면서 들은 말 중에 가장 무례했다. 덧붙여 좀 더 사업을 고려하라며 마케팅은 곧 브랜딩이라는 말까지 하더라. 뭐, 좋다. 내 시장이 필요하고 내 브랜드가 필요하다고 충고한 그를 향한 답변이 바로 [Strictly 4 My CDJZ]다. 제이 드레이고(Jae Drago)에게 곧장 연락해서 아트워크를 부탁했다. 그 뒤로 지금까지 9번 정도에 걸쳐 아트워크를 그려준 그를 샤웃아웃한다. 나는 정당한 수고비를 마련하려고 했고, 음악을 계속해서 만들었다.

하여간 브랜딩, 브랜딩이라는 말은 정말 멍청한 개념 같다. 왜 사진을 찍고 춤추는 게임을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네가 좋은 음악을 만들고, 사람들이 그걸 즐기면 되는 거잖아? 좀 기괴한 현상인데 요즘 대단하다는 디제이들은 다들 이것저것 하더라고. 근데 나는 만약 한 분야에 뛰어나면 그걸로 성공하는 게 맞다고 봐. 아무튼 내 생각은 그래.

열정적인 창작의 배경이 되는 하루 루틴이 궁금하다. 네가 세워놓은 루틴에 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보통 정오쯤 일어나는데 이상적으로는 11시라고 가정하겠다. 내 개인 스튜디오는 방 안에 있어서 주변이 청결하지 않을 때는 바로 청소를 시작한다. 씻고 토스트를 만든다. 그러고 나서 내 음악을 훑는다. 내가 만든 음악을 고르거나 새로운 음악을 구매한다. 내가 하드디스크를 꽂고 디제잉하는 걸 다들 의아하게 보던데, 15,000곡 정도가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든 분위기에 맞게 음악을 틀 수 있다. 언젠가 해더웨이(Haddaway)의 “What Is Love?”를 틀었더니 사람들이 이 노래를 왜 가지고 있냐고 물어보더라고. 하하. 15,000곡 안에 이런 노래 하나 있을 수도 있지. 그거 틀면 클럽 뒤집어지거든. 그렇게 음악을 정리하거나 음악과 관련된 일은 꼭 해치운다. 만약 그날 정말로 느낌이 오지 않으면 다른 걸 한다. 내가 하는 일을 진심으로 사랑해도 가끔 지칠 때는 있다. 그럴 때는 삶의 균형도 좀 유지하면서 살지. 농구를 하거나,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리거나. 직접 요리하는 것도 좋아한다. 음악 만드는 일과 비슷하다. 하여간 상당히 즉흥적인 하루를 보내는데, 내 음악도 마찬가지다. 간혹 사람들이 내 노래가 어떤 구조를 지녔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할 때가 있는데, 내 머릿속도 존나 난잡하다. 내 정신은 항상 달리고 있고, 따라서 보통 하루는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도 루틴을 만들려고 노력하는데, 아직은 좀 어렵다.

평소 즐겨 가는 스팟이 궁금한데 아티스트로서 알려진 모습 외에 일상적인 풍경들을 맛볼 수 있을까?

과거에 일했던 레녹스 커피(Lenox Coffee)에 종종 가곤 한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뉴욕에 돌아와 일했던 첫 직장이다. 록스타마냥 다들 디제이로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이던데 나는 카페에서 일했고, 이건 제일 만족스러운 직업 중 하나였다. 쉬는 날에는 카페에 가서 친구들과 맥주 몇 병 까고, 서로 뭐하고 사는지 수다를 떤다. 아니면 친구 집에서 머리를 따거나 바버숍에 오랫동안 앉아 요즘 동네 이슈를 듣거나 한다. 난 보통 내가 사는 동네에 머무는 편이다. 난 스포츠도 굉장히 좋아해서 양키스 경기는 꼭 보러 가려고 한다. 메츠도.

뭐, 그래. 누가 나한테 “나 여기 클럽에 한 번 가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면 그냥 클럽에나 가라고 한다. 그런데 좀 다른 것도 하고 살라고. 박물관에도 가보고, 좀 걷기도 하고, 풀도 만지고 하면서. 마테차 들고 클럽 안에 서있는 거보다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지랄들이야. 업타운에도 가보고, 미슐랭 스타 받은 쌀국수 가게에도 한 번 가보는 거지. 브롱스의 포드햄 대학교 옆에 있다. 거기 존나 맛있어.

그래도 한국에 있는 나로서는 뉴욕의 클럽 신이 궁금하기만 하다. 뉴욕의 클럽 풍경을 좀 이야기해줄 수 있나?

아름답지만 동시에 답답하다. 네가 보고 싶었던 뉴욕 디제이들 하룻밤 사이에 다 볼 수 있을 걸? 모두가 각각의 베뉴에서 음악을 틀고 있다. 이게 양날의 검이지. 뉴욕의 클럽 신은 꽤 복잡하고 산만한데 그게 또 매력인 거 같다.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거 같아. 아무 데나 들어가서 바이브에 심취해 보길.

중요한 커리어로서 주크 바운스 워크를 빼놓을 수 없다. 2015년부터 그들과 함께했다. 상업화된 DnB의 대안으로서, 지역 내 풋워크 장르의 갈증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자신들을 소개하는 크루, JBW와 함께한 배경은 무엇인가?

JBW는 내 커리어에 정말 중요한 영향을 끼친 리젠트 스트리트(Regent Street) 덕분에 시작됐다. 예전에 에디 앤 드류(Eddie And Drew)가 트리플 트레인(Tripletrain)과 어떤 집에서 진행하던 쇼가 있는데, 그때 리젠트 스트리트가 플레이하는 걸 처음 봤다. 뉴욕에서 그런 식으로 플레이하는 사람을 처음 봐서 꼭 만나고 싶었고, 역시 말도 잘 통하더라고. 찐하게 놀았던 건 트랙스맨(Traxman), 디제이 스핀(DJ Spinn) 그리고 더 에라(The Era)가 참여했던 보일러룸 파티였다. 난 그때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였으니 게스트도 아니었지만, 리젠트 스트리트의 초대를 받아서 들어갈 수 있었다. 가보니까 스캐타(Scatta)도 있더라고. 그날 제대로 느꼈다. 아, 내가 보일러룸에 들어와있구나, 하고.

트랙스맨과는 이미 한 번 안면 튼 적이 있다. 기억도 나지 않는 누군가의 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때 트랙스맨과 스핀이 마이클 잭슨 앨범을 놓고 싸우는 거야. [Off the Wall], [Bad] 중에 뭐가 더 좋냐고. 하하. 내가 살면서 본 가장 웃긴 광경이었다. 하여간 그때 스캐타를 처음 알게 된 뒤로 그는 가끔 나를 뉴저지로 초대하곤 했다. 그들은 이미 엘에이에서 스위샤를 만난 적 있었고, 내가 스위샤랑 한패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 나에 관해 물어본 거 같더라. 오랫동안 함께한 뮤지션 친구라며 스위샤가 밀어준 거 같던데. 그렇게 JBW와 안면을 텄고, 스위샤와 내가 크루에 들어가게 됐지.

그 뒤로 제이 드레이고한테 전화 한 통 받았다. 크루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고. 시간이 지나 파운더 누아르, 제이 드레이고, 소닉 D(Sonic D)에게서 왜 이걸 시작했는지 들었는데, 그들은 정글과 드럼앤 베이스와 같은 장르의 힘을 이해했고 이것이 풋워크, 주크와 모두 연결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그때는 이런 음악을 대표하고 선보이는 자리가 없었거든. LA는 화요일부터 주말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게 화요일에는 JBW, 수요일은 로 앤 띠오리(Low end Theory)가 열렸다. 이게 당시에는 굉장히 인상적인 무브먼트였다.

지난번에는 클렌트(Clent)와 코리(Corey)를 초대했는데, 코리야말로 풋워크를 이어나갈 다음 세대다. 심지어 풋워크 춤도 잘 춘다. 풋워크의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한 자리였지. 서로 덕담을 주고받다가 코리가 갑자기 “나 근데 월요일에 학교 가야 돼”라고 말하는데 그게 존나 멋있더라고. 주말에 비행기 타고 LA에 와서 춤 좀 추고 놀다가 다시 학교에 간다는 말이잖아! 생각할수록 멋지다고. 이런 작은 순간을 공유하기 위해 파티를 여는 거지.

로컬 장르(풋워크, 저지 클럽 등)에서 파생된 춤은 그 장르가 전파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러한 서브 장르들을 전면적으로 플레이하는 데 본인과 동료들은 거리낌이 없다. 춤이 지닌 음악적인 힘 그리고 음악과 춤의 상호작용에 관해 묻고 싶다.

음악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드럼은 소통의 도구였고, 드럼 서클(Drum Circle) 안에서 다들 모여 춤을 췄다. 시카고는 풋워크, 뉴욕은 라이트핏(Litefeet) 배틀이 있고, 마이애미와 플로리다에는 주크(Jook), 멤피스에도 주크(Juke)가 있다. 미국에는 최소한 내가 아는 도시에만 해도 각자의 댄스 문화와 장르가 정립된 거 같다. 나는 뉴욕에서 고등학교 때 라이트핏 배틀을 보면서 컸다. 이러한 문화 뒤에 숨겨진 열정은 정말 끝도 없다. 이제는 사라졌지만, 뉴욕의 댄스 신을 촬영한 채널 ‘D-Cole’이 있었다. 그것은 뉴욕의 ‘Walacam’이나 ‘Crossfire’ 같은 존재였다. 기억에 남는 시리즈로 “Dance or Go Home”, “Rap or Go Home”, “Sing or Go Home” 같은 배틀을 열어 춤 외에도 재능 있는 친구들이 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줬다. 이렇게 구구절절 다 읊는 이유는 춤은 언제나 음악과 함께했고,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배틀 문화가 다소 조용해진 느낌이 든다. 그러나 춤이 강세인 틱톡을 보아하니, 댄스 문화의 또 다른 넥스트 레벨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틱톡의 에너지가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음, 글쎄. 이렇게 상업화된 문화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다. 뭐 사실 다 마찬가지지. 랩 배틀이나 복싱이나 돈을 깔아놓고 그걸 따기 위해 하는 거니까. 틱톡도 조회수 뽑으려고 하는 거니 비슷한 거겠지. 그러나 유명해지든 유명해지지 않든 간에 문화는 여전히 존재한다.

나름 오랜 기간 아시아 투어를 진행했다. 서울이 이번 투어의 종착지인데, 그다음에 가장 여행하고 싶은 도시 한 곳만 언급하자면.

아프리카에 가본 적 없어 그런지 그곳에서 공연해보고 싶다. 문화와 유산도 풍부하고 아름다운 대자연도 있으니 한 번 경험해보고 싶은데. 그리고 케냐에서 온 호미들을 여기서 샤웃아웃하고 싶다. 케냐 사람들은 외지에서도 바로 서로가 누군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처음 봤는데도 팔찌 하나로 서로의 고향을 물어보고 몇 다리 건너 아는 이들을 이야기하던데, 그게 존나 아름다웠다. 카리브해 부근에도 가보고 싶다. 그곳에서 댄스홀이나 소카(Soca) 같은 음악 좀 파보고 싶다. 소카와 풋워크가 유사한 템포라 이걸 가지고 새롭게 무언가를 시도하는 뮤지션이 있는지도 궁금하고.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그런 것들이 흥미롭다.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본인은 싫어하는 것에 관해 알려 달라.

첫 번째로 오지랖 넓은 사람들. 그들은 세상을 이해하고 탐구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지만, 그 정보를 악용하는 모습이 싫다. 해는 떴는데 비가 내리는 날씨도 싫다. 존(Xone) 믹서가 좋으면서도 싫다. 이펙터가 존재하고 그중에서도 리버브(Reverb) 소리가 죽여주는 존 믹서가 나왔으면 좋겠다. 믹서 중 필터(Filter) 소리가 제일 좋지만, 난 필터를 즐겨 쓰는 디제이가 아니니까. 언젠가 내가 이비자에서 하우스를 트는 디제이가 된다면 존 믹서를 쓰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기미가 없다. 진(Gin)과도 애매한 관계다. 진 칵테일은 좋지만 스트레이트 진은 싫다. 싸구려 대마초도 사랑과 증오를 오가는 경계에 있다. 좋은 대마초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싸구려 대마초를 피워봐야 한다. 아마 다들 레지(Reggie)를 피워봤을 것 같은데, 만약 누군가가 자기는 한평생 고급 대마초만 피웠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다들 살면서 주유소에서 파는 레지를 안 피웠다고 말할 수 있나? 뉴욕 닉스도 사랑과 증오를 오간다. 존나 사랑하는데, 씨발 좀 이겼으면 좋겠다. 이 인터뷰에 뉴욕 닉스를 태그해라. 내가 죽기 전까지 한 번은 이겼으면 좋겠어.

가장 즐기는 소셜 미디어는?

사람들은 더는 무언가를 읽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의 난 인스타그램을 선호한다. 지금 당장 세상의 비밀을 담은 문서를 종이에 인쇄해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스타그램에 그걸 올린다면 모두가 볼 것이다.

Kush Jones 인스타그램 계정


Editor │ 권혁인
Assistant │ 서재덕 서희승
Translator │ 서희승
Photographer │ 유지민
Special thanks to Cake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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