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X와 HD, 공존할 수 없는 둘의 복잡 미묘한 대립관계.
High Definition 시대가 열린 이래, 스케이트보드 비디오 신(Scene)은 끊임없이 어떠한 논쟁에 휩싸여있다. 당신이 스케이트 비디오를 얼마나 보는지, 주로 접하게 되는 스케이트보드 비디오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당신의 생각보다는 꽤 크고 경악할 정도로 마니악(Maniac)한 이 세계는 조금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각자의 신념을 지니고 꽤 치열하게, 여전히 싸우고 있다.
누군가에게 이 문제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안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영상업계에서 SD 계열이 거의 사장되다시피 하고 Full HD시대를 넘어 4K, 5K까지 온 마당에, 구태여 저화질의 비디오를 고집한다는 것은 그저 옛 향수에 젖어있는 노친네로 밖에 비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옛 향수에 젖는 기분도 그리 나쁘지는 않지만, 또 그렇게 단순한 문제만은 아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이 논쟁의 핵심에 있는 한 카메라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자, 어디 한번 논쟁의 불을 지펴보자.
1995년, 거품경제의 그림자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일본의 소니(Sony)는 그 불황 속에서 ‘DCR-VX1000’이라는 정말 기가 막힌 비디오카메라를 하나 만들어낸다. 소위 말하는 ’준프로’를 타겟으로 발매된 이 카메라는 3CCD를 탑재한 DV 테이프 방식에 410,000 해상도의 디지털 센서와 530라인의 아날로그 수평 해상도를 겸비한, 지금 봐도 손색이 없는 걸출한 카메라였다. 뭔 소린가 싶어 벌써부터 머리가 아픈 독자들을 위해 스펙 이야기는 이쯤 해두겠다. 여하튼 7-8년여 전만 해도 몇몇 VX-2000, PD-150 등 후속모델과 함께 방송계통을 비롯한 독립영화에도 익히 사용되었던 카메라라는 점을 보면 VX1000의 수준과 수요범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고교 시절 당신이 방송부였다면, 이 카메라가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자, 그러면 시대가 너무 빠르게 변해간다는 슬픈 감상은 잠시 뒤로 하고 학교 방송부에서도 완벽히 퇴출당하다시피 한 이 카메라를, 빌어먹을 LCD 창조차 없는 이 카메라를 왜 아직도 스케이트보드 신에서는 하나의 주력으로 사용하는 걸까.
일반적으로 DCR-VX1000은 스케이트보드 촬영에 있어 가히 최적화되어 있다는 견해가 있다. 자 그럼 카메라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카메라의 스펙은 둘째 치고 적절한 무게감과ㅡ사실 조금 무겁긴 하다ㅡ 신속하고 간편한 조작이 가능한 인터페이스는 VX-1000이 사랑받은 가장 큰 요인이다. 게다가 VX 시리즈의 상징적인 요소를 그대로 계승한 툭 튀어나온 외장 스테레오 마이크는 팔로우 컷ㅡ스케이터를 뒤에서 따라가면서 촬영하는 것ㅡ에서 스케이트보드의 소리를 마치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완벽하게 잡아낸다. 그뿐만 아니라 Century社의 Mark 1이라는 전용 어안렌즈를 완벽하게 소화해낼 수 있다는 점은 이 카메라가 더욱 사랑스러운 이유다. 카메라와 렌즈가 합해지는 순간, 스케이트보딩을 위한 완벽에 가까운 화각을 만들어 내며 화룡점정을 찍는다.
많은 VX 추종자들이 지적하는 부분 중 하나가, SD 화질이 가지는 4:3 비율이 적절한 촬영 기술과 만날 경우 화면에 꽉 차는 구성 덕분에 피사체를 더욱 역동적으로 촬영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VX-1000은 스케이트보딩에 더욱 적합한 매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 실제로 HD의 16:9 화면비율은 어안 렌즈를 들이댔을 때 프레임 안에서 양옆 공간이 많이 비는 걸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요소는 결국 이 카메라가 스케이트 비디오의 역사 속에서 한 축을 담당하게끔 해주었으며, 수많은 VX 신봉자들을 양산해냈다.
Magenta Skateboards – ‘SF Hill Street Blues 2’ (SD)
TBPR Production – ‘Lenz’ Original Trailer (SD)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매번 테이프를 구매해가면서 촬영을 하고, 편집을 위해 테이프를 돌려가며 캡처를 해야 한다는 수고는 제쳐두고라도, 벌써 발매일로부터 20년이 지나ㅡ90년대 말에 단종되어 이제는 새 제품이 나오지 않는다ㅡ쉴 새 없이 고장을 일으키는 이놈의 카메라를ㅡ정말 쉴 틈 없이 고장 난다ㅡ 굳이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
과정의 편의와 단순화에서 비롯되는 작품에 대한 태도와 진정성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뤄둔다 치고, 실제로 많은 필름메이커들이 대중의 기호를 충족시켜줌과 동시에 편리하면서 차세대 기술들을 겸비한 HD 체제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그들은 실제로 HD 화질을 활용해 신선한 시도를 선보이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게다가 알려진 바와 같이 동영상 기능이 강화된 각종 DSLR이 시장에 우후죽순 쏟아지면서 저렴하고ㅡ심지어 VX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경우도 있다ㅡ 간편하게 영상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져서 기존의 필름메이커들뿐만 아니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됐다.
그럼 이러한 HD매체들은 스케이트보딩의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담기에 부족한 매체일까? 물론 아니다. 아래 영상들을 확인해보자.
New Balance Numeric – ‘Quids in’ (HD)
CARHARTT W.I.P. X 5BORO NYC – ‘NEW YORK CITY to DETROIT’ (HD)
클래식한 매력은 조금 덜하지만, 어안렌즈를 이용한 특유의 촬영방식에서 흠을 찾기란 사실 어렵다. 선명한 화질은 물론, 기술력으로 연출해내는 장관은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필라델피아 출신의 걸출한 필름메이커, 크리스 뮬헌(Chris Mulhern)은 동부 특유의 스타일과 자부심, 스케이터와 거리의 풍경을 꾸밈없이 담아냈다. 그는 때때로 너무 화려해서 왜곡될 정도로 넘쳐흐르는 여타 필름들 안에서 스케이트보딩과 길거리라는 화두를 가지고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담백하게 이야기한다. 그 어떤 매체를 손에 쥐고도 변하지 않는 뮬헌의 자세는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일 것이다.
여하튼 결국 이 이야기는 투실투실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살이 좋다는 녀석과 가느다란 몸매에 앞인지 뒤인지 모를 정도의 가슴이 좋다는 녀석 둘이 싸워대는 것에 비견할 만큼 끝나지 않는 개개인의 취향 다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승자 없는 이 싸움의 방식에 흥미로운 부분이 또 하나 있다.
뉴욕을 베이스로 활동하는 저화질 영상의 선두주자, 하드웨어 컴퍼니 Bronze 56k와 그 추종자들의 일련의 활동은 그런 측면에서 매우 흥미롭다. VX 카메라로 촬영한 화면을 HD 비율로 늘려 놓은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이건 HD야!!”라고 써놓기를 서슴지 않고, 더 나아가 자신의 영상에 “결국 너희도 HD로 비디오를 만드는구나. 실망이야”라는 댓글을 직접 달며 HD 추종자들을 조롱한다. 그들이 HD 영상을 비꼬는 것은 일종의 유희다. Bronze 56k는 최근의 영상에서도 이 같은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또한, HD 화질의 비디오를 유투브에 올려놓고 영상 중간 코멘트로, “HD 화질로 만들어 미안하니 240p 화질로 다운그레이드해서 봐 달라”며 요구한다. 이쯤 되면 이건 하나의 운동(Movement)이다.
Bronze 56k – ‘Caviar(Rob gonyon part)’
Bronze 56k – ‘ENRON’
HD 주자들도 지지 않는다. 최근 New Balance의 스케이트 라인인 New Balance Numeric은 4K 화질을 4:3 프레임에 담아낸 영상을 공개하며 반격했다. VX 어안렌즈의 비네팅까지 완벽하게 재현한 프레임 앞에서 VX 추종자들 역시 잠시나마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 이제 가장 큰 화두인 화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VHS를 포함한 저화질 비디오가 근래 강세인 것이 사실이다. 근현대ㅡ특정 연대를 거론하기란 사실 힘들다ㅡ 예술영화의 사조를 품은 영상에서부터 사카즘(Sarcasm)과 바이퍼웨이브(Vaporwave)로 점철된 SD 영상에 이르기까지, 저화질을 기반으로 한 스케이트보드 영상은 하나의 시류를 만들며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비단 스케이트보드 필름뿐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이러한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예술적이고 감각적인 부분에서 HD는 무위에 가까운 것일까.
두 명의 필름메이커를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는 슈프림(Supreme)의 스케이트보드 비디오 “Cherry”로도 유명한 William Strobeck이다. 과거 ‘Photosynthesis’나, ‘Mosaic’ 같은 VX로 제작된, 이제는 걸작의 반열에 오른 비디오를 비롯해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해왔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본인의 작업 역시 VX로 진행해오던 그는 Transworld와의 Cinematographer Project를 기점으로 HD로 전향했다. William Strobeck은 본인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VX1000을 공중 휴지통에 버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뉴욕의 스케이트 웹 매거진 Quartersnacks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Cherry”를 HD로 만든 이유를 들어 과거처럼 보이는 영상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것으로 받아드릴 수 있게끔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언제부턴가 4:3 비율의 텔레비전을 찾아보기 힘든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디오를 동시대의 것으로 인식할 수 있게끔, 아니 그러한 의미부여를 위한 나름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Cherry”와 그 이후의 작품들을 보면 느낄 수 있겠지만, 단순한 편집 구성에서뿐만 아니라 촬영 방식에서도 일련의 스케이트 비디오들과는 다른 노선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무난히 어안렌즈로 촬영할 만한 장면에서도 망원렌즈를 선택하는 것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완벽히 새로운 시도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런 일련의 컷들은 영상에 신선함을 불어넣는 것은 물론, 비디오 전체의 색깔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같은 예로 노르웨이의 필름메이커, Kasper Häggström이 있다. Dank magazine의 출판 기념 파티를 찍은 영상들이나, 온라인 매거진인 NOWNESS와의 작업인 “Perry” 등에서 그의 실험적인 시도를 느낄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스케이트 필름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형식이지만, 큰 맥락에 있어 스케이트 필름 역시 다큐멘터리 안에 있다고 봤을 때, 그리고 이 영상이 스케이트보드라는 하나의 범주에 포함될 때, 이 논의에서 제하기는 힘들 것 같다.
Dank no 6, fall 2014 – ‘Launch Party’
William Strobeck – ‘Joyride’
위에 언급한 영상들은 물론, 지금 이 논의 자체가 어쩌면 스케이트보딩의 ‘탈스케이트화’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정확히 짚어내자면, 현재의 스케이트보드 산업으로부터의 탈피이자 새로운 형태로 나아가기 위한 실험이 아닐까. 스케이트보드 고유의 문화가 퇴색된 신물 나는 지금의 산업에서 새로운 시도를 통해 다양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자 저항의 맥락으로 읽히는 것이다.
VX 역시 같은 맥락에서 거대 기업들이 산업 구조를 형성하기 이전, 스케이트보딩의 황금기라 불리던 시절의 향수일지도 모른다. 아니 단순히 향수라고 부르기보단 저항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순수한 스케이트보드 회사들이 현재 거대 자본이 차지한 그 자리에 있던 시절, 반짝반짝 빛나는 주옥같은 비디오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던 그 시절에 열광한 스케이터들이 펼치는 자본으로부터의 저항 말이다. Lurknyc의 영상 속 전통적인 촬영방식과 90년대 힙합으로 도배된 BGM을 보면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느 정도 우리는 추측해 볼 수 있다. “힙합은 죽었다”라며 일갈을 남긴 나스(Nas)처럼 그들은 그들의 언어로 자본주의와 상업화가 만들어낸 지금의 산업구조를 부정하고, 비판하며, 저항하는 것이다.
눈치 빠른 이라면 이제 슬슬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아- 이 글이 결국 뻔한 결말로 치닫고 있구나”라는 것을, 그러나 명징한 사실로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곳 말이다. 앞서 한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결국, SD냐, HD냐, 4k냐, 라는 것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의 스펙에 앞서 선행되는 것은 필름메이커와 스케이터의 감각이며, 형식이자, 메시지인 것이다.
*필자가 기술한 내용의 대부분은 전거를 찾기 힘든, 필자 나름의 해석과 견해임을 밝힙니다.
*스케이트보드 영상을 촬영하는 필르머 대부분이 사용하는 ‘SCR-VX1000’이라는 모델에 조금 더 무게를 두어 제목을 ‘VX vs HD’로 정한 점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