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최대의 오타쿠 성지, 나카노 브로드웨이(Nakano Broadway)에 본점을 둔 상점 만다라케(Mandarake)는 “그날 잃어버린 물건이 여기 있다”라는 신념 아래 만화, 애니메이션, 동인지, CD, DVD 등을 판매하며 일상에 지친 이들을 아련한 과거로 안내한다. 나카노 브로드웨이 안의 각 지점마다 피규어를 비롯한 각각의 주력 상품을 산처럼 쌓아둔 이들이지만 소위 ‘시간을 관장’하는 집단을 자처하는 이들의 주력 상품은 역시나 중고, 희귀 서적들. 특히 예술, 문학, 사진집, 등의 서적을 아카이빙해 판매하는 만다라케 카이바점을 방문(혹은 인스타그램으로 엿보기만 하더라도)하면 그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자극에 좀처럼 정신을 부여잡기 쉽지 않다.
일본의 레이지 푸키즈(Reiji Fukitsu)의 만화책을 발견한 것도 바로 이를 통해서다.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 홀로그램 표지와 낙서를 한듯하지만 정교하게 그려진 어딘가 불량한 캐릭터 그리고 꿈을 꾸는 듯한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화려한 색감. 24살의 나이에 만화가로 데뷔한 레이지 푸키즈는 현재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활동하며 다양한 재료 위에 크기도 형태도 다른 작업물을 이식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일본 패션 브랜드는 물론 한국의 모멘텔(Momentel), 샬롬(Shalom Club)과의 협업을 통해 그 영향력을 바다 건너로 넓혀가고 있다.
본인이 만다라케 카이바에서 찾은 만화책은 “에게산의 귀신(エゲ山の鬼)”. 레이지가 초등학생 때 들은 친구의 얘기, 그러니까 꿈에서 본 에게산의 귀신에게 사랑에 빠져 에게산에서 귀신을 기다리는 친구 ‘나기’의 이야기를 그린 얼토당토않은 만화(나기 역시 실제 어릴 적 친구의 이름이며 이야기 또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다. 샬롬 클럽 팝업을 빌미로 서울을 찾은 그녀에게 기발하고 엉뚱한 작업 세계에 관해 물었다.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당신은 무얼하는 사람인가.
만화와 일러스트를 그리고 있는 레이지 푸키즈라고 한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과 그 문화를 사랑하고, 그래피티와 음악을 좋아하는 평범한 소녀다.
어쩐 일로 서울에 오게 되었는지.
샬롭 클럽(Shalom Club)에서 열리는 팝업에 친구들과 참여하기 위해 급하게 서울로 오게 됐다.
작년에 이어 또다시 샬롬 클럽을 방문했다. 최근에는 모멘텔과 협업도 했고. 한국 브랜드들과는 어떻게 협업을 이어가게 되었나. 한국에서 당신의 일러스트가 인기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모멘텔의 주인장 수연에게 연락이 왔다(DM으로). 수연은 나를 ‘genius’라고 부른다. 조금 부담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수연과는 확실히 잘 맞는 느낌이다. 얼굴에 감도는 긴장감도 비슷하고. 내 일러스트가 한국에서 인기가 있나?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 세계가 같은 콘텐츠를 공유하는 시대지 않나. 여러 도시의 동향을 파악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작년에는 아티스트 김윤기와의 협업 티셔츠도 발매한 것으로 아는데 이는 어떻게 성사된 건지.
2016년 김윤기의 음악을 처음 듣고 충격을 받았다. 작업물을 너무 좋아했어서 DM으로 티셔츠 협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생각해 보니 전부 DM이다. 지금은 ‘대DM시대’다.
당신의 그림에는 다채로운 색감과 귀여운 순정만화의 주인공 같은 캐릭터가 많은데, 이런 스타일에 영감이 된 요소가 있다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도 일을 하셨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거기다 외동이기도 하고. 그때 내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줬던 게 TV에서 방영되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이나 교재 가장자리에 그려진 삽화였다.
그림을 전공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일러스트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어?
일러스트보다는 만화로 시작했다. 어느 날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셨는데, 그날 그 꿈을 만화로 그려본 게 계기가 됐다. 아주 엉뚱한 꿈이었지만.
일러스트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어떻게 만들어낸 건가, 혹시 주변 친구들을 그린 것인지?
지금 친구들이라기보다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많다. 그리 좋지 못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불량아’가 많은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수학여행을 갈 때면 긴 앞머리와 옷깃을 세운 친구들이 항상 있었지. 보통 그런 애들이 모델이 된다. 급식용 봉지라면을 전교생 수만큼 자르고, 욕설을 먹물로 적은 종이를 복도에 100장씩 붙여 놓는 난폭한 짓도 하던 애들인데 굉장히 재밌기도 했다. 지금도 그 시기의 영감을 뛰어넘는 건 없다.
어릴 땐 보통 무얼 하며 시간을 보냈나. 좋아했던 만화, 음악 어떤 걸 이야기해도 좋다.
식초 다시마 한 봉지를 들고 산책을 나가곤 했다. 매미 잡기에 유난히 열중했던 여름도 있었다.
반려견 ‘라’에게 건어물을 던져주며 놀기도 했다. 가족끼리 4컷 만화를 연재하거나 친구들과 여우 분장을 하고 연극을 하는 꽤나 창의적인 아이였지. 아, 8살 무렵에는 산나물 먹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만화가로도 활동 중인데, 당신이 그리는 만화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겼나.
매번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순수한 마음을 바탕으로 그린다. 사람이 아닌 물건, 물질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도 매우 좋다.
만화의 스토리를 구상하는 과정이 어떻게 되나.
외로워지면 생각나는 걸 계속 노트에 적는다. 베스트 프렌드 히나노와 80시간 동안 통화를 하며 떠오른 것들도.
앞으로 만화로 그려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살짝 귀띔해 달라.
일본 전통 연극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최근에는 그래피티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 같은데 그래피티의 매력이 뭔가. 아무래도 크게 그리는 것?
내게 있어 이 지구에, 이 길에, 지금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그래피티다. 인정에 대한 욕구 혹은 이로 인한 비판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것들과 가장 거리가 먼 게 그래피티일 수도 있다. 모든 그래피티 아티스트를 존경한다.
티셔츠는 물론 시계, 필통, 파우치, 달력 등 다양한 사물에 당신의 일러스트가 새겨졌다. 어떤 것에도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앞으로 새롭게 시도해 보고 싶은 사물이 있다면?
비누.
레이지 푸키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
자유로운 사람. 추울 때 더운 나라에 있는 사람. 큰 오토바이를 탈 수 있는 사람. 친절한 사람.
Photographer | 전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