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101: Raf Simons

101 수업: [미] (대학의) 기초 과정의, 입문의, 개론의; 초보의, 기본이 되는 수업


현대 사회에서 현명한 소비자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홍수처럼 넘쳐나는 사방의 광고와 유명인의 패션, 금세 바뀌어 버리는 트렌드의 유혹까지. 물론,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의복생활이 더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패스트 패션이나 유행에 의존해 소비한다면, 의복의 제대로 된 이해가 있다고 보기도 어려울뿐더러, 얼마 지나지 않아 질려버리기에 십상이다. 옷을 창작한 디자이너의 생각과 브랜드의 철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특정한 제품을 구매한다면 당신의 옷장은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로 가득 찰 것.

이는 바로 이 수업의 목표이기도 하다. ‘101’이란 숫자는 새내기 대학생이 완전히 처음 접하는 과목의 옆에 붙는 숫자다. 말 그대로 기초 수업을 의미한다. ‘히스토리 101(History 101)’은 역사가 깊은 브랜드는 물론 특정한 제품과 인물을 아우르는 수업으로 더 이상 인스타그램 속 ‘OOTD’ 태그의 참고 없이 자신이 원하는 제품을 찾을 수 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라프 시몬스(Raf Simons)는 가장 혁신적인 현대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그가 스물일곱 살 때 설립한 라프 시몬스 레이블은 어느덧 패션 역사의 기념비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당장 인터넷을 켜 그 이름을 뒤져보면, 라프 시몬스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의 컬렉션을 비롯해 수많은 레플리카 또한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라프 시몬스가 만든 옷에 열광한다.

라프 시몬스의 패션은 언제나 파격과 맞닿아 있다. 이 기저에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포스트 펑크(Post Punk)와 뉴 웨이브(New Wave), 서브컬처와 유스컬처가 창작의 자양분으로 작용해왔다. 무엇보다 그는 문화와 음악을 패션에 잘 녹여내는 디자이너다. 이번 HISTORY 101에서는 라프 시몬스가 지금껏 세상에 내놓은 컬렉션의 영감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따라가려 한다.

 

CHAPTER 1: 패션을 공부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소년

(좌: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 1997 컬렉션 / 우: 마르지엘라에게 경의를 표한 라프 시몬스 2016 컬렉션)

열여덟 살이 되기 전까지, 패션 디자인이나 예술을 배울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정말 몰랐죠. 당시 저는 이미 예술 세계에 매력을 느꼈지만 그걸 공부할 있는 분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가 다니던 학교는 아주 다른 환경이었거든요

라프 시몬스가 옷을 만들게 된 배경에는 뚜렷한 계기가 있었다. 바로 패션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의 쇼였다. 1990년대 초반, 그는 디자이너 발터 반 비렌동크(Walter Van Beirendonck)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마르지엘라 쇼를 보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몬스는 자신이 패션계에 몸담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리에서 열린 마틴 마르지엘라의 S/S 1990 쇼를 보며, 패션이야말로 자신이 갈구하던 것임을 깨닫는다. 당시 쇼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지 알만하다.

HISTORY 101 VOLl.1에서 다뤘던 언더커버(UNDERCOVER)의 디자이너 준 타카하시도 마르지엘라의 쇼를 보고 본격적으로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마르지엘라는 단순한 디자이너가 아닌 패션계의 신적인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패션의 길로 들어선 라프 시몬스의 디자인은 항상 우리가 사는 세계의 무언가를 표현한다. 사회와 경제적 관습, 가치와 복잡한 남성성 코드, 젊은이의 반항. 대부분 기존의 만연한 현상에 도전하는 것들이다. 그는 진보적인 남성복부터 유스컬처로부터 영감 받은 체제전복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디자인 그리고 스트리트 패션을 넘나드는 독창적인 실루엣으로 무장한 결과물을 보여준다.

 

CHAPTER 2: 그가 젊음과 대화하는 법

라프 시몬스의 초기 컬렉션부터 줄곧 이어진 행보가 그렇듯, 그는 유스컬처에 각별한 애정을 보인다. 세상에 존재하는 ‘젊음’은 항상 엄격한 시선과 충돌하는데, 라프 시몬스는 그 시선에 저항하며 젊은이가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입는지 관찰한 뒤 디자인을 직접 반영했다. 당시 함께한 모델은 에이전시에서 캐스팅한 전문 모델이 아닌 그가 직접 거리를 돌며 선택한 ‘유스’다. 그들의 삶과 스타일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그 철학을 자신의 컬렉션에 담았다.

라프 시몬스의 첫 데뷔작인 ‘A/W 95 컬렉션’은 쇼가 아닌 영상 형식의 프레젠테이션으로 제작했다. 뉴 웨이브와 펑크 음악에 영향받은 이 컬렉션은 미국 대학생과 영국 남학생의 의복을 연상케 한다. 이는 과거 패션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유스컬처에 초점을 맞춘 파격적인 콘셉트였다.

이 컬렉션을 참고한 에이셉 라키(A$AP Rocky)의 뮤직비디오 “Raf”는 라프시몬스 팬 사이에서 기존의 라프 시몬스 패션의 철학을 전부 제거한, 단지 힙합의 ‘멋’만을 표현했다고 혹평받기도 했다. 라프 시몬스가 지금까지 유스컬처에 보여 온 애정을 안다면 이러한 반응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S/S 97 “How To Talk To Your Teen’은 라프 시몬스의 초기 컬렉션 중 하나로 사회로부터 소외된 청춘을 다뤘다. 이때 발표한 비디오는 열네 명의 십 대 청소년이 학교에서 나와, 상상의 UFO에서 만나는 모습을 담는다. 이 컬렉션은 단순히 미학적인 가치뿐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사회로부터 소외된 청소년의 문화를 다뤘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라프 시몬스는 쇼 초청장에 부모에게 전하는 지침서인 ‘당신의 자녀들과 대화하는 법(HOW TO TALK TO YOUR TEEN)’을 포함했다. 이러한 재치 넘치는 초청장의 내용에는 ‘청소년의 사생활을 존중하라’ 같은 내용으로 자신의 사생활을 위해 방문을 잠그는 학생을 적극적으로 변호한다. 이전 시즌과 흡사하게 그는 모드(Mod)와 펑크(Punk) 문화를 통해 학교 유니폼의 실루엣을 재해석했다.

 

라프 시몬스가 가장 큰 영감을 받는 요소는 청소년의 삶과 음악이다. 지금까지도 많은 패션 컬렉터가 ‘Holy Grail!’이라 외치는 쇼 중 하나인 ‘Summa Cum Laude S/S 00’ 컬렉션은 낮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해가 진 뒤 죽도록 레이브 파티에서 노는 학생으로부터 영감 받았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하드코어 테크노에 미친 듯이 춤추는 개버(Gabber)와 그에 상반하는 분위기의 멘사(MENSA) 멤버 스타일을 결합했는데, 이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시도였다.

 

이러한 요소는 팝, 예술에 영감을 받아온 이전 컬렉션과 달리 ‘현재’ 이 땅에서 일어나는 하위문화를 표현한 컬렉션이었다. 라프 시몬스는 개버 시그니처 스타일인 오버사이즈 MA-1 재킷과 모범생이 즐길 법한 허리까지 올린 와이드 팬츠와 구두를 신은 모델을 쇼에 선보였다. 지금 이러한 스타일이 소위 힙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도 라프 시몬스만의 철학이 지금까지 꾸준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CHAPTER 3: 음악

음악은 라프 시몬스의 다양한 작업에 지속해서 등장해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와 관련된 레퍼런스 역시 많다. 뉴 웨이브와 신스팝, 포스트 펑크에서 차용한 이미지와 단어를 남성복의 디테일로 반영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아래 링크는 라프 시몬스가 영감 받은 음악으로 만든 플레이리스트니 이를 찬찬히 들으면서 읽을 것을 추천한다.

 

A/W 1997-1998 & Smashing Pumpkins

라프 시몬스가 브랜드 설립 후 처음 개인의 음악 취향을 대중에게 나타낸 것은 A/W 97 컬렉션에서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의 노래 “Tonight Tonight”을 런웨이 사운드 트랙으로 쓰면서부터다. 이 곡은 사랑 노래로 유명하지만, 이 곡의 작곡가, 빌리 코간(Billy Corgan)이 학대받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잊기 위해 쓴 곡으로도 알려졌다.

학교 유니폼에서 영감을 받은 ‘아이비 룩’ 콘셉트를 선보인 이 쇼는 당시 학생들이 교복을 본인의 스타일에 맞춰 리폼하는 행위, 즉 억압적인 사회에 어떤 식으로든 반항하려는 청소년의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이는 그가 체제에 반항하는 젊은이를 다루는 특유의 방식이었다.

 

A/W 1998-1999 ‘Radioactivity’ & KRAFTWERK

라프 시몬스는 이 쇼를 통해 패션쇼에서 단지 옷뿐 아니라 팝 문화와 예술 등 풍부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를 계기로 음악과 패션을 결합한, 당시 패션계에 없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그는 자신을 자극하는 요소를 대중에게 보여주는 일을 꺼리지 않았고 독일 전자음악의 대부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의 1978년 앨범 [Man Machine]에서 영감 받아 심지어 실제 밴드 멤버를 모델로 세웠다.

 

A/W 2001-2002 ‘Riot, Riot, Riot’ & Manic Street Preachers (Richey Edwards)

세기가 바뀌며 라프 시몬스는 1년간의 긴 휴가를 보낸다. 그 후 상징적인 F/W 2001 컬렉션 ‘Riot, Riot, Riot’으로 복귀하는데, 이 컬렉션은 매니악 스트리트 프리처(Maniac Street Preacher)의 기타리스트 리치 에드워드(Richey Edwards)가 돌연 사라진 사건에서 착안했다. 봄버 재킷과 스웨터에 부착한 패치가 인상적으로, 이는 라프 시몬스가 어릴 적 패션과 무관하게 그저 좋아하는 음악과 특정 밴드의 표식을 옷에 붙이던 행동의 연장선이다.

컬렉션에 사용한 가장 상징적인 사진 중 하나는 1991년 리치 에드워드가 저널리스트 스티브 라마크(Steve Lamacq)와의 논쟁 후 ‘4 REAL’이란 단어를 팔뚝에 새긴 이미지다. 버려진 창고에서 나오는 인공적인 연기, 신분을 알 수 없는 테러리스트와 긴 코트, 후디 그리고 스카프까지. 이것이 그들의 정체성을 더욱 모호하게 한다. 이전 컬렉션을 통해 젊은이가 서브컬처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순수함을 묘사했던 것과 달리 이 컬렉션에서는 십대의 반항이라는 호전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췄다. 이 컬렉션에 영향 받은 이지 시즌 1(Yeezy Season 1)을 비교한다면, 15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다는 것을 곧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Chapter 4: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아티스트와의 협업

위 컬렉션만 봐도 라프 시몬스는 그 영감의 원천과 독특한 관계를 맺는다. 쇼 하나를 단순한 레퍼런스의 시작점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예술적인 요소를 일부 남겨두고,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추가해 옷을 만들어낸다. 오늘날 패션 사업의 선두 디자이너로서, 그는 자신의 미학을 소비 상품에 결합하는 일에 적극적이다. 그가 선택한 예술가와 맺는 관계의 본질은 ‘공생’이다.

 

A/W 2003-2004 ‘Closer’ & Peter Saville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으로 대표되는 포스트 펑크에 심취한 라프 시몬스는 2000년대 초 피터 사빌(Peter Saville)을 자신의 컬렉션으로 소환한다. 사빌은 조이 디비전의 앨범 [Unknown Pleasures]와 뉴 오더(New Order)의 앨범 [Technique] 등 다양한 록밴드의 앨범 커버를 디렉팅한 전설적인 그래픽 디자이너다.

라프 시몬스와 피터 사빌의 협업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예는 ‘A/W 2003’ 컬렉션으로, 피터 사빌이 직접 그린 앨범 커버를 피시테일 파카에 그려 넣었다. 몇 년 전 한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세 종의 재킷 세트가 한화 약 21,670,000원에 올라온 적이 있다. 0을 실수로 하나 더 붙인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겠지만, 지금은 저 가격에도 중고 제품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렇게 라프 시몬스의 옷은 단순한 아이템보다는 가치와 의미를 담은 예술 작품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1999 고립된 영웅들 (Isolated Heroes)

1999년도 여름에 발매한 ‘고립된 영웅들(Isolated Heroes)’이라는 제목의 사진집은 영국의 사진작가 데이비드 심즈(David Sims)와 작업한 결과물이다. 사진집에는 S/S 2000 컬렉션을 입고 있는 모델이 수록되어있고, 여기서 주목할 점은 라프 시몬스의 옷보다 여기 찍힌 모델에 있다. 사진집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전문 모델이 아닌 평범한 소년들이다.

이들은 전형적인 모델이라는 틀에는 맞지 않지만 라프 시몬스는 외려 이들의 개성에 집중해 부자연스러운 보정의 도움 없이 각자의 정체성을 그려냈다. 모델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촬영한 사진은 아름다움과 젊은 남성성을 다루는 동시에 모든 선입견에 대한 ‘완벽한 고립’을 다룬다.

 

그래픽 디자이너 스털링 루비(Sterling Ruby)와의 협업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협업은 아티스트가 자신의 작품을 디자이너에게 전달한 뒤 해당 그래픽을 프린팅한 결과물로 만들어내는 걸 일컫는다. 하지만 스털링 루비는 라프 시몬스 컬렉션의 전 생산 과정에 참여했다. 원단에 직접 그림을 그리고 염색을 하면서 자신의 옷을 만들었다.

늘 샤프하고 단정한 옷 스타일을 한 라프 시몬스와 길게 헝클어진 머리에 스니커를 신고 있는 스털링 루비의 상반된 외모만 봐도 그 둘의 미적인 관점에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라프 시몬스가 미래지향적인 영감을 단숨에 포착해내는 시각이 탁월하다면, 루비의 스타일은 그 정반대로 상상 속에 혼재한 이미지를 자유롭게 섞어내는 듯하다. 이들의 불균형한 성격과 함께 그들이 공유하는 서브컬처, 음악, 예술에 대한 공통의 관심이 결합되어 이 협업을 생동감 넘치고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으로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Chapter 5: 라프 시몬스가 옷을 만든다는 것

나는 단지 옷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태도, 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주고 싶다. 내 기억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오늘날의 세계에 재배치하려 노력한다.”

라프 시몬스가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위에서 소개한 컬렉션만 봐도 그가 선보이는 결과물이 옷 그 이상의 가치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시대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화 현상을 자신의 시각으로 풀어낸다. 그렇기에 그가 현대 패션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할 수밖에 없다. 10년, 12년 전의 라프 시몬스 컬렉션이 지금 봐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는 목소리가 있다면 바로 지금부터 자기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많은 것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언제나 라프 시몬스는 중요한 무언가를 만들어왔고, 지금도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 혁신적인 비전을 견지한 채 사회적 발언을 하는 일 또한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말한 ‘목소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고유한 시선을 가지라는 말과 같다. 남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이는 어쩌면 삶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라프 시몬스가 만드는 것은 단지 옷이 아니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글 │ 김나영
제작 │ VISLA, MUSI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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